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서울 도심에 있는 외딴 섬 ‘학소도’를 아시나요 [E-BOOK]

신간 ‘서울에 있는 나의 섬 학소도’
20여 년 동안 2000여 명의 사람들 방문
사람과 자연의 변화 담은 고향집 이야기

저자 최범석, 지도없는여행 279쪽, 가격 1만7500원

[이코노미스트 최영진 기자] ‘실제로는 광화문에서 자동차로 10분, 지하철로 세 정거장밖에 안 되는 거리에 있는데, 마치 어느 깊은 산골 혹은 서울 한복판에 떠 있는 작은 무인도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복잡했던 머리와 마음이 평온을 되찾으면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서울에 있는 나의 섬 학소도 중에서)

인왕산 자락에 있는 서울 홍제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 있는 놀이터 부근에 조그마한 문이 있다. 한 번이라도 이용한 적이 없다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눈에 띄지 않는 출입구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60여 년이 된 옥상이 있는 1층 집이 하나 나온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출입구를 제외하면 1층 집 집 주위는 아파트 단지를 구분하는 외벽이 둘러싸여 있어서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 출입구가 없다면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는 외딴섬 같은 집이다. 그곳이 서울 도심에 있는 집 ‘학소도’다. 뜻을 풀이하면 ‘학의 둥지가 있는 섬’이다.  

3개 국어 유창한 자유인…운명처럼 고향 집에 돌아와

겨울 철새 학이 겨울에만 머물고 봄이 되면 중국, 일본 등지로 떠나는 것처럼 이 집의 주인 최범석씨 역시 인생의 1/3을 해외에서 보냈다. 나이 서른 초반에 쓰러져 가는 집에 들어가 20여 년 동안 다양한 사람과 자연의 이야기가 담긴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그는 한때는 여행가, 한때 스포츠 에이전시 대표, 지금은 작가로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그를 ‘자유인’이라고 떠올린다. 한국에서 태어나 초등학교까지 마치고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독일로 넘어간 후 미국·프랑스·스위스 등에서 학업을 마치느라 해외에서 15년 정도를 보냈다. 미국 버클리대에서 국제정치학·경제학·독문학을 공부했고, 서울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0년대 말 33일간의 대륙횡단 열차 여행의 경험을 기록한 ‘반더루스트, 영원한 자유의 이름’이라는 책은 그의 인생철학을 엿보게 한다. 나이 서른이 되기 전에 이미 70여 개 나라를 배낭 하나 메고 구석 구석 돌았다고 하니 그의 방랑벽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유롭게 살던 그가 아무도 신경 쓰지 못하던 쓰러져 가던 고향 집을 떠올린 것은 운명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생전 직접 지었던 집으로 12살까지 살았지만, 해외에 나가면서 가족 누구도 그 집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1990년대 후반 어느 겨울 침낭과, 두꺼운 옷 몇 가지, 커피 물과 라면을 끓일 수 있는 냄비와 부스터, 그리고 책 몇 권과 노트북만 챙겨서 학소도로 돌아갔다. 현관문과 창문이 다 깨지고 전등도 나가 있는 폐가였던 학소도로 들어가 30여 년 동안의 변화를 기록한 게 ‘서울에 있는 나의 섬 학소도’다. 서른 초반에 2002 한국월드컵조직위원회에 합류하고, 월드컵을 계기로 차범근·차두리 부자가 소속되어 있던 스포츠 에이전시 설립을 하면서 한국에 터를 잡은 것도 학소도에 생기를 불러일으킨 계기가 됐다. 

학소도는 방이 세 개, 거실, 부엌, 화장실 등의 구조를 가진 30평대의 평범한 단독주택이다. 이 집이 특이한 것은 집터 구조 덕분이다. 100평이 조금 넘는 대지가 절반으로 나뉘어 있는데 앞뜰과 옥상과 같은 높이에 뒤뜰이 마련된 것이다. 텃밭과 유실수가 있는 뒤뜰에 가려면 현관을 나와 계단을 올라가는 구조다. 

자유와 집, 왠지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그는 집을 통해서 자유를 다시 한번 이야기한다. 애초에 그의 고향집 방문은 3박4일 정도의 여행으로 시작했다. 그러다 고향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하루 이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의 손때가 묻기 시작하면서 학소도는 독특한 공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학소도를 사람들의 온기와 다양한 식물, 그리고 스토리로 채워 나갔다. 

