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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현대그룹]“누구 목에 노벨평화상을 다나 봐라”

[秘話 현대그룹]“누구 목에 노벨평화상을 다나 봐라”

지난 1998년 북한을 방문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가운데)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왼쪽), 고 정몽헌 회장.
지난 1998년 11월 김대중 대통령(오른쪽)과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접견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회장은 노벨 평화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89년 1월24일 처음으로 북한의 평양 땅을 밟았다. 당시 북한의 노동당 서열 4위였던 허담의 초청이었다. 현대그룹의 대북사업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노태우 대통령의 공산권 개방정책인 이른바 ‘북방정책’에 큰 힘을 얻었다. 당시 정주영 명예회장은 박재면 현대중공업 사장, 김윤규 현대건설 전무 등과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허담에게 이들을 소개했다. “이 사람은 건축쟁이(김윤규 전무), 또 이 사람은 기계쟁이(박재면 사장)입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자신의 대북사업을 ‘필생의 사업’이라고 밝혔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그만큼 대북사업에 욕심을 부렸다. 현대는 이때 북한 측과 ‘금강산 관광개발 및 시베리아 공동개발, 원동지구 공동진출에 관한 의정서’를 체결했다. 이 의정서가 바로 현대그룹의 향후 대북사업의 밑그림이 됐다. 그런데 정주영 명예회장은 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쓴맛을 봤다. 김영삼 대통령에게 참패한 것이다. 그는 선거 과정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앙숙관계가 됐다. 후보 시절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표를 갉아먹는다는 이유로 정주영 명예회장의 출마 포기를 종용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듣지 않았다. 이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보복성 조치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금융권의 각종 제재와 세무조사를 받아야 했다. 신규 사업은 거의 하지 못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그렇게 간절히 바라는 대북사업도 공공연하게 막았다. 정부가 대북사업 창구를 단일화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대북사업은 모름지기 민간기업들이 중구난방 식으로 할 수 없는 국가적 사업이라는 논리였다. 정명예회장은 김영삼 정권 5년간 숨을 죽이며 살아야 했다. 대북사업도 깊은 겨울잠을 자야 했다. 그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말했다. “정치권의 기상은 날씨보다도 더 변화무쌍하다. 정부가 지원하고 통일원이 허가해 북한에 갈 때 그 화창했던 봄 분위기는 한꺼번에 얼어붙어 버렸다. 때문에 내가 북한에 가서 그 사람들과 열흘에 걸쳐 진지하게 협의해 가지고 온 의정서는 쓸모없게 됐다. 나는 북한에 가서 되지도 않을 일로 바람만 잡고 온 사람이 돼 버렸다.”(정주영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대북사업 경쟁자 김대중-정주영 세월은 흘러 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환호했다. 그가 언급한 ‘봄날’이 다시 왔다. 정주영 명예회장과 김대중 대통령은 똑같이 북한이 최대 관심사였다. 김대중 대통령도 남북 평화통일이 ‘필생의 염원’이었다. 따라서 그는 북한에 대한 햇볕정책을 들고 나왔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필생의 사업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필생의 염원으로 바라봤다. 사실 두 사람을 달리 보면 대북사업에 대한 경쟁자 관계였다. 대통령과 민간인의 차이는 있지만 김대중 대통령과 정주영 명예회장은 대한민국의 노벨평화상을 누가 먼저 거머쥐느냐 하는 경쟁을 했다. 