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두 남자의 전쟁 이야기

두 남자의 전쟁 이야기


War Stories

존 케리는 군에 입대해 베트남에 가는 문제를 놓고 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예일대 4학년이던 1965~66년 갑자기 확대되는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것인지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예일대의 학생 지도자라면 “신을 위해, 나라를 위해, 그리고 예일을 위해”라는 교가의 한 대목처럼 군복무를 치르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됐다. 최우수 인재들만 가입하는 동아리 ‘스컬 앤드 본즈’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도 복무를 자원했다.

훗날 페더럴 익스프레스의 설립자가 된 프레드 스미스는 해병대에 자원했다. 1차대전의 용장 ‘블랙 잭’ 퍼싱의 손자인 딕 퍼싱도 해병대에 들어갔다. 고뇌에 찬 토론 같은 것은 별로 없었다고 역시 본즈 동아리 회원으로서 케리와 함께 해군에 자원한 데이비드 손은 돌이켰다. “그러나 1968년 같았으면 다른 결정을 내렸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 2년 사이에 상전이 벽해가 됐다.

1968년은 조지 W. 부시가 예일대를 졸업하던 해였다. 그때 이미 예일대 학생들은 방법만 있으면 모두들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했다. 베트남전과 그 전쟁이 낳은 반문화로 인해 예일대는 바뀌었다. 넥타이와 코트 차림의 말쑥한 사립학교 출신들은 장발의 성난 시위대에 밀려났다. 학교에서 여는 무도회 행사도 관심 부족으로 취소됐고, 마리화나가 맥주를 대신했다.

보수적이며 놀기 좋아하는 젊은 부시는 반전운동에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베트남에 가고 싶어한 것도 아니었다. 대학원생을 위한 징집연기 제도는 1968년 봄 폐지됐다. 부시의 눈앞에는 텍사스 주방위군 공군이라는 다른 길이 열렸다. 부시는 1990년 댈러스 모닝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복무를 면제받으려고 일부러 고막을 터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캐나다로 도망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비행기 조종술을 배워 자기계발을 하는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케리와 부시 두 사람은 지난주에도 여전히 베트남전을 치르고 있었다. 케리는 베트남에서 돌아온 뒤 반전운동가로 변신해 ‘하노이 제인’ 폰다와 손잡고 전쟁을 방해한 것 아니냐고 자신을 비난하는 보수 성향의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들의 집중 포화를 방어하느라 바빴다. 백악관은 부시가 주방위군 근무지를 무단 이탈한 것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기자들에게 관련 문서를 보여주느라 바빴다.

이같은 소동들은 대체로 불확실한 사실에 기초한 지엽적 사건들이었다(케리는 사실상 폰다를 만난 적도 없다. 부시는 공백은 있다지만 어쨌든 주방위군 복무를 마친 것 같다). 베트남전 시대는 두 사람의 생애에서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그 뒤 두 사람의 인생항로가 크게 달라진 것은 각자의 출신 가정과 성격, 그리고 각자가 속한 시간과 장소의 작지만 결정적인 차이들이 복잡미묘하게 얽혔기 때문이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예일대 출신의, 그것도 스컬 앤드 본즈 동아리 출신의 두 후보가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격돌하리라는 전망은 매우 흥미롭다. 두 사람 모두 미국의 기준으로 볼 때 대대로 부와 명예를 누려온 명문가 출신이다. 나이와 배경이 흡사한 두 사람(부시는 58세이고 케리는 60세)은 그러나 오늘날 미국을 둘로 갈라놓은 이념적·문화적 갈등의 맞은편에 서 있다. 도시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케리는 청색주(민주당 지지 주)를, 카우보이 억양을 구사하며 동부 엘리트 언론을 경멸하는 부시는 적색주(공화당 지지 주)를 대변한다. 이 두 명문가의 자제가 어쩌다가 그토록 상반되는 세계를 대변하게 됐을까?



