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재의 ‘브라보! 세컨드 라이프’(25) 유재철 대한민국장례문화원장] 죽음 외면하고 살면 반쪽짜리 삶
[이필재의 ‘브라보! 세컨드 라이프’(25) 유재철 대한민국장례문화원장] 죽음 외면하고 살면 반쪽짜리 삶
25년 염습사 길 걸은 ‘대통령의 염장이’… “장례 문화 바뀌어야”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갈 거 같습니다.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고 나름의 보람도 느끼죠. 시신을 염해 입관을 하고 나면 많은 유족들이 진심으로 고마워합니다. 자신들이 하기 힘든 일을 대신 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유족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어요. 돈 받고 일하면서 고맙다 소리를 듣는 일이죠.” 이른바 ‘대통령의 염장이’로 통하는 유재철 대한민국장례문화원장은 “어느 할머니는 먼저 간 언니를 곱게 모셔 줘 고맙다며 ‘이 손으로 나중에 나도 염을 해 달라’며 손을 꼭 잡더라”고 말했다. “저에겐 손이 보배죠. 알콜을 많이 만지는 탓에 찬바람이 불면 손이 터 11월이면 장갑을 꺼내 낍니다.”
그는 최규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났을 때 염습(殮襲)을 맡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을 총괄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때는 의식을 진행했다. 대통령의 장례를 가리키는 용어는 김영삼 대통령 장례 후 국가장으로 통일됐다. 과거 현직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이라고 불렀고 고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가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는 한국의 국가장으로 동방대학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 대학 장례지도사교육원의 원장을 맡고 있다. 장례지도사는 250시간에 걸쳐 8과목을 이수하고 50시간의 실습을 거치는 국가 공인 자격증이다. 그는 대한민국 전통명장(한국전통문화예술진흥협회 선정 장례 부문 1호)으로 문화재청 등록 무형문화재인 사직대제의 이수자이기도 하다. 어느 교수에게서 ‘전생에 이집트에서 왕의 미라를 만든 책임자’였을 거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의 삶은 35세를 분기점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스물일곱에 아버지가 돈을 대 줘 시작한 사업을 말아먹은 후 그는 삶의 의욕을 잃었었다. 사업 아이디어를 준 선배가 원망스러웠고,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100일간 무기력증에 빠져 지냈다. 한 스님과의 대화를 통해 실패의 원인을 자신의 내면에서 찾게 됐지만, 그 후로도 직업으로 1년 넘게 지속한 일이 없었다. 마지못해 들어간 몇 곳에서의 직장 생활은 시들했고, 친척이 하는 학원의 관리를 맡았지만 정이 가지 않았다. 인근에서 다른 학원을 하던 지금의 부인을 만난 것이 그 시절의 거의 유일한 ‘수확’이었다.
그러다 장의사를 하던 친구들을 만난 후 장의사를 차려 염습사의 길에 들어섰다. 그때만 해도 수입이 괜찮았다. ‘저승 가는 길 노잣돈’이라며 따로 돈을 챙기던 시절 친구들은 정찰제를 실시했다. 일찍이 고객 만족을 실천한 덕에 돈을 번 친구들은 상조회사로 발전시켰고 새마을금고도 차렸다. 그에겐 “돈 보고 이 일을 하다가는 또 망한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열심히 하면 돈은 따라오게 돼 있다는 뜻이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염하는 비용은 지금도 10만원이다.
염이란 고인을 깨끗이 목욕 시킨 후 수의를 하의, 상의 순으로 입힌 다음 얼굴을 다듬어 주는 일이다. 두 사람이 같이 한다. 그가 염습사로 나섰을 땐 50대 이상이 주로 장의사를 했다. 장의사는 가축의 도살, 정화조 청소와 더불어 꼭 필요하지만 종사자들이 당당하게 입에 올리지 못하는 일이다. 어린 딸을 둔 그로서는 이런 사회적 시선이 신경 쓰였다.
30대의 젊은 염습사가 드물던 시절이라 눈길을 끌었다. 여성 염습사가 귀하던 때 여자 염사를 둔 것도 입소문이 나 찾는 사람이 많았다. 전직 대통령뿐 아니라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 등 유명인의 장례도 그의 손을 거쳤다. 큰스님들 장례도 여러 건 맡았다. “큰 장례는 치밀하게 준비하는 한편의 연극 같은 것입니다. 연출자로서 매력을 느껴요. 재미도 있고, 변수도 많죠.”
