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교황의 도전과 과제
새 교황의 도전과 과제
The Vision of Benedict XVI
지난 24년간 요제프 라칭거(78) 추기경은 거의 매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바티칸 성벽을 지나 검은 자갈이 깔린 성베드로 광장을 가로질러 출근했다. 때론 기자들이 다가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최근 논란에 대해 질문하면 그는 예의 바르게 듣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라칭거는 고독하고 내성적이며 상념에 잠겨 있을 때가 더 많았다.
그의 친구이자 이웃인 독일 디 벨트지의 바티칸 주재 특파원 폴 바데는 “그는 실제론 매우 수줍은 사람”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종종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면 그가 걷는 모습이 보였다. 검은색 성복 차림에 보디가드도 없는 그는 매우 외로워 보였다. 그는 거리를 가로질러 길가의 서점에 진열된 신간 서적들을 바라보곤 했다. 열렬한 독서광이자 작가이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후임자로 선출된 지난주 모든 의식이 끝나고 자신의 즉위를 축하하는 수많은 군중이 물러가자 그는 “책들을 점검하기 위해” 자신의 오랜 아파트를 다시 찾았다고 바데는 말했다. “서재는 그의 작은 제국이고, 책 전부를 직접 옮기고 싶어했다.”
새 교황은 약 11억 가톨릭 신자들로 이뤄진 훨씬 더 큰 제국을 다스리게 된다. 가톨릭의 교리·원칙·카리스마·의사소통·의식·재산·신학생, 그리고 성인을 갈망하는 모든 자들을 이끌어야 한다. 새 교황이 자신의 제국을 이끄는 방식은 인간의 미래에 중요한 문제들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슬람의 도전, 에이즈의 재앙, 유럽연합(EU)의 모습뿐 아니라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 간의 극심한 분열 등이 그에게 주어진 과제다.
미국은 베네딕토 16세가 벌일 것으로 예상되는 세속주의와의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전선이다. 성직자의 독신주의와 성체 수여 등 보다 좁은 의미의 교회 내 문제뿐 아니라 피임·콘돔·낙태·동성애·동성 결혼 등 광범한 문제들을 둘러싸고 미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첨예한 논쟁은 누가 교황이 되든 간에 격화될 것이다. 그러나 1981년 이래 요한 바오로 2세를 위해 가톨릭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는 역할을 맡아온 라칭거의 판단은 다른 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의 판단은 가톨릭계를 양분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진정한 신자들과, 일부 교리는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교리에 대해선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신자들의 양분이다. 그러나 미국의 가톨릭 신자 대부분은 후자의 범주에 들지 모른다.
지난주 갤럽이 ‘도덕적 난제들’에 대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4%가 교회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양심을 따르겠다고 대답했다. 반면 교리를 곧이곧대로 따르겠다고 대답한 비율은 약 20%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완강한 정통 교리를 지지하는 강력한 집단(라칭거도 그중 한 명이다)은 일부 교리만 수용하는 평범한 가톨릭 신자들에겐 교회의 문을 닫는 게 낫다는 뜻을 비췄다. 다시 말해 교리를 부분적으로 수용해도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심정적으론 교리를 존중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않는 신도들에게 말이다.
일련의 인터뷰를 묶어 1996년 간행한 저서 ‘지상의 소금’(Salt of the Earth)에서 라칭거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대중적인 교회라는 개념을 버려야 할지 모른다. 우리가 가톨릭 역사상 예전과 매우 다른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을 수는 있다. 그래서 기독교가 마치 (마태복음 13장 31절에 나오는) 겨자씨처럼 오로지 작고 별 의미 없는 집단의 형태로 존속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러면서도 전력을 다해 악에 반대하며 이 땅에 선(善)을 부를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가 겨우 존재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신자 수가 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덜 전통적인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그 같은 사고에 대해 ‘진정한’ 신자와 ‘부실한’ 신자 집단을 명백히 구분 짓기 위한 ‘순수성 테스트’로 몰아가기 위한 것으로 여긴다. 베네딕토 16세 아래의 보다 엄격한 교회가 앞으로는 보수적으로 교리를 따르는 이에게만 성찬식을 허용할까? 이 논쟁은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낙태 찬성 입장을 표명한 존 케리 민주당 후보에게 성체 수여가 허용돼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과도한 정치적 문제로 비화됐다. 라칭거는 자신의 양심을 점검하는 자만이 성체를 수여받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네딕토 16세의 시대를 사는 미국인들은 자신의 양심을 정당화할 방법을 찾는 순간이 많아질지 모른다.
