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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안 되면 되게 하자 [김형중 분산금융 톺아보기]

세계 선도하던 한국 크립토 시장, 변방으로 밀려나

[게티이미지]





[김형중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특임교수] “산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내가 산에게로 가면 된다”

산을 옮겨보라는 말을 들은 사람이 있다. 성경에 나온다.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허풍 치는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다. 산을 옮기려 했는데 ‘산이 다가오지 않으면 모하메드가 산으로 가야 한다’고 쓴 글이 있다. 1652년 프랜시스 베이컨의 책에 나온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이 예문이 모하메드와 아무 관련이 없음을 알렸다.

필자가 고등학생일 때 영한사전에서 본 모하메드의 예문은 큰 감동이었는데 그건 필자가 정호승 시인과 같은 해석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하메드가 거론된 그 문장이 서양에서 조롱거리로 쓰이고 있다니 신기하다. 정호승 시인의 책에 담긴 “산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내가 산에게로 가면 된다”는 말은 희망의 메시지로 인식된다. 오지 않을 산에게 명령하지 않고 산으로 다가가면 그게 그거인 거란 의미일 게다. 이게 안 되면 좌절하지 말고 저걸 해보면 된다.

아, 옛날이여

필자는 2017년부터 한국의 크립토 시장에서 희망을 봤다. 그 이유는 대충 이랬다. 당시 서울의 특급 호텔들은 크립토 컨퍼런스로 연일 붐볐고 세계적으로 난다 긴다 하는 암호화폐 업계의 거물들이 한국의 연단에 서려고 거액을 내고 줄을 섰다. 그들의 코인이 한국에서 뜨면 불티나게 팔렸고, 한국의 거래소에 상장되면 시가총액이 폭발적으로 커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한국은 크립토 성지였다.

한국 언론사들이 컨퍼런스에 해외의 저명한 인사를 초청하면서 거액을 쥐어 주는 게 흔한 일이었다. 행사가 적자를 면하면 언론은 컨퍼런스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노벨상 수상자라도 한 명 초대하면 주최측은 행사의 면이 섰다며 좋아라 했다. 외국 참가자의 발언에는 마치 대단한 메시지가 담긴 것처럼 언론이 포장해 주면서 국내 거물들의 발언은 양념 정도로 여겼다.

크립토 시장에서도 약간의 사대주의 잔재가 남아 있었지만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언론이 비탈릭 부테린을 띄워주고 싶어도 갓 스무 살을 넘긴 청년에게 지면을 대폭 할애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닷컴 버블 시기에도 그랬던 것처럼 코인 시장에는 돈이 넘쳐났다. 그래서 코인 업자들이 등록비를 내는 건 당연했고, 국내 연단에 서려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후원금을 내야 했다. 왜냐하면 한국 무대가 그들에게는 등용문이었기 때문이다.

2018년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디코노미(Deconomy) 컨퍼런스에 해외의 거물들을 부른 건 주최측 두 명의 한국 청년이었다. 한국 청년들의 역량이 그 정도로 자랐다. 훗날 유니스왑을 세운 헤이든 애덤스도 디코노미에 참가했다. 기계공학자였던 그는 지멘스에서 해고되어 암울한 나날을 보내며 자바스크립트와 솔리티 프로그래밍을 공부하다가 생애 처음 해외여행에 나섰는데 그게 서울이었다. 그는 티켓 살 돈이 없어 행사장 입장이 거절되었지만 대신 거기서 부테린을 만났다.

업비트는 2017년 설립된 그해 말부터 국내는 물론이고 세계 시장에서도 1위 거래소로 등극했다. 무려 75%의 리플이 한국에서 거래되었다. 한국의 거래소에 상장된 카르다노(ADA)나 트론(TRX) 등의 단숨에 시가총액 10위 안에 들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실적이 증명해줬으니까. 그게 한국의 위상이었다. 금융시장에서 한국이 이처럼 뜨겁고 당당했던 적은 유사 이래 처음이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해외로 나가 성공해서 돌아오라

2022년에 벌어진 3대 크립토 대형사고는 테라-루나 폭락, FTX 파산, 위메이드 원화마켓 상장폐지 사태였다. 그 가운데 두 사례의 주인공이 한국인이었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만큼 한국의 영향력이 커진 거다. 그렇지만, 한국은 2018년 이후 시장에서 변방으로 밀려났고, 가두리 양식장으로 전락했다.

2022년 고팍스가 어렵사리 원화마켓에 들어왔다. 그런데 실명확인계좌를 받지 못한 코인마켓 거래소에도 실적이 밀렸다. 이럴 바엔 코인마켓 거래소들이 가상자산산업자 신고수리서를 반납하고 두바이나 아부다비에 둥지를 틀어 세계 10위 안에 드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1492년 레콩키스타로 이슬람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되면서 유대인에게 개종하거나 떠나라는 알함브라 칙령이 발표되었다. 스페인은 신대륙 발견으로 한동안 영화가 이어졌지만 쇠락의 길을 걸었고 추방된 유대인들이 정착한 암스테르담은 금융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무려 500년이 지난 2015년 스페인은 그때 추방된 유대인 후손의 국적을 회복해 주는 법을 만들었으니 그게 허무 개그 아닐까?

한국에서도 해시드 같은 벤처캐피탈(VC)이 등장해 미국의 a16z 같은 VC와 견줄 수준이 되나 싶었는데 테라-루나 사태 이후 칩거에 들어갔다. 토종 클레이의 가격이 2020년 수준으로 떨어져 또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다. 현재 36개 가상자산사업자 신고가 수리되었는데 신고수리서가 족쇄가 된 느낌이 든다.

분산거래소 유니스왑, USCD를 발행하는 서클, 스마트계약 감사 기업 써틱, 코인을 추적하는 체이널리시스, NFT 마켓플레이스 오픈씨 등 수많은 크립토 기업들이 유니콘에 등극했다. 한국에서는 업비트 하나가 거기에 끼었다. 

이 나라에서는 거래소에서 신용카드 결제나 스테이블코인 인출이 사실상 불가능하며, 내국인만 상대로 영업을 해야 한다. 그러니 규제가 약한 해외에서 보란 듯이 성공해 연어처럼 돌아오는 것도 하나의 해법이다. 안 되면 되게 해야 한다. 내가 산으로 다가가는 방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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