인왕산 자락의 ‘살롱’ 역할

그가 학소도에 초대한 사람은 지난 23년 동안 2000여 명이 훌쩍 넘는다. 스포츠,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방면의 사람들이 방문하면서 독특한 공간으로 변했다. 2002 한일월드컵을 보러 온 국제축구연맹(FIFA) 관계자들과 함께 맥주 한잔과 함께 경기를 보는 야외 펍(pub)이 되기도 했고, 성악을 전공한 이의 깜짝 공연이 벌어진 야외 공연장이 되기도 했다. 독특한 이들의 방문이 이어지면서 시시때때로 주변을 둘러싼 아파트 단지 사람들이 베란다에서 그 집의 독특한 행사를 보는 경우도 있다. 멋진 공연에는 저 멀리 아파트 베란다에 있던 주민들이 박수와 ‘앙코르’로 화답하기도 했다고 한다. 집으로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사라져 갈 때 그는 오히려 집으로 사람을 초대하는 횟수를 늘리고 있다. “인왕산 자락의 ‘살롱’은 파편화되어 가는 기억들을, 잔 조작으로 잠시 존재하다 사라져가는 추억들을, 지인들과 함께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나의 이상이자 작은 소망이다”라고 그 이유를 밝힌다. 

그가 학소도에 온기를 넣으면서 그곳은 1년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자연의 공간이 됐다. 3월에는 영춘화·복수초·크로커스·산수유·매화·수선화가 봄의 시작을 알리면서 겨우내 잠들어 있던 뒤뜰은 화려한 꽃들의 향연이 시작된다. 4월에는 목련·개나리·앵두·살구 등이 활짝 꽃을 피우고 살구나무·매화나무·보리수 열매로 술을 담그는 시기다. 한여름 이곳을 절정으로 만드는 것은 수국·산수국·목수국·능소화·무궁화·해바라기 등이다. 휴식기로 접어드는 가을 학소도는 국화 천지다. 앞뜰과 뒤뜰에 달린 감을 학소도를 방문한 사람들과 함께 따고, 그것을 안주 삼아 축배를 드는 시기다. 그리고 학소도는 하얀 눈밭에 포근하게 덮혀 겨울잠을 드는 공간으로 침묵에 들어간다. 사계절의 변화를 뚜렷하게 볼 수 있는 자연의 공간인 셈이다.

그는 그렇게 자연과 사람의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기록했다. 그 기록의 결과물이 이 책이고, 얼마 전 ‘국제탐정 K 달의 두 얼굴’이라는 장편소설을 내게 한 힘이다. 전 세계를 여행하며 고군분투하는 국제탐정 K의 여정을 담은 소설로 그가 국내외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흔적이 나온다. 

여전히 학소도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많은 이야깃거리가 채워지고 있다. 또한 그의 손길에 따라 다양한 식물과 과수나무가 학소도를 지키고 있다. 

“대학 강의실에서, 지구촌 여행길에서, 또 내가 이제껏 만난 사람들에게서 배우지 못한 것을 고향은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세계적 대도시 서울 도심에 있는 작은 섬, 학소도를 나에게 선물해 주었다. 이곳에서 자연을 소개해 주었고, 나는 자연을 통해 정직한 사랑을 배우고 있다”라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는 20여 년 동안 지켜온 학소도를 잠시 떠나는 해외여행을 준비 중이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집이 있기에 그는 그렇게 훌쩍 떠날 수 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설립 두 달 만에 네이버 ‘픽’…스탠퍼드 출신 창업자의 AI 비전은?

2차바이오텍, 신주 발행 등 748억원 수혈…“재생의료·CDMO 투자”

3알바생이 ‘급구’로 직접 뽑는 ‘착한가게’

4“삼성이 하면 역시 다르네”…진출 1년 만에 OLED 모니터 시장 제패

5 ‘여자친구 살해’ 20대 의대생 구속영장 발부

6‘네이버 색채’ 지우는 라인야후…이사진서 한국인 빼고 ‘기술 독립’ 선언

7NCT드림이 이끈 SM 1Q 실적…멀티 프로덕션 구축에 수익성은 악화

8삼성메디슨, 프랑스 AI 스타트업 ‘소니오’ 품는다…“우수 인력 확보”

9데일리펀딩, SaaS 내재화해 지속 성장 거버넌스 구축…흑자 전환 시동

실시간 뉴스

1설립 두 달 만에 네이버 ‘픽’…스탠퍼드 출신 창업자의 AI 비전은?

2차바이오텍, 신주 발행 등 748억원 수혈…“재생의료·CDMO 투자”

3알바생이 ‘급구’로 직접 뽑는 ‘착한가게’

4“삼성이 하면 역시 다르네”…진출 1년 만에 OLED 모니터 시장 제패

5 ‘여자친구 살해’ 20대 의대생 구속영장 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