권력을 향한 준비

케리와 부시는 내부자의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 순간에는 외부자로 자처했다. 남들로부터 소외됐다는 생각은 두 사람에게 강력한 동기를 부여했다. 특히 케리는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케리는 모계쪽으로 문벌 중의 문벌이라 할 수 있는 윈스롭가를 비롯한 뉴잉글랜드 지방 몇몇 명문가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그는 어린 시절 보스턴 외곽에 있는 윈스롭가 저택의 잔디밭에서 뛰어놀았다. 그의 부친은 다소 초라하고 우울한 성격의 국무부 관리였다. 그의 부모는 유대인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이민오면서 독일식 성 콘을 케리로 바꾸고 종교도 천주교로 바꿨다. 케리의 할아버지는 빚더미에 시달리다가 보스턴의 한 호텔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케리가 자신의 가족사를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몇해 전 보스턴 글로브지 기자들로부터 자세한 내용을 전해 듣고는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어쨌든 1957년 뉴잉글랜드의 사립학교들 중에서도 가장 배타적인 세인트 폴스(뉴햄프셔주 콩코드 소재)에 들어갈 때의 케리는 경직되고 다소 침울한 소년이었다. “그는 원래 조숙했다”고 당시 케리의 유일한 친구였던 대니 바르비에로는 말했다.

뉴욕 롱아일랜드에서 온 이탈리아계 소년 바르비에로나 케리는 모두 세인트 폴스가 체질에 맞지 않았다. 성공회 재단 학교에 다니는 천주교 신자였던 케리는 일요일마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가 미사에 참석했다. 바르비에로는 교목(校牧)의 서재에서 케리와 함께 앉아 “잘나가는 아이들로부터 ‘왕따’당하는 설움”을 털어놓던 시절을 돌이켰다.

케리는 성공 의지를 다졌다. 그가 닮고 싶어했던 위인은 존 F. 케네디였다. 세인트 폴스의 대다수 학생들은 대체로 공화당원인 부모의 영향을 받아 케네디를 아일랜드라는 개천에서 난 용쯤으로 여겼다. 케리는 재클린 케네디의 조카인 재닛 오친클로스와 사귀면서 스릴을 느꼈다. 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62년 여름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뉴포트에서 요트를 함께 타자는 초대를 받고는 더욱 흥분했다. 케리는 이름 머릿글자(JFK)가 케네디와 똑같아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았지만 사실 케네디의 목소리와 억양에다 머리 모양까지 닮고 싶어했다.

1961년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매사추세츠주 앤도버의 필립스 아카데미(사립학교)로 전학온 조지 W. 부시도 역시 외부자였다. 그는 또래들보다 1년 늦게 10학년으로 들어간 데다가 교과과정의 차이 때문에 급우들보다 한단계 더 뒤졌다. 그러나 앤도버는 세인트 폴스보다 민주적인 학교였고, 부시는 당시 앤도버 학생들이 높이 평가한 냉소적 유머감각을 갖고 있었다. 앤도버의 학생들은 모두 별명이 있었는데 부시의 별명은 ‘입술’이었다.

부시는 역시 그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와 운동에 뛰어났던 아버지만큼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꼈다. 부시는 공부와 운동을 모두 잘 못했다. 그러나 시큰둥한 학생들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었다. 2000년 대선 유세기간에 부시는 자신에게 진정한 정치적 재능이 있음을 느꼈던 순간을 회상했다. 앤도버 재학시절 스틱볼(야구와 유사한 경기) 리그 창단을 선포하기 위해 조회시간에 단상에 올라가 각종 농담과 재치로 청중을 사로잡을 때였다. 부시는 교실에서는 장난꾸러기였지만 그때 배운 리더십과 대중 선동법(친구들에게 별명을 붙여주거나 사람들 앞에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사람을 놀리되 도를 넘기지 않는 기술 등)을 통해 훗날 기자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주저하는 갑부와 의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인트 폴스의 동창이자 기숙사 룸메이트가 된 바르비에로와 함께 예일대 입학 첫날 교정을 거닐던 케리의 표정은 매우 심각했다. 케리는 하크니스 종탑 꼭대기의 낙수물받이 조각을 올려다봤다. 그것은 예일대 학생들이 갖춰야 할 자질을 말해주는 상징물이었다. 글 잘 쓰고, 운동 잘하고, 사람 잘 사귀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내용이었다. 케리는 그 네가지를 모두 이루겠다고 선언했다.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퇴임한 개디스 스미스는 예일대 시절의 케리는 ‘캠퍼스 거인’의 전형이었다고 회고했다. 케리는 축구와 하키를 했으며 예일대 정치동맹을 이끌었다. 스컬 앤드 본즈의 입회 권유를 받은 것은 당연했다.

