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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카에다 용의자와의 학창 시절 을 회고한다

알 카에다 용의자와의 학창 시절 을 회고한다


School Days With a Qaeda Suspect

모아잠 베그는 키가 작고 허약해서 반에서도 눈에 띌 정도였다. 물론 그는 재빠르게 달릴 수 있었기에 괴롭힘을 당하지도 않았고 밝고 환한 미소 때문에 친구도 많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뭔가 어색하고 고리타분한 면이 있었다. 어쩌면 줄무늬 바지와 통굽신발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엄마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던 그의 어두운 모습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우리 또래들이 탐정 드라마 ‘스타스키와 허치’나 영화 ‘스타워즈’에 대해 열을 올리던 때 그는 매우 진지했다. 가까운 한 친구는 그가 종교에 관해 매우 격렬한 토론을 벌였던 사실을 기억했다. 베그는 자비심을 높게 평가하는 이슬람교가 다른 종교들보다 우월하다고 말했다. 열살짜리 소년이 한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가 눈에 띄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는 유대인 학교에 다니는 이슬람교 신자 학생이었던 것이다.

베그는 결국 이슬람교의 ‘자비심’ 때문에 현재 쿠바의 관타나모 베이에 억류돼 있다. 그는 캠프 델타에 있는 6백80명의 알 카에다 대원 용의자들 중 군사 재판을 앞두고 있는 여섯명 가운데 한명이다. 급우들 중 몇몇은 나중에 이스라엘이나 미국으로 이민을 갔지만 베그는 9·11 테러가 있기 직전 아내와 세 자녀를 데리고 탈레반 통치하의 아프가니스탄으로 갔다. 친지들은 그가 그곳에서 가난한 이슬람 신자들을 돕기 위해 학교를 설립하려고 했던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그가 훨씬 더 사악한 일에 가담했다고 본다.

학교에서 유대교의 가르침을 배우던 베그가 (미국 당국의 말대로라면) 테러리스트 훈련을 받게 된 것은 당황스런 일이다. 은행 간부의 아들로 유대식 교육을 받았던 조용하고 신실한 영국 소년이 어떻게 그처럼 갑자기 이슬람교 과격파가 됐을까? 미국 정가에서는 지금 학교 개혁을 통해 이슬람 세계를 서방의 가치로 변화시켜 테러리즘에 대처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그러나 두 블록을 사이에 두고 베그와 내가 태어나 자랐던 영국 중부 지역에서는 서방의 가치와 현대식 교육이 부족하지 않았다. 내가 베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24년 전이었다. 최근 나는 “베그에게 과연 무엇이 잘못됐던 것일까”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다시 고향을 찾았다.

대다수의 영국인들, 특히 베그의 친지들은 미국을 비난했다. 그들은 베그가 감금돼 있던 18개월 동안 고문을 당해 왔으며 그는 무모한 범인 색출의 희생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뉴스위크는 베그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자선사업을 훨씬 넘어서는 활동을 했다고 자백한 진술서를 확보했다. 미 연방수사국(FBI)의 내부 보고서에 따르면 관타나모 베이에 억류중인 사람들은 폭탄으로 가득찬 무선조종 모형 항공기를 백악관으로 돌진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시인했다. 특히 베그는 테러리스트들이 어떻게 그런 비행기를 만들 수 있었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그의 자백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두 정상은 테러와의 전쟁에서는 의기투합했지만 관타나모 기지에 있는 9명의 영국인들 문제를 놓고서는 입장 차이를 보였다. 영국측은 법치주의를 설파하는 미국이 비밀 재판을 계획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지난달 부시는 백악관을 찾은 블레어에게 “돕고는 싶지만 그들이 풀려나 미국인들을 죽이게 된다면 우리 모두에게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시와 블레어가 베그의 처리 문제를 두고 논란을 벌이고 있는 동안 영국으로 돌아간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배달에 넉달이나 걸리고 검열을 받는 편지를 통해서만 그와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다. 적십자 편지지에 손으로 쓴 베그의 편지는 일상적인 내용부터 끔찍한 것까지 다양하다. 한 편지에는 아내가 해준 음식이 그립다는 대목이 들어 있었지만 지난해 말의 편지에는 “미국이 인류 문명에 가장 크게 공헌한 점은 땅콩 버터를 개발한 것”이라고 비웃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어쩌면 지난해 5월 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야말로 자신의 심경을 가장 솔직하게 담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것은 내가 평생 통과해야 했던 것 가운데 가장 힘든 시험이다. 당신에게 너무 큰 고통을 준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알라의 뜻과 당신의 기도로 이 시험을 통과하겠다”고 그는 적었다.

두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난 베그는 정서적·신체적으로 힘겨운 유년기를 보냈다. 어머니는 그가 여덟살 때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베그는 키가 너무 작아 성장 촉진제를 투여받았다. 1960년대에 파키스탄에서 영국으로 이민온 그의 아버지 아즈마트는 대대로 대영제국의 군에 봉직했던 것을 자랑스러워 했고 아들도 영국 해병대에 지원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베그는 그런 전통을 이어가기엔 너무 허약했다. 계모는 그에게 종종 소시지나 버거 같은 서양 음식을 장만해주곤 했지만 그의 몸은 좀처럼 크지 않았다.