김영삼 대통령 국가장 때 그는 일제의 잔재인 완장 대신 가정의례준칙대로 베 상장 착용을 제안해 실현시켰다. 메르스 사태가 있은 지 몇달 안 됐지만 운구병들은 존경의 의미로 마스크를 쓰지 않도록 했다. 염은 지난 25년간 3000여 회 했다. 병원 장례식장에 근무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다지 많이 한 건 아니다. 염을 가르친 사람은 500명에 이른다. “첫 2~3년 동안엔 운 좋게 깨끗한 시신들만 염을 했습니다. 그때 철길 사망 같은 사고사를 당한 험한 시신을 맡았다면 이 일을 계속 못했을 지도 몰라요.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장기 파열은 있었지만 심하게 훼손되지는 않았었습니다. 선생님들을 잘 만난 덕에 초기에 멘탈이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은 것도 다행스럽죠. 열심히 정성껏 염을 하는 것까지가 우리 일이라고 배웠어요. 그 후 사후의 세계는 염습사의 영역이 아니라는 거죠.”
깡패 문신을 한 ‘깍두기’ 청년에게 염습을 가르친 일이 있다. 여자를 만나 아이가 생겨 손을 씻었다고 했다. 체질이다 싶을 만큼 일을 잘했다. 그런데 한달 만에 그만뒀다. 어린 시신을 염한 후 자꾸 자기 아이와 겹쳐 보이더라는 것이다.
유 원장은 사업에 실패한 후 한때 절에 살았다. 법명은 정행(正行)이다. 바르게 행하라는 뜻으로 법정스님이 지어줬다. 법명을 받은 뒤 ‘바르게 행하기’는 그의 화두가 됐다. 2010년 그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이 스님의 다비(茶毘)를 치러 드렸다. 스님은 “관을 쓰지 말고 입고 있던 대로 화장하라”고 유언했다. 유언에 따라 관 없이 대나무 평상에 올려 운구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영혼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에 비유한다. 4.5t이나 되는 나무를 태워 화장하는 동안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며 신도들은 기도를 드리는 한편 죽음의 문제와 대면하게 된다.
불교의 장례인 다비는 삼국시대부터 있었고 화장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그는2013년 다비를 상품화했다. 2017년 이후 국내에서 치른 다비장은 대부분 그가 주도했다. “과거엔 밤새 불길이 치솟고 비용도 많이 들었지만 비교적 좁은 공간에서 3시간에 마치는 출장 다비를 개발했어요. 법적인 문제를 포함해 유해 가스 배출 등의 환경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세 건의 특허도 냈죠.” 그의 버킷 리스트는 다비장으로 인간문화재가 되는 것이다. 장례문화를 바꾸기 위한 책을 내는 꿈도 꾼다. 2002년 그는 이른바 엔딩 노트를 일본에서 들여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손질했다.
엔딩 노트는 어떻게 작성하는 게 좋나요?
“아름다운 이별을 하기 위해 생전에 자신의 장례에 대해 기록하는 것이죠. 배우자와 자녀에게 하고픈 말, 마지막 가는 길 뒷바라지를 누구에게 맡길 건지 적고 유언 및 유언 공증, 보유 자산, 채권 및 채무, 소장품 등도 기록으로 남기는 겁니다. 여기에다 존엄사를 선언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와 문화가 있는 장례는 어떻게 치르나요?
“고인의 약력, 삶에 담긴 의미를 소개하고 고마움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남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부의 봉투에 이름 적어 낸 후 형식적인 절을 하고 음식 먹으면서 지인들과 잡담 하다 오지 않습니까?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면 결혼도, 장례도 특색 있는 콘텐트가 나올 때가 됐어요. 평생 베풀고 산 선배의 장례식에 온 한 후배는 얻어먹기만 했다면서 갈라지는 목소리로 송골매의 노래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를 부르더군요. 어느 추모사 못지 않았습니다.”
남은 사람들이 육성으로 들려주는 추모 기사(obituary)인 셈이다. 그의 장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가족 중 한 사람은 심순덕 시인의 시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를 낭송했다고 한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기독교 신자인 큰처남은 “천국에 잘 도착했으니 울지 말고 잘 놀다 가시라는 어머니의 전화를 방금 받았다”고 가족을 대표해 인사했다고 한다.
