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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 지배력’에 대대적 메스

‘오너 지배력’에 대대적 메스

검찰이 SK그룹에 대해 강도높은 수사를 벌이고 있다. 재벌에 대한 정부의 공세가 시작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다. 앞으로 노무현 정부는 재벌의 오너 중심 지배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다각적인 정책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을 불과 1주일여 앞둔 2월 17일 검찰이 전격적으로 SK그룹의 헤드쿼터인 구조조정본부와 SK글로벌 등 계열사를 압수 수색했다. 동시에 SK의 핵심중 핵심인물인 김창근 구조조정본부장(사장)과 임원들을 검찰이 줄줄이 소환해 조사했다. 검찰의 SK수사는 처음부터 최태원 회장을 사법처리하는데 맞춰져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재계는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새 정부가 재벌개혁에 '속도'를 내기 위해 검찰을 앞세운 게 아닌가 하는 우려였다. 실제로 검찰은 "다른 그룹에도 수사를 확대할 수 있다"는 의중을 밝혔다.
시민단체의 고발에 따라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는 발표가 맞다면, 형식논리로 볼때 시민단체로 부터 고발당한 삼성, LG, 한화 등도 수사를 받아야 한다. 또 비슷한 의혹이 있다고 비판받은 현대자동차와 두산 등도 '칼날'을 맞게 될 가능성이 있다.

새 정부의 '재벌 길들이기'가 시작된 것이 아닌가라고 우려할 이유는 여럿 있다. 우선 구조조정본부에 대한 전격적인 압수수색이다. 구조조정본부는 그룹의 사령탑으로 그룹 각 계열사들의 재무겭獰?등 온갖 정보가 전부 모여있는 곳이다. 심지어 오너의 개인 재산이나 재테크 관련 비밀도 구조조정본부를 ‘털면’대부분 알 수 있다.
이뿐 아니다. 그룹의 향후 사업 추진방향과 구조조정의 전개과정도 알 수 있다.

가령 어느 회사를 살 때와 계열사를 매각할 때의 온갖 비밀도 구조조정본부에서 다 나온다. 이번 대선때 정치자금을 줬다면, 그 비밀도 구조조정본부 수사에서 충분히 파악될 수 있다. 이 때문에 구조조정본부장은 어느 기업을 막론하고, 또 언제나 오너가 가장 신임하는 사람만이 앉는 최측근의 자리다. 그런 구조조정본부장도 검찰이 소환 조사했다. 검찰이 과거 정치자금을 수사할 때 구조조정본부장을 소환 조사한 적은 있지만, 이번처럼 오너의 주식 부당내부거래나 계열사의 이면계약 등이 문제가 돼 구조조정본부장이 소환된 적은 거의 없었다.

둘째, 부당내부거래나 이면계약등의 문제로 검찰이 막바로 나선 적은 없었다. 지금까진 공정거래위원회나 금융감독원 등이 먼저 조사하고, 사안이 중대하다고 판단돼 검찰에 고발할 경우에만 검찰이 나섰다. 그러나 이번처럼 참여연대가 검찰에 고발한 사건을 검찰이 접수해 막바로 수사에 나선 것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케이스다.

또 SK증권과 미국의 거대 투자은행인 JP 모건 체이스의 이면계약 문제는 지난 연말 금융감독원이 조사해 과징금과 기관경고를 부과함으로써 종결시킨 사건이다. 금감원이 검찰에 고발하지 않은 사건을 참여연대가 지난 1월8일 고발했다 해서 검찰이 수사에 착수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검찰 발표에 따르면 이 수사 과정에서 부당내부거래 혐의를 포착해 수사를 확대했다고 한다. 그동안 부당내부거래는 언제나 공정위가 먼저 조사하고, 혐의가 클 경우에만 검찰에 고발해왔다는 점에서 이 역시 이례적이다.