베그가 받은 이슬람 교육은 이따금 동네 할머니와 코란을 읽는 정도였다. 그의 계모는 “그들 가족은 평생 이슬람교 사원에 가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베그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부모들은 버밍엄 근처에 있는 유일한 공립학교인 킹 데이비드 학교로 그를 보냈다. 베그의 아버지는 킹 데이비드가 유대인 학교이긴 하지만 이슬람 문화·규범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아즈마트는 “유대인들은 우리의 형제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같은 가계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베그는 우리가 살던 작은 영국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던 문화적 전환의(???) 선봉에 서 있었다. 어린 시절 베그는 우리반에서 두명밖에 없는 이슬람 신도 학생 중 한명으로 소외당한 아이였지만 성인이 된 후 그는 남아시아인 거주지역에서 정체성을 찾았다. 지금 베그 가족이 살고 있는 동네에 가보면 검은 부르카로 몸을 가린 여성들과 아프간 모자와 전통의상 샬와르 카미즈를 입은 남성들, 그리고 하얀 뜨개질 모자를 쓴 아이들을 볼 수 있다. 현재 이곳에는 남아시아인이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영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남아시아인의 비율이 4%에 불과하다. 한때 인도 음식과 옷을 팔던 상점들이 이제는 이슬람교 서적과 기념품을 팔고 있다. 베그가 아프가니스탄으로 가기 전 서점을 열었던 곳도 이곳 레이디풀가였다. 베그는 수년간 방황했다. 급우들 대다수가 대학을 졸업했을 무렵 그는 뭔가를 찾아헤맸다. 그는 아버지의 구식 영국 전통과 새롭게 목소리를 높이던 아시아적 가치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던 것 같다. 그는 아버지의 부동산 소개소와 식당일을 돕고 나서는 로스쿨에 입학했다가 돌연 자퇴했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몰라도 그는 결혼을 결심했다”고 그의 계모는 말했다.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당시 버밍엄 지역에서 설파되던 과격 이슬람주의였을 가능성이 높다. 1996년 영국에서 창립된 알 무하지룬이라는 민병대 단체는 1996년(???) 전세계에 이슬람 국가들을 세우자는 구호를 내세우고 여러 대학에서 집회를 열었다. 선동자 중 한명은 베그가 다니던 대학의 학생 하산 버트였지만 베그가 그 단체에서 활동했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현재 베그와 함께 억류돼 있는 사람들 중 세명은 그 대학에서 가까운 팁턴 출신이다.

베그가 연 서점 마크타바 알 안사르는 이슬람 용품들을 팔았다. 아내 샐리를 만난 것도 그 서점을 통해서였다. 샐리는 석유 사업으로 돈을 번 팔레스타인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녀도 과격 이슬람주의와 거리가 수녀원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그녀는 베그가 유대인 학교에 다녔다며 그곳에 대해 좋게 말하는 것을 듣고 충격받았다고 말하면서도 당시 남편도 자신이 가톨릭 학교를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다고 말했다.
영국 국내정보국(MI5)은 2000년께 베그의 서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영국 경찰은 테러 소탕작전의 일환으로 그의 가게를 급습했지만 아무런 혐의도 찾지 못해 그를 석방했다. 이 작전으로 급진적인 이슬람계 영국 거주자들 사이에서 베그의 인지도가 높아졌다. 그 사건은 또 그가 영국을 떠난 계기가 됐을지도 모른다. 베그는 자신이 아프가니스탄에 가면 사태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경찰의 기습이 있은 지 1년 뒤 그는 아내와 자식을 데리고 이란으로 갔다가 2001년 7월 아프가니스탄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학교를 열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샐리는 “내가 겁을 냈지만 남편은 그곳에 가면 백만장자처럼 살 수 있다고 계속 나를 설득했다. 나는 진흙 오두막에서나 살게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실제로 대궐 같은 집에서 살았다”고 말했다.

2001년 후반 아프간 전쟁이 시작되자 베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수도 카불에서 차로 한 시간 이상 거리에 있는 남쪽 로가르 지방으로 피신했다. 그때는 정말 끔찍한 진흙 오두막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베그는 카펫을 깔아주고 조리용 곤로를 설치해 주는 등 아내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애썼다. 그러다가 북부동맹군이 카불쪽으로 진주하던 어느날 대형 트럭으로 물품을 운반하던 베그가 사라졌다.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2001년 말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으로 피란했다. 한달 뒤 베그의 가족은 이슬라마바드에서 재회했다. 그곳에서 베그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당장 영국으로 돌아와라. 왜 아내와 아이들까지 데리고 그런 고생을 자처하고 있느냐”고 꾸짖었다. 베그도 동의했지만 “어차피 이곳에 온 이상 해야할 일은 마치고 돌아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2002년 1월 31일 저녁 샐리는 남편에게 넷째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몇시간 후 베그의 아파트에 파키스탄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휴대전화 3대, 노트북 한대와 현금 1만2천달러 정도를 압수했다.
베그의 아버지가 아들이 미군에 잡혀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한달 뒤였다. 가족들은 베그가 영어를 유창하게 하기 때문에 다른 죄수들을 신문하는 데 통역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베그는 관타나모 기지의 수감자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재판을 받는 6명 안에 포함됐다. FBI의 문서에 따르면 베그는 자신이 테러리스트라고 자백했다. 그러나 샐리는 “이 증거는 남편을 구타하거나 굶겨서 얻은 것이 분명하다. 남편이 테러리스트라면 나 역시 테러리스트일 것”이라고 말했다.

나를 비롯한 동창들은 옛 친구 베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우리가 정말 테러리스트가 될 사람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것인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은 영영 못 찾을지 모른다. 어린 시절 우리는 그가 정체성을 찾고 소속감을 가질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 분투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었다. 그런 그에게 이슬람교는 아내와 많은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었고 자금을 지원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앞길까지 제시해 주었다. 베그의 가족은 그가 늘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어했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는 엉뚱한 사람들을 돕게 됐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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