[역대 정부 첫 경제수장 잔혹사, 왜?] 정부와 박자 맞춰도 문제, 엇박자 내도 문제
[역대 정부 첫 경제수장 잔혹사, 왜?] 정부와 박자 맞춰도 문제, 엇박자 내도 문제
정권 교체 직후 급격한 정책 변화 뒤따르게 마련… ‘저조한 실적→빠른 교체’ 수순 밟기 일쑤 청와대가 지난 11월 9일 경제수장인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교체 인사를 단행했다. 홍남기 국무조정실장이 후임 후보자로 지목됐다. 김 부총리는 지난해 6월 취임 후 1년5개월여 만에 교체 대상자가 됐다. 문재인 정부 첫 경제수장인 김 부총리는 그간 경제정책 전반을 조율했지만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기조를 두고 다소 다른 방향성을 보여왔다는 이유로 엇박자 논란이 잇따랐다. 이번 인사는 이런 논란에 더해, 최근 여전히 국내 주요 경제지표가 나아지지 못하고 있는 데 따른 경질 조치 의미로 분석됐다. 일각에선 “현 정부에서 시장경제 시스템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그나마 높은 인사였는데 운이 따르지 않았다”며 동정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역대 경제수장 자리엔 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앉지만, 소수를 제외하면 대체로 순탄치 않은 재임 기간을 거쳤다. 그만큼 어려운 자리다. 특히 김 부총리처럼 정부가 바뀐 직후 첫 경제수장 자리에 앉은 인물일수록 나라 상황이나 경제정책 급변에 따른 혼란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저조한 실적→빠른 교체’의 수순을 밟아야 했다.
최근 20년간 역대 정부 첫 경제수장들의 행보를 보면 이 같은 현상은 공통되게 나타났다. 예컨대 김대중 정부 때 첫 경제수장이었던 이규성 재정경제부(현 기재부) 장관은 1998년 3월, 외환위기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그는 이듬해 5월까지 1년 2개월 남짓을 국가적인 혼란 속에서 구조조정 지휘에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1998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5.5%로 건국 이후 최악이었지만, 이를 경제수장 탓으로 돌리기는 부적절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첫 경제수장을 맡은 김진표 경제부총리(2003년 2월~2004년 2월) 역시 쓴맛을 봤다. 김 부총리는 노 전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내가 아는 두 명의 가장 유능한 관료 중 하나”라고 꼽을 만큼 신임을 받았다. 하지만 그가 자리에 있던 2003년 경제성장률은 2.9%로 그가 없던 전년(7.4%) 대비 급락했다. 결국 짧은 임기에 그쳤다. 당시 김 부총리는 법인세 인하와 같은 친(親)기업 기조에 따른 경기 활성화론을 주장해 재계의 지지를 받는가 했지만 문제는 정부 정책의 방향성과 엇박자였다는 데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을 구심점 삼아 분배 위주의 개혁적인 정책을 펼치려 했던 당시 정치권과 학계의 집중포화 대상이 되면서 그는 뜻대로 정책을 펼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김 부총리는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를 추진, 부동산 시장에서 아파트 가격 폭등을 유도한 주범으로 지적됐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 후 공약과는 달리 서울 강남권을 중심으로 아파트 가격이 폭등하면서 민심은 급속도로 이탈했다. 결국 다른 경제지표까지 악화하자 김 부총리는 더 버티지 못했다. “한 번 쓴 각료는 최소 2년 간 같이 가겠다”고 했던 노 전 대통령의 뜻도 첫 경제수장 때부터 실현될 수 없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첫 경제수장의 잔혹사가 한층 거세졌다. 당시 첫 자리는 이 전 대통령의 ‘경제 멘토’로 불리면서 독보적 신임을 받던 강만수 기재부 장관 차지였다(2008년 2월~2009년 2월). 그는 연 7%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한다는 정부 방침과 엇박자를 내지 않고 성장 위주 경제정책 수립에 나섰지만, 이번엔 거꾸로 정부 기조에 너무 충실히 발맞추려 무리한 것이 화근이 됐다.
