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과 실언이냐 … '아슬아슬'
‘소신 발언이냐, 실언이냐’ 신국환 산업자원부 장관이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반도체 사이의 전략적 제휴 등 업계의 협력을 강조, 파문이 일고 있다. 지난 20일 아침 서울 메리어트 호텔에는 이윤우 삼성전자 사장, 박종섭 하이닉스반도체 사장, 김이환 아남반도체 부사장, 한신혁 동부전자 사장 등 내로라 하는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날 이곳에서 신장관이 한국 반도체산업협회 회원사 대표들과의 조찬 간담회를 소집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간담회 모두발언을 통해 반도체 수출의 중요성을 언급하다가 돌연 “일류기업인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전략적 제휴를 하면 반도체 산업이 우리 성장을 견인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순 좌중이 술렁거리더니 신장관이 던진 발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놓고 해석이 분분한 모습이었다. 신 장관은 간담회 직후 자신의 발언이 던진 파장 때문인지 “제휴라는 말의 뜻은 채산성 있는 수출을 위해 긴밀하게 협력하자는 뜻이지 구조조정과는 무관한 얘기”라고 다시 설명했다. 산자부 관계자들도 기자들에게 “장관이 전략적 제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이는 업계의 공동협력을 강조한 일종의 ‘표현’으로 이해해 달라”고 거듭 해명에 나섰다. 해명자료를 통해 “신장관의 말뜻은 메모리 분야에서 삼성과 하이닉스가 협력해 0.07㎛기술과 12인치 웨이퍼장비 등 나노급 공정기술 개발을 추진하고 국내 업계의 협력 아래 장비·재료의 국산화를 추진해 달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도체협회 회장인 이윤우 삼성전자 사장은 간담회 직후 기자들에게 “이후 비공개로 열린 간담회에서 (인수와 같은) 제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면서 “국내 업체와의 제휴는 현재까지 어떠한 논의도 없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도 이날 공식적으로 하이닉스반도체와의 전략적 제휴를 계획하고 있지 않다고 부인하고 나섰다. 그러나 시장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관련 기업들의 주가가 출렁거리는가 하면 외신들은 일제히 한국 정부가 하이닉스반도체와 삼성전자의 제휴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함으로써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대한 하이닉스반도체 매각 가능성이 날로 희박해지고 있다고 타전했다. 다우존스 통신은 “하이닉스가 자력생존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 뒤부터는 하이닉스의 장래에 대해 더욱 큰 불확실성이 더해지고 있다”며 “삼성은 부채에 짓눌려 있는 하이닉스에 개입되지 않기를 원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신장관의 발언은 하이닉스의 독자생존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부가 모종의 프로젝트를 벌이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으로까지 이어졌다. 장관 취임 전 하이닉스 구조조정특위 위원장으로 재직한 두 달 내내 그가 견지해온 지론이 ‘자력갱생’이었다는 점에서 앞으로 독자적인 정상화 쪽으로 방향을 굳힐 가능성이 높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의 발언은 그동안 심중에 품고 있는 소신을 강조한 것이지 실수로 나온 표현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최근 마이크론과의 협상이 교착상태에 머물고 있고 D램값이 다시금 상승세를 타고 있는 점도 독자 정상화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마이크론과 하이닉스와의 협상이 결렬될 경우 독자생존론은 부각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신장관의 발언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신장관은 그동안 사석에서 “파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는 입장을 누누히 피력해온데다 기자들과 만나서도 독자적인 정상화를 시사하는 발언을 자주 하곤 했다. 반도체 전문가들 사이에는, 이같은 주장과 관련해 삼성전자와의 전략적 제휴 방안을 대안으로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채권단은 신장관의 언급에 대해 “마이크론테크놀로지와의 매각협상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더라도 두 업체간 제휴는 매우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이닉스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 관계자는 “세계 반도체 D램시장 1위업체인 삼성전자가 선언적인 의미에서라도 ‘협력’ 방침을 밝힐 경우 하이닉스는 매각협상은 물론 향후 독자생존을 택할 경우에도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하이닉스 구조조정 작업과 실질적인 매각협상의 열쇠를 채권단이 쥐고 있는 만큼 정부의 역할은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신장관의 발언이 신중치 못했다는 비판도 많다. 산자부가 그간 빅딜을 비롯한 여러 중요 산업 정책을 주도해 오는 과정에서 논란이 적지 않았다는 점에서 산자부 장관으로서의 직접적 개입이 또다른 시비를 낳을 소지도 있다는 것이다. 설사 협상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압력성 발언이었다 할지라도 협상 중인 사안에 대해 주무부처 장관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지적이다. 신장관은 3∼6공에 걸쳐 옛 상공부의 수출과장과 최장수 상역국장(5년 10개월)을 지낸 수출 전문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박태준 전 총리와 이한동 총리의 대표적인 인맥으로 자민련 입당 후 세 차례나 고향인 문경·예천에서 출마했다가 거푸 고배를 마셨지만, 뚝심 있고 보스 기질이 강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수출 1백억 달러·1천억 달러 계획을 입안하는 등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는 일요일에도 밤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일하는 스타일로, 다시 장관으로 온다고 하자 산자부에 비상이 걸렸을 정도다. 그는 장관 취임 직후 “자신의 재기용은 수출과 실물경제의 구조조정을 끝내라는 뜻으로 안다”며 “하이닉스 구조조정에 대해서도 산자부가 적절한 역할을 하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하이닉스 구조조정특위 위원장을 맡을 당시 자민련을 탈당하며 정치와 연을 끊은 그는 앞으로 구조조정의 전도사가 될 것임을 자임한 바 있다. 강한 추진력의 소유자인 그가 산업 주무부처의 장으로 재등장하면서 갖가지 화제를 낳고 있다. 신장관은 하이닉스 발언 파문이 있은 지 하루 뒤인 21일에는 무역업계 대표자들과 간담회를 통해 “업계간 협력 강화를 통해 제값 받는 수출이 될 수 있도록 행정력을 집중하겠다”며 “올 수출은 당초 전망(7.5% 증가)보다 높은 10% 내외의 신장세가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무역업체들에 대해서도 “지난해 수출 물량은 늘었지만 과당 경쟁으로 수출단가가 떨어져 실적이 좋지 않았다”며 “이는 우리 기업간 상호협력 부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채산성 있는 수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 일류상품 1백개를 선정, 집중 육성하겠다는 아이디어도 이같은 신념에서 나왔다. 산자부는 지난 23일 초코파이·김·비단잉어·홍채인식 보안 시스템·무세제 세탁 시스템 등 1백개 상품이 세계 일류상품으로 선정됐고, 이들 제품을 생산한 회사에 대해서 병역특례요원 배정을 늘리는 등 각종 지원을 펼치기로 했다. 하지만 무역보조금이나 각종 지원에 대한 시비가 끊이지 않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 수출드라이브 시대 ‘전가의 보도’인 전폭적 지원정책이 또다른 불씨를 낳을 수도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연일 화제를 낳고 있는 신장관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펼칠지 주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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