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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가 곧 놀이’ 못말리는 10대

‘소비가 곧 놀이’ 못말리는 10대

아들 정훈이가 8만원짜리 게임보이를 잃어버렸을 때 박수현씨는 화가 치밀었다. 물건 간수 좀 잘하라고 그렇게 야단쳤는데도 이런 일이 벌써 세번째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샤프연필 같은 소소한 물건을 잃어버려 큰 걱정을 안했지만 몇만원짜리를 잃어버렸을 때는 정말 한대 때려주고 싶었다. 그러고도 아이는 다시 새것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지난번 학부모 모임 때문에 아이가 다니는 중학교에 들렀을 때 학교 분실물 센터에 쌓인 물건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선생님 말을 들으니 “아이들이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박씨는 “이젠 1만원 넘는 것은 아예 사주지 않겠다”고 아이에게 다짐을 했다. 그래도 중학교에 들어갔으니 디지털 카메라 기능이 달린 휴대폰을 사달라고 떼를 썼을 때 아이가 ‘왕따’를 당할까봐 별수 없이 지갑을 열고 말았다. 아이의 휴대폰 통화료와 문자 메시지 서비스, 아이가 미니 홈피 사이트인 ‘싸이월드’에서 구매하는 아이템의 결제 비용 등으로 그녀의 계좌에선 휴대폰 사용료로 매달 5만원 가량의 돈이 빠져 나간다. 그녀는 “학원비 외에 이렇게 돈이 들어가니 정말 둘째아이 갖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올해 2분기 가계수지 동향에 따르면 학원비·개인교습비 등 사교육비는 한달 평균 13만9천원으로 지난해보다 7% 증가했다. 교육부는 교육방송(EBS)의 수능 강의 이후 사교육비가 4만7천원가량 줄었다고 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하지만 아이를 가진 부모들을 괴롭히는 건 사교육비만이 아니다.

인터넷과 휴대폰·게임기·인라인스케이트·디지털 카메라·MP3 등 새로운 유행이 만들어질 때마다 사달라고 졸라대는 아이들의 성화도 그에 못지 않다. 아이들은 원하는 것을 사주더라도 금방 싫증내는 데다 자기 것에 대한 애착도 없어 잃어버리고도 찾질 않는다. 중학교 1학년 딸을 둔 강남의 한 주부는 “초등학교 때 한반에 여학생이 17명이었는데 한두명을 빼곤 모두 최신 기능의 휴대폰을 갖고 있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요즘에는 초등학교 졸업 무렵이면 웬만한 중산층 가정에선 모두 아이에게 휴대폰을 사주는 게 흔한 일이다.

한국의 10대들도 풍요의 1990년대에 성장기를 보낸 미국의 10대 못지 않게 소비문화에 푹 젖어 있다. 10대의 문화를 연구하고 있는 연세대 심리학과의 황상민 교수는 “한국 10대들의 행동 특성은 물질적 소비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말한다. 인터넷에 푹 빠져 있는 요즘의 ‘N세대’ 아이들이 노는 방식엔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

이들 N세대가 등장하면서부터 ‘소비가 곧 놀이’가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에서 아이템을 구매하거나, 자기만의 미니 홈피를 꾸미거나, PC방을 이용하려 해도 돈이 든다. 지금의 10대들은 한국 경제가 승승장구하던,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 이전 시기에 태어난 풍요의 세대다. 경기가 좋았던 시절에 여기저기서 용돈을 많이 받아 ‘레인보 포켓’(용돈받는 주머니가 일곱개라는 의미)을 가지고 있을 만큼 ‘가처분 소득’이 많았던 아이들이기도 하다.

소비에서 쾌락을 찾는 10대 소녀들을 소재로 한 정이현의 소설 ‘소녀시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명품관 1층에서 나비 모양 머리핀 두개를 골라서 민지 새엄마의 카드로 계산한 다음 하나씩 나눠 가졌다. 팔랑팔랑 분홍 나비가 머리 위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쭈욱, 업 되었다.” 주인공인 10대 여자아이는 “오빠, 저 깜찍이예요.

내가 문자 보냈는데, 막 씹고… 그래 봐요. 흥!”이라며 ‘사랑하는 오빠’에게 문자 메시지를 날린다. 원조 교제로 30만원을 번 이 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소녀 시절도 살아보면 그다지 나쁘지 많은 않다. 원하면 돈 벌 건수도 얼마든지 널렸고, 급할 땐 좀 치사하지만 울어버리면 된다. 아저씨 시대보다, 할머니 시대보다 솔직히 짱 멋지지 않은가?” 인터넷에 들어가면 숱한 ‘놀 것’이 존재하는 요즘 아이들의 시대는 정말 ‘짱 멋진 시대’인지도 모른다.