죽음을 어떻게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모두가 죽기를 바라지 않지만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죠. 죽음을 외면하고 사는 삶은 어쩌면 반쪽짜리인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죽음을 부정하고 분노하다 살려주시면 다르게 살겠다고 타협을 시도하는가 하면 심한 우울감에 사로잡혔다 거기서 빠져나와 마침내 죽음을 수용한다고 합니다. 스위스 출신 심리학자 퀴블로 로스의 연구 결과죠.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포드대 학위수여식에 참석해 ‘지난 33년 간 아침이면 거울을 보면서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되뇌었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일상적으로 실천한 셈이죠. 웰 다잉을 하려면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결국 리빙 웰(잘 살기)하기로 결단해야죠.”
그는 자신이 목격한 몇 가지 죽음에 대해 들려줬다.
#1. 곡기 끊은 할머니의 존엄사: 여든이 된 한 할머니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고 분홍빛 고운 치마저고리로 갈아입은 후 곡기를 끊었다.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대소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2. 원망에 사로잡힌 부자의 죽음: 환갑 즈음인 남자는 태능에 건물이 세 채라고 했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는 가족을 힘들게 했다. 육두문자는 보통이었다. 그럴 때마다 가족들은 공포에 떨었다. 결국 인상 쓴 고인의 얼굴을 다듬어야 했다.
#3. 편안했던 가난한 남자의 죽음: 환갑 또래의 다른 남자는 연립주택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다. 조계사에 다니는 딸이 그에게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나무아이타불을 입으로 따라하라고 했다. 안 되면 마음으로 따라하라고 속삭였다. 염할 때 보니 표정이 편안했다.
그는 마지막 길을 떠날 때 귀가 가장 늦게 닫힌다고 덧붙였다. “제명대로 살다 편안히 죽는 고종명(考終命)을 우리 선조들은 오복의 하나로 쳤습니다. 품격 있는 죽음을 맞아야죠.”
안타까운 죽음이 뭐라고 보나요?
“면회가 자유롭지 않은 중환자실에서 최후를 맞느니 자식 등 가족에게 둘러싸여 떠나는 게 좋다고 봅니다. 본인의 임종이자 자녀의 임종이죠. 사망(死亡)이란 말은 죽어서 망한다는 뜻이니 쓰지 말아야 합니다.”
때 되어 잘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요?
“죽음에 이르는 데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자전거로 가고 싶은 곳에 가기 위해 자전거 타기를 연습하는 것과 비슷하죠. 죽음에 대한 교육도 필요합니다. 죽음에 대해 공부해야 삶이 깊어지죠. 대학에 가려 12년 동안 공부하면서 저 세상 갈 준비를 소홀히 합니다. 죽음 교육이 이뤄지면 자살률 1위 국가라는 국가적 오명도 벗을 수 있을지 몰라요.”
이 천하의 염장이에게 묘비명을 어떻게 새기고 싶은지 물었다. “바르게 행하려 늘상 궁리하던 사람, 여기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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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최규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났을 때 염습(殮襲)을 맡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을 총괄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때는 의식을 진행했다. 대통령의 장례를 가리키는 용어는 김영삼 대통령 장례 후 국가장으로 통일됐다. 과거 현직 대통령의 장례는 국장이라고 불렀고 고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가 국장으로 치러졌다. 그는 한국의 국가장으로 동방대학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 대학 장례지도사교육원의 원장을 맡고 있다. 장례지도사는 250시간에 걸쳐 8과목을 이수하고 50시간의 실습을 거치는 국가 공인 자격증이다. 그는 대한민국 전통명장(한국전통문화예술진흥협회 선정 장례 부문 1호)으로 문화재청 등록 무형문화재인 사직대제의 이수자이기도 하다. 어느 교수에게서 ‘전생에 이집트에서 왕의 미라를 만든 책임자’였을 거라는 소리도 들었다.
