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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뒤흔든 체니의 오발탄

미국을 뒤흔든 체니의 오발탄

The Shot Heard Round the World 딕 체니(65) 부통령은 결코 정상적인 정치인이 아니었다. 유권자의 표나 지지율, 언론의 머리기사를 얻으려면 마땅히 필요한 일인데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처럼 상대를 즐겁게 하려 들지 않았다. 체니는 말이 없고, 자신의 세계에 갇혀 살며, 약간 우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최근 그가 보여준 행태는 비단 환영받을 만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쌀쌀맞기조차 했다. 그렇다고 그가 겸손과 겸양을 제대로 갖춘 사람이라는 말이 아니다. 관직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만큼(또는 그 이상으로) 권력을 갈구하지 않는다는 말도 아니다. 사실 체니는 2000년 대선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러닝메이트를 찾아 보라는 요구에 바로 자신을 천거한 사람이다. 사실 9·11 사태 이후 체니는 매일 터져나오는 TV 뉴스보다 그리스의 비극을 즐겨 읽는 독자들에게 더 친숙한 모습을 보여줬다. 때때로 그는 자신의 텐트 안에서 종말이 불가피하지만 전투는 반드시 치러야 하며 영광은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외로운 지도자처럼 보인다. 체니는 백악관 일일 정보 브리핑 때 테러 위협을 골똘히 생각하며 정녕코 자신을 트로이 전쟁의 아킬레스나 헥토르의 현대판 전사로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설령 그렇게 생각했다 해도 그만큼 당당하지만은 않았다. 9·11 사태 발생 몇 주 후 체니는 자신과 가족, 보좌진이 탄저균 공격에 노출됐을 가능성을 우려했다. 체니를 잘 아는 전직 관리들에 따르면 부통령 관저엔 수상한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사법 당국에서 일하던 한 전직 관리는 감지기에서 경보음이 울렸다고 말했다). 경보는 나중에 오작동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체니와 측근들은 안전을 고려해 효과가 가장 강력한 항생제인 시프로를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러곤 그 소동에 관해 함구령을 내렸다(뉴스위크의 확인 요청에 부통령실은 요인 경호 책임을 맡은 재무부 비밀검찰국에 알아보라고 말했으나 비밀검찰국은 논평을 거부했다). 체니는 조용한 전사가 되기를 좋아한다. 가혹하긴 하지만 비관적이지 않으며 단호한 전사 말이다. 절제심은 지도자의 위대한 속성의 하나다. 제2차 세계대전을 미국의 승리로 이끈 조지 C 마셜 장군은 한때 이렇게 말했다. “내겐 부인에게 드러내 보이는 감정을 제외하면 아무 감정도 없다.” 그리고 체니가 사냥 도중 78세의 텍사스 변호사 해리 위팅턴을 쏜 사고로 몹시 당혹해 한다는 점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날 밤 체니는 영빈관 발코니에 혼자 앉은 채 다른 사람들이 오가도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충격받았고 침울했으며 처량했다”고 사냥을 주최한 캐서린 암스트롱은 뉴스위크에 전했다. “부통령에게 다가가 팔로 감싸 안을까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통령을 위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체니의 부인 린은 남편의 사냥에 따라가지 않았다). 왜 체니가 당시나 사건 발생 며칠 뒤까지 기자들에게 말할 기분이 아니었는지는 인간적으로 충분히 납득이 간다. 그러나 사고 발생 36시간 후인 월요일(2월 13일) 아침까지도 부시 대통령에게 알리지 않은 점은 다소 이상하다. 부시가 부통령을 부르지 않은 점도 마찬가지로 정상은 아니다. 논객들은 즉각 체니의 오발 사고 수습 과정을 둘러싸고 부시와 체니의 관계가 냉랭해졌다는 추측을 쏟아냈다. 한 발 더 나아가 체니가 이라크 침공을 밀어붙였고, 행정부 비판이 제기될 때마다 부통령이 거론되면서 두 사람 간의 관계가 냉랭해졌다는 추측도 나왔다. 정치적 야망이 없는 체니는 자신의 전부를 대통령에 바칠 만한 보기 드문 2인자로 칭찬받는다. 