휴대폰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요즘 아이들의 행태를 보자. 지난해 소비자보호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청소년의 휴대폰 교체 주기는 평균 1년 4개월로 성인에 비해 훨씬 짧았다. 교체 이유는 고장·분실(47.6%)이 가장 많았으나 신형 기기의 등장이라는 이유도 31.6%나 됐다. 하루 평균 전화 횟수는 5.71통으로 일본 청소년의 2.7통에 비해 두배 이상이었다. 휴대폰 평균 이용 요금은 4만3천원이고, 5만원 이상 요금이 나온다는 응답도 25.1%였다. 대부분의 휴대폰은 카메라폰 기능(57.2%), 64 화음(36.4%), 동영상 전용(36%)으로 고가의 최신 기종이었다. 이 조사 직후 소보원은 “청소년의 합리적인 휴대폰 이용문화 정착을 위해선 청소년 당사자 교육 외에 경제권을 가진 부모 대상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아동심리 전문가들은 아이들이 집안에서 제왕으로 등극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그 중 하나는 점차 줄어들고 있는 출산율이 보여주듯 요즘 한국의 한가족은 대부분 한자녀 내지 두자녀를 둔 가정이라는 점일 것이다. 한국의 출산율은 계속 낮아져 여성 1명당 1.17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이다. 최근 발표된 서울시의 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 거주 여성의 평균 출산율은 0.99명으로 채 1명이 안 된다.

한국은 이제 ‘한가정, 한자녀’인 ‘외동이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얘기다. 이화여대 심리학과의 양윤 교수는 “외동이를 둔 가정에서는 아이에게 쏟아야 할 비용과 시간 모두가 한 아이에게 집중된다”며 “부모들의 아이들에 대한 집착도 강해지고 아이 역시 왕자로 클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말한다. 과거의 아이들이 가족내 구매 결정에서 소외돼 있었다면 요즘 아이들은 가장 강력한 구매 결정자로 등극했다.

또 하나의 원인은 부모 세대에게서 찾을 수 있다. 10대를 자녀로 둔 30∼40대의 부모 세대 역시 70∼80년대 고도 성장기에 청소년 시절을 거쳤다. 부모 세대가 자랄 때처럼 결핍된 느낌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아이에게 해줄 만큼 해줬다라는 충족감”을 느끼고 싶어한다. 학교에서 체벌이 횡행하던 7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최현정씨는 “가능하면 아이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고 싶다. 나 자신이 부모나 선생님으로부터 이해받거나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과 남편의 한달 수입 가운데 3분의 1을 아이에게 쏟아붓고 있다. 올 여름 방학 때는 학원에서 실시한 중국 여행에 아이를 보냈다. 비용이 얼마나 들었는지에 대해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10대들의 소비문화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아이가 쓰던 구형 데스크톱 컴퓨터를 노트북으로 교체하려던 김미경씨는 아이가 사야 할 노트북의 사양을 줄줄이 말하며 거기에 맞는 국내 대기업의 한 기종을 꼽았을 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고등학교 1학년인 아이는 인터넷을 뒤져 필요한 사양을 추려내고 그중 가장 싸게 파는 쇼핑몰 주소를 찾아냈다.

그녀는 두말 하지 않고 결제를 위해 신용카드를 꺼내 들었다. 양윤 이화여대 교수는 “과거에는 부모를 통해 소비가 이뤄졌다면 이제는 아이들이 직접 소비의 주체가 되고 있다. 아이들은 소비에서 부모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 뭘 사고 말아야 할 지를 선택하는 부모의 역할이 사라져버린 것”이라고 말한다. 10대들은 단지 과잉 소비 세대인 것만이 아니라 가격을 비교하고 성능을 따지는 ‘합리적 소비자’이기도 하다.

발달심리학자들은 아이들에게 ‘엄격함’을 강조하던 ‘훈육 중심의 패러다임’이 90년대 이후 아이들에 대한 이해와 포용 중심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한다. 그 기점으로 한국에 민주화가 시작된 1987년이 꼽힌다. 부모 교육의 단골 강사이기도 한 황상민 연세대 교수는 “부모들에게 엄격한 훈육을 강조하면 거부감을 느낀다. 아이의 요구를 수용하고 애정을 쏟는 패턴은 아마도 10년 이상 지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70∼80년대 대학 교육을 받았던 지금의 10대 부모들은 권위적인 문화에 체질적인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에 아이에게 좀더 허용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김정훈 원광대 생활과학대 교수는 “부모들이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지나친 죄책감을 갖고 있다”며 “욕구를 절제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충고한다. 아이들에 대한 ‘이해와 포용’을 한다 하더라도 부모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훨씬 많은 정보를 갖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의 의사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면 남은 부모의 역할은 무엇일까. 양윤 교수는 ‘모델과 안내자’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아이에게 부모는 소비와 삶의 모델이다. 그것도 권위적인 모델이 아니라 친밀한 모델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도’가 아니라 ‘안내자’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쌍방향 시대에 일방적인 부모의 지도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일산의 한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 김병태씨는 수업시간에 소란을 피우는 아이들에게 “너희들 공부 안하면 좋은 대학 못가!”라고 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다음 그가 꺼낸 ‘협상카드’는 이랬다. “너희들 공부 안하면 돈 못 벌어!” 그러자 아이들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지며 책을 꺼내 들었다. 심리학자들의 충고 한마디 더.

“10대들은 돈 많이 버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돈 이외 다른 삶의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모가 보여주지 않으면 아이들은 욕망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부모가 사는 방식과 아이가 사는 방식은 깊이 연관돼 있다.” 그러니 취재 중 만난 한 학부모의 “한국에서 부모 노릇하기 정말 힘들다”라는 푸념에 동감하지 않을 부모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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