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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 잃은 돈 단기상품만 기웃

갈 곳 잃은 돈 단기상품만 기웃

갈 곳 잃은 시중자금이 단기 고수익 투자처로 쏠리는 단기부동화 현상으로 자금 시장이 고착상태에 빠져 있다. 사진은 지난 10월23일 부동자금이 몰린 경기도 분당의 주상복합 스타파크 청약 현장.
‘갈곳 잃은 돈, 어디로 갈 것인가?’ 시중자금이 계속 단기로만 떠돌고 있다. 정부가 지난 10월29일 부동산종합대책을 내놓은 이후 부동산을 기웃거리던 돈마저 숨을 죽이고 있다. 거액투자가들 중심으로 매수세가 살아 있던 30억∼50억원 규모 상가에 대한 입질도 크게 줄었다. 주식시장은 지난 11월5일 종합주가지수가 800포인트를 넘어섰음에도 객장에서 개인투자가들을 발견하기 어렵다. 과거 개인투자가들이 790∼800포인트대에서 대대적인 매수세에 참가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하지만 단기금융상품인 MMF(머니마켓펀드), 규제에서 비켜 서 있는 일부 주상복합아파트, 공모주 등에는 연일 자금이 몰리고 있다. 지난 3월 SK사태와 카드채 문제 등으로 30조원대로 감소했던 투신권의 MMF 수탁고는 하반기 들어 다시 늘고 있다. 지난 10월 말 현재 50조3백20억원으로 증가해 7개월 만에 다시 50조원을 돌파했다. 내년부터 20가구 이상 주상복합아파트의 분양권 전매를 앞두고 분양한 경기도 분당의 스타파크와 서울 광진구 노유동의 트라팰리스는 각각 71.78대 1, 1백9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많은 투자자가 몰렸다. 주식시장의 장기적 수급에 상관없이 단타로 치고 빠지는 공모주 시장에도 단기자금이 몰리고 있다. 지난 10월29일 마감한 인터넷 기업 지식발전소의 코스닥 등록 공모주 일반 청약에는 3조2백39억원의 자금이 몰렸다. 이는 올 들어 공모주 청약을 한 웹젠(3조3천억원) 다음으로 많은 규모였다. 어느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오르는 전형적인 ‘고무풍선’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ELS 등 주식연계채권 시장만 더 교란 지난해 말 현재 우리나라의 단기부동자금은 모두 6백88조원으로 추정된다. 이 중 개인과 기업들이 6개월 미만의 단기금융상품에 보유하고 있는 자금은 약 4백78조원으로 전체 부동자금의 절반이 넘는다. 시중자금이 이렇게 단기부동화하는 이유에 대해 김일구 굿모닝신한증권 연구위원은 “경제 상황의 불확실성이 가장 큰 이유”라고 말한다. “IMF(국제통화기금) 위기 이후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기업들이 신규 투자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돈은 있는데 투자를 하지 않으니 돈이 단기로 돌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 현상이다.”(김일구 위원) 저금리도 단기부동화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김위원은 “투자자들 입장에선 이렇게 금리가 낮은 상황에서 장기로 투자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저금리로 인해 단기부동화하는 자금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최희갑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도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실질 수익률이 마이너스다. 실질금리가 낮아져 저축할 유인이 현저히 약해진 상태”라고 지적한다. 사실 시중자금의 단기부동화로 시장 교란에 대한 우려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단기자금이 고수익을 찾아다니며 부동산 시장의 과열을 야기하고, 외부 충격에 취약한 모습을 보여왔다. SK글로벌과 카드채 사태는 곧바로 MMF 대량 환매로 이어져 투신사를 유동성 위기에 몰아넣기도 했다. 부동산시장도 마찬가지였다. 주상복합 청약열기 등 단기 투자상품에 시중자금이 급속히 몰려들어 거품을 만들어 놓았다. 그럼 단기부동화를 해소할 해법은 무엇일까? 일단 전문가들은 증시로의 자금유입이 급선무라고 입을 모은다. 10·29대책으로 더 이상 부동산 쪽으로 자금이 흘러들어가기 어려운 상황이니만큼 하루빨리 증시로의 자금 유입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 엄준흠 신영증권 차장은 “증시로 자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단기부동화로 인한 시장 교란은 지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주식투자자금인 주식형 펀드의 수탁고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개인투자자들도 주식을 기피하고 있어 이런 바람은 쉽게 현실화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주식 투자자금인 순수 주식형 펀드 수탁고는 올 6월 말 11조원대에서 최근 9조9천6백50억원으로 줄어들었고, 주식 혼합형도 13조원대로 감소해 투신사 등 기관투자가들의 매입 여력은 갈수록 취약해지고 있다. 한 펀드매니저는 “지속적으로 환매가 일어나면 기관투자가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주식을 내다팔 수밖에 없다”며 “주식을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그나마 돈이 몰리는 곳은 원금보장이 되는 ELS(주가지수연계채권) 상품뿐이다. 지난해 11월부터 은행·증권·투신사에서 판매된 ELS 관련 상품은 약 12조원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증권업계에서는 올해 증시에서 이탈한 약 10조원의 개인자금 중 상당액이 ELS 상품으로 흘러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ELS 관련 상품은 증시의 매수 기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엄준흠 차장은 “ELS는 원금의 이자에 해당 부분을 주가지수선물옵션에 투자하는 상품이라 오히려 주식시장을 더 교란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강세장을 더 강세로 약세장을 더 약세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외국인을 제외하고 주식을 살 수 있는 곳은 연기금밖에 없다. 하지만 연기금의 자산운용은 보수적인 채권에만 쏠리고 있다. 채권시장의 최대 ‘큰손’으로 통하는 국민연금은 지난 10월 말 기준 금융자산 90조원 가운데 무려 83조원(92%)을 채권에 투자하고 있다. 주식비중은 7%에 불과한 실정이다. 사학연금·공무원연금·교원공제회 등 다른 연기금들의 채권투자 비중도 90%대에 달한다. 우량기업들의 충분한 사내 유보금으로 인해 채권을 발행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나마 발행되는 우량채권들을 이들이 싹쓸이해 가는 바람에 채권 품귀현상마저 빚고 있다. 엄준흠 차장은 “매수 여력이 있는 곳은 연기금뿐이다. 이들이 포트폴리오에서 주식 비중을 높여야 시중자금의 단기부동화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기업 투자마인드 활성화 시급 시중 부동자금을 정부 부문으로 흡수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홍순영 삼성경제연구소 상무는 “장기 국공채를 발행하면 국채가 늘어난다. 물론 정부의 재정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문제가 있지만 시장 금리가 올라가 장기투자를 유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고준석 신한은행 PB센터 부동산재테크팀장도 장기 국채를 발행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한다. 고팀장은 “최근 부동산값 상승세의 원인 중 하나는 단기 부동자금”이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해 은행 금리 수준의 장기 국채를 발행하고 여기에 상속세·증여세 면세 혜택을 주면, 부동산값을 잡고 부동자금을 흡수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방법은 단기적 처방일 수밖에 없다. 본질적으로 부동자금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은 ‘경기회복’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일구 연구위원은 “부동자금 문제의 원인이 저금리 때문이냐 아니면 기업들이 투자를 못하고 있는 경제 환경 때문이냐에 따라 처방이 달라질 것”이라며 “금리보다는 오히려 기업들이 투자를 늘리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라고 말한다. 어려울수록 원론에 천착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주식 수요기반을 늘리고 시중자금을 정부 차원으로 흡수하면서 기업들이 투자마인드를 활성화하는 것이 단기부동화를 해소할 수 있는 대안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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