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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의 금강산 관광사업 ‘사형선고’ 막전막후] 미국의 새 계산법 겨냥한 벼랑끝 압박?

[김정은의 금강산 관광사업 ‘사형선고’ 막전막후] 미국의 새 계산법 겨냥한 벼랑끝 압박?

남북 협력방식 사업에 근본적 문제 제기… 금강산행 정치적 의미 놓고 해석 분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부인 리설주 여사 등과 함께 금강산관광지구를 현지지도하고 금강산에 설치된 남측 시설 철거를 지시했다고 조선중앙TV가 10월 23일 보도했다. / 사진:연합뉴스
파국 위기에 처해 있던 남북 간 금강산 관광협력 사업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결정타를 날렸다. 지난 10월 22일 금강산 일대를 돌아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 시설들을 남측의 관계 부문과 합의하여 싹 들어내도록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는 “금강산이 마치 북과 남의 공유물처럼, 북남관계의 상징, 축도처럼 돼있고 북남관계가 발전하지 않으면 금강산 관광도 하지 못하는 것으로 돼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생각이고 잘못된 인식”이라고 강조한 것으로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 등 선전 매체들이 일제히 전했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이런 발언은 남측 현대아산과 북측 아태평화위가 합의해 지난 1998년 11월 관광선을 첫 출항시킨 남북 협력방식의 금강산 관광에 대한 근본적 문제 제기로, 사실상 사형선고를 내린 셈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손쉽게 관광지나 내어주고 앉아서 득을 보려고 했던 선임자들의 잘못된 정책으로 금강산이 10여 년간 방치돼 흠이 남았다”는 김정은의 발언에는 50년 독점계약 방식으로 현대와 금강산 사업을 추진한 데 대한 강한 거부감이 드러난다. 김정은이 “금강산 관광지구의 부지를 망탕 떼어주고 문화관광지에 대한 관리를 외면하여 경관에 손해를 줬다”며 해당 부서인 노동당 통일전선부(대남 사업 담당)를 질책한 점에서 알 수 있듯 상황은 돌이키기 쉽지 않아 보인다. “동행한 일꾼(간부의 북한식 표현)들 모두도 한결같이 (건물을) 철거하고 우리식으로 꾸리는 것이 응당하다고 말씀을 올렸다”는 북한 보도 내용도 마찬가지다.
 “너절한 남측 시설들을 싹 들어내라”
북한 측이 “(금강산을) 새롭게 단장하고 우리 인민들을 맞이하게 될 그 날은 멀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 점으로 미뤄볼 때 금강산의 남측 시설 철거와 원상 회복, 북측에 의한 시설물 공사가 속도감 있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김정은도 자신이 주도해온 각종 대형 건설 사업을 언급하며 튼튼한 설계역량과 강력한 건설역량을 강조했고 “우리 군대와 노동계급이 있기에 금강산에 세계적인 문화 관광지를 꾸리는 사업은 문제로도 되지 않는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김정은 집권 이후 건설 공사를 주도해온 돌격대와 인민군대를 총동원할 것임을 내비친 것이다.

김정은의 메가톤급 발언에 통일부 등 우리 대북 주무부처는 사태 파악과 함께 북한과의 협의 추진을 언급하고 있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는 상황이라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가뜩이나 북한의 냉랭한 대남 태도로 남북관계의 동력이 줄어든 상황에서 금강산 관광마저 파국으로 마무리 된다면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점에서다. 사업 주체인 현대아산 측은 뜻밖의 북한 발표에 당혹해 하면서 사태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다.