쭦재벌과 대기업 구분론=사실 재계는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 재벌정책이 상당히 강성 기조를 띨 것으로 예상했었다. 노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 전국경제인연합회를 직접 거명하면서 “사실을 왜곡하거나 오도하고 있다”며 비판한 바 있다. 출자총액규제나 집단소송제 도입, 상속 및 증여세의 완전 포괄주의 도입 등 세 가지 재벌개혁정책은 흥정의 대상이 아니며, (반발을)정면돌파할 것이라고 명확히 말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20일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로 확정된 날, 노 당선자가 첫 기자회견에서 “재벌과 대기업은 분명히 다르다”며 확고하게 선을 그을 때부터 이런 기조는 예상됐던 바다. 재계 역시 마찬가지 인식이었다. 삼성 이건희, LG 구본무, 현대자동차 정몽구, 효성 조석래 회장 등 전경련 회장 후보로 거론된 기업인들이 모두 고사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으로 풀이된다. 2월 7일 전경련 회장이 된 SK 손길승 회장도 처음엔 회장직 제의를 강하게 거절했었다. 이와 관련, 재계 관계자들은 공연히 재계 수장이 돼 새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지 않겠다는 의사가 반영됐을 것이라고 분석했었다.

노 대통령의 재벌정책은 단순히 출자총액제한 규제 강화 등에 머무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재벌 규제들과 향후 도입될 재벌정책들은 ‘재벌과 대기업 구분론’에 따라 재검토되거나 정리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경제분과 인수위원도 “당선자의 이 코멘트는 평소 내가 가졌던 생각이며, 인수위에서 깊이 논의할 계획”이라고 뒷받침한 바 있다. 재벌 정책의 철학이 ‘구분론’이란 얘기다. 그러면 새 정부아래서 없어지거나 도입될 재벌규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이를 위해 재벌과 대기업이 왜 다른 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경제학에선 재벌을 ‘한 가족이 소유와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는, 다각화된 거대기업의 집단’이라고 정의한다. 즉 재벌은 ▶대기업 그룹 ▶여러 업종을 동시에 경영 ▶가족 지배등 세 가지 특징이 한 곳에 뒤섞인 개념이다. 이 중에서도 마지막 특징인 가족 지배가 가장 핵심이다.
미국의 제너럴 일렉트릭(GE)을 보자. GE캐피털 등 여러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다루는 사업도 100가지를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GE를 재벌이라고 하지 않는다. 거대복합기업(콩글로머리트, Conglomerate)이라고 할 뿐이다. 특정인 또는 가족이 소유하지 않아서다.

일본의 미쓰이(三井) ·미쓰비시 三菱) 그룹 등도 재벌이라고 하지 않는다. 은행과 중공업겭齪?등 수많은 대기업들이 똑같이 ‘미쓰이’ ‘미쓰비시’란 상호를 쓰고, 한달에 한번씩 각 계열사 사장들이 모여 이른바 ‘사장단 모임’을 한다. 그래도 이들을 두고 기업집단 또는 계열이라고 할 뿐이다. 오너가 없어서다.
스위스에 본사를 두고 있는 ABB그룹은 미국의 GE나 독일 지멘스와 나란히 세계 3대 중전기업체중 하나인 거대기업이다. 자회사만도 1,400여 개나 되는 그룹형태다. 게다가 스웨덴의 유서 깊은 가문인 발렌베리(Wallenberg)가(家) 가 대주주다. 그래도 ABB를 재벌이라 부르지 않는다. 소유는 하되 경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재벌의 핵심은 가족의 소유 및 경영지배권이다. 일본의 유명한 재벌 연구가인 교토(京都)대 시모타니(下谷政弘)교수가 “재벌을 재벌답게 하는 유일한 특징은 가족의 폐쇄적인 소유경영 지배에 있다”고 정의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대기업은 재벌이 아니다. GE나 미쓰이갂BB등은 대기업이다. 여러 업종을 영위하고, 자회사가 많더라도 그룹일 뿐이다. 소액주주 운동의 대부인 고려대 장하성 교수는 얼마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GE도, 소니도, 삼성도 모두 대기업이지만 삼성은 재벌”이라고 말했다. 그는 “재벌은 한국에만 있는 그룹 형태의 기업이고, 사전에 재벌이란 이름으로 등록돼 있다”고 덧붙였다.

