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에서 즐기는 겨울 알프스
하늘과 땅에서 즐기는 겨울 알프스
행글라이더로 알프스 산중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생 모리츠의 자연을 감상하는 ‘슈퍼 스위스 스릴 위크엔드’는 그야말로 스릴 만점이다.
스위스가 좋지 않은 이미지로 그려진 적이 있다. 영화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에서 배우 오슨 웰스가 놀이기구인 대회전 관람차를 타고 조셉 코튼에게 이렇게 말한 대목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보르자가(家) 통치 아래 30년간 전쟁 ·테러 ·살인 ·유혈사태에 시달렸지만,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낳고 르네상스도 꽃피웠지. 스위스에는 형제애가 있었어. 그래서 500년간 민주주의와 평화를 누렸지만 자랑할 만한 게 뭐 있어. 기껏해야 뻐꾸기 시계뿐이지.” 사실 스위스는 500년이 넘는 역사에서 자랑할 만한 유산을 많이 물려받았다.
취리히의 구시가, 아펜첼러(Appenzeller) 치즈, 장크트갈렌(Sankt Gallen) 수도원의 도서관, 샤슬라(Chasselas) 백포도주, 요들, 초콜릿, 그리고 혹자는 잊어버리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현대식 스키 휴양지도 있다. 생 모리츠(St. Moritz ·현지 발음으로는 ‘장크트 모리츠’다)에는 가장 멋지고 가장 비싼 현대식 스키 휴양지이자 사상 최초의 스키장이 있다. 현지에서 전해 내려오는 바에 따르면 겨울 관광이 처음 시작된 것은 1864년 가을이었다.
생 모리츠의 호텔업자 요하네스 바트루트(Johannes Badrutt)는 여름에 들른 몇몇 영국인 관광객에게 겨울에 다시 오면 방을 무료로 주겠다고 제안한 것.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런던까지 왕복 여행비를 물어주곤 했다. 영국인 관광객들은 크리스마스에서 이듬해 부활절까지 생 모리츠를 찾았다. 그 결과 겨울은 추운 지방에서 보내야 한다는 엉뚱한 발상이 생겨 이른바 ‘금박시대(Gilded Age ·미국 역사에서 엄청난 물질주의와 정치부패가 일어난 1870년대를 일컫는 말)’를 풍미했다.
생 모리츠는 해발 1,830m의 엥가딘(Engadin) 골짜기에 있다. 알프스 남부의 장엄한 바위산 사이사이에 위치한 절묘한 호수들 가운데 하나와 접해 있다. 생 모리츠에서 이탈리아까지는 직선 거리로 3,660m밖에 안 된다. 가장 높은 봉우리엔 이탈리아어 이름이 붙어 있는데, 해발 3,960m의 베르니나(Bernina)가 바로 그것이다. 생 모리츠 바로 뒤로 가파르게 솟아 있는 스키 코스 코르빌리아(Corviglia)라는 이름도 이탈리아어다. 코르빌리아 꼭대기에는 이곳에서 유명한 레스토랑 가운데 하나인 마티스(Mathis)가 있다. 마티스에서 불과 몇m 떨어진 곳에 레스토랑 내부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음 절벽이 있다. 하인즈라는 남자가 지나가는 외국인들에게 가냘픈 듯한 알루미늄 막대기와 비닐 천에 의지해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같이 떨어지자고 유혹하는 곳이다.
지난 3월 어느 날 늦은 오후 뽀얀 안개 속을 뚫고 고요히 버티고 선 생 모리츠의 아름다움과 처음 접했을 때 ‘미치광이’ 하인즈가 죽음의 벼랑 끝에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눈이 녹기 전 그곳에 당도하느라 서두른 나는 준비된 관광 프로그램을 눈여겨볼 틈조차 없었다. 나는 스키를 타지 않는다. 지난 20년간 날마다 스쿼시를 한 나머지 무릎에 무리가 간 것이다.
그러나 핏줄이 드러날 정도로 피부가 하얀 북유럽인인 나는 모든 겨울 스포츠를 사랑한다. 생 모리츠는 나처럼 스키를 못 타는 사람들에게 환상적인 곳이다. 사실 이곳 겨울 관광객 가운데 상당수가 스키를 타러 오는 것은 아니다. 나는 화끈한 술에다 눈 덮인 야외에서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마지막 날 메인 이벤트는 내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방에 느긋하게 앉아 있다가 그 무시무시한 일정을 처음 읽게 된 것이다. 비수가 아닌 고드름이 심장에 꽂히는 듯했다. ‘금요일 정오, 코르빌리아에서 행글라이딩’이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닌가.