하지만 당국이나 사업자 모두 이런 상태라면 금강산 관광사업의 종료가 불가피 하다는 현실적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일각에서는 불똥이 개성공단 쪽으로까지 튀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한때 ‘햇볕정책의 옥동자’로까지 불리던 두 사업이 현대아산과 북측 파트너를 매개로 한 일란성 쌍둥이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다.
 개성공단으로도 불똥 튈까 우려
‘금강산 남북협력’ 중단을 전격 선언한 김정은의 의중과 향후 경제협력·대북투자, 더 나아가 남북관계에 미칠 파장 등을 전망하기 위해서는 우선 구체적 언급 내용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함께 발언 배경 등을 꼼꼼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김 위원장의 금강산 방문은 지난 10월 15일 백두산 방문을 기점으로 한 북부지역과 동해안 일대 현지지도의 일환이다. 현지지도는 최고지도자가 노동당과 군부·내각의 핵심 간부를 이끌고 군부대나 협동농장, 공장·기업소 등을 방문해 실태를 파악하고 격려 혹은 질책한 뒤 이런저런 지시를 내리는 현장방문 통치활동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나온 김정은의 언급은 곧바로 ‘말씀’으로 정리돼 반드시 고치거나 이행해야 할 사안으로 간주된다. 헌법이나 법률보다 김일성·김정일의 말이 더 중시되는 북한 특유의 ‘교시 정치’가 김정은 시기에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백두산에서 금강산까지 이어진 김정은의 이번 행보는 경제문제에 초점이 맞춰졌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민생투어’라고 할 수 있는 움직임이다. 그런데 그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는 백두산 삼지연 지역 시찰에서 김정은은 미국의 대북제재를 문제 삼았다. 자신이 주도한 개건(리모델링)과 뉴타운 조성 사업이 한창인 삼지연읍 건설현장에서 김정은은 “지금 나라의 형편은 적대세력들의 집요한 제재와 압살책동으로 의연 어렵고 우리 앞에는 난관도 시련도 많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직접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로 북한의 경제상황이 어렵다는 점을 토로한 것이다. 그는 이어 “적대세력들이 우리 인민 앞에 강요해온 고통은 이제 더는 고통이 아니라 그것이 그대로 우리 인민의 분노로 변했다”고 주장했다. 대북제재로 초래된 경제난과 식량난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을 미국과 이른바 적대세력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읽혀지는 발언이다. 김정은 집권 이후 누적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도발로 대북제재를 자초했다는 비판이 자신에게 쏠리는 걸 막아보려는 뜻도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은이 백두산을 방문했다는 북한 관영매체들의 보도는 당초 김정은의 리더십을 부각시키려는 이미지 메이킹 차원으로 해석됐다. 그가 여동생 김여정 등을 이끌고 백마를 타고 첫눈이 내린 백두산을 올랐다는 기사와 함께 북한이 관련 영상을 공개한 때문이다. 이른바 백두혈통임을 강조하려는 듯 김정은과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말에는 김씨 일가를 상징하는 커다란 별이 새겨져 있었다. 2013년 12월 고모부 장성택을 전격 처형하기 직전 백두산을 당 고위 간부들과 함께 방문하는 등 주요 계기마다 백두산을 찾았다는 점에서 김정은이 무언가 중대 결단을 앞두고 있다는 관측도 일부 전문가와 언론 사이에서 대두했다.

하지만 김정은은 곧장 평양으로 귀환하지 않았다. 양강도와 함북도를 지나 강원도(북측)를 잇는 말굽형 루트로 경제시찰 일정을 보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2012년 본격적인 통치 활동에 들어간 이후 강원도 원산 지역을 자주 방문했다. 미사일 발사 등 군사훈련 참관이나 이 지역의 경제현장을 둘러보기 위한 차원이었다. 인근 함경도 지역으로 활동 반경을 넓히기도 했다. 하지만 원산 이남 지대로 내려와 휴전선과 인접해 있는 금강산 지역을 찾은 사실이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일각에서는 단풍철을 맞아 금강산 지역을 겸사겸사 들러보려던 계획에 따라 방문이 이뤄졌을 가능성을 점친다.

