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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人시대 종로에서 은행·보험과 한판대결

野人시대 종로에서 은행·보험과 한판대결

황영기 사장
주요 메이저 증권사 중 유일하게 삼성증권만 여의도에 있질 않다. 사옥을 새로 옮기면서도 삼성증권은 종로타워를 선택했다. 이번에도 한국의 월스트리트로 불리는 여의도가 아닌 종로를 택한 것이다. 한국증권거래소에 등록된 증권사 수는 모두 52개로 국내 증권사 37개와 외국계 증권사 15개가 있다. 삼성과 함께 정상을 다투는 대형 증권사들부터 중소형 증권사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국내 증권사들은 본사를 여의도에 두고 있다. 반면 투자은행(Investment Banking) 업무를 주로 하는 외국계 중에는 여의도에 본사를 둔 회사가 하나도 없다. 삼성증권은 종로행의 이유를 외국계 증권사들과 투자은행 업무에서 한판 승부를 벌이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주식약정 수수료에 의존하는 국내 증권업 관행에서 벗어나 투자은행 업무와 고객자산 관리라는 본연의 업무로 외국계 메이저들과 정면으로 승부하겠다는 것.

자본금 2백억으로 투자금융업 시작 21세기 들어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삼성증권은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별 볼일 없는 중소 증권사에 불과했다. 일반인들에게 이름조차 생소했던 증권사가 10년 만에 국내 최고를 넘어 외국계 공룡들과 일전을 불사하겠다고 나설 만큼 커버린 원인은 무엇일까? 삼성증권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삼성증권의 모태는 1982년 9월 설립된 한일투자금융이다. 자본금 2백억원 규모로 단기금융업으로 시작, 87년 공개시장 증권매출 업무까지 영역을 넓혔다. 88년 기업공개를 하고, 90년 증권업 전환을 결의했다. 91년 국제증권이란 이름으로 증권업을 시작했으며, 지금은 해체된 한일그룹을 새로운 주인으로 맞았다. 하지만 국제증권이란 이름도 한일그룹의 울타리도 오래가지 않았다. 92년 삼성그룹이 증권업에 뛰어들면서 국제증권을 인수했다. 재계 수위를 다투던 삼성이, 특히 금융분야에서 강점이 있는 거대그룹이 새 주인이 되면서 증권업계 판도 변화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삼성증권은 94년 자본금을 6백억원으로 늘리고, 회사채 지급보증 업무 경영인가를 받는 등 대형 종합증권사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95년에는 도쿄·홍콩·뉴욕에 사무소를 개설하고, 이듬해에는 런던에 현지법인까지 세우며 당시 유행하던 세계경영에 나섰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다 97년 가을, 외환위기를 겪으며 우리나라는 IMF(국제통화기금) 체제로 들어간다. 경제 국치일이라며 전 국민이 통곡하고, 금모으기 운동에 결혼 예물로 가져온 금반지와 돌반지를 은행으로 들고 가던 시절이었다. 삼성증권의 모기업인 삼성그룹도 삼성자동차 문제 등으로 휘청거릴 정도였다. 위기는 기회의 또 다른 이름이란 말이 삼성그룹과 증권에게 그대로 적용됐다. 90년대 말 불안해 보이던 삼성그룹은 어느새 맞수가 없는 국내 최대 그룹으로 입지를 굳히고 있고, 삼성증권은 2000년 중순부터 업계 수위를 달리고 있다. 금리가 20% 이상으로 치솟고, 종합주가지수가 300포인트를 깨는 등 불안한 상황에서 DJ정부가 들어선 98년, 삼성증권은 두 차례 유상증자를 실시하며 자본금을 1천7백38억원으로 늘렸다. 이해 국내 최초로 뮤추얼펀드 판매를 개시했다. 이때부터 살로먼브라더스 등에서 일한 임기영 전무 등 투자은행 업무 전문인력을 대거 영입했다. 현재 삼성증권의 투자은행 부문 인력은 총 80명이며, 이 중 22명이 해외 유명대학 MBA(경영학석사)학위를 갖고 있다. 99년 30년 가까이 업계 수위를 유지하던 대우증권의 모그룹인 대우그룹이 무너졌다. 한보·기아에 이어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가 다시 한번 무너졌다. 철저한 선단식 경영행태를 유지하던 한국적 현실에서 대우증권의 최고 신화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현대증권이 ‘바이코리아’ 펀드 열풍을 일으키며 부상했다. 하지만 2000년 들어 증시가 한풀 꺾였고, 설상가상으로 현대그룹이 왕자의 난에 휩싸인다.