그러나 정치적 질곡과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는 초연함은 체니의 감각을 무디게 한 듯하다. 이 같은 초연함은 허리케인 카트리나 당시 늑장 대응했다는 비판으로부터 행정부를 감싸기에 바쁜 대통령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부시는 체니의 오발 사고를 둘러싼 언론의 소동을 잠재우려 했지만 본인도 확신하진 못한 듯했다. 오발 사고 나흘 뒤 체니를 단독 인터뷰한 폭스 TV의 앵커맨 브릿 흄과의 대담에서 체니가 “선방했다”고만 말했을 뿐이다. 인터뷰가 진행된 20분 동안 체니는 사실 인간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지만 심각하고 슬픈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위팅턴에게 발사된 탄환의 방아쇠를 당긴 사람은 결국 나다. 이번 일은 결코 잊지 못할 사고다… 그것은… 내 인생 최악의 날 중 하루였다.” 체니 지지자들은 이번 사고에서 엽기적인 즐거움을 찾는 논객과 코미디언들을 비난했다. “부통령이 기성 언론을 너무 화나게 했기 때문에 언론은 그를 공격할 꼬투리를 계속 찾아 왔다”고 전직 상원의원 앨런 심슨은 말했다. 심슨은 체니와 같은 와이오밍주 출신으로 40년 지기다. 그러나 이번 사고는 체니가 가진 권력의 이상한 속성에 또다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역사상 가장 막강한 부통령이지만 미국에서 그처럼 높은 직위를 누린 공직자 중 가장 비밀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사람 중 한 명이다. 체니는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으스스하고 초법적이며 사악한 다스 베이더와 같은 인물로 묘사된다. 2000년 부통령 후보들 간의 TV 토론에 비친, 온화하고 청중을 부드럽게 웃기는 딕 체니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그와 앨 고어의 러닝메이트 조 리버먼 상원의원은 당시 유머가 깃들인 공격을 주고받았다. 그러자 아예 대통령 후보와 부통령 후보를 서로 바꿔 붙임성 있고 상식이 통하는 워싱턴 정치인 2명이 부시와 고어 대신 대통령에 출마하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지적도 꽤 있었다. 각자 정치 명문가 출신이지만 상처를 받았으며 높은 기대감이 주는 부담에 짓눌린 부시와 고어 대신 말이다. 한때는 온건파들도 호감을 가지는 듯했던 체니는 최근 몇 년 사이 이상하게도 성격이 차가워졌다. 오랜 친구들조차 그가 더 화를 잘 내고, 더 의심하며, 강박증에 시달리진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부시 전 대통령 당시 국가안보 보좌관을 지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뉴요커지와의 회견에서 “체니를 좋은 친구로 여긴다. 그를 안 지도 이미 30년이 됐다. 그러나 그 이상은 모른다”고 말해 소란을 불러일으켰다. 체니가 변했을까? 그가 스트레스나 노화, 병, 세계의 실제적 테러, 혹은 마음속의 악령 따위 때문에 성격이 바뀌고, 비뚤어지고, 어쩌면 타락했을까? 그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들(실제로 그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은 체니가 지금의 비열한 정치보다 더 장기적인 관점을 취한다고만 주장할 뿐 말을 아낀다. 그러나 체니가 덜 상냥해지고, 덜 개방적이며, 화해를 하거나 공통분모를 모색하는 데 보다 인색해진 점은 분명하다. 9·11 당시 비밀검찰국 요원들의 안내로 지하벙커에 내려간 그는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 그런 행동이 대통령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때도 말이다. 체니의 성격이 어두워지는 이유를 추측하는 일은 워싱턴에서 일종의 오락거리가 됐다. 가장 널리 퍼진 설은 이 모두가 심장수술의 결과라는 설명이다(4차례 심장마비를 겪은 체니는 관상동맥 형성술, 4중 우회수술을 받았으며, 심장박동 조율기도 착용했었다). 심장병 환자는 실제로 기분이나 성격의 변화를 겪기도 하지만 체니의 경우엔 확실한 증거가 없다. 보다 확실한 한 가지 추측은 체니가 주변의 상황 변화와 함께 성격이 바뀌었다는 주장이다.