부드러운 말투의 베네딕토 16세는 독일 바이에른 출신의 신학 교수였다. 백발을 한 그는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일지 모른다. 그러나 흰색 성복을 착용한 이 지성인은 교회의 힘은 신도 수가 아니라 교리의 힘에 달려 있다고 확신한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핵심적 교리의 ‘확고한 진실’에 있다고 믿는다. 그가 그 메시지를 얼마나 자신있게 전할지는 금세기의 역사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미국인 다수는 새 교황이 시급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한다. 추기경 시절 보여준 것보다 온건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베네딕토 16세는 쇼맨십을 타고난 사람은 아니지만 미디어의 힘과 요한 바오로 2세 이후 미디어가 교회에 갖는 중요성을 이해한다. 연극 배우 출신인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역동적인 힘과 나중엔 육체적 고통까지 이겨낸 의지력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4반세기에 걸친 재위 기간에 그는 교황직 수행의 무대를 전 세계로 넓혔다. 반면 베네딕토 16세는 보다 고독한 성격의 소유자다.
하지만 지금까지 언론에 비친 모습이나 그가 교황에 선출된 뒤 한 주 동안 추기경들이 기자들에게 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면에 대해 말한 것을 종합해보면 신임 교황은 교황직에 따르는 요구가 1978년 당시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노터데임대 역사학 교수인 로버트 설리번 신부는 “그는 ‘전통주의자’이고 ‘유럽 출신’이며, ‘가톨릭 신자’이자 ‘지성인’이다.
따라서 그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를 바티칸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으로 보는 시각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고 설리번 교수는 시사했다. 새 교황이 앞으로 언론을 얼마나 잘 다룰 것인가가 그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에 큰 영향이 미칠 것이다. 그의 목표는 요한 바오로 2세처럼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상한 아버지 같은 모습을 통해, 정작 교황의 교리엔 수긍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존경한 많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모든 교황직이 그렇듯 그의 교황직도 비밀리에 시작됐다. 115명의 추기경들이 지난주 요한 바오로 2세의 후임자 선출을 위해 시스티나 성당 안으로 들어갈 당시 다수는 라칭거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그들은 신앙심에 대한 그의 편협한 해석과 교회에 대한 지나치게 중앙집권적인 비전을 거부했다. 그러나 라칭거는 이미 핵심적인 목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한 뒤 며칠 동안 그는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로마에 운집한 수백만 군중 앞에서 작고한 교황에 대한 감동적인 기억을 되살려내며 장례식에서 설교했다. 그러곤 새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추기경들 간의 비밀회의)를 열었고, 주교로 임명된 사람들을 위해 영적인 지침을 제시했다.
콘클라베가 시작되기 전 일주일간의 공식적인 침묵 기간에 추기경들은 서로 상의하고 기도했다. 콘클라베 개막에 앞서 라칭거는 기독교인들을 “마르크스주의에서 진보주의로, 그리고 방탕주의로까지” 몰고간 교리와 이념의 새로운 바람에 대해 경고했다. 그의 개막 연설은 거의 선거 유세처럼 들렸다. 첫 번째 투표에서 라칭거는 밀란 대주교직을 은퇴한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예수회 추기경과 비슷한 약 40표를 얻었다. 역시 예수회 출신인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과 로마 주교 대리인 카밀로 루이니 추기경이 각각 12표를 조금 넘게 얻었고, 나머지 후보들이 약간씩 표를 얻었다.
4월 19일 아침 루이니의 표가 라칭거에게로 넘어가면서 그에 대한 지지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라칭거는 세 번째 투표가 접전을 기록한 뒤 네 번째 투표에서 교황으로 선출됐다. 코맥 머피 오코노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과반수에 해당하는 77 내지 78표가 나오는 순간 모두 잠시 숨을 죽인 뒤 박수를 쳤다. [라칭거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기도를 했던 게 분명하지만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이 같은 순간이 닥쳐올 수 있음을 그도 모를 리 없지만 막상 닥치면 매우 특별한 순간이다.”
투표 용지를 태우며 나는 연기가 시스티나 성당의 굴뚝 위로 솟았지만 베드로 광장에 모인 군중은 그 신호의 의미를 확신할 수 없었다. 순간 대성당의 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새 교황의 모습을 보기 위해 길가에서 광장 안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일부 사람들은 라칭거가 베네딕토 16세로 즉위해 발코니에 나타나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 바데는 라칭거 스스로가 보여준 변화에 “놀랐다”며 “그가 그토록 승리감에 들뜬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새 교황은 엄청난 자신감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동유럽의 해방과 아시아·아프리카에서의 교세 확장에 힘쓴 지 4반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 가톨릭 교회는 유럽·미국·중남미에서의 교리 회복이란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라칭거는 이렇게 썼다. “세속주의가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탈바꿈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정치를 통해 스스로를 내세우고 가톨릭이나 기독교의 비전과는 동떨어진, 순전히 개인적 차원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하고 있다.”