최규하·노무현 전 대통령 염습 맡아
그러다 장의사를 하던 친구들을 만난 후 장의사를 차려 염습사의 길에 들어섰다. 그때만 해도 수입이 괜찮았다. ‘저승 가는 길 노잣돈’이라며 따로 돈을 챙기던 시절 친구들은 정찰제를 실시했다. 일찍이 고객 만족을 실천한 덕에 돈을 번 친구들은 상조회사로 발전시켰고 새마을금고도 차렸다. 그에겐 “돈 보고 이 일을 하다가는 또 망한다”고 충고했다고 한다. 열심히 하면 돈은 따라오게 돼 있다는 뜻이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염하는 비용은 지금도 10만원이다.
염이란 고인을 깨끗이 목욕 시킨 후 수의를 하의, 상의 순으로 입힌 다음 얼굴을 다듬어 주는 일이다. 두 사람이 같이 한다. 그가 염습사로 나섰을 땐 50대 이상이 주로 장의사를 했다. 장의사는 가축의 도살, 정화조 청소와 더불어 꼭 필요하지만 종사자들이 당당하게 입에 올리지 못하는 일이다. 어린 딸을 둔 그로서는 이런 사회적 시선이 신경 쓰였다.
30대의 젊은 염습사가 드물던 시절이라 눈길을 끌었다. 여성 염습사가 귀하던 때 여자 염사를 둔 것도 입소문이 나 찾는 사람이 많았다. 전직 대통령뿐 아니라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 등 유명인의 장례도 그의 손을 거쳤다. 큰스님들 장례도 여러 건 맡았다. “큰 장례는 치밀하게 준비하는 한편의 연극 같은 것입니다. 연출자로서 매력을 느껴요. 재미도 있고, 변수도 많죠.”
김영삼 대통령 국가장 때 그는 일제의 잔재인 완장 대신 가정의례준칙대로 베 상장 착용을 제안해 실현시켰다. 메르스 사태가 있은 지 몇달 안 됐지만 운구병들은 존경의 의미로 마스크를 쓰지 않도록 했다. 염은 지난 25년간 3000여 회 했다. 병원 장례식장에 근무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다지 많이 한 건 아니다. 염을 가르친 사람은 500명에 이른다. “첫 2~3년 동안엔 운 좋게 깨끗한 시신들만 염을 했습니다. 그때 철길 사망 같은 사고사를 당한 험한 시신을 맡았다면 이 일을 계속 못했을 지도 몰라요. 노무현 전 대통령도 장기 파열은 있었지만 심하게 훼손되지는 않았었습니다. 선생님들을 잘 만난 덕에 초기에 멘탈이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은 것도 다행스럽죠. 열심히 정성껏 염을 하는 것까지가 우리 일이라고 배웠어요. 그 후 사후의 세계는 염습사의 영역이 아니라는 거죠.”
깡패 문신을 한 ‘깍두기’ 청년에게 염습을 가르친 일이 있다. 여자를 만나 아이가 생겨 손을 씻었다고 했다. 체질이다 싶을 만큼 일을 잘했다. 그런데 한달 만에 그만뒀다. 어린 시신을 염한 후 자꾸 자기 아이와 겹쳐 보이더라는 것이다.
유 원장은 사업에 실패한 후 한때 절에 살았다. 법명은 정행(正行)이다. 바르게 행하라는 뜻으로 법정스님이 지어줬다. 법명을 받은 뒤 ‘바르게 행하기’는 그의 화두가 됐다. 2010년 그는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이 스님의 다비(茶毘)를 치러 드렸다. 스님은 “관을 쓰지 말고 입고 있던 대로 화장하라”고 유언했다. 유언에 따라 관 없이 대나무 평상에 올려 운구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영혼이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에 비유한다. 4.5t이나 되는 나무를 태워 화장하는 동안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며 신도들은 기도를 드리는 한편 죽음의 문제와 대면하게 된다.
불교의 장례인 다비는 삼국시대부터 있었고 화장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그는2013년 다비를 상품화했다. 2017년 이후 국내에서 치른 다비장은 대부분 그가 주도했다. “과거엔 밤새 불길이 치솟고 비용도 많이 들었지만 비교적 좁은 공간에서 3시간에 마치는 출장 다비를 개발했어요. 법적인 문제를 포함해 유해 가스 배출 등의 환경 문제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세 건의 특허도 냈죠.”
다비장으로 인간문화재 되고파
엔딩 노트는 어떻게 작성하는 게 좋나요?