적확한 표현이다. 다만 한가지,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의 거대기업 대부분은 재벌이므로 한국에만 있는 기업형태라는 주장은 잘못 됐다. 규모가 크기 때문에 대기업이란 점에서 ‘독점’부분만 빼면 부정적 의미도 없다. 게다가 기술이든, 경영이든 다른 기업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해왔기 때문에 경쟁에서 이겼고, 그 결과 대기업이 됐다는 긍정적 의미도 때론 곁들여진다.

쭦새로 도입될 정책, 없어질 정책=이렇게 보면 재벌과 대기업이 서로 다른 첫번째 차이는 오너의 지배력이다. 황제경영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따라서 오너의 황제경영을 견제하고 감시할 이른바 지배구조 관련 장치들이 강화되거나 신설될 것이다. 증권분야의 집단소송제는 오너와 그룹을 감시하는 장치중 ‘백미(白眉)’이므로 아무리 재계가 반대해도 도입될 것이 확실하다. 변호사들의 수입만 늘려주고, 기업들이 망할 가능성이 높아지며, 이미 비슷한 효력을 발휘할 장치가 마련돼 있다고 해도 집단소송제만큼 확실히 견제할 수 있는 장치는 그리 많지 않아서다.

또 국민연금 등 각종 연기금들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수 만큼 기업경영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도 아직은 검토단계지만 새 정부에서 반드시 도입될 것이다. 이를 통해 오너를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액주주들이 사외이사 등을 선임할 수 있도록 하는 집중투표제도 도입될 것이다.
오너의 소유지배력을 완화하기 위해 상속 및 증여세의 완전포괄주의도 도입될 것이다. 불법은 아니지만 편법 상속을 통한 소유지배권의 세습을 억제하기 위해서다.

두번째 차이는 ‘그룹’이므로 그룹체제를 약화시킬 재벌정책들이 도입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신호탄이 ‘계열사의 분리 명령제 또는 청구제’다. 노 대통령의 공약에는 금융계열사로 제한돼 있다. 즉, 계열 금융사가 그룹내 다른 계열사를 부당하게 지원할 경우 정부가 그룹에서의 분리를 법원에 청구하거나 그룹에 명령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게 도입돼 어느 정도 정착하면 금융 ·제조등을 가리지 않고 계열 분리를 시킬 것으로 보인다.

이미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의 용역을 받아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작업한 공정거래법의 개정 방향에 이 내용이 들어가 있다. 금융계열사 분리 청구제 등은 미국 등 선진국의 기업분할이란 개념과 전혀 다르다. 기업분할은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기업의 분할이다. 엑슨 모빌의 전신인 스탠더드 오일은 1910년대 정유업에서 지나치게 독점적 사업자로 되자 각 지역별로 회사를 쪼갰다.

AT&T는 장거리 ·근거리 통신등 사업을 분할하고 지역별로도 쪼갰다. 그래서 같은 통신업을 놓고 분할된 기업들끼리 서로 경쟁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계열분리는 ‘경쟁 촉진’개념이 아니다. 가령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을 분리하고, LG화학과 LG증권을 분리한다고 해서 전자산업이나 화학업종의 경쟁이 촉진되는 것은 아니다. 결국 ‘분리 청구제’는 그룹을 해체하기 위한 한 수단이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노 대통령이 흥정대상이 아니라고 얘기한 출자총액제한 규제는 크게 강화되지 않을 듯싶다. 계열사끼리 서로 빚보증을 서주는 채무보증금지나 계열사끼리 돌아가며 출자하는 순환출자 억제 등도 새 정부에선 재검토될 것으로 보인다. 계열분리 청구제가 도입되면 출자를 크게 규제할 필요가 없고, 현실적으로 투자 억제등 부작용이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16년 전인 1987년부터 도입된 이들 출자관련 규제는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는 데 큰 도움이 돼지 않았다. 규제의 실효성이 없었다는 얘기다. 법규로 보면 재벌의 지배구조를 다루는 상법이나 증권거래법은 강화될 것이고, 경쟁정책과 재벌규제정책이 혼합돼 있는 공정거래법은 ‘경쟁촉진법’으로 다시 태어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같은 제도적 장치들이 대부분 입법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재벌과 새 정부, 정치권의 공방이 끝없이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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