조지 위겔과 같은 미국 가톨릭계 지식인들은 미국에서도 같은 추세가 감지된다고 주장한다. 근저 ‘라데팡스의 신개선문과 노트르담 성당’에서 그는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유럽 문제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말 프랑스에서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사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프랑스인은 7.7%에 불과하며 15.2%는 이따금씩, 41%는 아예 참석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종교가 없다고 대답한 사람도 27%나 됐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신앙심이 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타운대의 한 연구소가 최근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가톨릭 신자 중 지난 7일간 미사에 참석한 적이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67%(1965년)에서 45%로 줄었다. 이 같은 감소는 교회의 재정과 심각한 사제 확보 문제 등 각종 현안에 영향을 미치게 되며 그런 문제는 새 교황의 과제다. 디트로이트 교구의 애덤 조셉 메이드 추기경은 “카롤 보이티와(요한 바오로 2세의 본명)가 동유럽에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듯 새 교황도 서유럽에서 부름을 받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며 자신의 족적을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새 교황의 호칭도 바로 그런 목표를 잘 말해준다. 베네딕토 15세는 유럽을 분열시킨 1차 세계대전 당시 평화중재자 역할을 하려고 애썼다. 1700년대의 베네딕토 14세는 계몽운동의 회의주의와 이성주의에 맞섰다. 그리고 6세기께 성 베네딕토는 유럽 기독교 문명의 빛을 보존하는 데 일조한 수도원을 세웠다. 새 베네딕토가 진정코 의기양양하게 보였다면 그것은 바로 이 특별한 임무(서방의 재복음화)를 달성하기 위해 평생 훈련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라칭거는 독일에서 태어나 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느낌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이 독실한 바이에른의 중심부에서 태어났다. 낮은 구릉의 목초지와 외딴 마을이 있는 곳이었다. 라칭거의 고향 트라운슈타인의 성오스발트 교구 신부인 제바스티안 하인들은 “이곳은 신앙이 자연 풍광의 일부”라며 “바이에른 주민들은 시골의 아름다움 속에서 하느님의 창조를 깨닫는다”고 말했다. 어디를 가도 언덕 위엔 성당이 있고, 수호 성인이나 성모 마리아를 모시는 성소가 시골길을 따라 늘어서 있다.
그러나 라칭거가 어렸던 시절 이런 독실한 신앙 세계에 아돌프 히틀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치가 정권을 잡았을 때 라칭거는 겨우 여섯 살이었다. 50대의 시골 경찰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히틀러가 독일을 전쟁으로 몰고 갈 것으로 믿고 히틀러를 그리스도의 적으로 불렀다. 라칭거는 회고록에서 젊은 나치당원들이 교회가 죄와 구원에 대해 말하는 것을 조롱했다고 회고했다. 그들은 가톨릭이 유대인과 로마인들에 의해 강요된 이질적 신앙의 집합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숲속에서 보다 이교도적인 아리아안 식으로 종교의식을 거행하길 좋아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라칭거는 독일군을 직접 경험했다. 어린 소년이었던 그에겐 무력함과 좌절의 냉혹한 경험이었다. 그는 열두 살의 나이로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941년 14세가 되던 해 강제로 나치의 청소년 조직인 히틀러 유겐트 대원이 됐다. 17세에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 부근에서 유대인 강제노역자들과 함께 방어용 토루와 대전차 장애물을 건설했다. 전쟁 말기에 그의 고향으로 미군이 진주해오자 라칭거는 독일군 보병에 입대했다가 탈영했다. 미군은 그에게 독일군 군복을 다시 입힌 뒤 그를 야외 포로수용소에 한 달 반 동안 구금했다.
라칭거는 원래 신학 교수를 꿈꿨다. 신부라는 소명을 찾은 것은 나중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수줍음을 많이 탔고 비현실적이었다. 스포츠나 조직 운영, 행정에는 재능이 없었다. 과연 내가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1951년 사제 서품을 받고 이미 자신을 실망시키고 있던 가톨릭계에 들어갔다. 오스트리아인 신학생으로 나중에 라칭거의 보좌관이 된 지그프리트 비덴호퍼는 라칭거가 나치와 전쟁의 도적적·육체적 고통이 끝나면 기독교가 부흥할 것으로 믿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목격한 것은 마비되고 경직된 교회와 ‘너무 구속이 심하고 규정이 많은’ 교황청이었다.
1959년 그는 본대학의 강사로서 이런 문제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로써 라칭거는 현지의 스타로 부상했고, 그의 강의실은 늘 만원이었다. 현재 신학 교수인 막스 제클러는 “그는 천사같이 아름다운 목소리, 명확한 설명, 깊은 지식, 독실한 신앙으로 우리를 매료시켰다”고 말했다. 라칭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고문으로 선출됐다. 그 뒤 1967년과 68년 튀빙겐대학에 강의하러 갔을 때도 그는 공의회의 기억 때문에 여전히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튀빙겐대학을 휩쓸던 급진주의는 그에게 두려움과 쓰라림을 안겨 주었다. 학생 방해꾼들은 그의 강의를 중단시켰다. 학생회는 복음서를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는 “집단 사기”라고 비난했을 뿐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를 “고통을 가학·피학적으로 찬미하는 상징”으로까지 불렀다. 학생들의 그런 시위에서 라칭거는 30년 전 나치 독설의 메아리를 들었다.
