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딛고 맨주먹 ‘업계 평정’
차별 딛고 맨주먹 ‘업계 평정’
일본 빠찡코 시장의 규모는 29조엔(약 290조원)이다. 일본 전체 미디어 광고액의 6배, 복권 산업의 30배 규모다. 외식산업 규모를 앞선다. 그리고 전 국민의 10명 중 3명이 빠찡코를 즐긴다. 그러다 보니 빠찡코는 일본 국민에게 있어 단순한 도박이 아니라 이제는 없어선 안 될 오락의 일부가 돼버렸다.
일본의 빠찡코 시장을 꽉 휘어잡은 이는 한국계 일본인 한창우(韓昌祐 ·74) 회장이다. 그가 경영하는 ‘마루한’은 일본 업계 선두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젊은이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하는 도쿄(東京)디즈니랜드 입장객의 4배 가까운 연인원 9,000만 명을 끌어들인 기업이 바로 마루한이다.
햇볕이 따갑게 쏟아지는 6월 7일 낮.
도쿄역이 밑으로 훤히 내려다보이는 마루노우치 퍼시픽 센추리 플레이스 빌딩 28층의 마루한 도쿄본사 사무실을 찾았다. 등기상 본사는 교토(京都)에 있고 한 회장은 한 달에 한 번꼴로 도쿄에 들른다. 회장 접견실에는 한 회장이 훈장을 받은 사진이 큼직하게 걸려 있다. 1999년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훈 3등 ‘서보장’이다. 일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한국계 일본인은 이희건 신한은행 창립자와 한 회장 두 명뿐이라고 한다.
한 회장은 최근 또 하나의 ‘훈장’을 얻었다. 미국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 억만장자 순위에서 일본 갑부 26위에 오른 것이다. 일본에서 상위 30위 이내에 한국계 기업인이 들어간 것은 손정의(孫正義) 소프트뱅크 그룹 사장(9위)에 이어 두 번째다. 그의 순자산은 11억 달러(약 1조1,000억원). 롯데 신격호 회장 일가의 순자산은 17억 달러,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회장은 15억 달러였다.
포브스는 “그는 온갖 차별 속에서도 지난해 매출액 1조3,000억엔(약 13조원)을 기록하며 빠찡코업계 넘버 원을 획득한 불굴의 경영자”라며 “‘마루한’의 쾌속 질주는 계속될 것”이라고 극찬했다.
한 회장의 취미는 ‘패션’과 ‘클래식 음악’으로 실제 그의 패션 감각은 돋보였다. 회색 양복에 딱 어울리는 넥타이에 양말까지 세트로 준비를 한 듯했다.
“갑부 상위권에 진입하게 된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에 그는 “내가 이번에는 일본 내 26위에 그쳤지만 내년에는 롯데를 제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부터 내보였다. 2010년에 매출 5조엔을 기록하게 되면 한국 ·일본을 합해 5위 이내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란 주장이다.
일본 굴지의 기업인으로 등극한 한 회장의 인생 역정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14세 때인 1945년 10월 21일 밤 11시. 그는 고향인 삼천포 앞바다에 섰다. 일본에서 벽돌 쌓는 일을 하던 친형의 부름으로 무작정 밀항선에 올라탔다.
“친형이 일본에서 벽돌 쌓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형이 한국에 돌아왔다가 다시 해방이 되자 밀항선을 타고 일본에 건너가면서 꼭 일본에 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대책 없이 밀항선을 탄 거죠. 일본까지 배로 5~6시간이면 갈 줄 알았는데 24시간이나 걸리더군요. 완전히 보트 피플이었죠. 통통배가 파도에 흔들리니 미치겠더라고요(웃음). 그래서 10월 22일 밤 도착한 곳이 시모노세키(下關)였어요. 쌀 두 포대와 영어사전이 나의 짐 전부였죠. 몽롱해진 상태에서 인근 조그만 여관에 들어갔는데 배를 오래 타서 그런지 누워 있어도 눈이 핑핑 돌면서 넘어질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안 넘어지려고 다다미 바닥을 손으로 꼭 움켜쥐고 있었어요.”
