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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의 큐빅 맞추기

CJ의 큐빅 맞추기

설탕부터 영화까지, 식품에서 홈쇼핑까지 종횡무진하던 CJ가 구조조정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재현 회장은 ‘선택과 집중’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 수 있을까.
1953년 이병철 삼성 회장은 제지, 제약, 제당 중 어느 곳에 투자할까를 놓고 고심했다. 이 회장의 선택은 종이도, 약도 아니었다. 바로 설탕이었다. CJ의 전신인 제일제당은 그렇게 출발했다. 50년이 지난 지금 이 회장의 장손인 이재현(41) CJ 회장은 다시 사업 포트폴리오를 짜느라 고심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대와는 문제의 난이도가 다르다. 선택만 있는 ‘퍼즐’이 아니라 선택을 위해 포기가 따르는 ‘큐빅’을 맞춰야 한다. 그동안 CJ는 너무 많은 일을 벌여왔다. 그런 탓에 벌여놓은 서로 다른 사업들의 색깔을 맞추는 게 만만치 않다.

93년 삼성그룹에서 분리된 후 CJ의 사업구조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화무쌍했다. 전통적인 식품사업과는 거리가 먼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홈쇼핑 ·생명공학 등에까지 뛰어들었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변화를 시도한 만큼 시행착오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최근 2~3년 간 진행된 일련의 분사와 매각은 결과가 좋든 나쁘든 CJ의 파란만장한 행보를 말해준다.

CJ는 95년 스티븐 스필버그, 제프리 카젠버그 등이 설립한 벤처 영화제작사 드림웍스에 3억달러를 투자하면서 2대 주주가 됐다. 주위의 반응처럼 그건 설탕회사가 벌인 도박이었다. 당시 협상테이블까지 동행했던 CJ의 한 관계자는 “이재현 회장은 ‘동양인 경영자는 보수적’이라는 선입관을 깨기 위해 청바지를 입고 피자집에서 스필버그를 만나 딜을 성사시켰다”며 “식품회사의 한계를 뛰어넘어 엔터테인먼트 사업에도 진출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보여준 사건이었다”고 말한다. 8년이 지나도록 CJ는 드림웍스로부터 이렇다할 배당을 받지는 못했지만, 처음부터 CJ가 노렸던 건 배당이 아니었다.

이 회장은 드림웍스에서 못 이룬 꿈을 CJ엔터테인먼트에서 실현하려고 했다. 투자자란 유리한 배경으로 드림웍스의 아시아 지역 배급권을 따냈고, 국내 영화에 투자한 끝에 국내 영화산업계 선두 기업으로 키워냈다. 하지만 사업초기 CJ는 영화 배급사나 영화제작 투자사로 인식되지 않아 인력 수급과 영화 배급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경영진의 판단은 빨랐지만 냉정했다. ‘살아남으면 키운다’며 2000년 분사를 결정했다.

당시 대표이사로 내정된 이강복(51) 사장은 “30년간 설탕으로 못 만드는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영화사업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당시의 막막함을 피력한다. 그러나 등 흥행작이 쏟아지면서 사업의 돌파구를 찾았다. 같은 기간 삼성, LG 등은 무리한 투자로 막대한 손실을 입고 철수했지만 CJ는 대기업이 하면 실패한다는 징크스를 깼다.

CJ푸드빌 역시 분사를 통해 강력한 사업으로 키운 케이스다. 전신인 CJ 외식사업부는 설탕에서 식품으로 발전한 사업이 식품서비스로 커진 결과였다. 그러나 예측보다 외식산업의 성장속도는 빨랐고, 내부에서 키우기엔 부담이 컸다. 당시 외식사업부에 근무했던 한 직원은 “식품을 만드는 일과 식품을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식당을 운영하는 것은 언뜻 보면 연관성이 있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일”이라고 말한다.