스키를 못 타는 내가 행글라이딩을? 그것도 한겨울에 무슨 행글라이딩? 행글라이딩은 절벽에서 태평양으로 뛰어내리거나 아니면 잘못 착륙해 태평양 해안도로를 달리는 포르셰와 엉키고 마는 털북숭이 캘리포니아인들이나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왜 그 짓을? 따뜻한 지방에서나 어울리는 데다 죽을지도 모르는 모험을 피한다고 해서 생 모리츠에서의 추억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마음 한쪽에서 푸념이 쏟아지고 다른 한쪽에선 저널리스트의 의무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칼날 같은 바위가 깔린 얼음 경사면 위 300m 상공에서 행글라이딩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코르빌리아 절벽에서 행글라이딩을 하다 유명을 달리해도 할 수 없지 않은가. 진리는 하나의 전쟁터다.
양심의 목소리가 이겼다. 승리 뒤에 두려움이 엄습하자 결정적 순간에 항상 그랬듯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이럴 때 어니스트 헤밍웨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대답은 거나하게 취한 뒤 만사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 뒤 멋진 시간을 보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생 모리츠에는 공포감을 잊게 해줄 만한 일이 많았다. 여기서 잠시 생 모리츠에 대해 자랑하는 게 도리일 듯싶다. 적어도 중세 이래 생 모리츠로 사람들이 꾸준히 몰려드는 것은 온천 때문이다. 치료 효과 때문만은 아니다. 1519년 교황 레오 10세는 이곳 온천에 들르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죄를 완전히 사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생 모리츠에서는 봅슬레이에서부터 허스키한 목소리에 우아한 스키복을 입은 키 큰 여성까지 없는 게 없다. 여배우 우마 서먼 같은 여성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바트루트 팰리스 호텔(Badrutt’s Palace Hotel)도 명물이다. 19세기 후반 바트루트가 세운 이 호텔은 지금도 바트루트 일가에서 소유하고 있다. 호텔은 상상한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생 모리츠의 대표적인 호텔이라면 으리으리하고 갑부들만 머무는 곳일 것이라고들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인심도 좋고 고풍스럽다. 미로처럼 얽혀 있는 호텔의 구석구석에는 볼거리도 많다. 나는 처음 당도했을 때 동화 〈플라자 호텔의 엘로이즈〉(Eloise at The Plaza)에 등장하는 여섯 살 소녀 엘로이즈처럼 몇 시간이고 호텔 안을 배회했다.
바트루트 호텔은 유럽에서 보기 드물게 객실이 크고 넓다. 그러나 미국 라스베이거스 스타일의 객실과 달리 크고 넓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호화로우면서도 균형이 잡혀 있어 편안한 느낌을 준다. 모든 객실 창 밖으로 호수와 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낡은 발코니의 페인트가 벗겨져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운전기사가 딸린 자동차가 필요하다면 호텔에서 제공하는 68년형 호화 소형 롤스로이스 팬텀을 이용할 수 있다.
호텔 직원들은 매우 친절하고 살갑다. 대다수 ‘고급’ 호텔에서 기계적으로 미소 짓는 직원들과 판이하다.
직원들 모두 적어도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 3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이탈리아 북부, 스위스 그라우뷘덴주의 라인 계곡에서 주로 쓰이는 로망슈어(Romansh)와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직원도 있다.
바트루트 호텔에는 옥에 티가 두 가지 있다. 먼저 브랜디 술잔을 들 수 있다. 술잔 주위에 ‘2.5센티리터’라고 새긴 띠가 둘러져 있는데 천박하게 보일지 모른다. 아니면 스위스적인 것일까. 둘째, 일본식 마사지다. 우리 부부가 결별하기 전날 밤 아내는 내 생일 선물이랍시고 일본식 마사지를 받게 해줬다.