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 당시 최연소(34세) 비서실장을 지냈고, 6선 관록의 하원의원이었으며, 부시 전 대통령 아래에선 국방장관까지 지낸 체니는 온건파 공화당 인사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들과 함께 일하도록 요구받았다. 비록 자신의 정치적 취향은 매우 보수적이었지만 주변엔 그를 견제하려는 사람들이 항상 있었다. 레이건 행정부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을 역임했고 부시 전 대통령 때는 국무장관을 지낸 제임스 베이커 같은 인물이 좋은 예다. 그 후 1995년 체니는 거대 군수업체인 핼리버튼사의 최고경영자(CEO)가 됐다. 그는 대개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매우 부유한 사람들로 이뤄진 배타적 세계로 들어갔다. 어린 시절부터 즐겨온 사냥 여행에 자주 가담한 시기도 이때였다(최근 동행자들 중에는 석유업계의 거부 T 분 피켄스 같은 재벌과 댈러스 카우보이의 명 쿼터백 로저 스토바크 같은 유명 체육계 인사도 여러 명 포함됐다). 그는 회사 전용기로 이곳저곳 누볐으며 측근과 부하 직원들은 온갖 시중을 다 들었다. 그는 정치적으로 골수 보수파였다. 특히 보수적 가치를 굳게 믿는 부인 린은 대부분의 보도에 따르면 비록 주위 사람과 잘 어울렸지만 잘난 척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여성이었다. 암스트롱의 목장은 체니가 속한 VIP의 세계를 완벽히 상징한다. 오발 사고는 바로 그곳에서 일어났다. 200㎢(약 6100만 평)의 완만한 대지에 자리 잡은 그 목장은 마치 영화 ‘고스포드 파크’(영국 귀족 사회에서 발생한 밀실 살인 사건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미국 남부 버전과 흡사하다. 제1, 2차 세계대전 사이를 배경으로 사냥 파티가 이뤄지는 영화 속 영국 시골 저택 고스포드 파크처럼 화려하거나 시중드는 하인이 많지는 않지만 암스트롱의 목장 역시 소박하고 우아하면서도 비밀스럽고 품격이 있다. 그곳에서 이뤄지는 메추라기 사냥 과정은 하나의 정교한 의식이다. 새가 있는 곳을 알려줄 수행원과 새들을 푸드덕 날아오르게 만든 뒤 총에 맞아 떨어진 새를 물어오도록 훈련된 개가 동행한다. 하인과 칵테일, 바비큐가 있으며, 수㎞ 근방에 기자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세상과 등지는 부통령의 공식적인 모습처럼 그 농장도 나름대로 세상과 고립돼 있다. 체니와 함께 사냥을 한 사람들은 부유한 공화당원들과 텍사스 ‘대지주 계급’ 출신들이었다. 농장 주인은 과거 영국 주재 대사였고 핼리버튼사 임원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체니를 CEO 자리에 앉힌 장본인인 공화당의 여장부 앤 암스트롱이다(그녀는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거론된 적도 있다). 암스트롱의 딸 캐서린은 의지가 굳고 활달한 여성으로(로라 부시는 최근 한 백악관 저녁 모임에서 그녀를 찰스 왕세자 옆자리에 앉혔다) 사건 당일 체니와 함께 사냥에 동행해 나중에 당시 상황을 뉴스위크에 전해 주기도 했다. 늦은 오후 모두들 사냥을 접으려 할 때였다. 오스틴의 유능한 변호사이자 공화당의 거액 기부자인 해리 위팅턴이 총 두 발로 메추라기 두 마리를 잡았다. 캐서린은 “훌륭해요. 두 마리를 잡았군요!”라고 외쳤다. 위팅턴이 개와 수행원을 데리고 명중시킨 새를 찾으러 간 동안 체니와 파멜라 윌퍼드 스위스·리히텐슈타인 주재 미국 대사, 그리고 공화당의 또 다른 주요 기부자는 또 다른 새 무리를 찾아 나아갔다. 자신의 뒤로 날아가는 새를 발견한 체니는 28구경 엽총을 들고 지는 해를 향해 돌아서며 방아쇠를 당겼다. 사냥꾼이 의무적으로 착용해야 하는 형광 오렌지색 조끼를 입고 있던 위팅턴은 27m 떨어진 마른 웅덩이를 지나 체니 쪽으로 다가오던 중이었다. 91m 떨어진 곳에서 지프에 타고 있던 암스트롱은 위팅턴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비밀검찰국 소속 요원들은 차 밖으로 뛰쳐나와 그녀를 지나 달려갔다. “이런 제길”이라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체니도 손에 총을 든 채 위팅턴에게 뛰어갔다. 얼마 후 부통령은 암스트롱과 함께 차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암스트롱은 “불쌍한 체니가 너무나 큰 고통을 겪었다”고 말했다. “너무도 조용했다.