실제로 북한이 공개한 영상에는 김정은이 지팡이를 짚고 부인 이설주와 함께 금강산을 오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또 당 간부와 김여정, 현송월 선전선동부 부부장 등을 대동하고 금강산 계곡에서 단풍과 절경을 보며 웃는 표정으로 대화하는 모습도 파악된다. 이 과정에서 현대아산이 세운 복합시설인 온정각과 문화회관(서커스 공연), 선상호텔인 해금강호텔과 고성항 횟집, 펜션 등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진 것으로 파악된다. 북한이 공개한 영상에는 녹슨 해금강호텔 옆을 지나는 김정은의 모습이 포착된다.

물론 김정은의 금강산 방문이 즉흥적으로 이뤄졌을 가능성은 작다는 게 정부 당국과 북한 전문가 그룹의 대체적인 견해다. 금강산 관광이 대북제재 해제의 상징적 사업이자 아이콘이 된 상황에서 최고지도자가 아무 생각 없이 덜컥 방문하기는 쉽지 않다는 얘기다. 때문에 김정은의 금강산행에 고도의 정치적 의미가 깔려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9월 문재인 대통령과의 9·19 평양공동선언에서 금강산 관광 재개와 개성공단 재가동에 원칙적으로 의기투합했다. 지난 1월 신년사에선 금강산 관광의 재개 용의를 밝히면서 “남조선 동포를 환영할 것”이란 메시지까지 보냈다.

하지만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로 상황은 꼬였고 6월 판문점에서의 남북한과 미국 정상 회동에도 금강산·개성은 요지부동인 상황이다. 더욱이 10월 초 스웨덴 스톡홀롬에서 열린 북미 실무 협상마저 북한의 기대와 달리 성과 없이 조기 종결되면서 자칫 북미 대화의 모멘텀이 상실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대두하고 있다. “미국의 새로운 계산법을 기대한다”며 연말을 시한으로 제시한 김정은으로서는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자칫 스타일을 구길 수 있는 국면이다. 야심차게 신년사에서 금강산 관광 재개를 언급했던 대목도 공염불로 끝날 공산이 커진 것이다. 대북제재 노선에서의 이탈과 한미 공조 틀에서의 ‘자주적’ 대북접근을 문재인 정부에 촉구하면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문제를 압박했지만 성과는 없는 상황이다.
 북미, 남북 잇단 대화에도 상황 진전 없어
조선중앙TV가 10월 23일 보도한 금강산관광지구 전경. / 사진:연합뉴스
이런 저간의 상황 탓에 금강산의 문을 완전히 닫아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만들었을 수 있다. 일부에서는 금강산 관광 재개를 한국과 미국 측에 압박하려는 으름장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제기한다. 북한의 대미 협상 책임자인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이 이번 금강산 산행에 함께 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기도 한다. 하지만 백두산에서 함경도 등으로 이어진 앞서의 일정 등을 감안하면 최선희가 대미협상 담당자 자격으로 수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정은의 신임을 받는 핵심 간부층의 동행 및 백두산·금강산 여정으로 보는 게 더 합당하다는 얘기다.

지난 2008년 관광 중단 이후 북한은 금강산 지역은 현대아산 자산을 일방적으로 몰수하거나 동결 조치했다. 이후 10년 넘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극심한 건물 노후화가 진행된 상태라 김정은이 이를 ‘기분 나빠지는 너절한 남측시설’이라 지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정은이 금강산 내 남측 시설물 철거를 언급하면서 “남측의 관계 부문과 합의하여 싹 들어내도록 하라”고 지시한 점을 들어 일각에서는 남북 간 합의를 통해 철거작업이 이뤄질 것이란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통일부 등 정부 부처는 이번 기회를 북측과의 대화 통로 마련에 활용하겠다는 복안도 내비친다.