한 회장은 운 좋게도 당시 일본 정부가 10월 30일까지 외국인 등록을 받고 있어서 밀항자 대신 거주민 대우를 받게 됐다. 이후 한 회장은 3년 동안 피나는 공부 끝에 일본의 유명 사립대학인 호세이(法政)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했다. 호세이대학은 와세다(早稻田) ·게이오(慶應) ·죠치(上智) ·릿교(立校) 대학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문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한 한 회장 같은 한국인이 직장을 얻을 수 있는 시절은 아니었다. 일본인들도 취업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한국인 자존심, 도전정신으로 차별 이겨내
그는 52년 당시 교토에서 열차로 4시간 거리인 미네야마(峰山)에서 기계 20대를 놓고 빠찡코 사업을 하던 매형을 찾아갔다. 빠찡코와의 첫 만남이었다.
매형 밑에서 일을 배우던 그는 67년 독자적으로 ‘볼링장’사업에 뛰어들었다. 볼링 붐이 불던 때였다. 그러나 지나친 확장 전략으로 그는 41세 때인 72년 당시 60억엔의 빚을 떠안고 말았다. 지금으로 따지면 1,200억엔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매일 자살하려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아이들(7명 ·당시는 6명)과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라 망설이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절망 속에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가 떠오르더군요. 불굴의 의지로 고기잡이에 나선 노인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젊은 내가 못할쏘냐’란 투지가 일더군요. 결국 헝그리 정신과 도전정신, 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오늘날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본업’인 빠찡코로 돌아왔다. 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목 좋은 점포 위치를 일일이 확인하며 매장을 하나 둘 늘렸다.
“빚 원금을 1년째는 매달 25만엔, 2년째는 매달 50만엔, 3년째는 매달 75만엔꼴로 갚아 나갔습니다. 정말 도전정신 하나로 버텼습니다. 때마침 운 좋게도 손님이 몰리기 시작하더군요.”
하지만 온갖 차별이 그를 괴롭혔다. 지역사회에선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청년회의소(JC)에도 가입시켜 주지 않았다.
“제가 둥지를 튼 미네야마란 곳은 인구가 1만5,000명밖에 안 되는 도시입니다. 늘 인근 주민들과 같이 어울려 다녔죠. 그런데 30여 년 전에 그곳의 JC가 저를 제외시켜 버리는 게 아닙니까. 정말 서럽고 슬펐습니다. 어떨 때는 전차에 탔는데 제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한국인은 어쩌고 저쩌고 흉을 보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맘을 바꿔 먹었습니다. 어느 나라에나 차별이 있는 것이라고요.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고 미국도 마찬가지예요. 결국 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선, 아니 차별을 줄이기 위해선 스스로 지성과 교양을 쌓고 경제적 안정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지역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전 남들이 8시간 일할 때 15시간 일했어요. 언제든지 내 어깨에는 태극기가 둘러져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내가 나쁜 놈이 되면 한국인 전체가 나쁜 놈이 된다는 생각으로 항상 한국인 대표라는 자부심을 갖고 왔습니다.”
한 회장은 95년 꿈에 그리던 ‘도쿄 입성’에 성공했다. 매출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마루한은 현재 일본 전국에 180곳의 점포, 기계대수 10만 대의 최대 규모 빠찡코를 자랑한다. 종업원도 7,000명에 이른다. 1년에 대졸 사원 400명 이상을 채용한다. 지난해 1조3,000억엔이었던 연 매출액은 올해는 1조6,000억엔이 될 전망이다. 이는 업계 2위인 ‘다이나모’의 기계대수(9만 대)와 연 매출(1조800억엔)에 비해 상당한 격차다.
하지만 이 같은 성공은 남들이 생각지 못하는, 남들보다 한발 앞선 아이디어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세심한 배려 하나하나가 매출을 좌우합니다. 예컨대 그날 돈을 많이 날린 고객에게는 점장이 다가가 ‘죄송하네요’라고 말을 걸면서 구슬을 조금 융통해준다든지 담배 한 갑을 서비스하는 식이죠. 또 매장에 담배 냄새 제거 시설을 설치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간이 샤워시설까지 갖춰놨습니다. 연인들을 위한 전용 좌석도 마련하고요.”
그는 이처럼 맨발로 일궈낸 성공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여느 한국 기업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솔직히 일본의 롯데나 한국의 삼성갟G 등은 다 훌륭한 기업이기는 하지만 초창기에는 정부의 혜택과 백업이 뒷받침된 거 아닙니까. 하지만 우린 달라요. 온갖 차별 다 받아가면서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있었습니까. 난 그걸 이겨내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한 회장은 ‘현금 장사’가 기본 전략이다.