산업분류에서 각각 제조업과 서비스업에 속하는 별개의 사업이란 걸 경영진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서비스 질을 높여 경쟁력을 키운다는 전략으로 분사를 택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분사 당시 410억원이던 매출이 2년 만인 지난해 770억원으로 두배 수준으로 뛰었다. CJ푸드시스템 역시 기존의 식자재업체와 분사된 급식업체가 통합해 시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분사 당시 2,706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 7,557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2000년 CJ가 2,300억원이라는 거액을 주고 39쇼핑을 인수했을 때 주위에선 다시 ‘설탕회사의 모험’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당시만해도 홈쇼핑은 열악한 시스템으로 소비자로부터 외면받고 있었다. CJ 내부에서도 소비자들이 직접 만져보지 않고 화면을 통해 구매할지를 놓고 논쟁이 붙었다.

인수 직후엔 39쇼핑 직원들과 CJ에서 온 간부들 사이에 심심찮게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당시 프리랜서 쇼호스트로 CJ39쇼핑(현 CJ홈쇼핑)에 출연했던 김모씨는 “상품기획과 마케팅전략 수립과정에서 기존 직원들과 CJ에서 온 간부들 사이에 상당한 의견대립이 있었다”며 “백화점 등 유통 쪽에 노하우가 있는 LG가 홈쇼핑사업을 하는 것과 식품회사가 홈쇼핑을 경영하는 것은 다르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경영진은 39쇼핑 출신 직원들의 전문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시간이 흐른 뒤에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재 홈쇼핑은 CJ의 캐시카우(현금창출원) 중 하나가 됐다. 지난해 매출 1조4,272억원에 당기순이익 447억원을 올렸다. 하지만 아직까지 CJ홈쇼핑은 업계에서 완전하게 CJ의 계열사로 뿌리를 내리지는 못한 것 같다. 항간에 홈쇼핑 매각설까지 나돌고 있는 것도 이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에 대해 CJ 관계자는 “CJ홈쇼핑에 대한 소문이 무성하지만 무엇 때문에 잘 나가는 회사를 매각하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CJ홈쇼핑(CJ 보유지분 30%)을 롯데에 매각한다는 소문은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했다.

94년 시작한 슈퍼마켓용 화장품 브랜드 ‘식물나라’는 적자 때문에 CJ 경영진들의 골칫거리였다. 저가 화장품으로 틈새를 공략한다고 했지만 패션과 연계되는 화장품은 먹어서 없어지는 식품과는 달랐다. 한 대형 화장품업체 임원은 “당시 CJ는 단가 10,000원 미만인 식품을 대량으로 파는 능력은 있었지만 화장품은 싸다고 무조건 잘 팔리는 게 아니다”고 꼬집었다. 결국 화장품 사업부는 2001년 4월 CJ엔프라니로 분사했다. 분사 후 고품질 프리미엄 화장품 브랜드로 전략을 수정해 차츰 시장점유율을 높여 나갔지만 흑자로 전환되던 지난해 7월 한국주철관공업에 매각됐다. 핵심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흑자전환 중인 회사를 팔아야 하는 경영진의 고뇌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드림라인은 CJ 최대의 실패작이다. 97년 CJ는 한국도로공사 등과 컨소시엄으로 드림라인의 전신인 제일고속통신을 설립한 뒤 지분을 늘려 경영권을 확보했다. 당시 경영진은 “e비즈니스를 포함한 정보통신과 엔터테인먼트 ·미디어분야에서 큰 시너지 효과를 내겠다”고 자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초고속 통신망 사업은 그들의 장밋빛 환상을 보장해주지 못했다.

천문학적인 투자비가 필요했고 선점 업체와의 치열한 경쟁이 경영악화를 불러와 적자 규모만 1,000억원에 달했다. 급기야 모기업인 CJ에 큰 부담을 주는 상황에까지 이르자 경영진은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했다. 2001년 말 하나로통신에 드림라인 보유주식을 395억원에 매각하고 초고속 통신망 사업에서 손을 뗀 것이다. 드림라인 매각으로 CJ는 위기를 모면했지만 일각에선 ‘재벌 3세의 문어발식 확장이 가져온 결과’라는 반갑지 않은 평가가 쏟아졌다.

