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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장 밖’ 아베의 고육책

‘모기장 밖’ 아베의 고육책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을 건너뛰는(우회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There will be no skipping South Korea).” 2년 전 한국을 방문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한국 기자가 “한국 경시 풍조나, 이른바 ‘코리아 패싱’이 불식됐다고 할 수 있느냐”고 묻자 “한국은 내게 굉장히 중요한 국가다. 한국을 우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그 부분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다시 한번 “노 스키핑(No Skipping)”이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미국에는 한국에 대한 코리아 패싱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한국에 온 트럼프의 입을 통해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글도 모르겠고 뜻도 모를 콩글리시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이 잊을 만하면 논란의 대상이 되곤 했다. 실제로는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나타나 보이거나, 실제와는 다른 것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 또한 ‘코리아 패싱’이었다. 한때 대북 외교에서 북한 및 주요 강대국에 한국이 소외당함을 두고 자조적으로 쓰기 시작한 말이다. 정치권에선 야당의 공격 무기였다.

영어의 문법상으로도 맞지 않는 용어다. 아마도 ‘한국이 소외당하고 있다(Korea has been passed over)’라는 표현을 줄여 말하고자 하는 모양인데, 일본 언론이 쓰기 시작한 ‘재팬 패싱(Japan Passing)’에서 빌려온 것 같다. 일본이 한창 잘나갈 때 경제 성장에 조바심을 낸 미국이 일본 때리기에 쓴 용어라는데, 실제로는 미국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일본 자체에서 자기비하의 의미로 썼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이 한꺼번에 바뀌면서 외교와 안보의 공백 상황이 불투명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코리아 패싱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그러나 그런 무책임한 주장은 외교 상황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자칫 냉소적인 비아냥거림으로 들릴 수 있다. ‘재팬낫싱(Japan Nothing)’ ‘재팬배싱(Japan Bashing)’ 따위의 일본식 영어 ‘재플리시(Japlish 또는 Janglish)’에서 연유한 것임이 틀림없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국정 공백 사태를 겪은 한국은 새롭게 출범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맺지 못했다. 당시 매티스 국방장관과 틸러슨 국무장관,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서둘러 방한했지만 정작 북핵(北核) 대응에서 한국은 논의 과정부터 노골적으로 제외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때 ‘코리아 패싱’이라는 용어가 줄곧 매스컴에 등장했다.

한국 매체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국제 외교 상황에서 이 같은 용어가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용어의 발상지 격인 일본에서조차 ‘코리아 패싱’이라는 용어는 쓰지 않았다. 다만 버블이 붕괴되고 사회적 모순이 폭발하던 1990년대의 일본이 한창 자조적인 태도를 갖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 같은 용어들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일본은 모기장 밖에 있지 않다(日本は蚊帳の外ではな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 말이다. 아베 총리는 지난해 4월 열린 남북 정상회담 당시 일본 극우 성향의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미국과 일본의 연대가 북한을 움직이게 했다”고 자평하면서 ‘모기장 바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일본어로 ‘카야노 소토(蚊帳の外)’는 한국어로는 모기장 바깥이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은 다 모기장 안에 있어 보호를 받는데 혼자만 모기장 밖에 있어 모기에 물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쓰이곤 한다. 남들로부터 배제된 ‘왕따’의 느낌을 준다. 국제 정치에서는 ‘패싱(Passing)’이라는 용어와 일맥상통한다. 패싱은 개인이나 단체, 국가 사이에서 열외 취급을 당하는 경우를 빗대 이르는 말로 굳어졌다.

잠잠했던 패싱 논란은 올해 들어 다시 일본으로 옮겨간 분위기다. 일본과의 대화를 전면 차단한 북한은 이 와중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북한 땅으로 이끌었다. 한반도에 평화가 무르익는데 ‘찬밥’ 신세로 전락한 일본이 우리 경제 쪽으로 화풀이 하려는 심정은 이해할 만하다.

6월 30일 열린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3번째 정상회담은 이례적이었다. 현직 미국 대통령이 북한에 발을 디딘 적도 없었거니와, 미국·한국·북한의 정상 3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담소를 나눈 것도 남북 분단 이후 처음이다.

당초 이 회담은 트럼프의 트위터를 통해 실현됐으니 예측불허였다. 북한 땅을 밟은 트럼프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이 자리에 있는 것은 큰 영광이다(It is a great honor to be here beyond the military demarcation line)”라고 했고 이에 대해 김정은은 “트럼프 대통령이 국경을 넘어선 것은 좋지 않은 과거를 청산하고 좋은 미래를 개척하자는 용단”이라며 찬사의 말을 보냈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던 아베가 북미 회담이라는 역사적 순간에는 ‘모기장 밖’이었던 것이다. 아베 외교의 한계를 드러낸 셈이다. 북한을 둘러싼 6자회담 당사국 가운데 아베 하나만 김정은과 만나지 못하고 따돌림당한 꼴이 아닌가. 그런데도 아베는 “트럼프 대통령이 내 생각을 김정은에게 전달해줬고, 시진핑 국가주석도 문제 해결에 협조해 준다”고 둘러대기에 급급했다. 아베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과 친구 사이라고 자랑하지만 정작 외교에서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북한의 우방인 중국과 러시아는 정상회담이 잦았고, 시진핑 주석도 푸틴 대통령도 북미 회담 실현의 감을 잡고 있었는데 오직 아베 총리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중국 포위망이든 북방 영토 반환이든 아베 외교가 올린 성과는 없었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재회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 발등 찍는 감정 외교의 칼을 빼든 것이다.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회동 이후 아베 총리의 외교가 또 ‘모기장 밖’에 놓였다”며 ‘재팬 패싱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는 일본 언론보도가 나왔다. 도쿄신문은 “북한의 비핵화 현안과 관련된 주변 6개국 가운데 정상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지 못한 나라는 일본뿐”이라며 이같이 지적했다.

아베 총리는 지난해에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서 일본만 배제되자 언론과 정치권으로부터 무시당하거나 고립됐다는 의미의 ‘모기장 밖’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최근 한국에 대한 일본 수출규제의 표면적인 명분은 위안부 합의나 징용 배상문제다. 그러나 본질은 ‘모기장 안’으로 들어오고 싶다는 제스처. 그렇다면 ‘경제보복’의 실마리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을 것 같다.

- 정영수 칼럼니스트(전 중앙일보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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