퍼스트 삼성시대의 개막 2000년은 삼성그룹과 삼성증권에 있어 모두 의미있는 한해다. 오랜 경쟁자였던 현대그룹이 조각나며 부동의 재계 수위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신화를 재현하며 사상 초유의 당기순이익을 기록하는 등 여타 재벌그룹들을 압도했다. 한국증시의 공룡이 돼버린 삼성전자뿐 아니라 삼성증권·삼성화재·삼성전기·삼성SDI 등 계열사들이 우량기업의 대표주자들로 각광받았다. 이해 5월부터 선두로 나서기 시작한 삼성증권은 올해 11월까지 약정에서 줄곧 1위를 지키고 있다. 몇몇 기업들이 한두달 역전시킨 사례도 있지만 지속되지는 못했다. 이해 말 삼성투자신탁증권을 흡수합병한다. 당시 시장 반응은 삼성투자신탁증권의 부실을 떠안게 됐다며 부정적인 견해도 만만치 않았지만 삼성증권의 1위 수성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지난 2001년 6월, 황영기 현 사장이 취임했다. 황사장은 취임 이후 줄곧 약정 위주의 경쟁보다는 고객 수익우선의 정도경영을 하겠다고 표방했다. 지난 4일에는 내년 1월1일부터 직원평가에서 약정을 제외시키는 파격적인 영업직제 개편안을 밝혔다. 사실상 증권사의 핵심 직종인 브로커(영업) 직제를 폐지한다는 의미다. 이날 증권가에서는 황사장의 이 개편안에 대한 찬반양론이 갈렸다. 배현기 동원증권 수석연구원은 “투입에 대한 수익을 계산해 보면 약정에서 돈을 벌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며 앞으로 더욱 그럴 것”이라며 시장점유율에 연연해할 필요가 없다고 단언했다. 미래에셋증권은 4일 오후 “미래에셋증권은 창업 이후 일관되게 종합자산관리를 추진해 왔다”며 선진 증권사 이미지 심기에 발빠르게 나서기도 했다. 반면 한 증권사 관계자는 직원은 “일단은 부럽다”면서 “금융상품자산이 20조원 되는 업계 1위 회사만이 할 수 있는 쇼맨십”이라고 폄하했다. 다른 소형 증권사 직원 역시 “삼성증권의 경우 계열사 자금이 많기 때문에 가능할 수도 있다”면서도 “전에도 삼성증권이 매매수수료보다는 자산증식이나 유치로 직원을 평정한다고 했다가 잘 안 돼 타 증권사의 영업직원을 영입해 방향을 바꾼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약정수익 52%, 새 체제 성공할까? 당장 삼성증권은 내년 1월1일부터 새로운 도전에 직면한다. 비록 다른 증권사들에 비해 적은 비율이라고 하지만 주식약정 수수료는 전체 수익의 52%에 이른다. 지난달에도 삼성증권은 12조9천3백44억원(9.29%)을 기록, 12조3천5백55억원(8.87%)의 약정을 올린 LG투자증권을 큰 차이로 앞섰다. 내년부터 새로운 영업체제가 가동되면 약정수수료 수익 감소는 불가피하다. 이 부분을 종합자산관리 업무와 기업금융 업무에서 만회한다는 게 삼성증권의 전략이다. 황사장은 종합자산관리 업무에서는 은행을, 기업금융 업무에서는 외국계를 경쟁자로 설정해 놓고 있다. 황사장은 “기업공개 M&A(인수·합병) 정부지분매각 해외DR(주식예탁증서)발행 등 투자은행 업무가 활기를 띠고 있다”며 “올 들어 맡은 관련 업무 규모가 총 9조6천억원대에 달한다”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마스트플랜이 나온 시점에 삼성증권은 외국계 증권사들과 기업금융 부분에서 정면승부를 외치며 종로타워로 이사를 했다. 종로타워는 일제시대 조선 주먹계의 황제였던 김두한의 주 활동무대다. 삼성증권은 김두한이 일본 주먹들에 맞서던 이곳에서 외국계 증권사들과 기업금융 부분 등에서 정면승부를 벌이겠다고 밝혔다. 다소 신파적 홍보성 멘트지만 기업금융과 종합자산관리 업무 부문의 역량을 강화해 선진 증권사로 도약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재계 1위의 모그룹으로부터의 전폭적 지원과 업계 1위로서의 명성, 20조원이 넘는 예탁자산 등 삼성증권은 여타 국내 증권사들에 비해 선진국형 증권사로 도약하기에 유리한 조건이다. 하지만 개인 비중이 유난히 높고, 높은 약정수수료 의존율, 막대한 자본과 노하우의 외국계 증권사들과의 경쟁 등을 헤쳐나가기가 쉽지만은 않은 게 현실이다. 황사장은 “증권영업직을 2세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직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이 말이 일부 비판적 증시관계자들의 지적처럼 ‘가진 자의 쇼맨십’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당장 내년부터 닥칠 약정수수료 감소부터 헤쳐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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