땅딸막한 아시아 여성이 내 등을 마구 짓밟았다. 나와 곧 헤어질 아내가 일부러 그렇게 시켰던 것 같다. 그랬지만 ‘바트루트 호텔은 다르겠지’라는 생각에 생애 두 번째로 일본식 마사지를 받았다. 호텔 한쪽 구석에 위치한 마사지룸으로 갔더니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잘 안 가는 작자가 내 등을 짓누르고 오른쪽 엉덩이도 주무르는 게 아닌가. 웬일인지 왼쪽 엉덩이에는 손도 안 댔다. 안마사의 차별 대우가 짜증나 불쾌한 기분으로 나와버렸다.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생 모리츠에서 4개월 동안 겨울을 보내며 문화 ·패션 ·스포츠 ·사교 ·음악 그리고 식도락도 즐길 수 있다. 생 모리츠에서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황금기의 고풍스러운 겨울 휴양지를 현대판으로 경험할 수 있다. 압권은 물론 스키다. 생 모리츠에서 겨울에 가장 볼 만한 것이 화이트 터프(White Turf)라는 3주 동안의 축제다. 화이트 터프는 화강암처럼 단단히 얼어붙은 생 모리츠호(湖)의 빙판 위에서 열린다. 말이 끄는 스키로 빙원을 질주하는 스키쾨링(skikjoring)이라는 독특한 경주도 벌어진다. 이곳의 주민 몇몇은 축제 기간 호수 위에 자동차 500대와 1만2,000명의 인파, 세 무리의 조랑말이 들어서기도 한다고 들려줬다. 나는 한참 뒤에야 언젠가 얼음이 깨질지 모른다는 농담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보는 것보다 직접 참여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머리를 앞으로 하고 엎드린 자세로 타는 크레스타(Cresta) 썰매 경주, 일명 터보건(toboggan) 썰매 경주는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끝난 뒤였다. 총 1,770m에 달하는 봅슬레이 경기도 재미있을 듯하다. 봅슬레이는 발을 앞으로 하고 누워 탄다. 터보건겫씜슘뮌?모두 시내로부터 가까운 곳에서 열리기 때문에 매우 편리하다.
겨울 스포츠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개 썰매다. 얼어붙은 호수 위를 시속 24km로 내달리는 기분은 환상적이다. 다만 생각지도 못한 녀석들의 방귀 때문에 좀 당황했다. 한 줄에 6마리씩 2열 종대로 달리는 총 12마리의 강인한 견공들을 바라보노라면 우아하기 그지없지만 녀석들은 시도 때도 없이 방귀를 뀌어댄다. 이러다 오존층이 뚫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군데군데 둔덕도 조심해야 한다. 개 썰매는 방석 위에 앉아 타지만 스프링 같은 완충장치는 없기 때문이다. 시속 24km로 달리는 나무 썰매에서 꼬리뼈가 어떻게 되는지는 직접 타봐야 안다.
이렇게 며칠 즐기는 사이 행글라이딩을 거의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다가오면서 호사 끝에 결국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재삼 깨닫게 됐다. 쏜살같이 흘러가는 목요일 밤, 나는 다시 공포에 사로잡혔다. 2차대전의 영웅 조지 패튼 장군이던가 헤밍웨이던가, 누군가 ‘영웅이란 상상력이 전혀 없는 겁쟁이’, 뭐 그런 식으로 말한 것 같다. 아니면 ‘겁쟁이란 상상력이 풍부한 영웅’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내가 한 말인가. 누가 말했든 무슨 상관이람…. 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세계 정상급 겁쟁이인데…. 그런 내가 내일 코르빌리아에서 행글라이딩을 한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건지, 호텔 측은 지구에서 보내는 내 마지막 날의 첫 행사로 헬기까지 대령했다. 나는 그저 경치 좋은 곳으로 데려가려니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옛 일본군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라도 되는양 헬기는 알프스의 산봉우리들 주위를 뱅뱅 휘젓고 다녔다. 이륙 후 몇 초 만에 길이 30m의 고드름들을 스치듯 빙하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었다. 아뿔싸!
헬기에서 알프스 남쪽 너머 이탈리아 땅이 보였다. 지금까지 본 광경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스페인에서 알프스 너머 로마로 진격한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도 2,200년 전 이 모습을 봤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불행히도 한니발이라는 이름만 떠올리면 영화 〈한니발〉(Hannibal)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앤서니 홉킨스의 악마 같은 이미지가 생각난다. 무드를 깨는 〈제3의 사나이〉 증후군이 발동하는 것이다.
얼음 세례를 받고 난 지 한 시간도 안 돼 케이블카로 죽음의 언덕 위까지 끌려 올라갔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남자들’은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혹시 아침밥에 무슨 약이라도 탄 것은 아닐까.
어쨌든 낭떠러지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절벽은 작지만 절벽 너머로 산이 호수까지 천길 만길 낭떠러지처럼 이어져 있다. 절벽 위에 매우 작고 낡은 행글라이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70년대풍의 버려진 옥외 의자나 땅에 떨어진 연과 같았다. 어두컴컴한 동굴 같은 곳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은 헝클어져 있고 눈은 광기로 빛났다. 옷도 따뜻하게 입지 않은 듯했다. 1968년 창설된 독일의 좌파 테러 조직 바더 마인호프 단(Baader-Meinhof Gang)을 찾아내기 위해 정찰하다 행글라이딩에 입문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이 사내가 바로 하인즈다. 그는 두 행글라이더 가운데 더 낡은 것을 가리키며 “이게 오늘 타실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나마 나아 보이는 행글라이더는 자기가 탈 것이란다. 나는 이처럼 무모한 행글라이딩에 ‘전문가가 동반할 것’이라는 말을 언뜻 들은 듯하다. 따라서 커다란 2인용에 비상 터보 프로펠러 엔진을 얹고 낙하산도 2개 갖춘 행글라이더이겠거니 생각했던 것 같다.
