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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재계 지도]대마불사’ 깨지며 삼성만 독주

[달라진 재계 지도]대마불사’ 깨지며 삼성만 독주

1970년대 ‘중화학 공업 육성’, 80년대 ‘산업합리화 조치’, 90년대 ‘외환위기’. 재계가 겪은 대표적인 변곡점들이다. 수십조원의 자산과 매출을 기록하는 재벌은 좀처럼 흔들릴 것 같지 않다. 그렇지만 재계에도 ‘보이지 않는 손’은 존재한다. 영원할 것 같은 재벌도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재계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60년대 대표적 재벌이었던 방직·목재·제분 업체들은 70년대 정부 주도로 중화학공업과 수출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재편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80년 당시 재계 8위에까지 올랐던 국제상사나 60년대 재계 2위까지 올랐던 삼호는 5공화국 당시 산업합리화 조치로 사업을 접어야 했다. 이처럼 때로는 인위적이고 정치적인 변수가 재계를 재편하기도 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재계는 신흥재벌들로 붐볐다. 특히 해외건설과 아파트 건설 등 건설업의 활황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기업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동아·한보·극동건설·삼환기업 등이 모두 중동 건설에서 번 돈으로 재계에 진입한 경우다. 미원·해태·진로 등은 탄탄한 소비재 제품을 기반으로 다각화를 시도했다. 10위권 밖의 그룹들이 공격적 투자를 주도하면서 재계는 가장 역동적인 시절을 보냈다. 일종의 ‘재벌 공급초과’ 상태였던 셈이다. 이런 ‘공급초과’ 상태는 97년 외환위기를 지나면서 해소됐다. 무한확장을 꾀하던 재벌들이 수익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결국 빚더미에 올라앉고 말았던 것. 결국 5대 재벌에 속하던 대우와 재계 순위 10위 안에 있던 쌍용·기아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신화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90년대, ‘재벌 공급효과’ 위기 뒤에 한국의 재계에는 ‘전통의 강호’들이 더욱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한국 최고의 기업 삼성의 독주는 외환위기 후 가장 두드러진 특징. 이범일 삼성경제연구소 경영전략실장은 “이미 93년부터 질(質) 경영을 추구했던 삼성의 진가가 외환위기 뒤 더욱 두드러졌다”고 분석했다. 삼성의 독주로 재계에는 4대 그룹이라는 표현 대신 ‘1대 그룹’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하고 있다. 유한수 포스코 고문은 “앞으로 재계에서 삼성과 다른 기업의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 25%를 차지하고 한국 수출의 20%를 담당하는 삼성의 위상은 어느 때보다 도드라진다. 삼성의 독주는 재계에 ‘수익성 위주 경영’ ‘준비 경영’ ‘글로벌 경영’ 등 여러 가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해 주고 있다. 2000년 ‘왕자의 난’ 이후 2001년 분리 독립한 현대자동차 그룹의 선전도 재계의 지형을 바꾸고 있다. 한국의 대표재벌로 십수년을 군림했던 현대그룹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현대자동차는 분리 뒤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다. 2000년 매출액 35조에서 지난해는 60조로 크게 성장했다. 매출액으로는 재계 3위 수준. LG·SK 등 전통의 강호 역시 재계 2, 3위를 유지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만 이 두 그룹은 최근 각각 카드사 사태와 경영권 위협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향후 향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4대 그룹의 비중이 커진 것도 눈에 띈다. 97년 30대 그룹의 매출 중 4대 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은 58%였던 것에 비해 2003년에는 67%에 이를 정도다. 재계에도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증거다. 위기를 겪으면서 과감한 구조조정이 기업의 장래에 명약이 될 수 있음도 깨달았다. 맥주로 대표되던 두산그룹과 화약 중심의 한화그룹이 중공업과 금융그룹으로 주력 사업을 재편한 것은 외환위기 때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좀처럼 자기 사업을 버리지 못하던 재벌의 관행이 완전히 탈피했다. 공기업 민영화는 재계 판도 변화에서 주요한 변수가 됐다. 한국전력을 비롯 KT·포스코·KT&G 등이 완전 민영화되면서 재계 지도가 바뀌었다. 공기업이 재계 지도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2년 공정거래위원회가 출자총액·상호출자 제한기업에 공기업을 포함하면서부터다.