대표적으로 강 장관은 수출 실적을 단기간 끌어올리기 위해 고환율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곧 외부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추진이라는 비판에 휩싸였다. 실제로 이 무렵 글로벌 금융위기와 세계적인 고유가 사태가 벌어지면서 고환율 정책은 국가 경제에 심각한 부메랑으로 날아들었다. 취임 전인 2007년 5.5%였던 경제성장률은 그가 있던 2008년 2.8%로 반토막이 났다. 강 장관은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수 차례 공식석상에서 “나빠진 경제상황은 이전 정부 책임”이라고 주장하면서 책임을 회피했지만 여론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는 이후 산업은행장으로 있을 때 대우조선해양의 각종 경영 비리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혐의가 인정돼 지난 5월 징역 5년 2개월을 최종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이 밖에 박근혜 정부 첫 경제수장이었던 현오석 경제부총리(2013년 3월~2014년 7월)도 임기 내내 순탄치 않았다. 2013년 2.9%, 2014년 3.3%의 경제성장률은 박근혜 정부가 공약했던 연 4%에 미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경제지표 악화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들은 후임자, 즉 같은 정부에서 두 번째 경제수장으로 바통을 이어받은 경우보다 고전했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김대중 정부의 두 번째 경제수장인 강봉균 장관(1999년 5월~2000년 1월) 땐 직전 해의 외환위기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면서 경제성장률이 11.3%(99년)까지 치솟았고, 노무현 정부에서 김진표 부총리의 후임자였던 이헌재 경제부총리(2004년 2월~2005년 3월) 역시도 2004년 4.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성과를 냈다. 그는 경질이 아닌 사퇴로 자리에서 내려왔다. 강만수 장관의 뒤를 이어 이명박 정부의 두 번째 경제수장이 됐던 윤증현 기재부 장관은 2009년 2월부터 2011년 6월까지 2년4개월이라는 비교적 긴 임기를 마쳤다.
그는 전임자의 실책과 금융위기 여파로 마이너스 성장이 유력하다는 전망을 뒤로 하고 2009년 0.7%의 경제성장률로 선방했다. 이후 2010년 6.5%, 2011년 3.7%의 준수한 경제성장률이 그가 받아든 성적표였다. 박근혜 정부에서 현오석 부총리의 후임자였던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경우 2014년 7월부터 2016년 1월까지 약 1년6개월간, 역시 전임자보다는 긴 임기를 보냈다. 다만 그는 실적이 썩 좋진 않았다(2015년 경제성장률 2.8%).
이 같은 역대 정부 첫 경제수장 잔혹사에 대해 전문가들은 몇 가지 분석을 내놓는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막 바뀐 상황에서 첫 단추를 잘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 좋은 의도와 달리 정부 교체 직후 시장이나 정치권의 높아진 변화 목소리와 괴리되는 부분이 생기면서 겪는 어려움, 이로써 정책의 궤도 수정이 쉽지 않아진 애로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분석했다. 그는 “경제정책은 기본적으로 경제부총리가 컨트롤타워로서 전권을 갖고 지휘해야 한다고 보지만 다양한 외부 요인들이 혼재하면서 (부총리에게) 힘이 실리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경제수장 스스로도 이전 정부 때와의 차별성을 부각하려다 보니 도리어 무리한 정책을 내놓거나, 정부 교체기의 혼선에 휩쓸리면서 방향을 잡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다.
송덕진 극동미래연구소장은 “여러모로 불리한 환경에 처한 역대 정부 첫 경제수장 때보다 두 번째 경제수장 때부터 경제지표가 좋아지는 경향이 나타났던 게 꼭 인물 교체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라며 “인물 교체보다 정책 수행의 일관·연속성이 중요하다”고 해석했다. 이 때문에 문재인 정부가 홍남기 후보자를 내정한 것도 단순 인물 교체 의미보다는 엇박자 논란에서 탈피, 정부 주도의 소득주도성장 기조를 한층 일관되게 연속해서 추진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계에 따르면 홍 후보자는 김동연 부총리보다 자기 목소리를 덜 내면서 일하는 인사로 알려졌다.