“아름다운 이별을 하기 위해 생전에 자신의 장례에 대해 기록하는 것이죠. 배우자와 자녀에게 하고픈 말, 마지막 가는 길 뒷바라지를 누구에게 맡길 건지 적고 유언 및 유언 공증, 보유 자산, 채권 및 채무, 소장품 등도 기록으로 남기는 겁니다. 여기에다 존엄사를 선언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와 문화가 있는 장례는 어떻게 치르나요?
“고인의 약력, 삶에 담긴 의미를 소개하고 고마움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남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부의 봉투에 이름 적어 낸 후 형식적인 절을 하고 음식 먹으면서 지인들과 잡담 하다 오지 않습니까?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면 결혼도, 장례도 특색 있는 콘텐트가 나올 때가 됐어요. 평생 베풀고 산 선배의 장례식에 온 한 후배는 얻어먹기만 했다면서 갈라지는 목소리로 송골매의 노래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를 부르더군요. 어느 추모사 못지 않았습니다.”
남은 사람들이 육성으로 들려주는 추모 기사(obituary)인 셈이다. 그의 장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가족 중 한 사람은 심순덕 시인의 시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를 낭송했다고 한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기독교 신자인 큰처남은 “천국에 잘 도착했으니 울지 말고 잘 놀다 가시라는 어머니의 전화를 방금 받았다”고 가족을 대표해 인사했다고 한다.
죽음을 어떻게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모두가 죽기를 바라지 않지만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죠. 죽음을 외면하고 사는 삶은 어쩌면 반쪽짜리인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죽음을 부정하고 분노하다 살려주시면 다르게 살겠다고 타협을 시도하는가 하면 심한 우울감에 사로잡혔다 거기서 빠져나와 마침내 죽음을 수용한다고 합니다. 스위스 출신 심리학자 퀴블로 로스의 연구 결과죠. 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포드대 학위수여식에 참석해 ‘지난 33년 간 아침이면 거울을 보면서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되뇌었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일상적으로 실천한 셈이죠. 웰 다잉을 하려면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결국 리빙 웰(잘 살기)하기로 결단해야죠.”
그는 자신이 목격한 몇 가지 죽음에 대해 들려줬다.
#1. 곡기 끊은 할머니의 존엄사: 여든이 된 한 할머니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고 분홍빛 고운 치마저고리로 갈아입은 후 곡기를 끊었다.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대소변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2. 원망에 사로잡힌 부자의 죽음: 환갑 즈음인 남자는 태능에 건물이 세 채라고 했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는 가족을 힘들게 했다. 육두문자는 보통이었다. 그럴 때마다 가족들은 공포에 떨었다. 결국 인상 쓴 고인의 얼굴을 다듬어야 했다.
#3. 편안했던 가난한 남자의 죽음: 환갑 또래의 다른 남자는 연립주택에서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다. 조계사에 다니는 딸이 그에게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나무아이타불을 입으로 따라하라고 했다. 안 되면 마음으로 따라하라고 속삭였다. 염할 때 보니 표정이 편안했다.
그는 마지막 길을 떠날 때 귀가 가장 늦게 닫힌다고 덧붙였다. “제명대로 살다 편안히 죽는 고종명(考終命)을 우리 선조들은 오복의 하나로 쳤습니다. 품격 있는 죽음을 맞아야죠.”
안타까운 죽음이 뭐라고 보나요?
“면회가 자유롭지 않은 중환자실에서 최후를 맞느니 자식 등 가족에게 둘러싸여 떠나는 게 좋다고 봅니다. 본인의 임종이자 자녀의 임종이죠. 사망(死亡)이란 말은 죽어서 망한다는 뜻이니 쓰지 말아야 합니다.”
때 되어 잘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나요?
“죽음에 이르는 데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자전거로 가고 싶은 곳에 가기 위해 자전거 타기를 연습하는 것과 비슷하죠. 죽음에 대한 교육도 필요합니다. 죽음에 대해 공부해야 삶이 깊어지죠. 대학에 가려 12년 동안 공부하면서 저 세상 갈 준비를 소홀히 합니다. 죽음 교육이 이뤄지면 자살률 1위 국가라는 국가적 오명도 벗을 수 있을지 몰라요.”
이 천하의 염장이에게 묘비명을 어떻게 새기고 싶은지 물었다. “바르게 행하려 늘상 궁리하던 사람, 여기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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