정씨 일가의 자서전을 썼던 한 작가의 설명이다. “왕회장(정주영 명예회장)은 사석에서 ‘노벨평화상을 제 목(김대중 대통령)에 먼저 다나 내 목에 먼저 다나 두고 보자’라고 말했다.” 정명예회장은 대북사업을 시작하면서 ‘장사꾼’이라고 자처했다. 그렇지만 그는 노벨평화상까지 노렸던 것이다. 정명예회장의 끝없는 사업가적·정치가적 야망을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정주영 명예회장의 아들들이 이런 아버지의 야망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에 따라 사실상 장남인 2남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과 3남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 5남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은 각자 대북사업의 선점을 위한 물밑경쟁을 벌였다. 몽구 회장은 이에 앞서 96년 집안의 장남으로서 현대그룹 회장으로 등극했다. 원래 장남인 몽필씨는 82년 교통사고로 작고했다. 또 4남인 몽우씨도 90년 타계했다.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싹튼 ‘현대그룹 3형제간 대북사업 경쟁’의 내막은 뭘까? 우선 몽구 회장은 차정식 전무(현대차서비스)를 앞세웠다. 몽근 회장 측에서는 김영일 현대백화점 사장이 나섰다. 몽헌 회장은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내세웠다. 실무적으로 대북사업을 처음 뚫었던 전직 현대아산 고위관계자의 설명이다. “나는 홍콩지사에서 근무하다가 97년에 북경지사장으로 옮겼다. 현대그룹의 대북사업 추진을 위한 최전방이었다. 그런데 차정식 전무와 김영일 사장, 이익치 회장이 베이징 등을 오가며 분주히 움직였다. 이들은 각각 몽구·몽근·몽헌 회장의 대리인들이었다. 이들 3형제 회장들은 아버지의 꿈을 이뤄드리기 위해 경쟁적으로 대북사업을 각각 추진했던 것이다.” 처음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몽구 회장이었다. 현대그룹 고위관계자의 설명이다. “몽구 회장은 대북사업에 조바심을 냈다. 아버지(정주영 명예회장)에게 빨리 경영능력을 인정받고 싶어했다. 그는 96년에 그룹 회장으로 취임한 뒤 아버지의 큰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전임 그룹회장인 정세영 명예회장(정주영 명예회장의 셋째동생) 측근들의 간헐적인 공격도 감수해야 했다. 가장 아픈 공격이 몽구 회장은 영어를 잘 못한다는 것이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영어를 매우 중요시했다. 몽구 회장에 대한 온갖 좋지 않은 소리가 아버지 귀에 들어갔다. 따라서 그는 그룹회장으로 취임한 뒤 아버지에게 경영능력을 인정받을 만한 획기적인 일을 추진하고 싶어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대북사업이었다. 그는 대북사업을 성공시켜 후계자로서 경영능력을 인정받으려고 했다.” 몽구 회장을 보필했던 현대정공 고위관계자의 설명도 비슷하다.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으로 정주영 명예회장이 대북사업을 다시 추진할 때다. 몽구 회장은 그룹의 회장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이 대북사업의 중심에 설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 자꾸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과 현대종합상사 관계자를 불렀다. 이익치 회장은 바로 몽구 회장의 동생인 몽헌 회장 사람이다. 몽구 회장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북사업의 주도권을 동생인 몽헌 회장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그는 정주영 명예회장이 대북사업을 다시 추진하면서 자신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생각에 초조해했던 것이다. 동생인 몽헌 회장과 대북사업을 놓고 한판 경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설명대로 2000년 현대그룹 ‘왕자의 난’ 불씨는 바로 두 형제간 대북사업 경쟁이었다. 그런데 이들 3형제는 대북사업 구상이 서로 크게 달랐다. 몽구 회장은 차정식 현대차서비스 전무를 앞세워 화차 임가공 사업을 추진했다. 몽근 회장은 김영일 현대백화점 사장을 앞세워 작업복 임가공 사업을 추진했다. 또 몽헌 회장은 이익치 회장을 앞세워 금강산 관광사업을 추진했다.