볼링장 사업이 난관에 부딪혔을 때 사업이 잘 될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얼굴을 비추던 은행들이 등을 돌렸던 기억 때문이다. 당시 은행 관계자들은 한 회장이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지금 마루한은 연 1조3,000억엔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이면서도 빚이 500억엔밖에 안 된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만일의 해프닝에 대한 자금관리는 여러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볼링장으로 말아먹은 이후 난 은행들이 기업의 상황 변화에 따라 어떻게 나올지 충분히 숙지하고 있거든요. 은행을 가급적 이용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의 자기자금경영을 목표로 은행 돈은 최소한으로 이용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돈 버는 것은 기술, 쓰는 것은 예술
그는 또 ‘빠찡코’가 갖는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키는 데 성공한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흔히들 빠찡코 하면 검은 돈이라든지 야쿠자 같은 폭력조직과 관련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그런 것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어요. 탈세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렇게 유지해온 깨끗한 이미지가 도쿄대 출신 등 일본 내 유수의 대학 졸업생 400명이 매년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있는 원동력이 된 겁니다. 아마 우리 회사에는 국제기독교학교(ICU) 출신만 없고 모든 대학 출신자들이 다 있을 걸요. 또 하나, 제게는 이 사업을 일으켜 세운 설립자로서의 책임감이 있습니다. 우리 직원이 빠찡코 회사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부모로부터 ‘다른 곳으로 직장 옮기라’는 소리를 듣거나, 애인에게 결혼을 거절당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전 어느 초일류 기업보다 더 투명하게 경영을 하기 위해 모든 수입과 경비, 그리고 차입금 등을 바로 공개합니다. 관계 당국에서 감탄하고 돌아갈 정도입니다.”
실제 한 회장에 대한 업계의 평판은 좋은 편이다.
빠찡코 업계에 밝은 오사카(大阪)상업대학의 다니오카 이치로(谷岡一郞) 학장은 “마루한이 빠찡코 업계를 정화하면서 빠찡코에 대한 국민 인식이 개선됐다”고 말한다.
한 회장은 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수익금의 1%를 지역사회 봉사에 내놓고 있다.
“지금으로 따지면 일본 돈 1억엔 정도인데…. 솔직히 전 돈에 대한 욕심은 없어요. 지금으로 충분합니다. 내 철학은 돈을 버는 것은 기술이고, 쓰는 것은 예술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예술로서 영원히 남고 싶습니다. 또한 사회봉사를 하면서 고수하는 원칙은 보답을 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투자지요. 봉사는 어디까지나 봉사여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한국이고, 자란 곳은 일본이니 양쪽에 내가 번 것들을 돌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랜 세월 한국과 일본을 터전으로 살아온 한 회장 입장에선 최근 삐걱거리는 한겴?관계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세계적으로 볼 때 주변국 가운데 사이 좋은 나라는 별로 없는 법이죠.(웃음)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두 나라는 사이좋게 지내야 할 수밖에 없는 걸. 그러기 위해선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전 역사를 일본인들에게 정확히 알리고 전세계에 호소하고자 세계 대학 중 한국 관련 학과나 조직에 역사책 700권을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독도 문제도 그렇고 야스쿠니 참배 문제도 그렇고 왜 수교 40주년, 한 ·일 우정의 해에 일본인들이 이런 문제를 일으키느냐 하는 거예요. 솔직히 고이즈미가 야스쿠니에 참배한다고 해서 일본이 군국주의가 되는 건 아니지만 때린 놈과 맞은 놈은 다르지 않습니까. 근린 아시아 국가 사람들의 심정을 고이즈미도 헤아리고 삼가야 합니다.”
한 회장은 마루한을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하기 위해 현재 금융 당국과 협의 중이다.
하지만 상장 목적이 다른 회사와는 다르다. “상장을 통해 돈을 벌거나 자금을 조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마루한의 상장이 투명한 회사임을 사회에 알리고 내가 일본에서 60년 동안 한 일에 대해 사회의 평가를 받고자 하는 겁니다.”