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체니는 “그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엉클 톰스 하우스’라 불리는 영빈관으로 체니가 돌아왔지만 언론에 이 사건을 어떻게 공개할지 전혀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백악관은 처음엔 부통령의 사냥 파티에서 확인되지 않은 오발 사고가 있었다는 보고만 받았다. 백악관 정치고문이자 대통령 비서실 차장인 칼 로브는 캐서린 암스트롱(그녀는 “로브는 가장 절친한 친구 중 하나”라고 뉴스위크에 말했다)에게 전화를 건 뒤에야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고 부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발포자는 부통령이며 위팅턴이 부상을 입었다는 내용이었다. 민감한 사안이라며 익명을 요구한 한 고위 백악관 관리에 따르면 그날 밤 체니는 부시나 백악관 관리, 자신의 홍보 담당자들에게도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비서실장이자 대통령의 무한 권한을 지지하며 입이 무거운 변호사 출신의 데이비드 애딩턴 부통령 비서실장에게만 알렸다. 체니의 보좌관들은 나중에 체니가 언론에 알리기 전에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고 싶었으며 위팅턴의 건강 상태는 당시 약간 불확실했다고 말했다. 처음엔 경미한 부상인 줄 알았지만 일요일인 12일 아침 병원 측은 그의 몸에 박힌 작은 산탄 일부가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발표했다. 워싱턴의 백악관 관리들은 체니의 측근들에게 오발 사건을 언론에 공개하라고 조용히 권고했다. 그러나 부시는 체니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고 아무 위로나 조언도 건네지 않았다. 오전 8시 직후 부보안관 한 명이 농장에 도착해 체니의 진술을 기록했다. 그 무렵 사건이 조용히 넘어가지 않으리란 점이 확실해졌다. 체니와 캐서린 암스트롱은 이 일을 어떻게 세상에 알려야 할지 의논했다. 암스트롱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체니는 “어떻게 하면 당신 마음이 편해지겠느냐”고 대답했다. 암스트롱은 그 지역 신문 코퍼스 크리스티 콜러-타임스의 제이미 파월 기자를 알고 있었다. 파월은 사냥에 관해 박식해 1년 전 암스트롱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당시 섬세하면서도 호의적인 부고 기사를 써줬다. 암스트롱은 그에게 즉각 연락을 바란다는 메시지를 계속 남겼지만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암스트롱과 신문사 사이의 오랜 협상이 끝난 후 오후 2시쯤 코퍼스 크리스티 콜러-타임스는 마침내 그 기사를 자사 웹사이트에 게재했다. 12일 오후 일부 언론은 ‘부통령, 사람을 쏘다’라는 제목으로 사건을 보도했다. 언론의 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제목이었다. 암스트롱은 체니의 이상적인 대변인은 되지 못했다. 그녀는 위팅턴이 사고 당시 체니의 뒤쪽으로 접근하면서도 이를 체니에게 알리지 않았으므로 그에게 책임이 있다는 듯 말했다(사냥꾼들은 대개 이 경우 무조건 총을 든 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암스트롱은 그날 체니가 점심 식사 자리에서 “전혀, 조금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체니는 나중에 맥주를 마셨다고 시인했다. 체니는 오랫동안 언론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일부 보좌관들은 체니가 기자들에게 무관심할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아내와 딸들은 언론에 보다 공격적이고 적대적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기자들은 대체 체니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궁금해 할 뿐이다. 부통령도 이를 은근히 즐기는 듯하다. 언젠가 체니가 이라크에서 막 돌아온 해병대원 몇 명을 만나는 뉴욕 북부의 어느 자리에 뉴스위크가 동석했다. 약 30분 후 체니는 수행원들에게 “언론 관계자들을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떠나는 기자들을 바라보며 체니는 씩 웃음을 지으며 “난 이럴 때가 제일 좋아”라고 말했다. 