라칭거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한 가톨릭 신앙이 정치적 이념 때문에 왜곡되거나 희석됐다고 보고, 정치적 이념을 혐오했다. 그것은 그가 1977년 추기경 겸 뮌헨 대주교가 되면서 그의 사상적 중심이 됐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그를 신앙교리성 장관에 임명했다. 과거 대심문관(Grand Inquisitor)이란 호칭으로 불리던 자리였다. 물론 라칭거의 시대에는 고문(拷問)이 없었다. 그러나 라칭거는 이념적인 면에선 냉혹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해방신학’이라 불리던 시대 사조가 라틴 아메리카 신부들과 주교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교회는 빈자들과 일체감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혁명적인 변화를 위해 그들을 정치 세력으로 조직화하는 데 도움을 줘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에 따라 일부 급진파 신부들과 마르크스주의 게릴라들 사이에 연맹이 형성됐다. 라칭거의 도움으로 요한 바오로 2세는 해방신학 운동을 탄압했다.
추기경으로서 라칭거가 탄압에 찬성했다면 베네딕토 16세로서도 당연히 그럴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요한 바오로 2세 아래서 맡은 라칭거의 역할과 교황으로서 그의 역할은 별개다. 그는 이제 교황이 됐기 때문에 좀 더 성직자다운 자세를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전통을 중시하지 않는 미국 가톨릭계에 베네딕토 16세는 당혹스럽거나 심지어 성가신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그는 낙태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동성 간 결혼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베네딕토 16세는 이미 동성 결혼뿐 아니라 동성애자들의 입양을 허용하는 새로운 스페인의 법률을 비난했다). 게다가 조만간 여성들이 사제로 서품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베네딕토 16세가 다른 문제들에선 좀 더 융통성을 보일지 모른다는 조짐을 발견하고 있다. 그가 교황에 선출된 이후 타종교에 대한 그의 언급이 이미 부드러워졌다. 신앙교리성 장관으로서 라칭거는 예수 그리스도와 가톨릭이 다른 모든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은 그의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베네딕토 16세로서 행한 첫 강론에서 의도적으로 타 종교 신자들과 무신자들을 포용했다. “가톨릭이 그들과 개방되고 진지한 대화를 계속하길 원한다는 점을 확신시키기 위해”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의 행동이 그의 말과 일치할까? 미국인들은 예의주시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베네딕토 16세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한 인물이란 것을 알게 될지 모른다. 그것을 시사하는 한 가지 예가 있다. 미국인 가톨릭 신자 중 다수는 2002년 성직자 섹스 스캔들이 발생하자 바티칸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데 대해 지금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라칭거는 미국 가톨릭 교회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미국의 주교들에게 그런 문제가 드러나면 즉시 로마에 통보토록 했다(동시에 그는 언론이 그 문제에 관심을 갖는 데 대해서도 질타했다). 앞으로 그런 사건이 터지면 베네딕토 16세가 관용적인 태도를 취할 것으로 내다보는 관측통은 거의 없다.
급진과 보수라는 신앙 스펙트럼의 양 극단에서 중간에 위치한 대다수 가톨릭 신자들은 믿음을 가진 자라면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님이 새 목자를 어디로 인도하는지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과 뜻이 달라도 교회를 완전히 떠나려 하지 않는다. 보수파로 유명한 리처드 존 노이하우스 신부는 “아무리 체제에 화가 난 신자라도 가톨릭 신자이길 포기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그들을 쫓아내고 싶어할까. 그의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몬시뇨르(고위 성직자에 대한 경칭으로 교황이 추기경들을 부를 때 사용하는 명칭) 어윈 가츠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를 가족처럼 잘 안다. 물론 그에게 실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히 강경파들이 그렇다. 그는 강직한 성격이지만 융통성이 없지는 않다. 강하면 얼마든지 관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교황으로서 집전한 첫 미사에서 베네딕토 16세는 막중한 책무에 자신의 나약함을 느끼지만 “신자들을 버리지 않고 늘 인도해주시는” 주님에게 의지하겠다고 밝혔다. 바로 그것이 앞으로 교황과 신자 둘 다를 지탱해줄 수 있는 희망이다.
With STEFAN THEIL in Traunstein,
EDWARD PENTIN
and ROBERT BLAIR KAISER in Rome,
JULIE SCELFO in New York, ERIC PAPE
in Paris and JOSEPH CONTRERAS
in Mexico City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지난 24년간 요제프 라칭거(78) 추기경은 거의 매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바티칸 성벽을 지나 검은 자갈이 깔린 성베드로 광장을 가로질러 출근했다. 때론 기자들이 다가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최근 논란에 대해 질문하면 그는 예의 바르게 듣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라칭거는 고독하고 내성적이며 상념에 잠겨 있을 때가 더 많았다.