그렇지만 북한이 자신들의 일방적인 조치를 취하는 과정에서 남측과 사전에 협의를 진행한다는 건 낯선 일이다. 특히 김정은이 매우 불편한 입장을 밝히면서 조속한 철거를 지시했는데, 그 이행 과정에서 남측과 어떤 형식이던 논의를 거쳐 일을 처리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실제로 북한은 금강산 일대의 남측 시설을 철거해 가라는 통지를 10월 25일 보내왔다. 이상민 통일부 대변은 이날 브리핑에서 “북한이 통지문을 통해 ‘금강산지구에 국제관광문화지구를 새로 건설할 것이다. 합의되는 날짜에 금강산지구에 들어와 (남측) 당국과 민간기업이 설치한 시설을 철거해 가기 바란다’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또 “통지문에는 ‘실무적 문제들은 문서교환 방식으로 협의하면 됨’이라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고 덧붙였다.

김정은의 이번 조치가 선대 지도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금강산 관광사업 결정을 비판한 것이란 해석도 일부에선 제기한다. 김정은이 “선임자들의 잘못된 정책으로 금강산이 10여 년간 방치됐다”고 언급했다는 점에서다. 김정은은 또 “국력이 여릴 적에 남에게 의존하려 했던 선임자들의 의존정책이 매우 잘못됐다”고 심각하게 비판했다는 게 북한 매체들의 전언이다. 하지만 김정은의 이번 언급이나 지시를 ‘김정일 비판’으로까지 해석하는 것은 지나쳐 보인다. 이어진 3대 세습 체제인 북한 권력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선대 수령의 업적이나 유훈을 절대적으로 고수해야 할 상황에서 김정은이 스스로 제 발등을 찍는 일은 벌이지 않을 것이란 차원에서 봐도 마찬가지다.

김정은은 이번 금강산 방문에서 관광사업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관광지구 부지를 망탕 떼여주고 문화관광지에 대한 관리를 외면하여 경관에 손해를 줬다”고 비판하면서 ‘정책지도를 맡은 당 중앙위 해당 부서’라고 책임을 분명히 했다. 금강산 사업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김정은에 의해 이뤄졌지만 어디까지나 담당 부서인 통일전선부의 책임으로 국한한다는 의미다. 북한의 논리대로라면 당의 간부들이 잘못된 사업방식과 판단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기망해 금강산 관광 사업을 비준 받아 진행했다는 쪽으로 가닥이 잡힐 것이란 얘기다.

이럴 경우 통일전선부 책임 간부들에 대한 처벌이나 숙청이 뒤따를 가능성도 있다. 금강산 관광을 시작할 당시 통일전선부의 책임자는 김용순 통일전선부장 겸 당 대남 비서였다. 그는 북한 군부가 “군사 요새인 금강산과 장전항 지역을 남조선 관광객에게 내준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반발하는 군부를 제끼고 김정일 위원장을 설득해 사업을 관철시킨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물론 김용순이 이미 2003년 사망했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책임자 처벌은 한계가 따를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난 2월 하노이 회담 결렬의 책임으로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이 협상 주도권을 외무성 대미라인에 넘겨주고 퇴장했다는 점에서 통전부의 입지는 더 좁아질 수 있다.

금강산 사업과 관련한 김정은의 이번 언급이나 인식을 분석해보면, 아버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금강산을 ‘내주는’ 방식으로 남측과 관광 사업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김일성 주석 집권 말기인 1990년대에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모순에다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까지 겹쳐서, 그렇지 않아도 빈사 상태였던 산업 전반을 옥죄고 들었다. 개혁·개방을 택한 중국은 아직 북한에게 의미 있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 처지가 못됐다. 북한은 5년마다 열어야 하는 조선노동당 대회를 1980년 10월 6차 당 대회 이후 개최하지 못하는 형국(김정은 집권 이후 개최)에 처했다. 노동당이 국가경제계획을 제대로 제시하기 힘든 상황에 봉착한 때문이다. 1993년 12월 열린 당 6기 21차 전원회의에서는 제3차 7개년 계획 실패를 자인해야 하는 막다른 길까지 몰렸다.

