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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소비시장 살아나나 -"안팎으로 불안 …내 지갑 못연다"

[진단]소비시장 살아나나 -"안팎으로 불안 …내 지갑 못연다"

한국 경제는 이제 ‘한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예전에는 물가와 성장률, 수출과 내수시장 방어라는 두 마리 또는 세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고심했다. 이제 정부는 더 이상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대신 한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예전보다 몇 배 더 고민해야 한다. 한 마리 토끼가 바로 내수(內需)다. 한국은행 앞에 ‘건전한 소비는 경제를 살립니다’는 현수막을 내걸고,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재정지출 확대와 내수 확대를 주문할 정도다. 가뜩이나 침체국면이던 세계경기가 미국 테러사건으로 꽁꽁 얼어붙자 내수 외에는 대안이 없어진 셈이다. 수출은 몇 달째 내리막길이다. 문제는 앞으로 얼마나 더 깜깜한 터널을 지나야 할 지 모른다는 점이다. 테러전쟁으로 미국 경제가 좀처럼 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 경제의 영양제와 같은 수출에 더 이상 매달릴 수 없다. 하지만 내수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돈 쓰는 것처럼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만은 막상 쓰라고 하니 쓸 돈도, 쓸 마음도 없는 게 문제다. 60년대 경제 개발 이후 줄곧 근검절약과 수출, 고성장의 환경에서만 지내온 한국 경제에게 저 성장에 따른 소비확대 정책은 낯설 수밖에 없다. 대만이나 싱가포르처럼 마이너스 성장도 아닌 상황인데도 소비심리는 꽁꽁 얼어붙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정문건 전무는 “2% 성장은 일반인들에게 실제로 마이너스 성장처럼 느껴질 수 있다. 외환위기 때를 제외하곤 거의 매년 7% 내외의 성장을 했던 기억이 저성장을 마이너스 성장처럼 느끼게 한다”고 지적했다. 빨리 달리던 자동차가 갑자기 속력을 줄이면 상대적으로 더 느리게 느껴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정부도 재빨리 대응했다. 재정확대정책과 저금리 정책도 동시에 펴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이런 내수 진작 정책을 일단 바람직한 방향으로 보고 있다. LG경제연구원의 김성식 박사는 “금리는 더 내릴 여지가 있고, 재정적자도 GDP 대비 2% 이상 가져갈 수 있다. 위기 때는 좀더 탄력적으로 정책을 운용해 정부가 급격한 경기침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정부의 재정확대 정책이나 내수 진작책이 서서히 효과를 보고 있다. 건설경기가 살아나고 있고, 서비스 경기도 상대적으로 좋은 편이다. 세계 경기의 동반침체에 비교하면 이 정도라도 유지하는 것은 ‘괜찮은 성적’이라는 게 민간연구소들의 평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소비심리가 살아나기 위해선 시간이 좀더 걸릴 것 같다. 연말로 접어들면서 감원 태풍이 다시 불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정부의 소비진작책이 서민이나 봉급 생활자들의 호주머니를 열기에는 역부족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여전한 상황에서 정책 몇 개로 소비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긴 힘들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최숙희 연구위원은 “소비자들이 앞으로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예측하는 ‘미래형편지수’가 3분기에 이어 4분기에도 내림세를 유지하고 있다. 적어도 경기 회복이 예상되는 내년 하반기까지는 소비 심리가 살아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음은 소비현장의 대표적 지표들.

자동차 대표적인 경기지표인 승용차 판매가 감소하고 있다. 올 들어 꾸준히 내수판매가 감소하던 승용차는 지난달 중대형 승용차와 고급 차종인 SUV(다목적 차량)의 판매량 증대에 힘입어 잠깐 반짝했었다. 하지만 지난달에는 내수판매가 다시 9월보다 3.7% 감소한 9만5천3백71대로 집계됐다. 특히 소형차는 전월대비 0.7%, 중형차는 전월대비13.5% 감소한 반면 대형차는 6%가량 늘어난 8천1백66대가 판매됐다. 경차는 지난달과 비슷한 수준을 나타냈다. 반면 수입차 판매는 지난해에 비해 두 배 가까이 증가한 8천6백7대에 이를 것으로 한국자동차공업협회는 내다봤다.

보약 경동시장에 집중 분포돼 있는 한약상·한의원들은 지난해보다 20% 이상, 2년 전인 99년보다는 40% 이상 매출이 줄었다고 울상이었다. 특히 한약의 성수기인 9, 10월에도 여름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해 차가워진 경기를 실감하고 있다. 경동시장의 10개 도매상이 설립한 전자상거래업체 e-KDM의 오경석 사장은 “한약재의 특성상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 않지만 2년 전에 비해선 절반 정도밖에 손님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보통 여름이 지나 9월, 10월이 되면 연중 가장 손님이 많은데 올해는 여름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한숨을 쉬었다. 실제로 경동시장에서 10년 간 한약재 도매상을 해온 고려한약유통공사의 경우 지난해 10월에는 매출이 1억5천이 채 안돼 지난해 같은 기간 2억원에 비해 25% 이상 감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소매 손님도 줄었다. 18년째 한의원을 하고 있는 진주당한의원의 김진수 원장은 “조제약 손님은 있어도 보약손님은 거의 없다. 원래 경기가 없으면 보약손님이 없어진다”고 시중 경기를 진단했다.