공보담당관과 공보국장이 여러 번 바뀌는 와중에도 체니의 수석 언론 고문은 항상 메리 매털린이었다. 오랜 세월 공화당에 몸담아 온 직업 정치인 매털린은 민주당의 유명 정치고문 제임스 카빌의 부인이기도 하다. 지금은 체니의 개인상담역으로 활동 중이다. 아무튼 체니 가족의 언론 경멸 심리는 매털린 탓에 더욱 강해진다(뉴스위크는 수차 전화를 했지만 매털린은 응답하지 않았다). 그나마 체니에게 뭔가 말을 하도록 설득할 사람도 매털린이 거의 유일하다. 공식 보좌관들은 체니를 다소 무서워한다. 뉴스위크는 언젠가 체니의 공보담당관(부통령이 되고 5년 남짓한 기간 중 6번이나 바뀌었다)에게 부통령이 일요일 교회에 나가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너무 사적인’ 질문이라 부통령에게 여쭈지 못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매털린은 월요일인 2월 13일까지도 체니의 공개적 입장표명을 머릿속으로만 생각했으나 화요일이 되면서 위팅턴의 상황이 악화조짐을 보였다(새 사냥용 산탄이 심장 근처 조직에 염증을 일으켰다). 그러나 부통령은 화요일에도 침묵을 지켰다. 점차 초조해진 백악관 참모진은 앨 고어처럼 야심 찬 부통령이라면 오프라 쇼에 나가 눈물바람이라도 일으켰을 거라며 조금은 불만 섞인 농담을 주고받았다. 13일 아침 백악관의 일일 정보 브리핑이 열리기 전 체니는 대통령과 독대했다. 늘 그렇듯 익명을 요구한 한 백악관 참모에 따르면 부시는 평상시엔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체니가 이번 사고로 얼마나 상심했는지 알아보려고 체니의 말을 경청했으며 이런저런 몸짓과 표정을 면밀히 관찰했다. “대통령은 이 문제에 관해 그에게 어느 정도 재량권을 주고 싶어했다. 대통령은 이번 사고가 그를 얼마나 압박하는지 알았다. 그래서 너무 다그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고 그 참모는 전했다. 마침내 15일이 되면서 언론이 들끓고 각종 심야 토크쇼에서 이번 사고가 웃음거리로 이용되자 체니는 (전하는 말로는) 자진해서 대중 앞에 서기로 결심했다. 서커스판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기자회견은 불가능하다고 매털린은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인 돈 아이머스에게 말했다. 우호적이면서도 진지하며 믿음직한 질문자로 낙점된 폭스 뉴스의 앵커맨 브릿 흄은 자신의 역할을 무난히 수행했다. 체니는 흄에게 사냥은 “삶의 큰 즐거움”이었지만 “사냥철은 이제 끝나간다. 얼마간은 그저 그렇게 시간을 보내겠다. 그런 연후에 미래를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체니를 명사수(하루에 70여 마리의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렸다)이자 원칙론자이며 안전지상주의 사냥꾼이라고 전하는 친구들은 그가 영원히 총을 내려놓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한번 실수는 병가지상사다. 이것이 바로 체니 같은 사냥꾼의 자세다. 최대한 빨리 사냥터로 돌아온다. 그에겐 사냥꾼의 피가 흐른다”고 막역한 친구인 색스비 챔블리스 상원의원(조지아)은 말했다. 체니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줄 뿐 아니라 경멸을 받는 데도 익숙하다. 그러나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일은 힘들다. 2002년 백악관 때문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자리에서 물러난 트렌트 로트 의원(미시시피)은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부통령이 일부 의원들을 만나러 의회를 방문했기에 “최고 포수님”하고 인사를 건넸더니 웃음을 보이지 않더라고 말했다. 체니는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욕먹을 운명이지만 먼 훗날 역사가 명예를 되찾아 주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침공을 준비하던 2002년 늦가을 보수적 성향의 대지주인 빅터 데이비스 핸슨이 체니의 관심을 끌었다. 내셔널리뷰 온라인에 9·11 관련 글을 쓰던 핸슨은 급기야 부통령의 집에 저녁식사 초대까지 받았다. 핸슨은 체니가 지적 호기심이 높고 독서량도 많으며 더구나 전쟁광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라크 전쟁에 무슨 환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단지 최소한도로 나쁜 선택일 뿐이었다.” 