왕회장은 ‘큰 그림’ 그리려 했다 어찌 됐든 당시 몽구 회장은 아버지에 이어 대북사업을 선점했다. 더 깊이 따지고 보면 몽구 회장은 아버지의 칭찬을 받을 만한 쾌거도 이뤘다. 몽구 회장 측은 차정식 전무를 앞세워 아버지도 접촉하지 못한 북한 측 인사와 만나 사업을 진척시켰다. 차정식 전무는 97년 북한을 8일간 방문해 화차 임가공과 북한 내 컨테이너 독점 공급 계약을 하고 돌아왔다. 차정식 전무는 이에 앞서 96년 7월30일에도 이용도 전무(현대정공)와 함께 북한을 방문해 사전협의를 했다. 차정식 전무는 다음해 7월께 북한 측과 수리조선사업과 고선박 해체사업 의향서를 체결하기도 했다. 몽구 회장의 적극적인 대북사업 추진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정주영 명예회장은 몽구 회장의 성공적인 대북사업 추진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냥 사업추진 보고만 받고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익치 회장은 현대그룹의 대북송금· 비자금 사건과 관련한 대검찰청 조사(2003년)에서 이에 대한 정황을 설명했다. “89년 정주영 명예회장의 방북을 시작으로 대북사업을 추진했으나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정몽구 회장 측의 현대정공에서 차정식 전무를 앞세워 겨우 화차 임가공 등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실제로 정몽구 회장은 북한에서 철도차량 4대를 임가공해 들여왔다). 이를 불만스럽게 생각한 정주영 명예회장이 98년 초에 이르러 정몽헌 회장에게 대북사업을 맡기게 된다.” 다시 한번 이익치 회장이 진술한 단어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 몽구 회장 측의… 겨우 화차임가공 사업을… 이를 불만스럽게 생각한 정주영 명예회장이… 몽헌 회장에게 대북사업을 맡기게 됐다….” 여기에서 정주영 명예회장의 불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는 몽구 회장이 추진한 화차 임가공 사업에 대해 못마땅해했다. 몽구 회장 측은 거창한 것보다는 실현성이 있는 작은 사업부터 물꼬를 트자는 전략적 접근이었다. 정명예회장도 잘 모르게 추진됐다. 이익치 회장이 이런 정황을 눈치챘다. 그는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달려가 정몽구 회장이 대북사업을 극비리에 추진한다는 얘기를 했다. 이익치 회장의 표현대로 ‘겨우’ 화차 임가공(돈을 받고 화물기차를 가공하는 것) 사업을 대북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노발대발했다. 그가 생각하는 대북사업은 엄청나게 큰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중동 건설로 국가를 살렸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80년대 후반 이후 중동 건설 붐이 사라지면서 불도저 등 중장비마저 놀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한 큰 그림은 대북사업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과거 중동 건설과 같이 ‘북한 건설’로 다시 영광을 되찾아보자는 꿈이었다. 단순히 현대건설의 남아도는 장비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이 아니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50년을 내다보는 사업 비전이 바로 대북사업, 그것은 바로 북한의 경제 개발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주영 명예회장이 몽구 회장의 화차 임가공 사업 추진에 크게 실망한 것은 당연했다. 현대그룹 회장으로서 큰 그림을 그리지 않고 지엽적인 사업에 힘을 쏟았다는 것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최소한 평양에서 신의주를 잇는 고속도로 건설 정도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즉 첫 대북사업으로 북한의 SOC(사회간접자본) 사업 등을 구상하고 있었다. 몽헌 회장과 이익치 회장, 김윤규 사장 등은 처음부터 이 같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큰 그림 전략’을 배운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도 입버릇처럼 ‘큰 그림을 봐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몽헌 회장과 이익치 회장, 김윤규 사장 등이 이후 현대그룹을 이끌고 가는 경영 스타일도 이와 같았다. 