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기업들, 연말연초 돈줄 불안감 확산
금리 또는 이자율은 곧 ‘돈 값’이다. 돈 값은 경제의 체온이기도 하다. 금리의 오르내림을 통해 우리경제와 자금사정을 한꺼번에 읽을 수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지금 느낄 수 있는 우리 경제 체온은 점차 따뜻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돈에 대한 수요가 늘면 당연히 더 많은 이자를 부담하기 마련이다. 물론 우리 경제가 따뜻해지고 있는지 여부는 장담키 어렵다. 이런 금리를 결정하는 채권시장이 요즘 올 한해 동안 누렸던 예상 밖 평온을 깨고 긴장감 속에 빠져 있다. ‘미 아프간 카불장악’과 ‘정부의 특소세 인하’라는 안팎의 소식이 전해진 지난 14일 채권시장은 투매사태를 빚었다. 미국의 카불장악 직후 보복전쟁 조기종결 기대감 고조→주가상승→금리폭등→경기회복 조기 가시화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채권값이 폭락(금리 폭등)했다. 시중은행 채권운용 관계자는 “갑자기 채권에 대한 매력이 뚝 떨어지면서 ‘보유=짐’으로 여겨지고 있는 분위기로 바뀌었다”고 심정을 드러냈다. ‘주식은 위험하고 그래도 안전한 채권으로 돈을 벌어야겠다’는 은행 채권운용자들은 줄고 있다. 채권시장이 어느 때보다도 경기와 유동성·투자심리에 민감해졌다. ‘저금리-저주가’ 행렬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도 뚜렷하다. 이래저래 채권시장을 떠나려는 자금이 늘면서 금리가 오르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채권시장을 걱정하는 이유는 금리가 곧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는 기업의 금융비용을 증대시키고 추가로 자금을 조달하는데 어려움을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지난 10여년 동안 ‘채권시장 선진화’라는 구호만 되풀이할 뿐 ‘땜질 처방’에 급급함으로써 불안이 잠복돼 있는 상태다. 채권시장의 체질은 약하기 짝이 없다. 올 들어서도 특정한 기관투자가가 금리를 주물럭거리거나 자그만 충격과 재료에 따라 투매와 투기가 반복돼왔다. 지난 4월 이후 회사채시장은 순발행 기조로 전환되면서 6월과 7월에만 5조원이 넘는 회사채가 순증 발행됐으나 8월 이후 기업자금 공급원으로서의 기능을 잃기 시작했다. 8월에 이어 9월에도 1조8천억원이 넘는 회사채가 순상환되었고 시장 정상화의 척도로 여겨지는 최저 투자적격등급인 BBB등급 회사채의 발행 역시 크게 위축되고 있다. 채권시장에서 회사채가 외면당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전체 채권거래액에서 회사채가 차지하는 비중이 올해 중반 15%를 기록한 후 지속적으로 하락, 9월에는 7%까지 떨어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국채는 거래액 비중이 8월에 44%까지 상승하며 투자자들의 집중적인 매수 대상이 되었다. 회사채를 기피하고 국채를 선호한 배경은 안전자산에 대한 선호(flight to quality) 현상과 거래가 쉬운 자산에 대한 선호(flight to liquidity) 현상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국고채 대비 AA-등급 회사채의 신용스프레드는 1.1%포인트에서 1.6%포인트 이상으로 확대됐고 BBB-등급 회사채의 경우에도 5.3%포인트에서 5.7%포인트로 커졌다. 최근 금리급등의 배경엔 시중자금은 단기화되는데 비해 중장기 채권을 늘린 데 따른 불안감이 분출했다는 분석도 뒤따른다. 금리는 작년 말 6.7%에서 현재 5% 중반으로 내려앉았다. 2월 말부터 약 1개월 동안 5.6%∼6.0%의 범위에서 등락하던 국고채금리는 3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6%대로 진입한 뒤 5월 들어 하향 추세로 반전했다. 한은이 7월과 8월에 각각 0.25%포인트씩 콜금리를 인하한데 이어 9월19일 0.5%포인트를 추가로 내렸다. 당장 걱정되는 대목은 회사채 만기가 집중된 연말 연초 채권시장이다. 작년 이맘때도 같은 상황이었다. 물론 기우로 그쳤지만 신용경색 우려는 어김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정부와 채권담당자들은 ‘예고된 위험은 없다’며 느긋해 하지만 기업들의 사정은 다르다. 행여 신용경색으로 자금을 조달할 길이 막히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고 있다. 신용등급 A급 미만 회사채는 거래마저 뚝 끊어지면서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런 불안한 행보는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김범중 대우증권 리서치센터 선임연구원은 “은행을 비롯한 기관들이 환금성이 용이한 국고채를 주로 매매함으로써 신용등급 문제 이전에 회사채 거래가 제약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더구나 경기회복이 앞당겨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지면서 회사채 기피현상은 더욱 심화되지 않을까 우려되고 있다. 당분간 채권시장 전망은 잿빛이다. 올해 말부터 내년 1분기까지가 가장 어려운 시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11월과 12월 중 회사채 만기도래분은 12조9천억원 규모에 달한다. 이 중 채권시장에서 발행이 원활한 A급 이상 회사채 만기도래액은 4조9천억원에 불과하다. 이어 내년 1분기에 만기도래 예정인 회사채는 11조6천억원 규모지만 역시 A급 이상 등급 회사채는 2조4천억원밖에 되지 않는다. 더욱이 대규모 투기등급 채권의 소화에 도움을 주던 회사채 신속인수 제도의 존속시한이 올해로 종료된데다 연말을 앞두고 은행권이 BIS비율을 높이기 위해 자금을 소극적으로 운용할 경우 어려움을 가중될 게 뻔하다. 올해 회사채신속인수 방식으로 발행됐던 1년짜리 회사채를 비롯한 투기등급 채권 소화를 위해 발행한 20조원 규모의 P-CBO도 내년엔 만기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무엇보다도 신용등급 BBB+급 이하 채권의 소화가 가장 큰 문제다. 삼성전자나 SK텔레콤 등은 국고채 수준으로 이미 많은 자금을 확보해둔 만큼 시중자금 사정악화는 거리가 멀다. 비우량기업에게만 ‘싸늘한 겨울’로 여겨지고 있는 셈이다. 자금의 빈익빈 부익부는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한계기업들의 차환발행은 자력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비우량기업으로선 프라이머리 CBO(채권담보부증권) 발행이 유일한 비상구다. 정부는 이런 처방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신용보증기금 등에 3천억원 정도의 출연 후 신용보강이 필요한 기업에 대해 신용보증 후 프라이머리 CBO발행을 늘린다는 방침이다. 단기적으로 실세금리의 선도지표로 여겨지고 있는 국고채 3년물 금리는 5.5∼5.7%선 안팎에서 움직일 전망이다. 은행에 돈을 맡기기보다 채권을 사두는 게 낫다는 심리가 가세하면서 채권값 폭락에 제동을 걸 것으로 보인다. 내년엔 연평균 금리가 상반기 중 5.9% 전후로 현 수준보다 다소 낮게 형성한 뒤 하반기부터는 점차 상승하여 6.4%대에서 움직일 것이라는 게 금융연구원의 전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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