‘빠찡코왕’으로 불리는 데 실제 빠찡코 실력은 어느 정도냐는 질문에 그는 “빠찡코 인생 50년이지만 실제 해 본 것은 10번도 안 되고, 그것도 기껏 1,000엔 정도 해본 것”이라며 폭소를 터뜨렸다.
한 회장은 “돈을 많이 벌었는지는 모르나 돈 운용에선 낙제점”이라며 “내 호주머니에 있는 전 재산인 10억엔에다 신용으로 5억엔을 빌려 15억엔어치 주식을 샀는데 지금 4억엔이 되어버렸다”고 털어놨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주식투자는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일곱 자녀 중 세 명은 마루한의 핵심 멤버로 활약 중이다. 미상장 주식 등도 대부분 이들에게 넘긴 상태다.
일각에선 한 회장의 사업확장 때문에 빠찡코 업계의 70%를 장악하고 있는 한국계 상공인 사회가 분열됐다는 지적도 있다. 4년 전 일본에 귀화한 사실을 두고도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차별을 딛고 일어선 성공한 기업인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런 한 회장은 6월 22일 도쿄 도심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의 지바(千葉)현 마쿠하리(幕張) 메세 국제전시장에서 ‘깜짝 쇼’를 벌였다.
지난해 매출 1조엔 돌파와 한 회장이 일본에 건너온 지 60주년이 되는 것을 기념해 회사 직원들과 국내외 인사 6,500명 가까이 참석하는 대규모 기념파티를 연 것이다. 저녁 만찬으로 나오는 프랑스 요리를 나르는 종업원 수만 1,500명이었다. 식사를 준비하는 뉴오타니 호텔의 인원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프린스 ·셰러턴 호텔의 종업원까지 동원됐다. 한 자리에서 동시에 최대 인원이 식사를 하는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전망이다. 이날 행사에는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일본 총리와 공노명 ·김태지 전 주일 대사, 김덕룡 의원 등 양국의 저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마술쇼 ·콘서트 ·디스코 파티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이날 하루 행사 비용만 15억엔이 들었다. 거기에 모든 점포가 이틀간 문을 닫는 데 따른 기회비용도 10억엔가량 된다. 한 회장은 “이 정도 일궈놨으니 한 번 ‘찐하게’ 회포를 푸는 것도 필요하지요”라고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이제 그에게는 돈을 쓰는 ‘예술’만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노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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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빠찡코 시장을 꽉 휘어잡은 이는 한국계 일본인 한창우(韓昌祐 ·74) 회장이다. 그가 경영하는 ‘마루한’은 일본 업계 선두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젊은이들이 가장 가보고 싶어하는 도쿄(東京)디즈니랜드 입장객의 4배 가까운 연인원 9,000만 명을 끌어들인 기업이 바로 마루한이다.
햇볕이 따갑게 쏟아지는 6월 7일 낮.
도쿄역이 밑으로 훤히 내려다보이는 마루노우치 퍼시픽 센추리 플레이스 빌딩 28층의 마루한 도쿄본사 사무실을 찾았다. 등기상 본사는 교토(京都)에 있고 한 회장은 한 달에 한 번꼴로 도쿄에 들른다. 회장 접견실에는 한 회장이 훈장을 받은 사진이 큼직하게 걸려 있다. 1999년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훈 3등 ‘서보장’이다. 일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한국계 일본인은 이희건 신한은행 창립자와 한 회장 두 명뿐이라고 한다.
한 회장은 최근 또 하나의 ‘훈장’을 얻었다. 미국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 억만장자 순위에서 일본 갑부 26위에 오른 것이다. 일본에서 상위 30위 이내에 한국계 기업인이 들어간 것은 손정의(孫正義) 소프트뱅크 그룹 사장(9위)에 이어 두 번째다. 그의 순자산은 11억 달러(약 1조1,000억원). 롯데 신격호 회장 일가의 순자산은 17억 달러,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회장은 15억 달러였다.
포브스는 “그는 온갖 차별 속에서도 지난해 매출액 1조3,000억엔(약 13조원)을 기록하며 빠찡코업계 넘버 원을 획득한 불굴의 경영자”라며 “‘마루한’의 쾌속 질주는 계속될 것”이라고 극찬했다.
한 회장의 취미는 ‘패션’과 ‘클래식 음악’으로 실제 그의 패션 감각은 돋보였다. 회색 양복에 딱 어울리는 넥타이에 양말까지 세트로 준비를 한 듯했다.