기밀 엄수를 철칙으로 삼던 스컬 앤드 본즈는 미래 지도자의 산실을 표방했으며 그건 공연한 허풍이 아니었다. 당시 이미 그 동아리 출신 두명이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역할을 결정하는 실력자였다. 맥조지 번디 국가안보보좌관과 그의 동생인 빌 번디 국무부 동아시아담당 차관보는 점진적 파병 확대 정책을 추진했다. 케리는 어떻게 하다 보니 그들의 조카인 하비 번디와 룸메이트가 됐다. 빌 번디는 뉴 헤이븐에 올 때 가끔 그들의 기숙사에 들러 함께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빌 번디는 조카와 케리에게 남자의 군복무 의무를 강조했다. 조국이 부른다는 것이었다.

1966년 6월 졸업반 연설에서 케리는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비난하면서도 “그래도 우리는 군복무 의욕을 잃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의 연설이 물의를 빚었다고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케리는 근실하고 책임감 있다는 것이 교수단의 평가였다. 예일대가 만든 ‘남자가 되기 위해’(남녀공학이 되기 3년 전이었다)라는 홍보영화에서는 케리가 한 교수와 함께 ‘헌신’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모습이 나왔다.



전쟁 지대

1964년 예일대에 진학할 무렵 조지 W. 부시는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가장 부담스러웠다. 아버지는 야구팀 주장이자 파이 베타 카파 동아리와 스컬 앤드 본즈의 회장 출신이었다. 돈 많은 석유재벌이었던 부시의 아버지는 그해 가을 랠프 야버러에게 맞서 텍사스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했다가 패했다. 부시는 예일대 교목 윌리엄 슬론 코핀이 자신을 불러 “내가 자네 아버지를 잘 아는데 더 훌륭한 분에게 지셨네”라고 말했다고 돌이켰다. 부시는 그때 큰 충격을 받았다고 어머니 바버라 여사는 말했다.

당시 예일대는 앵글로색슨 백인 개신교도 위주의 상류학교에서 탈피해 유대인이나 흑인 우수학생들도 받아들이는 학교로 변신하는 중이었고, 코핀은 새로운 예일대의 한 상징이었다. 부시는 과거의 예일 문화에 더 익숙했다. 그는 데크라는 운동선수들의 동아리에 가입한 뒤 신입회원 포섭 책임자가 됐다. 그러나 예일대에서 동아리는 사라지는 추세였다.

동아리들이 줄지어 들어선 붉은 벽돌 건물들은 학생들의 관심 부족으로 점차 문을 닫기 시작했다. 동아리에 들어가는 학생들은 진보적이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놀림감이 됐다. 부시가 학보 ‘예일 데일리 뉴스’의 관심을 끈 것은 단 한차례, 데크 동아리가 신입회원들에게 문신을 새긴다는 폭로기사 때문이었다. 부시는 신입회원들에게 문신을 새긴 것이 아니라 담뱃불로 조금 지진 정도였다고 해명했다. 성역으로 간주되던 비밀 동아리들도 엘리트주의라는 비난을 받았다.

훗날 부시는 예일대 시절 자유주의자들이 느끼던 진한 죄책감과 자신에게 한수 접어주는 듯한 ‘무거운’ 분위기가 너무 싫었다고 투덜대고는 했다. 그는 졸업반 시절 요란하게 반전 데모를 벌이던 장발족 학생들을 경멸했다. 그러나 당시는 베트남전이 수렁에 빠져들기 시작한 1968년이었다. 심지어 공화당 하원의원이던 부시의 아버지도 참전의 당위성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부시는 2차대전 때 해군 비행사로 근무하며 훈장을 받은 아버지처럼 항공기 조종사가 되고 싶어 텍사스 주방위군 공군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일반인들보다는 연줄 좋은 사람이 더 들어가기 쉬웠다. 부시는 대기자 명단에 올라 있는 많은 사람을 제치고 우선적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모린 다우드의 심술궂은 표현대로 “오클라호마로부터 텍사스를 지키기 위해” 부시가 텍사스로 돌아가고 있을 무렵 케리는 베트남의 메콩 델타로 가고 있었다. 1년의 구축함 생활을 한 케리 대위는 우상이었던 케네디처럼 쾌속함 함장이 되고 싶어했다. 처음에는 베트남 연안을 순찰하는 비교적 안전한 임무를 맡았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쾌속함들은 강 상류로 올라가 적을 유인해 교전을 치르는 임무를 맡았다.