백화점 백화점은 소비불황의 예외지역이다. 롯데백화점의 경우 3분기 매출액이 기존 12개 점포에서 1조3천5백억원을 기록해 지난해 1조2천3백억보다 10%나 성장했다. 시장의 극심한 불황에 비춰본다면 소비가 양극화되는 현상이다. 롯데백화점의 한 관계자는 “꼭 사야되는 것은 백화점에 와서 사는 손님들이 많다. 소비 경향이 고급화되는 추세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백화점의 매출도 좀더 자세히 보면 다른 결론이 나온다. 롯데백화점 본점 아울렛 매장에 해당하는 멀티캐주얼 층(6층)은 지난해보다 63.3%나 매출이 증가한 반면 명품· 잡화·화장품 등 고가품이 많고, 필수품이 아닌 1층 매장의 매출은 지난해에 비해 15% 증가하는 데 그쳤다. 백화점 내에서도 소비의 양극화가 나타나는 셈이다. 백화점을 찾긴 하지만 실속파 구매가 늘어나는 것은 소비 경기가 그리 좋지 않다는 뜻이다.

동대문 시장 동대문 시장도 불황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시장상인들은 “지난해에 절반 정도밖에 못판다”고 하소연했다. 장사가 안돼 철시(撤市)하는 상인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백화점들의 가을 세일 매출이 20% 정도 늘어나고, 할인점도 소폭이나마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동대문에서 여성복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한수연씨(33)는 “IMF 직후 호황을 누렸던 것과 달리 요즘에는 손님이 절반으로 뚝 줄었다. 가게세도 내기 어려운 형편”이라고 했다. 한씨의 가게는 지난 10월 달에 약 1천4백만원이 약간 넘는 정도의 매출을 올렸다. 지난달보다 당연히 줄었다. 9월에는 추석 대목 때문에 반짝 경기가 있었다. 지난해 이맘때 2천만원과 비교하면 큰 폭으로 떨어진 수치다. 국내 손님만 준 것이 아니다. 보따리상들도 크게 줄었다. 테러때문이다. 우리나라 사정에 어두운 외국인 보따리상들에게 주문대행, 업소소개, 통역 등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된 동대문 외국인 구매안내소를 찾은 외국 보따리상은 지난 9월 5백8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8백32명)보다 30.3% 줄었다. 특히 이 기간 중 일본인 보따리상의 방문 횟수는 1백15건으로 전년 동기(1백98명)보다 42.1%나 급감했다. 이에 따라 이 안내소에서 외국 보따리상들에게 지원한 실적은 9월 한 달 동안 8천8백25만원에 불과 지난해 같은 기간 1억6천1백만원 대비 절반 수준에 그쳤다.

과일 배·사과·귤 등 주요 과일 값도 소비부진으로 폭락하고 있다. 특히 배값은 이달 초에 비해 도매 가격이 60% 이상 하락한 것으로 조사됐다. 10월25일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에 따르면 배 특품 값은 15kg 한 상자에 2만3천원으로 지난 10월12일 5만원의 40%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과(후지)는 특품 15kg 한 상자가 4만원으로 9월달보다 1∼2만원 떨어졌다. 감귤도 이날 5kg 한 상자에 1만5천원으로 거래돼 1주 전에 비해 20%가량 값이 떨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가락동 농협 공판장 강남규 과장은 “추석 이후에 포도를 제외한 배와 사과, 감귤, 단감 등 거의 모든 과일에 대한 소비가 감소하면서 과일값이 가파른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고 했다. 추석대목이 지나자 손님들이 크게 줄었다는 것. 특히 “배는 9월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해 일부 소매점은 트럭에 싣고 나가 떨이로 팔고 있다”고 말했다.

주류 주류 업계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3분기 들면서 경기가 차츰 나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소주업계 대표적 제품인 진로의 ‘참眞이슬露’의 경우 지난 여름 연중 최저치로 떨어졌다가 가을이 되면서 차츰 판매가 회복되고 있다. 하지만 소주업체의 매출이 늘어나는 것은 경기가 나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서민들의 술인 소주는 경기와 역관계에 있다. 벌이가 나아지면 대부분 맥주나 양주 등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소주의 소비가 줄고, 경기가 나빠지면 소주의 소비가 늘기 마련이다. 여의도에서 포장마차를 운영하는 박순원씨는 “올 들어 포장마차에 손님들이 많이 늘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퇴근시간 전후에만 자리가 찼는데 요즘에는 10시 넘어서도 손님이 있다”고 했다. 2차로 고급 술집 가는 대신 포장마차로 오는 게 아니겠는냐는 것이다. 하지만 고급 술의 소비도 꾸준히 늘고 있다. 올해 양주 소비는 IMF 직전 수준과 비슷해 질 것으로 보인다. 경기가 안 좋아도 고급 술에 대한 수요는 꾸준하다는 것이 주류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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