“갑부 상위권에 진입하게 된 소감이 어떠냐”는 질문에 그는 “내가 이번에는 일본 내 26위에 그쳤지만 내년에는 롯데를 제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부터 내보였다. 2010년에 매출 5조엔을 기록하게 되면 한국 ·일본을 합해 5위 이내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란 주장이다.
일본 굴지의 기업인으로 등극한 한 회장의 인생 역정은 파란의 연속이었다. 14세 때인 1945년 10월 21일 밤 11시. 그는 고향인 삼천포 앞바다에 섰다. 일본에서 벽돌 쌓는 일을 하던 친형의 부름으로 무작정 밀항선에 올라탔다.
“친형이 일본에서 벽돌 쌓는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형이 한국에 돌아왔다가 다시 해방이 되자 밀항선을 타고 일본에 건너가면서 꼭 일본에 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대책 없이 밀항선을 탄 거죠. 일본까지 배로 5~6시간이면 갈 줄 알았는데 24시간이나 걸리더군요. 완전히 보트 피플이었죠. 통통배가 파도에 흔들리니 미치겠더라고요(웃음). 그래서 10월 22일 밤 도착한 곳이 시모노세키(下關)였어요. 쌀 두 포대와 영어사전이 나의 짐 전부였죠. 몽롱해진 상태에서 인근 조그만 여관에 들어갔는데 배를 오래 타서 그런지 누워 있어도 눈이 핑핑 돌면서 넘어질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안 넘어지려고 다다미 바닥을 손으로 꼭 움켜쥐고 있었어요.”
한 회장은 운 좋게도 당시 일본 정부가 10월 30일까지 외국인 등록을 받고 있어서 밀항자 대신 거주민 대우를 받게 됐다. 이후 한 회장은 3년 동안 피나는 공부 끝에 일본의 유명 사립대학인 호세이(法政)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했다. 호세이대학은 와세다(早稻田) ·게이오(慶應) ·죠치(上智) ·릿교(立校) 대학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문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한 한 회장 같은 한국인이 직장을 얻을 수 있는 시절은 아니었다. 일본인들도 취업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한국인 자존심, 도전정신으로 차별 이겨내
그는 52년 당시 교토에서 열차로 4시간 거리인 미네야마(峰山)에서 기계 20대를 놓고 빠찡코 사업을 하던 매형을 찾아갔다. 빠찡코와의 첫 만남이었다.
매형 밑에서 일을 배우던 그는 67년 독자적으로 ‘볼링장’사업에 뛰어들었다. 볼링 붐이 불던 때였다. 그러나 지나친 확장 전략으로 그는 41세 때인 72년 당시 60억엔의 빚을 떠안고 말았다. 지금으로 따지면 1,200억엔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매일 자살하려고 마음을 먹었다가도 아이들(7명 ·당시는 6명)과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라 망설이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절망 속에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가 떠오르더군요. 불굴의 의지로 고기잡이에 나선 노인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젊은 내가 못할쏘냐’란 투지가 일더군요. 결국 헝그리 정신과 도전정신, 그리고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오늘날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는 ‘본업’인 빠찡코로 돌아왔다. 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목 좋은 점포 위치를 일일이 확인하며 매장을 하나 둘 늘렸다.
“빚 원금을 1년째는 매달 25만엔, 2년째는 매달 50만엔, 3년째는 매달 75만엔꼴로 갚아 나갔습니다. 정말 도전정신 하나로 버텼습니다. 때마침 운 좋게도 손님이 몰리기 시작하더군요.”
하지만 온갖 차별이 그를 괴롭혔다. 지역사회에선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청년회의소(JC)에도 가입시켜 주지 않았다.
“제가 둥지를 튼 미네야마란 곳은 인구가 1만5,000명밖에 안 되는 도시입니다. 늘 인근 주민들과 같이 어울려 다녔죠. 그런데 30여 년 전에 그곳의 JC가 저를 제외시켜 버리는 게 아닙니까. 정말 서럽고 슬펐습니다. 어떨 때는 전차에 탔는데 제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한국인은 어쩌고 저쩌고 흉을 보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맘을 바꿔 먹었습니다. 어느 나라에나 차별이 있는 것이라고요. 그건 한국도 마찬가지고 미국도 마찬가지예요. 결국 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선, 아니 차별을 줄이기 위해선 스스로 지성과 교양을 쌓고 경제적 안정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지역사회에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전 남들이 8시간 일할 때 15시간 일했어요. 언제든지 내 어깨에는 태극기가 둘러져 있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내가 나쁜 놈이 되면 한국인 전체가 나쁜 놈이 된다는 생각으로 항상 한국인 대표라는 자부심을 갖고 왔습니다.”