지난해 제일선물 매각에 이어 CJ는 지금 자회사인 제일투자증권을 매각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현금장사를 오래 한 덕에 투신사를 인수하긴 했지만 식품회사가 끌고 가기엔 역부족인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2001년 푸르덴셜 금융과 IFC(국제금융공사)와 합작하는 데 성공하고도 안정적 운영을 장담하지 못해 결국 매각을 결정한 것이다. CJ측은“제일투자증권 보유지분 매각을 위해 푸르덴셜과의 협상을 진행하는 한편 한화증권을 포함한 국내외 투자자들과도 접촉 중”이라고 했지만 현재로선 결과가 불투명하다. CJ측은 제일투자증권을 인수한 것이 외환위기 당시 정부가 배당한 대우채권 탓이라고 말하지만, 결과적으론 대기업이 금융업에 뛰어들어 실패한 셈이다.

이밖에도 CJ는 최근까지 ‘Only One’(선택과 집중을 의미)이란 슬로건을 걸고 사업부문 매각 ·분사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실시해야만 했다. 2000년 무역부문의 CJ코퍼레이션은 흡수 합병됐고, 2개 레스토랑과 25개 단체급식 점포를 없애고 생수사업도 접었다. 2001년 ‘게토레이’ 등을 생산해 온 음료사업부문을 롯데칠성음료에 매각했다. 주력사업군을 잡아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포기였다. 다 끌고 가다간 그나마 50년간 탄탄하게 꾸려온 기존의 식품사업마저 타격을 입을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다.

CJ는 삼성의 실질적인 모태기업이다. CJ는 외국산 설탕의 절반 값에 불과한 설탕으로 단기간에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이 돈은 이후 제일모직과 제일합섬 ·삼성전자 ·삼성생명 등을 설립하거나 인수하는데 필요한 자금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이후 CJ는 58년 제분, 63년 조미료, 79년 식용유, 80년 육가공 등 80년대 초까지 식품분야에서 사업영역을 확대해 왔다. 이들 소재식품은 상대적으로 경기를 덜 탄 덕에 CJ는 지난 48년 동안 우량기업 대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84년 조미료생산에서 축적한 발효기술로 제약업에 뛰어든 것을 시작으로 90년엔 생활화학사업에 진출했고, 94년엔 외식 ·단체급식 시장에 진출해 명실공히 종합식품회사가 됐다. 보유한 식품 종류만 10,000가지가 넘는다. 그러나 삼성 계열의 식품회사라는 고정된 이미지는 CJ 성장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손경식(64) 회장이 93년 CJ의 부회장으로 부임한 이후 삼성에서 계열분리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삼성그룹에서 떨어져 나온 CJ는 덩치를 키우고 식품회사의 이미지를 벗기 위해 사업다각화에 열을 올렸다. 분리 10년만에 기업 규모가 3.6배로 커진 것이 이를 반영한다.

사업군도 도저히 식품회사라고 규정짓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외식사업 ·엔터테인먼트 ·홈쇼핑 ·증권사등 이질적인 부문들로 짜깁기 됐다. CJ의 한 직원은 “입사 후 처음 받는 교육 중 하나가 10,000가지가 넘는 CJ 제품을 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경영진은 ‘미래 생활문화형 기업’임을 지향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이처럼 포괄적인 타이틀도 없다. 현재 CJ와 비슷한 출발점을 가진 국내 소재식품 회사들이 아직도 자기 업종에서 한 우물을 파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재현 회장은 지금 퍼즐맞추기에 한창이다. 퍼즐은 동시에 모든 면을 맞출 수 없다. 최근 2년 새 이 회장은 아깝지만 버릴 것은 버리고 팔 것은 팔아야 하는 구조조정의 쓴 맛을 봐야 했다. 대신 가능성을 보이는 분야에 과감히 투자해 핵심부문을 키우는데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기초체력은 다져진 상태다. CJ는 지난해 매출 2조2,705억원, 경상이익 1,524억원을 올렸다.