평소 육체적 위험을 즐겨온 케리는 전투에서도 아주 적극적이었다. 그가 배를 육지에 대자마자 뛰어내려 한 베트콩이 유탄발사기를 겨냥할 틈도 주지 않고 사살한 사건은 유명하다. 케네디를 흉내낸 그런 행동들은 처음에 반감을 샀다. 케리가 지휘한 쾌속함 PCF94의 부함장 짐 워서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맙소사, 오디 머피(2차대전 때 훈장을 가장 많이 탄 미군)가 우리 배에 타셨구먼’하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대원들은 케리를 신뢰했다. PCF94의 후방포를 담당했던 마이크 마데이로스는 “그가 지나치게 무모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어뢰 따위는 무시하고 전속력 돌진’을 부르짖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동료 장교들 사이에서는 케리가 너무 훈장에 목숨을 건다는 불평도 나왔다. 그가 용맹하게 싸웠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지만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그냥 넘어갔을 가벼운 부상을 근거로 케리는 명예전상장을 세차례나 탔다. 세차례 부상한 장병은 본국 근무를 신청할 수 있었고, 케리는 넉달 동안 전투를 치른 뒤 전근 신청을 했다.

그러나 훌륭한 지휘관답게 부하들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근무지를 떠날 때 그들이 좀더 안전한 임무에 배치되도록 신경썼다. 쾌속함의 포수로 근무한 바 있는 데이비드 앨스턴은 “전투가 끝나면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다친 데는 없느냐고 물었다. 신경을 써준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케리는 전투를 치르면서 심적 고통을 받았다. 그의 쾌속함은 ‘무차별 공격지대’, 다시 말해 움직이는 것은 무엇이든 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곳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케리의 대원들은 강가에 있는 노인이나 소년들처럼 일부 미심쩍은 표적들을 공격했다.

베트남에서는 누가 전투원이 될지 알 수 없었다. 1969년 1월 케리와 몇몇 동료 장교들은 이 ‘무차별 공격지대’ 정책에 대한 이의를 상부에 제기하기 위해 사이공에 갔다. 그러나 위로의 말만 몇마디 듣고 원대 복귀했다. 케리는 1969년 여름 한 제독의 부관이라는 좀더 안전한 보직을 맡아 본국으로 돌아온 뒤 반전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힐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부산물

1969년 하반기 조지 W. 부시가 비행교육을 받기 위해 텍사스의 엘링턴 공군기지에 갔을 때 교관은 모리 유델이라는 몸무게 1백20kg이 넘는 유도 유단자였는데 ‘비열한 X새끼’로 자처했다. 유델은 부시에게 “자네 아버지가 하원의원인 것은 알지만 내겐 아무 의미도 없네”라고 말했다. 그는 제트기 조종 교육을 마친 부시를 놀릴 심산으로 모의 근접전 훈련 중 그의 후미에 바짝 따라붙었다. 부시는 유델을 한번 쏘아보더니 빠른 속도로 곡예비행을 시작했다. 유델은 “그는 결코 겁쟁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부시의 동아리 경력은 비행학교에서 도움이 됐다.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서는 ‘죽은 벌레’ 게임이 인기였다. 술집에서 한사람이 ‘죽은 벌레’라고 외치면 장군이고 뭐고 모두들 죽은 벌레처럼 바닥에 누워 팔다리를 위로 뻗어야 했다. 가장 늦게 눕는 사람이 술값을 내는 것이었다. 구두쇠에다 술 먹고 하는 게임에 단련된 부시는 “언제나 제일 먼저 바닥에 누웠다”고 부시와 같은 부대에서 복무했던 퇴역 공군대령 스콧 우드핀은 회상했다.

부시에 대한 일반적인 비난은 실전을 피하기 위해 주방위군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사실 텍사스 주방위군 공군에는 조종사들이 베트남에서 비행시간을 채울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부시의 동료 조종사 세명은 부시가 기지 사령관에게 지원 문의를 했었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그러나 안된다는 답을 받았다. 당시 부시의 비행시간은 턱없이 짧았고, 그가 몰던 F102 기종은 공중전을 치르기에는 너무 낡은 기종으로 판단됐던 것이다.