한 회장은 95년 꿈에 그리던 ‘도쿄 입성’에 성공했다. 매출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다.
마루한은 현재 일본 전국에 180곳의 점포, 기계대수 10만 대의 최대 규모 빠찡코를 자랑한다. 종업원도 7,000명에 이른다. 1년에 대졸 사원 400명 이상을 채용한다. 지난해 1조3,000억엔이었던 연 매출액은 올해는 1조6,000억엔이 될 전망이다. 이는 업계 2위인 ‘다이나모’의 기계대수(9만 대)와 연 매출(1조800억엔)에 비해 상당한 격차다.
하지만 이 같은 성공은 남들이 생각지 못하는, 남들보다 한발 앞선 아이디어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세심한 배려 하나하나가 매출을 좌우합니다. 예컨대 그날 돈을 많이 날린 고객에게는 점장이 다가가 ‘죄송하네요’라고 말을 걸면서 구슬을 조금 융통해준다든지 담배 한 갑을 서비스하는 식이죠. 또 매장에 담배 냄새 제거 시설을 설치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간이 샤워시설까지 갖춰놨습니다. 연인들을 위한 전용 좌석도 마련하고요.”
그는 이처럼 맨발로 일궈낸 성공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여느 한국 기업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솔직히 일본의 롯데나 한국의 삼성갟G 등은 다 훌륭한 기업이기는 하지만 초창기에는 정부의 혜택과 백업이 뒷받침된 거 아닙니까. 하지만 우린 달라요. 온갖 차별 다 받아가면서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 있었습니까. 난 그걸 이겨내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한 회장은 ‘현금 장사’가 기본 전략이다.
볼링장 사업이 난관에 부딪혔을 때 사업이 잘 될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얼굴을 비추던 은행들이 등을 돌렸던 기억 때문이다. 당시 은행 관계자들은 한 회장이 아무리 하소연을 해도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지금 마루한은 연 1조3,000억엔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이면서도 빚이 500억엔밖에 안 된다.
“회사를 운영하면서 만일의 해프닝에 대한 자금관리는 여러 방법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볼링장으로 말아먹은 이후 난 은행들이 기업의 상황 변화에 따라 어떻게 나올지 충분히 숙지하고 있거든요. 은행을 가급적 이용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의 자기자금경영을 목표로 은행 돈은 최소한으로 이용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돈 버는 것은 기술, 쓰는 것은 예술
그는 또 ‘빠찡코’가 갖는 부정적 인식을 불식시키는 데 성공한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흔히들 빠찡코 하면 검은 돈이라든지 야쿠자 같은 폭력조직과 관련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그런 것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어요. 탈세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렇게 유지해온 깨끗한 이미지가 도쿄대 출신 등 일본 내 유수의 대학 졸업생 400명이 매년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있는 원동력이 된 겁니다. 아마 우리 회사에는 국제기독교학교(ICU) 출신만 없고 모든 대학 출신자들이 다 있을 걸요. 또 하나, 제게는 이 사업을 일으켜 세운 설립자로서의 책임감이 있습니다. 우리 직원이 빠찡코 회사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부모로부터 ‘다른 곳으로 직장 옮기라’는 소리를 듣거나, 애인에게 결혼을 거절당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전 어느 초일류 기업보다 더 투명하게 경영을 하기 위해 모든 수입과 경비, 그리고 차입금 등을 바로 공개합니다. 관계 당국에서 감탄하고 돌아갈 정도입니다.”
실제 한 회장에 대한 업계의 평판은 좋은 편이다.
빠찡코 업계에 밝은 오사카(大阪)상업대학의 다니오카 이치로(谷岡一郞) 학장은 “마루한이 빠찡코 업계를 정화하면서 빠찡코에 대한 국민 인식이 개선됐다”고 말한다.
한 회장은 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수익금의 1%를 지역사회 봉사에 내놓고 있다.
