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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도국에 뿌리 둔 다국적 기업들

개도국에 뿌리 둔 다국적 기업들

Flying South 까다로운 고객 한 사람을 위해 멋지고 복잡한 제품을 다시 고안해내야 한다면 좋지 않은 사업일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제조업체들은 공장에서 동일한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해 이윤을 남긴다. 그런 만큼 몇 년 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 소재 타미미&사히티 운송회사가 브라질의 버스 제조업체 마르코폴로에 막판에 주문품의 구조를 변경해 달라고 했던 요구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많은 무슬림들은 신자와 알라 사이에는 아무것도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순례자들을 메카로 운송하는 타미미&사히티사는 주문한 버스 1500대 중 95대를 컨버터블(지붕을 접을 수 있는 자동차)로 제작해 달라고 요구했다. 다른 제조업체라면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르코폴로는 그런 요구를 기회로 삼았다. 4개월 뒤 그 회사는 세계 최초의 컨버터블 형식 대중교통 수단인‘하지 버스’(hajj bus)를 선보였다. 한때 브라질 남부에서 가족 소유 정비업체였던 마르코폴로가 세계 유수의 버스 차체 제조사로 성장한 원동력은 바로 이런 융통성이다. 현재 이 회사는 4개 대륙 8개 조립공장에서 80개국에 수출한다. 이는 세계 투자 지형을 바꾸는 신종 ‘개도국 다국적 기업’(southern[developing-world] multinational)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기업들은 가망 없어 보이는 밑바닥에서 나타나 유명 브랜드 기업의 매출을 가로챈다. 제3세계의 장애물들(부패, 관료주의, 도로망 부실 등)을 직접 겪은 경험을 활용해 다른 신흥시장에서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 공세적인 개도국 다국적 기업들의 부상은 전통적인 빈국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에서도 지각 변동을 일으킨다. 단지 부국 소비자를 확보하려는 경쟁자로서, 혹은 국제 원조를 애원하는 나라가 아니라 세계 경제의 주역으로 상대를 보게 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개도국에서 다른 개도국으로의 자본 이동은 드물었다. 소위 남남(south-to-south) 해외 직접 투자(주식시장에의 일시적 투자가 아닌 공장·기업 설립용 직접 투자)는 1995년 150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2003년 말에는 세 배로 늘어나 460억 달러가 됐다. 2004년 전 세계 직접 투자액 6500억 달러에 비하면 여전히 적은 규모지만, 남남 자본 이동은 전통적인 북남(부국에서 빈국으로의) 자본 이동보다 5배나 빠르게 증가한다. 오늘날 개도국으로의 자본 이동 중 3분의 1은 같은 개도국에서 비롯된다. 10년 전의 두 배다. 심지어 오랫동안 무능력 국가(방글라데시), 정치적 가마솥(콜롬비아·볼리비아·앙골라), 금융의 모래함정(아르헨티나) 등으로 외면되던 나라들조차 남남 협력에서 뜻밖의 횡재를 얻는다. 국제금융공사(IFC)의 투자 전문가 조셉 배타트는 “다른 개도국들에 투자를 늘리는 개도국 기업들이 많아진다. 이는 한 순환주기 안에서의 상승파동이 아니다. 수치들은 이런 상승세가 지속될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아프리카·아시아·중남미·동유럽 소재의 기업들끼리 체결된 국제 계약을 모두 추적하기는 어렵다. 몇 년 전 남아공의 한 음료 제조회사가 미국 대기업 밀러 맥주회사를 인수해 언론에 대서특필됐었다. 그러나 그 통합 법인 SAB밀러사가 세계 2위의 맥주회사로 성장한 계기는 범아프리카 시장과, 콜롬비아·중국·인도·러시아·폴란드처럼 목마른 시장에 진출한 덕이다. 인도의 타타그룹은 남아공과 방글라데시에 금속공장을 짓는 중이다. 브라질 최대의 항공기 제작회사 엠브라에르는 중국 하얼빈(合爾濱)에서 여객기를 제조한다. 멕시코의 통신 재벌 카를로스 슬림은 새로운 정복자처럼 미국 남부 국경부터 아르헨티나 남단의 티에라델푸에고까지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1955년 결성된 비동맹국가들의 반둥회의 이래 빈국 지도자들은 가난 극복을 위해 서로 힘을 모은다는 꿈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런 이념적인 운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반면 터키의 조선업체 투르키예 페트롤레리와 파키스탄의 패키지드 리미티드 같은 제3세계 다국적 기업들 대다수는 얼마 안 되는 자본 투자로, 경쟁자가 드문 과보호 시장에서 크게 번창했다. 오늘날 신흥시장을 이끄는 원동력은 정치가 아니라 기업의 생존 노력이다. 지난 10년간 개도국들에 불어닥친 자유시장 개혁 바람은 폐쇄적인 경제를 열어젖히고 ‘보모 국가’(nanny state)의 관대함에 종지부를 찍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경제전문가 안드레아 골드스타인은 “그 충격을 이겨낸 기업들은 경쟁력이 강화됐다. 이런 기업들은 그럴 만한 역량을 갖췄기 때문에 해외로 진출한다”고 말했다. 다수 기업은 세계 어디에서도 성공하는 기술과 경영 능력을 터득했다. 세계 3위의 시멘트 업체인 멕시코의 세멕스는 좀 더 신속한 운송을 위해 자사 트럭들에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장비를 장착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시멘트업계의 도미노피자’(도미노피자는 신속한 배달로 유명하다)다. 엠브라에르의 중간 크기 여객기들은 캐나다의 봄바디어, 미국의 걸프스트림 에어로스페이스, 프랑스의 에어버스 등과 정면으로 경쟁한다. 