그의 친구이자 이웃인 독일 디 벨트지의 바티칸 주재 특파원 폴 바데는 “그는 실제론 매우 수줍은 사람”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종종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면 그가 걷는 모습이 보였다. 검은색 성복 차림에 보디가드도 없는 그는 매우 외로워 보였다. 그는 거리를 가로질러 길가의 서점에 진열된 신간 서적들을 바라보곤 했다. 열렬한 독서광이자 작가이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후임자로 선출된 지난주 모든 의식이 끝나고 자신의 즉위를 축하하는 수많은 군중이 물러가자 그는 “책들을 점검하기 위해” 자신의 오랜 아파트를 다시 찾았다고 바데는 말했다. “서재는 그의 작은 제국이고, 책 전부를 직접 옮기고 싶어했다.”
새 교황은 약 11억 가톨릭 신자들로 이뤄진 훨씬 더 큰 제국을 다스리게 된다. 가톨릭의 교리·원칙·카리스마·의사소통·의식·재산·신학생, 그리고 성인을 갈망하는 모든 자들을 이끌어야 한다. 새 교황이 자신의 제국을 이끄는 방식은 인간의 미래에 중요한 문제들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슬람의 도전, 에이즈의 재앙, 유럽연합(EU)의 모습뿐 아니라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 간의 극심한 분열 등이 그에게 주어진 과제다.
미국은 베네딕토 16세가 벌일 것으로 예상되는 세속주의와의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전선이다. 성직자의 독신주의와 성체 수여 등 보다 좁은 의미의 교회 내 문제뿐 아니라 피임·콘돔·낙태·동성애·동성 결혼 등 광범한 문제들을 둘러싸고 미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첨예한 논쟁은 누가 교황이 되든 간에 격화될 것이다. 그러나 1981년 이래 요한 바오로 2세를 위해 가톨릭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는 역할을 맡아온 라칭거의 판단은 다른 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의 판단은 가톨릭계를 양분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진정한 신자들과, 일부 교리는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교리에 대해선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신자들의 양분이다. 그러나 미국의 가톨릭 신자 대부분은 후자의 범주에 들지 모른다.
지난주 갤럽이 ‘도덕적 난제들’에 대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4%가 교회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양심을 따르겠다고 대답했다. 반면 교리를 곧이곧대로 따르겠다고 대답한 비율은 약 20%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완강한 정통 교리를 지지하는 강력한 집단(라칭거도 그중 한 명이다)은 일부 교리만 수용하는 평범한 가톨릭 신자들에겐 교회의 문을 닫는 게 낫다는 뜻을 비췄다. 다시 말해 교리를 부분적으로 수용해도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심정적으론 교리를 존중하면서도 실행에 옮기지 않는 신도들에게 말이다.
일련의 인터뷰를 묶어 1996년 간행한 저서 ‘지상의 소금’(Salt of the Earth)에서 라칭거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대중적인 교회라는 개념을 버려야 할지 모른다. 우리가 가톨릭 역사상 예전과 매우 다른 새로운 시대를 맞고 있을 수는 있다. 그래서 기독교가 마치 (마태복음 13장 31절에 나오는) 겨자씨처럼 오로지 작고 별 의미 없는 집단의 형태로 존속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러면서도 전력을 다해 악에 반대하며 이 땅에 선(善)을 부를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가 겨우 존재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신자 수가 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덜 전통적인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그 같은 사고에 대해 ‘진정한’ 신자와 ‘부실한’ 신자 집단을 명백히 구분 짓기 위한 ‘순수성 테스트’로 몰아가기 위한 것으로 여긴다. 베네딕토 16세 아래의 보다 엄격한 교회가 앞으로는 보수적으로 교리를 따르는 이에게만 성찬식을 허용할까? 이 논쟁은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낙태 찬성 입장을 표명한 존 케리 민주당 후보에게 성체 수여가 허용돼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과도한 정치적 문제로 비화됐다. 라칭거는 자신의 양심을 점검하는 자만이 성체를 수여받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네딕토 16세의 시대를 사는 미국인들은 자신의 양심을 정당화할 방법을 찾는 순간이 많아질지 모른다.
부드러운 말투의 베네딕토 16세는 독일 바이에른 출신의 신학 교수였다. 백발을 한 그는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일지 모른다. 그러나 흰색 성복을 착용한 이 지성인은 교회의 힘은 신도 수가 아니라 교리의 힘에 달려 있다고 확신한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핵심적 교리의 ‘확고한 진실’에 있다고 믿는다. 그가 그 메시지를 얼마나 자신있게 전할지는 금세기의 역사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미국인 다수는 새 교황이 시급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한다. 추기경 시절 보여준 것보다 온건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베네딕토 16세는 쇼맨십을 타고난 사람은 아니지만 미디어의 힘과 요한 바오로 2세 이후 미디어가 교회에 갖는 중요성을 이해한다. 연극 배우 출신인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역동적인 힘과 나중엔 육체적 고통까지 이겨낸 의지력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4반세기에 걸친 재위 기간에 그는 교황직 수행의 무대를 전 세계로 넓혔다. 반면 베네딕토 16세는 보다 고독한 성격의 소유자다.