비행훈련을 마친 부시의 방위군 생활은 거의 예비군 수준이었다. 1972년 겨울 부시는 아버지의 친구인 윈턴 (레드) 블라운트의 상원의원 출마를 돕기 위해 앨라배마 주방위군으로 전근시켜 달라고 신청했다. 부시가 과연 얼마나 자주 출근했었는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그의 상관이었던 사람들은 그를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부시는 또 조종사 면허 경신에 필요한 신체검사도 받지 않았다. 백악관은 부시가 더 이상 비행할 일이 없어 신체검사도 받을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부시가 앨라배마 기지에 출근했음을 증명해주는 유일한 증거는 치과 진료기록이다. 부시가 사무실에서 비행교본과 잡지를 뒤적이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난다고 주장하는 전직 장교도 나왔다. 부시는 초조한 참모진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앨라배마 시절 무슨 임무를 맡았었는지는 기억해내지 못했다. 댄 바틀릿 백악관 공보국장은 “대통령은 잡담을 한 것은 기억한다”고 말했다.

어쨌든 당시에는 그런 데 신경쓰는 사람이 없었다. 규율은 느슨했고 부시는 어떤 식으로든 징계를 받은 적이 없다. 부시는 1973년 가을 하버드 경영대학원에 가기 위해 6개월 조기 제대를 할 수 있었다.
부시는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조종사 재킷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는 하버드 광장에서 닉슨 반대 구호를 외치는 히피들이 싫었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이었다. 웰슬리에 있는 숙모 낸시 엘리스의 집에서 일요일 점심식사를 할 때면 부시는 자기 같은 사람들을 경시하는 동부의 속물 지식인들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1970년 제대한 케리는 베트남전의 악몽에 시달렸다. 머리를 기르고 ‘전쟁에 반대하는 베트남 참전용사들’(VVAW)이라는 반전단체에 가입했다. 노동자 계급인 일부 회원들은 케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VVAW의 지도자 스콧 카밀은 보스턴 글로브지와의 인터뷰에서 한 참전용사가 케리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가정부로 추정되는 어떤 사람이 “케리 나리님은 댁에 안계십니다”라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다음 모임이 있는 날 케리의 의자에는 ‘케리네 가정부를 해방시키자’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케리는 정계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다. 1970년 하원 출마를 고려했다. 70~72년 매사추세츠주에서 세군데나 선거구를 옮겨다니면서 승산이 높은 곳을 탐색했다. 그러다가 오래된 공업도시 로웰과 로렌스 주위의 교외에서 출마하면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진보 성향의 중산층은 케네디를 닮은 그의 외모·말투와 반전 발언을 좋아했다. 그러나 근로자 계급은 그를 외지에서 온 뜨내기로 취급하면서 ‘케리맨더링’이라는 농담을 했다. 케리는 외모를 가꾸는 버릇이 있었다. 세인트 폴스와 예일대에 다니면서 케리 선배의 명성을 익히 들은 바 있는 시사만화가 개리 트루도는 새로 시작한 풍자만화 ‘둔스베리’에서 케리를 조롱했다.

한 만화는 케리가 연설을 끝낸 뒤 사람들의 아첨에 흠뻑 취해 있는 모습을 그렸다. 만화 속의 케리는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자화자찬한다. “사립학교 출신의 이 멋쟁이, 오늘밤엔 정말 너무 잘했어.” 지방신문인 로웰 선의 기자들은 그보다 더 가혹해 케리를 뜨내기이자 할리우드 영화 사업가들로부터 선거자금을 지원받는 ‘객지 사람’으로 깎아내렸다. 선거 초반 크게 앞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케리는 결국 패배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전쟁의 교훈

참전용사들이 다 그렇듯 케리는 군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내가 그를 알고 지낸 지도 35년됐지만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해수욕장에도 가고 피크닉도 가고 배도 같이 타고 저녁에 함께 시간을 보낸 적도 있지만 늘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케리는 선거유세 때 참전용사들을 주위에 포진시키면 쓸모가 많다는 점을 깨달았다.

