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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향’ 가득한 남도의 ‘봄향’…문학여행길 따라 걷다[E-트래블]

문학의 고장이라고 불리는 전남 장흥
전국 최초의 문학관광기행특구로 지정
등단한 작가만 무려 100명 넘어

묵촌마을 동백숲 [강경록 이데일리 기자]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전남 장흥은 문학의 고장이다.

이유가 있다. 예부터 장흥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시인 묵객들이 나고 자랐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행 가사 ‘관서별곡’을 지은 백광홍(1522~1556)과 현대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청준(1939~2008), 한승원(1939~), 송기숙(1935~) 등 당대의 문장가가 모두 장흥 출신이다. 등단한 작가만 무려 100명을 넘는다. 전국 최초의 문학관광기행특구로 지정된 것도 같은 이유다. 자칫 멋모르고 장흥에서 글 자랑했다가는 망신당하기 십상이라는 말이다.

이번 여정에서는 장흥을 대표하는 한승원, 이청준 두 작가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장흥의 남부 지역인 회진면을 가로질러 여행하는 코스다. 한적한 고갯길과 오붓한 숲길, 시원한 바닷길이 펼쳐진 마을.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맞으며 두 작가의 작품 속 배경이 고스란히 녹아든 바로 그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작가 이청준 생가 [강경록 이데일리 기자] 


장흥 문학의 산실 ‘회진포구’

장흥 문학 여행길의 시작점은 천관문학관이다. 매화향 가득 품은 천관문학관에서는 장흥에서 나고 자란 문장가는 누군지, 그에게 문학적 영감을 제공한 무대는 또 어딘지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다. 문학관 위쪽의 문학공원 문탑 밑에는 구상, 박완서 등 작가들의 친필 원고 50여 점과 연보 등이 캡슐에 쌓여 묻혀 있다. 문탑 아래쪽은 천관산문학공원이다. 친필 원고에 적힌 글들을 50여 개 문학비에 각각 세워 놓았다.

문학관을 나와 회진포구로 운전대를 잡는다. 회진은 문인의 땅이자, 장흥 문학의 산실이다. 요즘 세대에게 잘 알려진 소설가 한강의 부친 한승원과 ‘당신들의 천국’, ‘눈길’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이청준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회진포구에서 고개 하나를 넘어서니 이청준 생가가 있는 진목마을이 보인다. 마을 골목길로 조금 들어서면 생가도 들어가 볼 수 있다. 그의 생가는 방 3개와 툇마루, 부엌을 갖춘 일자형 기와집이다. 이청준의 자전적 소설 ‘눈길’의 배경이 된 집이다. 

그의 묘는 진목마을에서 약 2.5km 떨어진 곳에 ‘이청준 문학자리’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의 부모를 모신 봉분과 장차 부인이 쉴 자리도 함께 마련해 두었다. 묘소 앞으로 넓은 바닥 돌에 작품 속 배경을 직접 그린 문학지도와 작가의 초상, 그리고 ‘해변 아리랑’의 한 대목이 새겨진 직사각형 돌기둥, 작가의 호 ‘미백(未白)’을 새긴 바위가 있다. 묘소 앞 ‘갯나들’은 어머니가 아들에게 싸 보낼 게를 잡던 곳. 드넓은 들판으로 변한 지금은 청보리가 봄바람에 살랑거린다.

인근의 선학동마을은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 촬영지로 유명하다. ‘천년학’의 원작은 이청준의 단편 ‘선학동 나그네’로, 소리꾼 유봉 밑에서 자란 동호와 송화의 아픈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선학동은 소설의 실제 무대로 원래 이름은 산저마을인데, 영화 ‘천년학’ 이후 선학동으로 바뀌었다.

영화 '천년학' 촬영지로 유명한 선학동마을. [강경록 이데일리 기자] 


장흥의 산과 바다, 문학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다

신상마을로 향한다. 한승원의 생가가 이 마을에 있어서다. 생가로 가는 길에 ‘앞메잔등’을 만난다. 마을 앞산 고개를 뜻한다. ‘앞산’을 의미하는 앞메와 ‘고개’를 뜻하는 잔등이 더해진 말이다. 중편 ‘폐촌’에서 겨울에 김을 가득 담은 구럭을 짊어진 사람들이 헐떡거리며 넘은 고개로 나온다. 고개를 넘어 신상 버스 정류장 건너편 신상마을로 들어서니 한승원 생가가 나온다. 어느 시골에서나 볼법한 풍경으로 전형적인 농가다. 그런데도 특별해 보이는 것은 남해 특유의 구성진 언어가 살아 있는 그의 소설이 이곳에서 태동해서다.