하지만 지금까지 언론에 비친 모습이나 그가 교황에 선출된 뒤 한 주 동안 추기경들이 기자들에게 그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면에 대해 말한 것을 종합해보면 신임 교황은 교황직에 따르는 요구가 1978년 당시보다 더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노터데임대 역사학 교수인 로버트 설리번 신부는 “그는 ‘전통주의자’이고 ‘유럽 출신’이며, ‘가톨릭 신자’이자 ‘지성인’이다.
따라서 그 모두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를 바티칸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으로 보는 시각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고 설리번 교수는 시사했다. 새 교황이 앞으로 언론을 얼마나 잘 다룰 것인가가 그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에 큰 영향이 미칠 것이다. 그의 목표는 요한 바오로 2세처럼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상한 아버지 같은 모습을 통해, 정작 교황의 교리엔 수긍하지 않으면서도 그를 존경한 많은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모든 교황직이 그렇듯 그의 교황직도 비밀리에 시작됐다. 115명의 추기경들이 지난주 요한 바오로 2세의 후임자 선출을 위해 시스티나 성당 안으로 들어갈 당시 다수는 라칭거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그들은 신앙심에 대한 그의 편협한 해석과 교회에 대한 지나치게 중앙집권적인 비전을 거부했다. 그러나 라칭거는 이미 핵심적인 목자로 떠오르고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한 뒤 며칠 동안 그는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로마에 운집한 수백만 군중 앞에서 작고한 교황에 대한 감동적인 기억을 되살려내며 장례식에서 설교했다. 그러곤 새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추기경들 간의 비밀회의)를 열었고, 주교로 임명된 사람들을 위해 영적인 지침을 제시했다.
콘클라베가 시작되기 전 일주일간의 공식적인 침묵 기간에 추기경들은 서로 상의하고 기도했다. 콘클라베 개막에 앞서 라칭거는 기독교인들을 “마르크스주의에서 진보주의로, 그리고 방탕주의로까지” 몰고간 교리와 이념의 새로운 바람에 대해 경고했다. 그의 개막 연설은 거의 선거 유세처럼 들렸다. 첫 번째 투표에서 라칭거는 밀란 대주교직을 은퇴한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예수회 추기경과 비슷한 약 40표를 얻었다. 역시 예수회 출신인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리오 추기경과 로마 주교 대리인 카밀로 루이니 추기경이 각각 12표를 조금 넘게 얻었고, 나머지 후보들이 약간씩 표를 얻었다.
4월 19일 아침 루이니의 표가 라칭거에게로 넘어가면서 그에 대한 지지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라칭거는 세 번째 투표가 접전을 기록한 뒤 네 번째 투표에서 교황으로 선출됐다. 코맥 머피 오코노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과반수에 해당하는 77 내지 78표가 나오는 순간 모두 잠시 숨을 죽인 뒤 박수를 쳤다. [라칭거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기도를 했던 게 분명하지만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이 같은 순간이 닥쳐올 수 있음을 그도 모를 리 없지만 막상 닥치면 매우 특별한 순간이다.”
투표 용지를 태우며 나는 연기가 시스티나 성당의 굴뚝 위로 솟았지만 베드로 광장에 모인 군중은 그 신호의 의미를 확신할 수 없었다. 순간 대성당의 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새 교황의 모습을 보기 위해 길가에서 광장 안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일부 사람들은 라칭거가 베네딕토 16세로 즉위해 발코니에 나타나자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 바데는 라칭거 스스로가 보여준 변화에 “놀랐다”며 “그가 그토록 승리감에 들뜬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새 교황은 엄청난 자신감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동유럽의 해방과 아시아·아프리카에서의 교세 확장에 힘쓴 지 4반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 가톨릭 교회는 유럽·미국·중남미에서의 교리 회복이란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라칭거는 이렇게 썼다. “세속주의가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탈바꿈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정치를 통해 스스로를 내세우고 가톨릭이나 기독교의 비전과는 동떨어진, 순전히 개인적 차원의 이데올로기로 변모하고 있다.”