“지금으로 따지면 일본 돈 1억엔 정도인데…. 솔직히 전 돈에 대한 욕심은 없어요. 지금으로 충분합니다. 내 철학은 돈을 버는 것은 기술이고, 쓰는 것은 예술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예술로서 영원히 남고 싶습니다. 또한 사회봉사를 하면서 고수하는 원칙은 보답을 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투자지요. 봉사는 어디까지나 봉사여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한국이고, 자란 곳은 일본이니 양쪽에 내가 번 것들을 돌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랜 세월 한국과 일본을 터전으로 살아온 한 회장 입장에선 최근 삐걱거리는 한겴?관계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세계적으로 볼 때 주변국 가운데 사이 좋은 나라는 별로 없는 법이죠.(웃음)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두 나라는 사이좋게 지내야 할 수밖에 없는 걸. 그러기 위해선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전 역사를 일본인들에게 정확히 알리고 전세계에 호소하고자 세계 대학 중 한국 관련 학과나 조직에 역사책 700권을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독도 문제도 그렇고 야스쿠니 참배 문제도 그렇고 왜 수교 40주년, 한 ·일 우정의 해에 일본인들이 이런 문제를 일으키느냐 하는 거예요. 솔직히 고이즈미가 야스쿠니에 참배한다고 해서 일본이 군국주의가 되는 건 아니지만 때린 놈과 맞은 놈은 다르지 않습니까. 근린 아시아 국가 사람들의 심정을 고이즈미도 헤아리고 삼가야 합니다.”
한 회장은 마루한을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하기 위해 현재 금융 당국과 협의 중이다.
하지만 상장 목적이 다른 회사와는 다르다. “상장을 통해 돈을 벌거나 자금을 조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마루한의 상장이 투명한 회사임을 사회에 알리고 내가 일본에서 60년 동안 한 일에 대해 사회의 평가를 받고자 하는 겁니다.”
‘빠찡코왕’으로 불리는 데 실제 빠찡코 실력은 어느 정도냐는 질문에 그는 “빠찡코 인생 50년이지만 실제 해 본 것은 10번도 안 되고, 그것도 기껏 1,000엔 정도 해본 것”이라며 폭소를 터뜨렸다.
한 회장은 “돈을 많이 벌었는지는 모르나 돈 운용에선 낙제점”이라며 “내 호주머니에 있는 전 재산인 10억엔에다 신용으로 5억엔을 빌려 15억엔어치 주식을 샀는데 지금 4억엔이 되어버렸다”고 털어놨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주식투자는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일곱 자녀 중 세 명은 마루한의 핵심 멤버로 활약 중이다. 미상장 주식 등도 대부분 이들에게 넘긴 상태다.
일각에선 한 회장의 사업확장 때문에 빠찡코 업계의 70%를 장악하고 있는 한국계 상공인 사회가 분열됐다는 지적도 있다. 4년 전 일본에 귀화한 사실을 두고도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차별을 딛고 일어선 성공한 기업인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런 한 회장은 6월 22일 도쿄 도심에서 자동차로 30분 거리의 지바(千葉)현 마쿠하리(幕張) 메세 국제전시장에서 ‘깜짝 쇼’를 벌였다.
지난해 매출 1조엔 돌파와 한 회장이 일본에 건너온 지 60주년이 되는 것을 기념해 회사 직원들과 국내외 인사 6,500명 가까이 참석하는 대규모 기념파티를 연 것이다. 저녁 만찬으로 나오는 프랑스 요리를 나르는 종업원 수만 1,500명이었다. 식사를 준비하는 뉴오타니 호텔의 인원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프린스 ·셰러턴 호텔의 종업원까지 동원됐다. 한 자리에서 동시에 최대 인원이 식사를 하는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전망이다. 이날 행사에는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일본 총리와 공노명 ·김태지 전 주일 대사, 김덕룡 의원 등 양국의 저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마술쇼 ·콘서트 ·디스코 파티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는 이날 하루 행사 비용만 15억엔이 들었다. 거기에 모든 점포가 이틀간 문을 닫는 데 따른 기회비용도 10억엔가량 된다. 한 회장은 “이 정도 일궈놨으니 한 번 ‘찐하게’ 회포를 푸는 것도 필요하지요”라고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이제 그에게는 돈을 쓰는 ‘예술’만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노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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