결국 이익치 회장은 당시 몽구 회장의 대북사업 성과를 폄하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일이 계기가 돼 정주영 명예회장은 현대그룹의 후계자를 몽구 회장에서 몽헌 회장으로 마음을 바꿨다는 것이다. 특히 정주명 명예회장은 몽헌 회장을 대북사업 총책임자를 바꾸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몽헌 회장을 현대그룹의 공동회장으로 임명해 힘을 실어줬다. 현대그룹의 형제간 공동회장 체제 탄생은 일대 사건이었다. 몽구 회장의 그룹 단독회장 체제에서 갑자기 바뀌었기 때문이다. 국내 대기업에서 이런 경영 체제는 사실상 처음이었다. 현대그룹 밖에서는 단순하게 후계자 구도상 ‘힘의 분산’을 위한 전략적인 조치로만 알았다. 현대그룹 측도 “국내사업은 몽구 회장이, 해외사업은 몽헌 회장이 나눠서 챙길 것”이라는 역할 분담론을 설명했다. 여기서 말하는 해외사업이란 바로 대북사업을 일컫는 것이다. 그렇지만 물밑에서는 몽구 회장과 몽헌 회장 간의 한차례 치열한 주도권 싸움이 벌어진 뒤였다. 그 결과로 공동회장 체제가 탄생됐던 것이다. 사실상 장남인 몽구 회장(2남)이 열살이나 아래인 몽헌 회장(5남)과 싸움에서 패배한 부산물이었던 셈이다.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공동회장 체제로 되면서 몽헌 회장의 힘이 커진 반면, 몽구 회장의 힘은 크게 약화됐다. 물론 몽헌 회장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일등공신은 이익치 회장이었다. 몽헌 회장이 공동회장으로 치고 올라오면서 몽구 회장의 심기가 불편했던 것은 당연했다. 몽구 회장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숨겨진 내막은 이랬다.

“누가 현대를 대표하느냐” 98년 1월. 당시 이익치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지시로 북측과 대북사업을 위한 접촉을 다시 시도했다. 이에 따라 북한 측과 중국에서 첫 접촉을 갖기로 약속했다. 몽헌 회장과 이익치 회장이 베이징에서 만나 대북사업과 관련해 회담을 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현대정공의 차정식 전무가 북한 측에 비밀 통지문을 하나 보냈다. ‘정몽헌 회장이 현대 측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몽헌 회장과 이익치 회장의 북측과의 첫 회담은 무산됐다. 몽헌 회장은 형인 몽구 회장의 견제에 분통을 터뜨렸다. 이익치 회장의 진술을 보면 좀더 자세하게 이를 알 수 있다. “정몽헌 회장이 현대그룹 공동회장으로 취임한 뒤 그동안 정주영 명예회장이 이뤄놓은 대북사업을 활성화시키기로 했다. 정몽헌 회장은 새로운 대북사업을 위해서는 다시 북측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북측과의 접촉을 모색할 방법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나는 일본 규슈대학 교수이던 고바야시에게 중개를 요청했다. 98년 1월 회담을 갖기로 했다. 그런데 차정식 전무가 북한 측에 ‘정몽헌 회장이 현대 측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는 통지문을 보내자, 북한은 ‘현대의 대북 창구는 정확히 누구냐’면서 일방적으로 만남을 취소했다. 이 사실을 정주영 명예회장께서도 알게 됐다. 그래서 정주영 명예회장이 친서를 써서 북측에 보내 사태를 수습했다. 98년 2월9일. 박세용 현대그룹 종합기획실장을 대표로 김윤규, 차정식, 본인(이익치) 등을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보내 북한 측과 만났다. 앞으로 현대를 대표하는 사람은 김윤규, 베이징을 대표하는 자는 김고중 현대종합상사 북경지사장이 담당하기로 했다고 통보했다.” 몽구 회장은 대북사업을 둘러싸고 동생인 몽헌 회장을 공격했으나 무산된 뒤 단독회장직도 잃게 된다. 동생과 대북사업 경쟁을 벌이면서 외려 입지만 약화된 것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이런 일로 즉각 몽구 회장을 대북사업에서 손떼게 했다. 이때부터 정명예회장은 몽구 회장에게서 마음이 떠났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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