신흥시장에 투자하는 일은 끊임없는 긴장을 요한다. 뎅기열부터 통화 체제 붕괴, 납치 등 여러 위험이 횡행하기 때문이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타룬 칸나는 “많은 기업들이 자신들이 사업을 벌이는 국가들과 정보를 공유한다”면서 “중요한 점은 위험의 절대 크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위험을 더 잘 견뎌내는 능력이다. 더 많이 알수록 위험을 더 잘 극복하게 된다”고 말했다. SAB밀러의 최고재무책임자(CFO) 맬컴 와이먼은 신흥시장 출신 다국적 기업들의 강점을 이렇게 요약한다. “남반구 기업들은 웬만해선 포기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대다수 서방 대기업들은 방글라데시 같은 국가를 그저 돈이나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본다. 반면에 가족의 이름을 딴 인도 재벌 타타그룹의 총수 라탄 타타는 그 나라를 잠재적인 이웃 시장으로 간주한다. 타타그룹은 새로운 제철소와 비료공장에 연료를 공급하려고 방글라데시와 천연가스 사용 협상을 벌이는 중이다. 25억 달러 규모의 이 계약은 1971년 독립 이래 방글라데시가 유치하는 최대의 외국인 직접 투자가 될 전망이다. 타타는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는 한 방글라데시에 어느 누구도 투자하지 않았다. 그리고 투자가 없으면 인프라도 구축되지 않는다”면서 “우리는 자신감을 갖고 뛰어들었다”고 밝혔다. 신념도 좋지만 지난 2002년 세계 최대 규모의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던 아르헨티나에 돈을 쏟아붓는 일은 어리석은 행동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남아공의 스탠더드 뱅크 그룹은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작지만 공격적인 이 금융기관은 네덜란드 ING의 부에노스 아이레스 지사를 인수 중이고, 또 현지 상업은행을 매입하기 위해 뱅크 오브 아메리카와 협상 중이다. 스탠더드 뱅크의 최고경영자(CEO) 자코 마리는 “우리는 신흥시장에 초점을 맞춘다”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빠져나갈 때 진출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도대체 왜 진출하는가? 소득 수준도 낮고, 물건도 잘 사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나라의 소비자들은 주요 고객층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을 서방 대기업들이 외면하기 때문에 오히려 기회가 찾아온다. 많은 신흥 소비시장들은 아직도 먼저 진출하는 기업이 임자다. SAB밀러의 스노 제품은 중국에서 2005년 상반기에만 매출이 51% 증가했다. 저가시장을 공략해온 카를로스 슬림 역시 선지불 전화카드를 판매해 아메리카 모빌을 설립 5년 만에 중남미 최고의 무선통신업체로 키웠다. 검은 대리석으로 수수하게 꾸민, 창고를 개조한 건물인 슬림의 멕시코 본사에 가보면 이 회사의 좌우명을 알게 된다. 베어스턴스의 이동통신 기업 분석가 리즈완 알리는 “저비용과 수수함. 그것이 바로 슬림의 스타일이다. 검소하게 살면서 수익 증대에 주력한다는 발상”이라고 말했다. 남반구 출신 다국적 기업들은 종종 슬림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다. 즉 인근 국가에서 사업을 시작한다. 러시아 기업들은 옛 소련 국가들에 엄청나게 투자한다. 태국도 해외 투자금의 약 59%를 동남아시아에 투입한다. 헝가리는 대외 투자금의 75%를 동·중부 유럽에 투자한다. 현재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의 인프라 구축에 쏟아붓는 돈의 거의 40%는 남아공 기업들에서 나온다. 그러나 대륙의 강자가 된 후에 최고의 회사들은 더 멀리 내다보기 시작한다. 타타 같은 기업인들과 마르코폴로 그룹은 포르투갈·미국 같은 선진국뿐만 아니라 중국·남아공 같은 국가로 진출한다. 개도국은 오랫동안 선진국 투자가들을 오만한 침입자로 비난해 왔다. 그래서 개도국 출신의 새로운 다국적 기업들은 이웃 기업처럼 부드럽게 보이려고 애쓴다. SAB밀러는 외국에서 수입할 때보다 비용이 더 드는 편이지만, 호프와 보리를 아프리카 현지 농부들에게 주문한다. 1990년대 중국의 동물사료 재벌인 호프그룹은 가난한 지역에 투자해 일자리 400만 개를 창출하려고 사영 회사들을 만들었다. 호프사 베이징 지사 총경리인 쑨딘은 “이 지역의 전체적인 발전에 도움을 주려고 우리의 돈을 쓸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브라질처럼 식민지배의 경험은 그런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마르코폴로의 CEO 주제 후벤스 데 라 호사는 “다국적 기업들은 흔히 사업을 벌이는 국가를 단물만 빨아먹는 곳으로 본다”면서 “그런 이유로 명성을 잃게 된다”고 전했다. 그러나 상황이나 경험이 비슷하다 해서 남반구의 신흥 대기업들이 더 불확실한 시장에서, 장기간 선진국의 경쟁사들을 능가하리라고는 장담하지 못한다. OECD의 골드스타인은 “짐바브웨산 코카콜라를 본다든가, 네팔산 보잉기를 보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전망”이라면서 “세계화 때문에 세계 곳곳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타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적어도 개도국들은 점점 더 많은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다. With RON MOREAU in New Delhi, MONICA CAMPBELL in Mexico City, QUINDLEN KROVATIN in Beijing and Bureau Reports 장병걸·정택진 cbg58@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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