“그냥 저만 따라오세요, 아셨죠. 쉽습니다.” 하인즈가 말했다. 그와 바트루트 호텔 직원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순간 이러다 정말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허공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 날지. 내가 여기서 도대체 뭘 하는 걸까. 저 친구들은? 체면을 잃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은가.
“하하하.” 하인즈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서도 스위스인들의 농담을 들은 것이다. 바트루트 직원도 배꼽을 잡고 따라 웃었다. 하인즈는 “농담입니다. 저랑 같이 타시는 겁니다. 아셨죠”라고 말하곤 내 머리에 큰 헬멧을 씌우고 낡은 골조(骨組) 안으로 밀어넣다시피했다. 그는 골조를 행글라이더 동체에 고정시켰다. 아랫도리 급소가 뻐근했다. 그는 내 앞에 서서 조종간을 잡았다. “스키는 탈 줄 아시죠.”
“아뇨.”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하인즈가 유감스럽다는 듯 내뱉었다. “그럼 제 스키를 같이 타셔야죠, 그렇죠?”
아니, 그렇기는, 뭘 같이 타? 그러나 거부할 시간이 없었다. 하인즈의 ‘농담’이 긴장감을 다소 누그러뜨렸지만 사실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절벽 끝으로 미끄러져 갔다. 나는 그의 빌어먹을 스키 뒤에 서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윽고 우리는 절벽으로 떨어졌다. 바람과 만나자 푸른 저편으로 술 취한 가마우지 한 마리처럼 몸을 맡겼다. 그리고….
와! 하늘로 치솟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하늘을 선회하는 매처럼 소리없이 부드럽게 날고 있었다. 비행기만 타면 난기류에 비행기가 약간 흔들려도 좌석을 꽉 잡던 나였다. 하지만 행글라이더는 안전한 느낌이었다. 덜렁거리는 내 두 다리 사이로 저 밑에 스키 슬로프를 따라 얽혀 있는 작은 막대기 같은 것들이 보였다. 뾰족한 바위와 나무들인 데도 장난감 같았다.
산사면 위의 300m 상공을 날고 있었지만 불과 몇cm 발 아래 멋진 모형물들이 펼쳐진 듯했다. 코르빌리아의 행글라이딩은 해발 2,550m에서 1,800m까지 750m를 하강한다. 고도가 급속히 낮아지지만 비단처럼 부드러운 하강이다. 하인즈가 가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날개에 장착된 원격 조종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나는 기꺼이 포즈를 취했다. 그의 목에 감겨 있던 두 팔을 들어올리기까지 했다. 행글라이더를 다시 타면 무서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순식간에 생 모리츠 상공으로 들어서자 생각이 달라졌다. 빌딩들은 더이상 장난감처럼 보이지 않았다. 들쭉날쭉한 거대한 철근과 콘크리트 더미였다. 저 위로 떨어지면 육포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공포감이 엄습했다. 그 순간 하인즈가 행글라이더를 360도 회전시켰다. 하강을 시작한 것이다. “비행기가 비스듬히 선회하면 날개는 부력을 덜 받죠. 안정되게 비행하려면 속도를 더 내야 합니다. 공기역학이죠. 안 그렇습니까.” 그가 미친 듯 선회 비행하며 외쳤다. 하지만 내게는 떨어져 죽지 않으려면 떨어져 죽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말로 해석됐다. 나는 공포로 몸이 굳었다. 바트루트 호텔의 뾰족 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하인즈는 미친 듯 낄낄거렸다. 그가 좋아하는 순간인 모양이다.
바트루트 호텔의 르 를레(Le Relais) 식당의 점심식사를 정확히 품평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나에게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새끼 비둘기 가슴살 구이에 백포도주 에글 데 뮈라이유(Aigle des Murailles), 살짝 튀긴 밤, 마른 버섯을 맛있게 먹었다. 백포도주는 기막힌 샤슬라 포도로 만든 생 모리츠의 특산품이다.