자산 2조 이상 공기업 11개 92조원대 자산을 보유한 한전은 재계 1위에 오르게 된다. KT·포스코 등도 재계 10위권에 드는 대기업. 특히 이들은 단계적으로 민영화 과정을 걸으면서 하루아침에 ‘재계의 공룡’으로 자리 매김했다. 이밖에 도로공사·주택공사·토지공사·수자원공사·가스공사·농업기반공사·KT&G 등이 상호출자제한을 받는 자산 2조원 이상 대기업으로 분류했다. 여기에 해당하는 49개 그룹 가운데 자그마치 11개가 공기업 혹은 민영화 공기업이다. 이들의 자산 규모는 2백31조원대로 49대 그룹 전체 자산(6백22조원)의 37.1%에 이른다. 민영화 공기업들은 ‘공익성’이라는 당초의 설립 목표가 사라지면서 전방위로 수익성 확보에 나서고 있다. KT가 대표적이다. 민영화되면서 정부 통신정책을 따라야 하는 부담을 벗었으나 경쟁력 확보라는 과제를 부여받은 KT는 온라인게임·전자상거래·건설 등으로 발을 넓히고 있다. 포스코는 중국 진출, KT&G는 바이오 등으로 확장경영을 선포했다. 이들은 또한 자회사가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그룹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샛별’ 등장 어려울 듯 한양·우성·극동·벽산·뉴코아·거평·신호·해태·진로 등 중견그룹들이 공격적인 사업 확대를 통해 30대 재벌로 진입했던 90년대와 달리 2003년에는 샛별이 거의 없다는 것도 특징. 신세계·CJ·한솔 등 삼성에서 분가한 그룹이 30대 그룹에 진입해 있고, 현대차를 비롯, 현대중공업·현대·현대백화점·현대산업개발·KCC 등 범현대가 기업들도 30대 그룹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이외에도 대우조선과 GM대우자동차 역시 20위권에 포진해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이실장은 “국내 경기가 좋지 않고,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대기업의 노하우와 인적자원이 더욱 힘을 발휘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신규 기업이 재계에 진입하기 어려운 여건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한국 경제가 세계에 시장을 열어놓고 있어 이제 단순히 국내 기업끼리의 경쟁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 외국 자본이 매입한 한국 기업의 총자산이 36조에 이를 정도로 외국 기업의 참여가 활발해진 상태다. 한국 내에서도 글로벌 경쟁이 이뤄지고 있다. 한국 경제 자체가 70·80년대처럼 역동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기업가들에겐 악재다. 연 8%씩 성장했던 황금기에는 돈 벌 기회도 그만큼 많았지만 지난해처럼 경제성장률이 2.9%에 머무를 경우 현상 유지하기도 어렵다. 이규억 아주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제 30대 재벌 중 해외를 바라보지 않으면 위상이 점점 축소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도 효성·코오롱·동국제강 등 몇몇 기업은 수년째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직은’ 전통산업인 화학과 철강으로 한우물을 파고 있기 때문. 한편으로는 답답하리만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들 기업은 그러나 유기EL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 등 신사업을 꾸준히 모색하고 있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미시경제실장은 “갑자기 성장하는 기업은 반드시 무리수가 생긴다”며 “오래된 기업일수록 경영 안정성이 높고, 기업문화가 튼튼해 위험에 대응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분석했다. 부침이 심한 재계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것도 과소평가할 일은 아니다.

[외국자본의 한국 기업 사냥] 6년새 자산 36조… 합치면 재계 5위권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이후 재계 지도를 바꾼 또 다른 변수는 외국계 기업이다. 지난 98년부터 2002년까지 5년간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된 인수·합병(M&A) 자료에 따르면 외국자본이 국내 기업을 M&A한 경우는 6백6건으로 전체(2천9백92건)의 20.2%에 달했다. 금액으로는 26조7천억원대에 이른다. 최근엔 하나로통신이 뉴브리지-AIG 컨소시엄의 외자를 유치하고, 쌍용자동차가 중국계 란싱그룹에 M&A되면서 외국계 기업으로 바뀌었다. 지난해에는 대상의 미니스톱 매각, 한화의 FAG한화베어링 합작지분 매각이 결정됐다. 급기야 소버린자산운용은 1천8백억원대 시드머니를 통해 자산 50조원이 넘는 SK그룹의 지주회사인 SK㈜에 대한 적대적 M&A에 나서 재계를 긴장시키기도 했다. 소주의 대명사’ 진로에 대한 골드먼 삭스의 법정관리 신청 역시 외국계 자본이 던진 파문으로 인식된다. 주식시장에서는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지난달 증권거래소가 발표한 ‘10대 그룹 시가총액 및 외국인 비중 현황’에 따르면 외국인이 갖고 있는 10대 그룹(공기업 제외, 상장기업 기준) 주식의 시가총액은 5월 말 49조1천5백억원에서 12월10일 69조7천6백억원으로 41.9%가 급증했다. 10대 그룹 시가총액에서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44.3%에 달한다. 지난 6년간 M&A를 통해 외국계로 경영권이 넘어간 기업의 총자산은 36조원에 이른다. 이는 공기업을 제외하고 재계 5위권에 해당하는 규모로 현재 5, 6위권인 한진과 롯데의 자산을 모두 더해야 ‘외국계 재벌’과 엇비슷하게 된다. 여기에다 대우조선·대우종합기계같이 굵직한 기업들이 골드만 삭스와 칼라일 등 외국계 투자회사들과 매각협상을 벌이고 있어 외국계의 비중은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승철 전경련 조사본부장은 “M&A 과정에서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 같은 제도적 미비점은 보완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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