케리는 1984년 상원의원직에 도전해 당시 인기가 높던 짐 섀넌 하원의원과 맞설 때 그 힘의 원천을 처음 이용했다. 토론에서 섀넌은 케리가 참전용사와 반전운동가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케리는 침착한 어조로 전쟁에 관한 설교는 하지 말라고 대꾸했다. 케리의 참모진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끝내준다. 저 말은 두고두고 써먹자고.” 케리는 84년 선거에서 이긴 뒤 해마다 집으로 참전용사들을 불러 파티를 열었다. 이제 그들은 선거가 있을 때마다 케리의 든든한 우군이다.

케리의 정치역정은 물론 정책에 대한 견해는 베트남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정부가 시민과 병사들에게 솔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품고 귀국했다”고 케리의 비서실장 데이비드 매킨은 말했다. 상원의원 케리는 법안을 만들고 그 통과를 위해 입씨름을 벌이는 입법활동보다는 조사위원회 운영에 치중했다. 개중에는 좀 희한하게 보이는 것도 있었다. 케리는 80년대 후반 한동안 CIA와 마약밀매단 및 레이건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던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의 관계를 밝히려고 애썼다. 그러나 구체적 물증은 찾아내지 못했다. 한편 아직도 베트남 당국이 억류하고 있다는 미군 전쟁포로와 실종병사들에 관한 온갖 음모설의 뿌리를 캐는, 고맙다는 소리도 못듣는 역할을 맡아 진정으로 국가를 위해 봉사했다.

케리는 소원대로 동부 기득권층에 합류했고 그 자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한편 조지 W. 부시는 동부 기득권층을 적대시하다시피했다(부친이 거기에 깊은 연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부시는 유럽 동맹국들이나 유엔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외교위원회형 인사들의 친화적 태도를 비웃는다.

부시의 독불장군식 정책에는 신경질적이고 잘난 체하는 태도가 담겨 있어 심지어 온건한 공화당원들조차 케리에게 표를 던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다. 늘 단호한 결의를 보이려고 애쓰는 부시에게서는 셰리(백포도주)나 홀짝이는 사람들과, 예일대의 남성다움을 없애버린 지적이면서도 어중간한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청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부시는 예일대에 대한 반감을 감추지 않다가 자기 딸 바버라를 2004년 학기에 받아주자 비로소 리처드 레빈 총장을 백악관으로 초대했다).

케리는 부시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 양반을 잘 안다”고 그는 보그지 기자 줄리아 리드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의 예일대 2년 후배라서 잘 아는데 지금도 변한 게 없다”(부시는 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예일대 시절 케리를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제는 부시 역시 케리와 마찬가지로 60년대 초 사립학교를 나오고 예일대에 들어가던 풋내기 시절과는 다르다. 두사람 모두 심성이 좀더 약했더라면 좌절하고 말았을 개인적 투쟁과 정치적 도전을 거치며 거듭 태어났다. 전쟁 스토리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특히 거꾸로 뒤집힌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특권층 자제들에게는.

With MICHAEL ISIKOFF, MARTHA BRANT, MARK HOSENBALL, T. TRENT GEGAX, RICHARD WOLFFE, SUSANNAH MEADOWS, DANIEL MCGINN, and JASON MCLURE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취임 100일’ 이은미 토스뱅크 대표, 추가도약 기틀 세워

2‘누들플레이션’ 부담 없이…면사랑, 여름면 가정간편식으로 출시

3칠갑농산 “요리 시간 단축시켜주는 제품 인기”

4현대제철, 싱가포르 ARTC와 맞손…스마트팩토리 구축 박차

5삼성자산, KODEX 월배당ETF 시리즈 순자산 1조원 돌파

6건설 불황에 “명분이…” 수도권 레미콘 운송노조, 집단 휴업 사흘 만에 철회

7애그유니, 아시아종묘와 파트너십으로 기능성 작물 대량생산 나서…

8교보생명, 일본 SBI그룹과 디지털 금융분야 포괄적 협력

9KG모빌리티, 포니 AI·포니링크와 ‘자율주행 기술협력’ MOU 체결

실시간 뉴스

1‘취임 100일’ 이은미 토스뱅크 대표, 추가도약 기틀 세워

2‘누들플레이션’ 부담 없이…면사랑, 여름면 가정간편식으로 출시

3칠갑농산 “요리 시간 단축시켜주는 제품 인기”

4현대제철, 싱가포르 ARTC와 맞손…스마트팩토리 구축 박차

5삼성자산, KODEX 월배당ETF 시리즈 순자산 1조원 돌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