다만 일각에선 보다 근본적인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경제정책의 일관·연속성이 유지되려면 경제수장의 임기를 어느 정도 보장해주는 게 바람직하다”며 현실과의 괴리를 언급했다. 실제로 한국은 전통적으로 경제정책의 컨트롤타워인 경제수장 자체가 정치권 입김에 따라 너무 빠르고 빈번하게 교체되기에 정책의 일관·연속성이 떨어진다는 비판론이 끊이지 않았다.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이 된 1998년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박근혜 정부까지 29년 간 39명이나 경제수장을 거쳤으며, 이들의 평균 임기는 410일에 불과했다. 1년을 겨우 넘겼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단기적인 성과를 보이기에만 급급해 지속가능한 정책을 제때 펼치지 못하고, 오히려 단기 실적까지 안 풀리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반면 선진국의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경제수장의 임기를 최대한 보장하면서 책임성은 더 강하게 갖도록 유도하고 있다.
예컨대 미국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이 4년 이상이나 일하는 등, 8년 간 경제수장 교체는 단 두 번뿐(총 3명)이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호황기를 누렸다. 금융위기에 선방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도 재무장관은 티모시 가이트너와 제이콥 루 2명뿐이었다. 이들은 각각 4년씩 일했다. 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다른 관료 교체는 잦은 가운데 경제수장만큼은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이 1년10개월째 계속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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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대 경제수장 자리엔 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앉지만, 소수를 제외하면 대체로 순탄치 않은 재임 기간을 거쳤다. 그만큼 어려운 자리다. 특히 김 부총리처럼 정부가 바뀐 직후 첫 경제수장 자리에 앉은 인물일수록 나라 상황이나 경제정책 급변에 따른 혼란의 중심에 위치하면서 ‘저조한 실적→빠른 교체’의 수순을 밟아야 했다.
최근 20년간 역대 정부 첫 경제수장들의 행보를 보면 이 같은 현상은 공통되게 나타났다. 예컨대 김대중 정부 때 첫 경제수장이었던 이규성 재정경제부(현 기재부) 장관은 1998년 3월, 외환위기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등판했다. 그는 이듬해 5월까지 1년 2개월 남짓을 국가적인 혼란 속에서 구조조정 지휘에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1998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5.5%로 건국 이후 최악이었지만, 이를 경제수장 탓으로 돌리기는 부적절했다.
짧은 임기에 각종 악재 만나거나 자초
특히 김 부총리는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를 추진, 부동산 시장에서 아파트 가격 폭등을 유도한 주범으로 지적됐다. 노무현 정부의 출범 후 공약과는 달리 서울 강남권을 중심으로 아파트 가격이 폭등하면서 민심은 급속도로 이탈했다. 결국 다른 경제지표까지 악화하자 김 부총리는 더 버티지 못했다. “한 번 쓴 각료는 최소 2년 간 같이 가겠다”고 했던 노 전 대통령의 뜻도 첫 경제수장 때부터 실현될 수 없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첫 경제수장의 잔혹사가 한층 거세졌다. 당시 첫 자리는 이 전 대통령의 ‘경제 멘토’로 불리면서 독보적 신임을 받던 강만수 기재부 장관 차지였다(2008년 2월~2009년 2월). 그는 연 7%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한다는 정부 방침과 엇박자를 내지 않고 성장 위주 경제정책 수립에 나섰지만, 이번엔 거꾸로 정부 기조에 너무 충실히 발맞추려 무리한 것이 화근이 됐다.
대표적으로 강 장관은 수출 실적을 단기간 끌어올리기 위해 고환율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곧 외부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추진이라는 비판에 휩싸였다. 실제로 이 무렵 글로벌 금융위기와 세계적인 고유가 사태가 벌어지면서 고환율 정책은 국가 경제에 심각한 부메랑으로 날아들었다. 취임 전인 2007년 5.5%였던 경제성장률은 그가 있던 2008년 2.8%로 반토막이 났다. 강 장관은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수 차례 공식석상에서 “나빠진 경제상황은 이전 정부 책임”이라고 주장하면서 책임을 회피했지만 여론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는 이후 산업은행장으로 있을 때 대우조선해양의 각종 경영 비리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혐의가 인정돼 지난 5월 징역 5년 2개월을 최종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이 밖에 박근혜 정부 첫 경제수장이었던 현오석 경제부총리(2013년 3월~2014년 7월)도 임기 내내 순탄치 않았다. 2013년 2.9%, 2014년 3.3%의 경제성장률은 박근혜 정부가 공약했던 연 4%에 미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경제지표 악화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들은 후임자, 즉 같은 정부에서 두 번째 경제수장으로 바통을 이어받은 경우보다 고전했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김대중 정부의 두 번째 경제수장인 강봉균 장관(1999년 5월~2000년 1월) 땐 직전 해의 외환위기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면서 경제성장률이 11.3%(99년)까지 치솟았고, 노무현 정부에서 김진표 부총리의 후임자였던 이헌재 경제부총리(2004년 2월~2005년 3월) 역시도 2004년 4.9%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는 성과를 냈다. 그는 경질이 아닌 사퇴로 자리에서 내려왔다.