조지 위겔과 같은 미국 가톨릭계 지식인들은 미국에서도 같은 추세가 감지된다고 주장한다. 근저 ‘라데팡스의 신개선문과 노트르담 성당’에서 그는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유럽 문제는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말 프랑스에서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사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프랑스인은 7.7%에 불과하며 15.2%는 이따금씩, 41%는 아예 참석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종교가 없다고 대답한 사람도 27%나 됐다. 미국은 상대적으로 신앙심이 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타운대의 한 연구소가 최근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가톨릭 신자 중 지난 7일간 미사에 참석한 적이 있다고 대답한 사람은 67%(1965년)에서 45%로 줄었다. 이 같은 감소는 교회의 재정과 심각한 사제 확보 문제 등 각종 현안에 영향을 미치게 되며 그런 문제는 새 교황의 과제다. 디트로이트 교구의 애덤 조셉 메이드 추기경은 “카롤 보이티와(요한 바오로 2세의 본명)가 동유럽에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듯 새 교황도 서유럽에서 부름을 받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며 자신의 족적을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새 교황의 호칭도 바로 그런 목표를 잘 말해준다. 베네딕토 15세는 유럽을 분열시킨 1차 세계대전 당시 평화중재자 역할을 하려고 애썼다. 1700년대의 베네딕토 14세는 계몽운동의 회의주의와 이성주의에 맞섰다. 그리고 6세기께 성 베네딕토는 유럽 기독교 문명의 빛을 보존하는 데 일조한 수도원을 세웠다. 새 베네딕토가 진정코 의기양양하게 보였다면 그것은 바로 이 특별한 임무(서방의 재복음화)를 달성하기 위해 평생 훈련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라칭거는 독일에서 태어나 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느낌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이 독실한 바이에른의 중심부에서 태어났다. 낮은 구릉의 목초지와 외딴 마을이 있는 곳이었다. 라칭거의 고향 트라운슈타인의 성오스발트 교구 신부인 제바스티안 하인들은 “이곳은 신앙이 자연 풍광의 일부”라며 “바이에른 주민들은 시골의 아름다움 속에서 하느님의 창조를 깨닫는다”고 말했다. 어디를 가도 언덕 위엔 성당이 있고, 수호 성인이나 성모 마리아를 모시는 성소가 시골길을 따라 늘어서 있다.
그러나 라칭거가 어렸던 시절 이런 독실한 신앙 세계에 아돌프 히틀러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치가 정권을 잡았을 때 라칭거는 겨우 여섯 살이었다. 50대의 시골 경찰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히틀러가 독일을 전쟁으로 몰고 갈 것으로 믿고 히틀러를 그리스도의 적으로 불렀다. 라칭거는 회고록에서 젊은 나치당원들이 교회가 죄와 구원에 대해 말하는 것을 조롱했다고 회고했다. 그들은 가톨릭이 유대인과 로마인들에 의해 강요된 이질적 신앙의 집합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숲속에서 보다 이교도적인 아리아안 식으로 종교의식을 거행하길 좋아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라칭거는 독일군을 직접 경험했다. 어린 소년이었던 그에겐 무력함과 좌절의 냉혹한 경험이었다. 그는 열두 살의 나이로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941년 14세가 되던 해 강제로 나치의 청소년 조직인 히틀러 유겐트 대원이 됐다. 17세에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경 부근에서 유대인 강제노역자들과 함께 방어용 토루와 대전차 장애물을 건설했다. 전쟁 말기에 그의 고향으로 미군이 진주해오자 라칭거는 독일군 보병에 입대했다가 탈영했다. 미군은 그에게 독일군 군복을 다시 입힌 뒤 그를 야외 포로수용소에 한 달 반 동안 구금했다.
라칭거는 원래 신학 교수를 꿈꿨다. 신부라는 소명을 찾은 것은 나중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수줍음을 많이 탔고 비현실적이었다. 스포츠나 조직 운영, 행정에는 재능이 없었다. 과연 내가 다른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1951년 사제 서품을 받고 이미 자신을 실망시키고 있던 가톨릭계에 들어갔다. 오스트리아인 신학생으로 나중에 라칭거의 보좌관이 된 지그프리트 비덴호퍼는 라칭거가 나치와 전쟁의 도적적·육체적 고통이 끝나면 기독교가 부흥할 것으로 믿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목격한 것은 마비되고 경직된 교회와 ‘너무 구속이 심하고 규정이 많은’ 교황청이었다.
1959년 그는 본대학의 강사로서 이런 문제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로써 라칭거는 현지의 스타로 부상했고, 그의 강의실은 늘 만원이었다. 현재 신학 교수인 막스 제클러는 “그는 천사같이 아름다운 목소리, 명확한 설명, 깊은 지식, 독실한 신앙으로 우리를 매료시켰다”고 말했다. 라칭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고문으로 선출됐다. 그 뒤 1967년과 68년 튀빙겐대학에 강의하러 갔을 때도 그는 공의회의 기억 때문에 여전히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튀빙겐대학을 휩쓸던 급진주의는 그에게 두려움과 쓰라림을 안겨 주었다. 학생 방해꾼들은 그의 강의를 중단시켰다. 학생회는 복음서를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는 “집단 사기”라고 비난했을 뿐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를 “고통을 가학·피학적으로 찬미하는 상징”으로까지 불렀다. 학생들의 그런 시위에서 라칭거는 30년 전 나치 독설의 메아리를 들었다.