나는 부리나케 취리히로 건너가 또 다른 유명 호텔 보르 오 락(Baur au Lac)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우아한 고급 호텔 보르 오 락에는 매우 친절한 총지배인 마이클 레이가 있다. 겨울에 생 모리츠에서 주말을 보낼 생각이라면 보르 오 락도 한 번 들러 보는 게 좋다. 다시 공항으로, 일터로, 눈이 녹아 질퍽한 도시의 거리로 돌아가기 전 준비운동을 하기에는 그만인 아주 멋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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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가 좋지 않은 이미지로 그려진 적이 있다. 영화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에서 배우 오슨 웰스가 놀이기구인 대회전 관람차를 타고 조셉 코튼에게 이렇게 말한 대목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보르자가(家) 통치 아래 30년간 전쟁 ·테러 ·살인 ·유혈사태에 시달렸지만,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낳고 르네상스도 꽃피웠지. 스위스에는 형제애가 있었어. 그래서 500년간 민주주의와 평화를 누렸지만 자랑할 만한 게 뭐 있어. 기껏해야 뻐꾸기 시계뿐이지.” 사실 스위스는 500년이 넘는 역사에서 자랑할 만한 유산을 많이 물려받았다.
취리히의 구시가, 아펜첼러(Appenzeller) 치즈, 장크트갈렌(Sankt Gallen) 수도원의 도서관, 샤슬라(Chasselas) 백포도주, 요들, 초콜릿, 그리고 혹자는 잊어버리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현대식 스키 휴양지도 있다. 생 모리츠(St. Moritz ·현지 발음으로는 ‘장크트 모리츠’다)에는 가장 멋지고 가장 비싼 현대식 스키 휴양지이자 사상 최초의 스키장이 있다. 현지에서 전해 내려오는 바에 따르면 겨울 관광이 처음 시작된 것은 1864년 가을이었다.
생 모리츠의 호텔업자 요하네스 바트루트(Johannes Badrutt)는 여름에 들른 몇몇 영국인 관광객에게 겨울에 다시 오면 방을 무료로 주겠다고 제안한 것.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런던까지 왕복 여행비를 물어주곤 했다. 영국인 관광객들은 크리스마스에서 이듬해 부활절까지 생 모리츠를 찾았다. 그 결과 겨울은 추운 지방에서 보내야 한다는 엉뚱한 발상이 생겨 이른바 ‘금박시대(Gilded Age ·미국 역사에서 엄청난 물질주의와 정치부패가 일어난 1870년대를 일컫는 말)’를 풍미했다.
생 모리츠는 해발 1,830m의 엥가딘(Engadin) 골짜기에 있다. 알프스 남부의 장엄한 바위산 사이사이에 위치한 절묘한 호수들 가운데 하나와 접해 있다. 생 모리츠에서 이탈리아까지는 직선 거리로 3,660m밖에 안 된다. 가장 높은 봉우리엔 이탈리아어 이름이 붙어 있는데, 해발 3,960m의 베르니나(Bernina)가 바로 그것이다. 생 모리츠 바로 뒤로 가파르게 솟아 있는 스키 코스 코르빌리아(Corviglia)라는 이름도 이탈리아어다. 코르빌리아 꼭대기에는 이곳에서 유명한 레스토랑 가운데 하나인 마티스(Mathis)가 있다. 마티스에서 불과 몇m 떨어진 곳에 레스토랑 내부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얼음 절벽이 있다. 하인즈라는 남자가 지나가는 외국인들에게 가냘픈 듯한 알루미늄 막대기와 비닐 천에 의지해 까마득한 낭떠러지로 같이 떨어지자고 유혹하는 곳이다.
지난 3월 어느 날 늦은 오후 뽀얀 안개 속을 뚫고 고요히 버티고 선 생 모리츠의 아름다움과 처음 접했을 때 ‘미치광이’ 하인즈가 죽음의 벼랑 끝에 도사리고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눈이 녹기 전 그곳에 당도하느라 서두른 나는 준비된 관광 프로그램을 눈여겨볼 틈조차 없었다. 나는 스키를 타지 않는다. 지난 20년간 날마다 스쿼시를 한 나머지 무릎에 무리가 간 것이다.
그러나 핏줄이 드러날 정도로 피부가 하얀 북유럽인인 나는 모든 겨울 스포츠를 사랑한다. 생 모리츠는 나처럼 스키를 못 타는 사람들에게 환상적인 곳이다. 사실 이곳 겨울 관광객 가운데 상당수가 스키를 타러 오는 것은 아니다. 나는 화끈한 술에다 눈 덮인 야외에서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마지막 날 메인 이벤트는 내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방에 느긋하게 앉아 있다가 그 무시무시한 일정을 처음 읽게 된 것이다. 비수가 아닌 고드름이 심장에 꽂히는 듯했다. ‘금요일 정오, 코르빌리아에서 행글라이딩’이라고 쓰여 있는 게 아닌가.