열악했던 당시 상황은 김일성 사망 이틀 전인 1994년 7월 6일 소집된 경제부문책임일꾼협의회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북한에서 ‘일꾼’은 해당 분야 간부를 의미한다. 경제 분야를 책임진 노동당과 내각의 고위 관료들이 참여한 일종의 대책회의라 할 수 있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가슴이 왜 이리 답답한가. 경제가 안 풀려 요즘은 끊었던 담배까지 다시 피우게 됐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경제 각 부문이 제대로 되는 게 없다”고 말한 뒤 부총리와 장관급 간부들을 하나씩 일으켜 세워 질책했다. 그는 “동무들! 농업·경공업·무역 제일주의는 당의 결정사항 아닌가. 화학비료는 남흥화학·흥남화학을 생산 정상화하도록 만들라우”라며 다그쳤다. 또 참석 간부들에게 “경제가 엉망인데 동무들은 회의에서 아무런 문제 제시나 답변을 못하고 있다”라고 호통을 쳤다. 김일성은 끝 부분에서 “이틀 뒤 다시 회의를 소집하겠으니 부문별로 대책을 세워보고하라”고 지시했지만 심근경색으로 숨지면서 회의는 다시 열리지 못했다.

이런 엉망진창 상태의 경제를 넘겨받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겐 험난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일성의 급작스런 사망은 북한 체제가 곧 몰락할 것이란 예견이 나올 정도로 엄청난 혼란을 던졌다. ‘고장난 비행기’에 비유될 수준으로 모든 게 비정상이었고, 언제 추락하거나 불시착해도 이상하게 없을 것이란 말까지 나왔다. 여기에다 김일성 사망 이듬해부터 연이어 닥친 대홍수와 이로 인한 식량난과 경제위기에 휩쓸려 허우적거려야 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포함한 고위 탈북 인사와 우리 대북 인권·지원 단체 등은 당시 200~300만 명의 주민이 굶주림으로 사망(한미 정보당국은 46만 명으로 파악)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북한 당국도 당시를 ‘고난의 행군(行軍)’이라 부를 정도다.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경제 분야에서 가장 관심을 쓸 수 밖에 없던 건 역시 먹는 문제의 해결이었다. 남한과의 적십자회담이나 차관급 당국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메뉴는 대북 식량지원 문제였다. 이른바 ‘인도주의 협력’이란 이름으로 이산상봉과 식량 원조를 맞바꾸는 거래가 이뤄졌다. 김정일도 내부적인 식량 증산책을 서둘렀다. 하지만 “풀판을 고기로 바꾸자”며 토끼 기르기를 장려하고 열대 메기를 북한 전역에서 기르라고 하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체제 명운이 걸린 절체절명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김정은이 택한 것이 금강산 관광이란 남북 경제협력 사업이었다. 북한이 금강산을 현대아산에 독점적으로 내주고, 남한 관광객들이 이곳을 방문해 산행과 온천욕·쇼핑 등을 즐긴 뒤 그 대가로 입산료를 지불하는 것이었다. 일정 기간에 걸쳐 이뤄질 관광사업 비용을 보장하기 위해 9억4200만 달러를 북한에 매월 분할해 제공하는 럼섬(lump-sim) 방식이라 북한으로선 더 매력적일 수 밖에 없었다. 1998년 6월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방북이 있었고, 같은 해 11월 첫 금강산 관광선 현대금강호가 동해항을 출항했다. 보다 많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육로를 통한 관광이 이어졌고, 2008년 7월 금강산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 경비병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져 중단될 때까지 관광 사업은 진행됐다. 10년 동안 3550차례에 걸쳐 192만6665명이 관광을 다녀왔다는 게 현대아산 측의 설명이다. 하루 평균 3000~4000명이 관광을 한 셈이란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금강산 관광에 대해 보수 성향의 정당과 국민여론은 비판적인 입장을 제기해 왔다. 막대한 관광 대가가 현금으로 제공됨으로써 북한의 핵 개발과 미사일 발사의 뒷돈이 됐다는 주장이다. 노무현 정부 시기 본격화한 개성공단도 120여 개 한국 업체가 북한 근로자 5만3000여 명에게 지급한 연간 8000만 달러 수준의 임금이 북한 당국에 건네짐으로써 김정은 정권만 살찌웠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북한 정권이나 대북정책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에도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을 통해 북한에 건네진 달러가 위기에 처했던 김정일 정권에게 산소호흡기 역할을 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 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11년 12월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28살의 청년 지도자 김정은이 북한 최고 권력을 거머쥐게 됐다. 만신창이가 된 북한 체제를 ‘핵 보유’라는 유산과 함께 물려받았지만 녹록하지 않은 상황은 이어졌다. 정치·군사 강국을 주장하면서도 경제문제의 해법은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게 김정은에겐 아킬레스건이다. 그런데도 자력갱생과 국산화 같은 현실과 동떨어진 구호에 머물며 한계를 드러내왔다. 핵 개발과 미사일 발사에 치중한 ‘경제-핵 병진노선’은 국제사회의 대북제제를 불렀고 민생을 더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집권 이후부터 도발적 행보를 걸으며 국제사회와 한반도 주변 정세를 어지럽게 만들었던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 초부터 유화 제스처를 취하면서 대화와 협상의 테이블로 나왔다. 그간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3차례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남(2차례 정상회담+판문점 남북미 회동) 등을 통해 비핵화와 개혁·개방 노선을 취할 수 있을 것처럼 비춰졌다. 하지만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자신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거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신뢰와 구애의 메시지를 보내며 대미관계 개선에 올인하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한 형국이다.

