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에서 맹자를 생각하다 [유웅환 반도체 열전]
미국 실리콘밸리 경쟁력의 핵심은 산학연 협업
국내 반도체 산업 성장 위해 대중소 상생 생태계 구축해야
지난 칼럼에서 살펴본 것처럼, 수 차례 반도체 치킨게임 속 부침은 있었지만 실리콘밸리는 지금도 건재하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10여 년 전, 삼성전자의 스카웃 제의를 받아 10년 동안의 실리콘밸리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필자는 맹자 말씀을 떠올렸다.
그는 전쟁론을 설파하면서 ‘천시(天時)는 지리(地理)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고 했다. 하늘의 뜻보다도 성곽을 탄탄히 쌓는 것이 중하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도자를 따라줄 민심이라는 말이다. 풀어서 쓰면 모든 일에는 때가 있으니(天時), 그것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地理)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가짐을 가지라는(人和) 말이 될 것이다. 비록 혼자 힘만으로는 천시와 지리를 극복할 수는 없겠지만, 인화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몸소 동료와 후배들에게 이로운 일을 행함으로써 조직 내에서부터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필자의 마음가짐은 실리콘밸리에서 배운 것이다.
고대 동양철학자라니, 최첨단을 달리는 실리콘밸리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리콘밸리 전반에 확고하게 흐르는 전통을 알면 이해가 될 것이다. 바로 인재, 즉 사람을 귀히 여기는 문화다.
인재를 귀하게 여기는 문화
골드러시 시대에 서부에서 금광으로 부를 축적하고 철도회사를 운영했던 릴런드 스탠퍼드(Leland Stanford)는 1891년 ‘세상에 직접적으로 유용한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는 설립 원칙 아래 스탠퍼드 대학을 세웠다(이 설립 원칙을 들으면 필자가 삶의 신조로 삼기도 하는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하라’는 홍익인간(弘益人間)도 떠올리실 것이다). 특히 스탠퍼드는 공학에 집중적으로 투자함으로써 대학과 연구소, 기업 간의 삼각편대를 구축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대학이 산업 역군 및 인재를 길러내는 인큐베이터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리고 세상에 이로운 사람을 만든다는 그들의 교육관은 실제 결과로 나타났다. 1939년 HP를 창립한 월리엄 휴렛과 데이비드 패커드는 스탠퍼드 전기공학과 출신이었다. 이들은 차고에서 시작해 회사를 창립했는데, 이는 후일 우리가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실리콘밸리의 수많은 ‘차고 창업 신화’의 원전(原典)과도 같다. 스탠퍼드는 구글의 두 창업자인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역시 배출했다.
지금도 스탠퍼드의 강의실에는 실제 창업을 해봤거나 실무경험이 있는 교수진들이 강의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투자자들이 학부생들의 졸업 프로젝트 발표회를 보고 현장에서 바로 계약을 맺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한다. 스탠퍼드의 반도체 분야 연구소들은 대학과 기업의 공생을 가능케 하는, 산학협력의 전통적이고 대표적인 모델이다. 여기서 대학과 기업의 관계는 단순한 전략적 동반자 정도로 봐서는 안된다. 그 이상이다. 끈끈한 정으로 이어져 있는 운명 공동체라는 말이 적합할지 모른다.
그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현직 경제계를 주름잡는 창업자 및 기업가들이 교육계에 기부하는 문화다. 스탠퍼드의 경우 동부의 아이비리그 대학들과 견주어도 남부럽지 않을 만큼의 재정을 확보하고 있는데, 이는 동문들이 자발적으로 낸 기부금 덕분이다. 선배들이 후배를 위해서 기부한 돈은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 우수한 교원의 확충, 연구 지원 및 장학제도의 혜택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와 같은 도움의 손길 덕분에 실리콘밸리 내의 대학들이 현장에서 요구하는 인재들을 지속적으로 배출할 수 있는 것이다.
학교와 기업 간의 선순환 구조가 갖는 저력은 수치로도 나타난다. 우선 취업률이 안정적이다. 구글은 매년 평균 5000명 정도의 신규 인력을 뽑는데, 이중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1800명가량,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서 1600명가량, 카네기멜론 대학교에서 900명가량을 뽑는다. 스탠퍼드 대학교는 구글 인력 충원의 핵심인 셈이다. 기부금 현황을 보면, 2010년 이후로 미국 고액 기부자 명단에서 실리콘밸리 출신의 기업가들의 이름이 다수를 차지한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 구글의 공동 창업자인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빈곤 및 사회공헌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기부금을 내놓고 있다. 또 2014년에는 현재 페이스북에서 일하고 있는 잔 코움이 왓츠앱을 매각하고 난 후 500만 달러를, 그리고 고프로의 창업자인 니콜라스 우드만이 500만 달러를 실리콘밸리 지역재단에 기부해 화제를 불러 모은 바 있다. 이처럼 실리콘밸리의 성공한 기업가들은 자신들의 성장 발판이 되어주었던 지역 사회와 학교를 나 몰라라 하지 않고 계속해서 재정적인 지원과 애정 어린 관심을 보내고 있으며, 이는 끊임없는 인재들이 배출되는 저력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 제2의 실리콘밸리를 위해
지금 이 시간에도 전 세계 각국은 '제2의 실리콘밸리’를 목표로 미래를 선도할 산업단지를 조성해 가고 있다. 우리도 중앙정부와 여러 지자체가 ‘테크노밸리’ 등의 이름을 붙이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반도체에 초점을 맞춰 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관련 산업시설이 성남, 수원, 화성, 용인, 평택 등에 퍼져 있어서 알파벳 K의 모양이 나와 ‘K-반도체 벨트’라 이름 붙여졌다. 다만 대한민국의 반도체 역량이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보니 수도권 밖 지자체들을 중심으로 앞다퉈 그 K의 크기를 수도권에서 국토 전체로 확장하려는 노력 역시 진행 중에 있다.
다만 피상적인 모방만으로는 실리콘밸리가 반세기 이상에 걸쳐서 이루어 낸 족적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앞서 살펴본대로 실리콘밸리 경쟁력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바로 산학연 협업이다. 이 산학연 협력은 민관 협업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미국의 반도체산업 역시 산업계만의 자체적인 노력으로 지탱되지 않는다. 통과를 앞두고 있는 미국의 반도체 관련 법안(Chips Act)은 반도체 산업계에 약 69조원을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산학연 협업과 이를 뒷받침하는 민관 협업은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이 메모리반도체 또는 대기업 위주에서 벗어나 대중소 상생 생태계를 만들어 비메모리 분야이자 시스템반도체를 구성하는 팹리스와 파운드리의 동반성장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실리콘밸리로부터 얻을 수 있는 노하우를 추가로 알아보기로 한다.
*필자는 27년 경력의 반도체 열사(烈士)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석·박사를 취득한 후 인텔에서 수석매니저를 지냈고,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에 스카웃돼 최연소 상무로 재직했다. 현대자동차 연구소 이사, SKT 부사장(ESG그룹장) 등을 거쳐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으로 활동하며 반도체 정책 보고서 등을 작성했다. 반도체 분야 90여 편의 국제 논문과 Prentice Hall과 고속반도체 설계에 관한 저서를 출간했다.
유웅환 전 제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인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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