스키를 못 타는 내가 행글라이딩을? 그것도 한겨울에 무슨 행글라이딩? 행글라이딩은 절벽에서 태평양으로 뛰어내리거나 아니면 잘못 착륙해 태평양 해안도로를 달리는 포르셰와 엉키고 마는 털북숭이 캘리포니아인들이나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왜 그 짓을? 따뜻한 지방에서나 어울리는 데다 죽을지도 모르는 모험을 피한다고 해서 생 모리츠에서의 추억이 훼손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마음 한쪽에서 푸념이 쏟아지고 다른 한쪽에선 저널리스트의 의무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칼날 같은 바위가 깔린 얼음 경사면 위 300m 상공에서 행글라이딩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코르빌리아 절벽에서 행글라이딩을 하다 유명을 달리해도 할 수 없지 않은가. 진리는 하나의 전쟁터다.
양심의 목소리가 이겼다. 승리 뒤에 두려움이 엄습하자 결정적 순간에 항상 그랬듯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이럴 때 어니스트 헤밍웨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대답은 거나하게 취한 뒤 만사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 뒤 멋진 시간을 보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생 모리츠에는 공포감을 잊게 해줄 만한 일이 많았다. 여기서 잠시 생 모리츠에 대해 자랑하는 게 도리일 듯싶다. 적어도 중세 이래 생 모리츠로 사람들이 꾸준히 몰려드는 것은 온천 때문이다. 치료 효과 때문만은 아니다. 1519년 교황 레오 10세는 이곳 온천에 들르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죄를 완전히 사해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생 모리츠에서는 봅슬레이에서부터 허스키한 목소리에 우아한 스키복을 입은 키 큰 여성까지 없는 게 없다. 여배우 우마 서먼 같은 여성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바트루트 팰리스 호텔(Badrutt’s Palace Hotel)도 명물이다. 19세기 후반 바트루트가 세운 이 호텔은 지금도 바트루트 일가에서 소유하고 있다. 호텔은 상상한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생 모리츠의 대표적인 호텔이라면 으리으리하고 갑부들만 머무는 곳일 것이라고들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인심도 좋고 고풍스럽다. 미로처럼 얽혀 있는 호텔의 구석구석에는 볼거리도 많다. 나는 처음 당도했을 때 동화 〈플라자 호텔의 엘로이즈〉(Eloise at The Plaza)에 등장하는 여섯 살 소녀 엘로이즈처럼 몇 시간이고 호텔 안을 배회했다.
바트루트 호텔은 유럽에서 보기 드물게 객실이 크고 넓다. 그러나 미국 라스베이거스 스타일의 객실과 달리 크고 넓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호화로우면서도 균형이 잡혀 있어 편안한 느낌을 준다. 모든 객실 창 밖으로 호수와 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낡은 발코니의 페인트가 벗겨져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운전기사가 딸린 자동차가 필요하다면 호텔에서 제공하는 68년형 호화 소형 롤스로이스 팬텀을 이용할 수 있다.
호텔 직원들은 매우 친절하고 살갑다. 대다수 ‘고급’ 호텔에서 기계적으로 미소 짓는 직원들과 판이하다.
직원들 모두 적어도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등 3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한다. 이탈리아 북부, 스위스 그라우뷘덴주의 라인 계곡에서 주로 쓰이는 로망슈어(Romansh)와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직원도 있다.
바트루트 호텔에는 옥에 티가 두 가지 있다. 먼저 브랜디 술잔을 들 수 있다. 술잔 주위에 ‘2.5센티리터’라고 새긴 띠가 둘러져 있는데 천박하게 보일지 모른다. 아니면 스위스적인 것일까. 둘째, 일본식 마사지다. 우리 부부가 결별하기 전날 밤 아내는 내 생일 선물이랍시고 일본식 마사지를 받게 해줬다.