꼬인 남북관계도 좀체 회복 기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하노이 북미 회담 결렬의 충격파 때문일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요인이 김정은 위원장과 북한 권력 핵심부를 얼어붙게 했는지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격렬한 비방과 함께 남북 당국 대화 거부는 우리 정부 당국자들을 당혹케 하고 있고, 회담 재개를 비롯한 대북전략 수립과 추진에도 어려움을 산생하고 있다.

남북관계의 대립은 당국 관계 뿐 아니라 경협이나 교류 분야에도 번졌다. 대표적으로 대북 식량지원 제안 거부와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방역 제의 무응답에 이어 최근에는 평양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 남북 대결을 무관중 경기로 치르고 실시간 중계마저도 북한 당국의 미온적 태도로 무산됐다. 남북관계의 냉각사태가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드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고 있고, 우리 국민들의 대북여론도 싸늘해졌다. 지난해 초 북한의 대남·대미 대화 기류로의 전환과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잇단 남북 정상회담 개최와 북미 정상회담 성사로 한반도에 화해와 협력의 희망이 넘쳐나던 때와 비교하면 급전직하의 상황을 맞았다고 볼 수 있다.
 정부 대북정책 추진에도 상당한 부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올랐다고 조선중앙TV가 10월 16일 보도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현송월 당 부부장 등 간부들과 함께 말을 타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대북 진출이나 북한·통일 관련 비지니스를 구상하며 채비를 서두르던 기업이나 기관·단체들은 당혹스러운 입장일 수밖에 없다. 남북관계의 대립 국면에서 사실상 꽁꽁 얼어붙었던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보다 문재인 정부 ‘희망고문’ 2~3년이 더 힘들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남북 정상회담 합의에 담긴 경협 아이템은 물론 문재인 정부가 그려온 한반도 통일경제 프로젝트에 대한 기대감이 컸지만 구체적인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데 따른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정은의 금강산 관광사업 완전 종료 선언이 나왔다. 금강산에서 남측이 건설한 관광 시설물을 겨냥해 ‘너절하다’며 철거를 지시한 김정은의 호기어린 목소리는 다소 성급해 보인다.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은 김정은의 이런 모습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관용을 베풀기 어렵다는 측면에서다. 우리 국민 여론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대통령이 연일 평화경제를 통한 남북 상생을 외치고 있던 상황에서 김정은이 내놓은 금강산 관광 파기 지시는 향후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 추진에도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lee.youngj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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