라칭거는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한 가톨릭 신앙이 정치적 이념 때문에 왜곡되거나 희석됐다고 보고, 정치적 이념을 혐오했다. 그것은 그가 1977년 추기경 겸 뮌헨 대주교가 되면서 그의 사상적 중심이 됐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그를 신앙교리성 장관에 임명했다. 과거 대심문관(Grand Inquisitor)이란 호칭으로 불리던 자리였다. 물론 라칭거의 시대에는 고문(拷問)이 없었다. 그러나 라칭거는 이념적인 면에선 냉혹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해방신학’이라 불리던 시대 사조가 라틴 아메리카 신부들과 주교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교회는 빈자들과 일체감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혁명적인 변화를 위해 그들을 정치 세력으로 조직화하는 데 도움을 줘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에 따라 일부 급진파 신부들과 마르크스주의 게릴라들 사이에 연맹이 형성됐다. 라칭거의 도움으로 요한 바오로 2세는 해방신학 운동을 탄압했다.
추기경으로서 라칭거가 탄압에 찬성했다면 베네딕토 16세로서도 당연히 그럴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요한 바오로 2세 아래서 맡은 라칭거의 역할과 교황으로서 그의 역할은 별개다. 그는 이제 교황이 됐기 때문에 좀 더 성직자다운 자세를 취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전통을 중시하지 않는 미국 가톨릭계에 베네딕토 16세는 당혹스럽거나 심지어 성가신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그는 낙태에 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동성 간 결혼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베네딕토 16세는 이미 동성 결혼뿐 아니라 동성애자들의 입양을 허용하는 새로운 스페인의 법률을 비난했다). 게다가 조만간 여성들이 사제로 서품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베네딕토 16세가 다른 문제들에선 좀 더 융통성을 보일지 모른다는 조짐을 발견하고 있다. 그가 교황에 선출된 이후 타종교에 대한 그의 언급이 이미 부드러워졌다. 신앙교리성 장관으로서 라칭거는 예수 그리스도와 가톨릭이 다른 모든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은 그의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베네딕토 16세로서 행한 첫 강론에서 의도적으로 타 종교 신자들과 무신자들을 포용했다. “가톨릭이 그들과 개방되고 진지한 대화를 계속하길 원한다는 점을 확신시키기 위해”라고 그는 설명했다.
그의 행동이 그의 말과 일치할까? 미국인들은 예의주시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베네딕토 16세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한 인물이란 것을 알게 될지 모른다. 그것을 시사하는 한 가지 예가 있다. 미국인 가톨릭 신자 중 다수는 2002년 성직자 섹스 스캔들이 발생하자 바티칸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은 데 대해 지금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라칭거는 미국 가톨릭 교회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미국의 주교들에게 그런 문제가 드러나면 즉시 로마에 통보토록 했다(동시에 그는 언론이 그 문제에 관심을 갖는 데 대해서도 질타했다). 앞으로 그런 사건이 터지면 베네딕토 16세가 관용적인 태도를 취할 것으로 내다보는 관측통은 거의 없다.
급진과 보수라는 신앙 스펙트럼의 양 극단에서 중간에 위치한 대다수 가톨릭 신자들은 믿음을 가진 자라면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님이 새 목자를 어디로 인도하는지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과 뜻이 달라도 교회를 완전히 떠나려 하지 않는다. 보수파로 유명한 리처드 존 노이하우스 신부는 “아무리 체제에 화가 난 신자라도 가톨릭 신자이길 포기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그들을 쫓아내고 싶어할까. 그의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몬시뇨르(고위 성직자에 대한 경칭으로 교황이 추기경들을 부를 때 사용하는 명칭) 어윈 가츠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를 가족처럼 잘 안다. 물론 그에게 실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히 강경파들이 그렇다. 그는 강직한 성격이지만 융통성이 없지는 않다. 강하면 얼마든지 관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교황으로서 집전한 첫 미사에서 베네딕토 16세는 막중한 책무에 자신의 나약함을 느끼지만 “신자들을 버리지 않고 늘 인도해주시는” 주님에게 의지하겠다고 밝혔다. 바로 그것이 앞으로 교황과 신자 둘 다를 지탱해줄 수 있는 희망이다.
With STEFAN THEIL in Traunstein,
EDWARD PENTIN
and ROBERT BLAIR KAISER in Rome,
JULIE SCELFO in New York, ERIC PAPE
in Paris and JOSEPH CONTRERAS
in Mexico City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3000억원대 횡령’ 경남은행 중징계….“기존 고객 피해 없어”
2수능 2개 틀려도 서울대 의대 어려워…만점자 10명 안팎 예상
3중부내륙철도 충주-문경 구간 개통..."문경서 수도권까지 90분 걸려"
4경북 서남권에 초대형 복합레저형 관광단지 들어서
5LIG넥스원, 경북 구미에 최첨단 소나 시험시설 준공
6“내 버스 언제오나” 폭설 퇴근대란에 서울 지하철·버스 증회 운행
7안정보다 변화…이환주 KB라이프 대표, 차기 국민은행장 후보로
8 KB국민은행장 후보에 이환주 KB라이프 대표
9한스미디어, ‘인공지능 마케팅’ 기술 담긴 ‘AI로 팔아라’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