땅딸막한 아시아 여성이 내 등을 마구 짓밟았다. 나와 곧 헤어질 아내가 일부러 그렇게 시켰던 것 같다. 그랬지만 ‘바트루트 호텔은 다르겠지’라는 생각에 생애 두 번째로 일본식 마사지를 받았다. 호텔 한쪽 구석에 위치한 마사지룸으로 갔더니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잘 안 가는 작자가 내 등을 짓누르고 오른쪽 엉덩이도 주무르는 게 아닌가. 웬일인지 왼쪽 엉덩이에는 손도 안 댔다. 안마사의 차별 대우가 짜증나 불쾌한 기분으로 나와버렸다.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생 모리츠에서 4개월 동안 겨울을 보내며 문화 ·패션 ·스포츠 ·사교 ·음악 그리고 식도락도 즐길 수 있다. 생 모리츠에서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황금기의 고풍스러운 겨울 휴양지를 현대판으로 경험할 수 있다. 압권은 물론 스키다. 생 모리츠에서 겨울에 가장 볼 만한 것이 화이트 터프(White Turf)라는 3주 동안의 축제다. 화이트 터프는 화강암처럼 단단히 얼어붙은 생 모리츠호(湖)의 빙판 위에서 열린다. 말이 끄는 스키로 빙원을 질주하는 스키쾨링(skikjoring)이라는 독특한 경주도 벌어진다. 이곳의 주민 몇몇은 축제 기간 호수 위에 자동차 500대와 1만2,000명의 인파, 세 무리의 조랑말이 들어서기도 한다고 들려줬다. 나는 한참 뒤에야 언젠가 얼음이 깨질지 모른다는 농담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보는 것보다 직접 참여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머리를 앞으로 하고 엎드린 자세로 타는 크레스타(Cresta) 썰매 경주, 일명 터보건(toboggan) 썰매 경주는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끝난 뒤였다. 총 1,770m에 달하는 봅슬레이 경기도 재미있을 듯하다. 봅슬레이는 발을 앞으로 하고 누워 탄다. 터보건겫씜슘뮌?모두 시내로부터 가까운 곳에서 열리기 때문에 매우 편리하다.
겨울 스포츠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개 썰매다. 얼어붙은 호수 위를 시속 24km로 내달리는 기분은 환상적이다. 다만 생각지도 못한 녀석들의 방귀 때문에 좀 당황했다. 한 줄에 6마리씩 2열 종대로 달리는 총 12마리의 강인한 견공들을 바라보노라면 우아하기 그지없지만 녀석들은 시도 때도 없이 방귀를 뀌어댄다. 이러다 오존층이 뚫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졌다. 군데군데 둔덕도 조심해야 한다. 개 썰매는 방석 위에 앉아 타지만 스프링 같은 완충장치는 없기 때문이다. 시속 24km로 달리는 나무 썰매에서 꼬리뼈가 어떻게 되는지는 직접 타봐야 안다.
이렇게 며칠 즐기는 사이 행글라이딩을 거의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다가오면서 호사 끝에 결국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재삼 깨닫게 됐다. 쏜살같이 흘러가는 목요일 밤, 나는 다시 공포에 사로잡혔다. 2차대전의 영웅 조지 패튼 장군이던가 헤밍웨이던가, 누군가 ‘영웅이란 상상력이 전혀 없는 겁쟁이’, 뭐 그런 식으로 말한 것 같다. 아니면 ‘겁쟁이란 상상력이 풍부한 영웅’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혹시 내가 한 말인가. 누가 말했든 무슨 상관이람…. 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세계 정상급 겁쟁이인데…. 그런 내가 내일 코르빌리아에서 행글라이딩을 한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건지, 호텔 측은 지구에서 보내는 내 마지막 날의 첫 행사로 헬기까지 대령했다. 나는 그저 경치 좋은 곳으로 데려가려니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옛 일본군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라도 되는양 헬기는 알프스의 산봉우리들 주위를 뱅뱅 휘젓고 다녔다. 이륙 후 몇 초 만에 길이 30m의 고드름들을 스치듯 빙하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것이었다. 아뿔싸!
헬기에서 알프스 남쪽 너머 이탈리아 땅이 보였다. 지금까지 본 광경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스페인에서 알프스 너머 로마로 진격한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도 2,200년 전 이 모습을 봤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불행히도 한니발이라는 이름만 떠올리면 영화 〈한니발〉(Hannibal)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앤서니 홉킨스의 악마 같은 이미지가 생각난다. 무드를 깨는 〈제3의 사나이〉 증후군이 발동하는 것이다.
얼음 세례를 받고 난 지 한 시간도 안 돼 케이블카로 죽음의 언덕 위까지 끌려 올라갔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남자들’은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혹시 아침밥에 무슨 약이라도 탄 것은 아닐까.
어쨌든 낭떠러지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절벽은 작지만 절벽 너머로 산이 호수까지 천길 만길 낭떠러지처럼 이어져 있다. 절벽 위에 매우 작고 낡은 행글라이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70년대풍의 버려진 옥외 의자나 땅에 떨어진 연과 같았다. 어두컴컴한 동굴 같은 곳에서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은 헝클어져 있고 눈은 광기로 빛났다. 옷도 따뜻하게 입지 않은 듯했다. 1968년 창설된 독일의 좌파 테러 조직 바더 마인호프 단(Baader-Meinhof Gang)을 찾아내기 위해 정찰하다 행글라이딩에 입문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이 사내가 바로 하인즈다. 그는 두 행글라이더 가운데 더 낡은 것을 가리키며 “이게 오늘 타실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나마 나아 보이는 행글라이더는 자기가 탈 것이란다. 나는 이처럼 무모한 행글라이딩에 ‘전문가가 동반할 것’이라는 말을 언뜻 들은 듯하다. 따라서 커다란 2인용에 비상 터보 프로펠러 엔진을 얹고 낙하산도 2개 갖춘 행글라이더이겠거니 생각했던 것 같다.