저수익 사업부문을 구조조정하고 경쟁력이 없는 부문을 매각하거나 분사해 전년대비 1.7% 줄었지만 경상이익은 110.5%나 증가했다. 올해는 매출을 지난해 대비 5.8% 증가한 2조4,019억원, 순이익은 58.9% 늘어난 1,703억원으로 잡았다. 재무구조도 현격하게 개선됐다. 외환위기 직전 233%였던 부채비율은 지난해말 103%로 낮아졌다. 적자 사업을 접고 영등포공장 부지 일부와 삼성전자 주식 등 유가증권을 매각한 결과다.

이제 CJ의 사업 퍼즐은 4대 사업군으로 압축된다. 식품 ·식품서비스,생명공학,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신유통이 바로 그것이다. 우선 식품 ·식품서비스 부문은 CJ의 모체인 만큼 더욱 내실을 다질 계획이다. 설탕 ·밀가루 ·식용유 ·조미료 ·육가공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계속 유지하며 이 소재식품에서 다양한 가공식품으로 영역을 넓혀간다는 전략이다.

국 ·밥 ·김치 등 한국인의 기본 주식을 상품화하는 작업도 병행할 계획이다. 지난해부터 해외진출용으로 개발한 식품 브랜드 ‘CJ구르메’(Gourmet)를 들고 해외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식품서비스 부문에선 CJ푸드빌이 운영중인 페밀리 레스토랑 ‘스카이락’ ‘빕스’ 등을 계속 확장할 계획이다. CJ푸드시스템의 단체급식과 식자재 부문을 확대할 참이다.

생명공학 분야에서는 고부가가치 세계 2위의 생산량을 확보한 바이오 제품인 라이신, 스레오닌(동물 성장촉진제) 등을 톱브랜드로 키우기로 했다. 제약기술과 접목해 인삼의약품 ·천연물질 ·환경처리제 등을 개발하는데 투자를 집중키로 했다. 수출규모도 계속 늘릴 방침이다. 미디어 ·엔터테인먼트부문은 CJ엔터테인먼트를 통해 영화 투자와 배급에 이어 현재 멀티플렉스극장 사업(브랜드명:CJ CGV)을 확대, 2005년까지 전국에 극장 체인망을 구축해 250개의 스크린을 확보할 계획이다. 신유통 부문에선 CJ홈쇼핑갅J몰, CJ GLS 등 무점포 유통부문에 투자를 확대할 계획이다.

이런 4대 사업군을 중심으로 기존의 내수기반의 한계를 뛰어넘겠다고 나섰다. 현재 해외 사업을 위한 전진기지 구축에 열을 올리고 있다. 햇반과 김치장류를 미국과 일본 ·중국에출시했다. 이어 인도네시아에 라이신과 스레오닌 MSG 핵산사료와 종계 공장을 세웠다. 필리핀 ·미얀마 ·중국 ·미국에도 사료와 식품 생산기지를 두고 있다. 원료의약품의 수출선도 일본 등 선진국으로 다변화하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부문에선 영화 <무사> 등을 일본과 홍콩에서 상영했다.

최근 10년은 CJ가 식품회사의 틀을 깨기 위해 사업다각화를 실험하면서 단맛과 쓴맛을 모두 느낀 시기였다.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제법 순발력 있는 판단으로 조직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손경식 CJ 회장은 “지난해 4대 핵심사업군을 중심으로 사업별 포트폴리오를 구축했다면 올해는 사업역량을 집중하고 뿌리를 내리는 첫해가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CJ는 큐빅을 성공적으로 맞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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