한승원 문학현장비는 넓바위포구에 있다. 천관산과 우산도, 금당도와 고흥반도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이 포구는 한승원 바다문학의 상징이다. 

한승원의 흔적과 처음 마주하는 곳은 넓바위 포구. 천관산과 우산도, 금당도와 고흥반도가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이 포구는 한승원 바다문학의 현장이다. 그의 대표적인 바다 소설 ‘갈매기’, ‘폐촌’, ‘그 바다 끓며 넘치며’, ‘낙지같은 여자’, ‘우산도’, ‘동학제’, ‘해변의 길손’, ‘갯비나리’ 등의 이야기가 이곳을 무대로 해서 쓰여졌다. 그는 ‘내 소설 8할은 고향 바닷바람에 의해서 탄생한 것이다’라고 술회했다.

신상마을에서 덕산마을로 이어지는 길에는 ‘한재’라고 불리는 고개가 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큰재산과 한재산 사이의 고개다. 단편 ‘앞산도 첩첩하고’, 장편 ‘동학제’, ‘그 바다 끓며 넘치며’에서 한재를 넘는 애달픈 사연이 나온다. 정상에 서면 덕산마을과 그 너머로 득량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 동쪽의 신상리·신덕리·대리 주민들이 회진으로 장 보러 가고, 산 서쪽의 덕산리 아이들이 대리에 있는 학교(현 명덕초등학교)에 다닐 때 넘어 다닌 고개다. 한재 정상에 서면 신상마을과 그 너머로 득량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재공원은 한재 정상 주변 10만㎡에 이르는 할미꽃 군락지다. 단일 규모로 전국 최대다. 해마다 3월 중순부터 4월 말까지 자줏빛 꽃망울을 틔운다.

한승원문학길 종점은 회령포다.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병선 12척을 인수해 출정한 곳이자, 명량해전 출정지다. 회진리 마을 뒷산에 회령진성이 있다. 조선 성종 때 축조한 수군진으로,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병선 12척을 수리했다고 한다. 현재 남은 성벽은 616m로, 동벽은 벼랑 위에 쌓았다고 하나 모두 없어지고 동문 터만 남았다. 회령진성 정상에서 너른 들판과 그 너머 천관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국 최대의 동백숲을 만나다

장흥은 이미 봄기운으로 가득하다. 운전대를 잡고 용산면 묵촌마을을 찾아가는 이유는 동백숲 때문이다. 이 마을 입구에는 마을의 액운을 막고자 조성한 인공림에 수령 250~300년 된 동백나무가 140여 그루 숲을 이루고 있다. 이 동백숲이 지금 절정에 달해 가지도 바닥에도 온통 붉은 물결을 이루고 있다. 주변도 온통 보리밭이어서 붉은 꽃잎이 한층 돋보인다.

관산읍에서 천관산자연휴양림으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오르면 골짜기를 뒤덮은 짙푸른 동백 숲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국내 최대 동백 숲인 ‘천관산 동백숲’이다. 얼핏 보면 초록빛 호수에 들어온 듯하다. 지난 2007년, 열명의 인원이 열 달 동안 매달려 3만그루까지 세다 ‘그만하면 됐다’는 통보를 받고서야 작업을 그쳤다고 할 정도로 동백나무가 빼곡해서다. 과거에는 이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대대로 동백나무로 숯을 만들었다. 지금도 드넓은 동백 숲에는 7개의 숯가마 터가 남아있을 정도다. 마을 주민들이 땅에 발을 딛지 않고 무협영화처럼 동백나무 가지를 밟고 걸어 다녔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다. 지금 남아있는 동백나무의 수령은 대부분 60~80년에 불과하다고 하니 당시 얼마나 많은 동백나무가 잘려 나갔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한승원 기념 헌정비 [강경록 이데일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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