“그냥 저만 따라오세요, 아셨죠. 쉽습니다.” 하인즈가 말했다. 그와 바트루트 호텔 직원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순간 이러다 정말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허공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 날지. 내가 여기서 도대체 뭘 하는 걸까. 저 친구들은? 체면을 잃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은가.
“하하하.” 하인즈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서도 스위스인들의 농담을 들은 것이다. 바트루트 직원도 배꼽을 잡고 따라 웃었다. 하인즈는 “농담입니다. 저랑 같이 타시는 겁니다. 아셨죠”라고 말하곤 내 머리에 큰 헬멧을 씌우고 낡은 골조(骨組) 안으로 밀어넣다시피했다. 그는 골조를 행글라이더 동체에 고정시켰다. 아랫도리 급소가 뻐근했다. 그는 내 앞에 서서 조종간을 잡았다. “스키는 탈 줄 아시죠.”
“아뇨.”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하인즈가 유감스럽다는 듯 내뱉었다. “그럼 제 스키를 같이 타셔야죠, 그렇죠?”
아니, 그렇기는, 뭘 같이 타? 그러나 거부할 시간이 없었다. 하인즈의 ‘농담’이 긴장감을 다소 누그러뜨렸지만 사실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절벽 끝으로 미끄러져 갔다. 나는 그의 빌어먹을 스키 뒤에 서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윽고 우리는 절벽으로 떨어졌다. 바람과 만나자 푸른 저편으로 술 취한 가마우지 한 마리처럼 몸을 맡겼다. 그리고….
와! 하늘로 치솟고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하늘을 선회하는 매처럼 소리없이 부드럽게 날고 있었다. 비행기만 타면 난기류에 비행기가 약간 흔들려도 좌석을 꽉 잡던 나였다. 하지만 행글라이더는 안전한 느낌이었다. 덜렁거리는 내 두 다리 사이로 저 밑에 스키 슬로프를 따라 얽혀 있는 작은 막대기 같은 것들이 보였다. 뾰족한 바위와 나무들인 데도 장난감 같았다.
산사면 위의 300m 상공을 날고 있었지만 불과 몇cm 발 아래 멋진 모형물들이 펼쳐진 듯했다. 코르빌리아의 행글라이딩은 해발 2,550m에서 1,800m까지 750m를 하강한다. 고도가 급속히 낮아지지만 비단처럼 부드러운 하강이다. 하인즈가 가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날개에 장착된 원격 조종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나는 기꺼이 포즈를 취했다. 그의 목에 감겨 있던 두 팔을 들어올리기까지 했다. 행글라이더를 다시 타면 무서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순식간에 생 모리츠 상공으로 들어서자 생각이 달라졌다. 빌딩들은 더이상 장난감처럼 보이지 않았다. 들쭉날쭉한 거대한 철근과 콘크리트 더미였다. 저 위로 떨어지면 육포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공포감이 엄습했다. 그 순간 하인즈가 행글라이더를 360도 회전시켰다. 하강을 시작한 것이다. “비행기가 비스듬히 선회하면 날개는 부력을 덜 받죠. 안정되게 비행하려면 속도를 더 내야 합니다. 공기역학이죠. 안 그렇습니까.” 그가 미친 듯 선회 비행하며 외쳤다. 하지만 내게는 떨어져 죽지 않으려면 떨어져 죽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말로 해석됐다. 나는 공포로 몸이 굳었다. 바트루트 호텔의 뾰족 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하인즈는 미친 듯 낄낄거렸다. 그가 좋아하는 순간인 모양이다.
바트루트 호텔의 르 를레(Le Relais) 식당의 점심식사를 정확히 품평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나에게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새끼 비둘기 가슴살 구이에 백포도주 에글 데 뮈라이유(Aigle des Murailles), 살짝 튀긴 밤, 마른 버섯을 맛있게 먹었다. 백포도주는 기막힌 샤슬라 포도로 만든 생 모리츠의 특산품이다.
나는 부리나케 취리히로 건너가 또 다른 유명 호텔 보르 오 락(Baur au Lac)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우아한 고급 호텔 보르 오 락에는 매우 친절한 총지배인 마이클 레이가 있다. 겨울에 생 모리츠에서 주말을 보낼 생각이라면 보르 오 락도 한 번 들러 보는 게 좋다. 다시 공항으로, 일터로, 눈이 녹아 질퍽한 도시의 거리로 돌아가기 전 준비운동을 하기에는 그만인 아주 멋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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