역대 정부 두 번째 경제수장들은 상대적 선방
그는 전임자의 실책과 금융위기 여파로 마이너스 성장이 유력하다는 전망을 뒤로 하고 2009년 0.7%의 경제성장률로 선방했다. 이후 2010년 6.5%, 2011년 3.7%의 준수한 경제성장률이 그가 받아든 성적표였다. 박근혜 정부에서 현오석 부총리의 후임자였던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경우 2014년 7월부터 2016년 1월까지 약 1년6개월간, 역시 전임자보다는 긴 임기를 보냈다. 다만 그는 실적이 썩 좋진 않았다(2015년 경제성장률 2.8%).
이 같은 역대 정부 첫 경제수장 잔혹사에 대해 전문가들은 몇 가지 분석을 내놓는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막 바뀐 상황에서 첫 단추를 잘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 좋은 의도와 달리 정부 교체 직후 시장이나 정치권의 높아진 변화 목소리와 괴리되는 부분이 생기면서 겪는 어려움, 이로써 정책의 궤도 수정이 쉽지 않아진 애로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분석했다. 그는 “경제정책은 기본적으로 경제부총리가 컨트롤타워로서 전권을 갖고 지휘해야 한다고 보지만 다양한 외부 요인들이 혼재하면서 (부총리에게) 힘이 실리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경제수장 스스로도 이전 정부 때와의 차별성을 부각하려다 보니 도리어 무리한 정책을 내놓거나, 정부 교체기의 혼선에 휩쓸리면서 방향을 잡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다.
송덕진 극동미래연구소장은 “여러모로 불리한 환경에 처한 역대 정부 첫 경제수장 때보다 두 번째 경제수장 때부터 경제지표가 좋아지는 경향이 나타났던 게 꼭 인물 교체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라며 “인물 교체보다 정책 수행의 일관·연속성이 중요하다”고 해석했다. 이 때문에 문재인 정부가 홍남기 후보자를 내정한 것도 단순 인물 교체 의미보다는 엇박자 논란에서 탈피, 정부 주도의 소득주도성장 기조를 한층 일관되게 연속해서 추진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계에 따르면 홍 후보자는 김동연 부총리보다 자기 목소리를 덜 내면서 일하는 인사로 알려졌다.
다만 일각에선 보다 근본적인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경제정책의 일관·연속성이 유지되려면 경제수장의 임기를 어느 정도 보장해주는 게 바람직하다”며 현실과의 괴리를 언급했다. 실제로 한국은 전통적으로 경제정책의 컨트롤타워인 경제수장 자체가 정치권 입김에 따라 너무 빠르고 빈번하게 교체되기에 정책의 일관·연속성이 떨어진다는 비판론이 끊이지 않았다.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이 된 1998년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박근혜 정부까지 29년 간 39명이나 경제수장을 거쳤으며, 이들의 평균 임기는 410일에 불과했다. 1년을 겨우 넘겼다는 얘기다.
29년 간 경제수장 39명 평균 임기 410일
예컨대 미국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이 4년 이상이나 일하는 등, 8년 간 경제수장 교체는 단 두 번뿐(총 3명)이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호황기를 누렸다. 금융위기에 선방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도 재무장관은 티모시 가이트너와 제이콥 루 2명뿐이었다. 이들은 각각 4년씩 일했다. 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다른 관료 교체는 잦은 가운데 경제수장만큼은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이 1년10개월째 계속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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