또한 저녁 시간 내내 “링컨에 대해 얘기했고, 지옥 같은 경험을 헤쳐 나온 지도자들에 관해 대화를 나눴다. 뭐랄까, 비장함 같은 게 느껴졌다”고 옛일을 떠올리던 핸슨은 방금 한 말을 정정했다. “비장함은 틀린 단어다. 감수한다는 말이 맞겠다. 내가 보기에 그는 당장엔 비난을 받아도 그 비난이 영원하진 않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가까운 지기들은 체니가 9·11에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테러 당일, 그리고 그 후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 체니의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으로선 당시 그가 느꼈을 심적 부담과 불확실성을 가늠하기란 어렵다. 9월 11일 오전 9시35분쯤, 비밀검찰국 요원들은 부통령을 냉큼 들어올려 백악관 벙커 안으로 밀어넣었다. 체니는 9·11 위원회에서 당시 워싱턴을 향한다고 파악된 납치 민간 항공기를 격추하라는 명령을 내리기 전에 부시 대통령과 먼저 상의했다고 증언했다(유나이티드항공 93편은 승객들의 용감한 저항행위가 있은 뒤 펜실베이니아주 벌판에 떨어졌다). 그러나 위원회 일에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민감한 정보이므로 신원은 밝히지 않았다) 당시 조사에 참여한 실무진은 아무도 체니의 설명을 믿지 않았다. 그 보고서 초안엔 그들의 의심이 그대로 담겨 있다. 앤드루 카드 백악관 비서실장과 당시 백악관 법률고문이던 앨버토 곤잘러스 등 백악관 최고위 관리들은 그 초안을 면밀히 검토한 뒤 몹시 격앙됐다. 한참 동안 설전이 벌어진 뒤 보고서는 한층 완화된 내용을 담게 됐다. 하지만 이 보고서를 꼼꼼히 읽어보면 실질적인 보고내용 속에는 체니가 당초 대통령에게 인가를 받기 위해 노력했다는 증거를 찾기 힘들다. 이는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체니에겐 당시 여행 중이던 (또한 금방 도착할 만한 거리에 있던) 상관에게 허락을 구해야 했다. 법적인 의무였다. 만일 체니가 대통령의 허가 없이 단독 명령을 내린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실질적 최고 권력자는 부시가 아니라 체니라는 세간의 소문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할 터였다. 9·11 이후 체니는 주로 ‘비밀 장소’에서 생활했다. 실제로 위협은 말에 그치지 않는 듯했다. 체니가 상당 기간 몰두한 일은 ‘유고시 계획’ 수립이었다. 이는 자기 자신과 대통령을 포함한 여러 최고 지도자들이 테러리스트의 생화학무기나 핵무기 공격으로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는 전제 하에 신속하게 공석을 메우는 소위 대체정부의 구성에 관한 일이었다. 탄저균 테러로 의심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부통령실의 실무진 간에는 으스스한 농담이 떠돌았다. 테러가 일어난 해 가을 여행길에 오르며 자동차에 사냥총을 싣는 체니에게 참모진 한 명이 농담을 던졌다. “상황이 그 정도로 나쁘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지도부를 향해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테러를 두고 하는 농담이었다. 그 해 가을 체니는 뉴욕주 북부, 사우스다코타주, 조지아주 남부, 메릴랜드주 이스턴쇼어 등에서 여러 차례 사냥을 했다. 정권 초기 체니가 부시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부시의 참모진은 부시가 점차 체니의 발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갔다고 말했다. 외교 문제에선 특히 더 그렇다고 주장했다. 물론 여전히 둘은 함께 점심을 들며 독대한다. 하지만 더 이상 매주 자리가 마련되진 않는다. 요즘 부시는 국가안보 문제에서 좀 더 온건한 쪽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목격된다. 이란과 북한 등 일련의 외교 문제에서 체니의 공격적인 방식은 현재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옹호하고 대부분이 지지하는 다원적 접근방식에 밀려났다. 지난주 의회에서 벌어진 무영장 도청에 관한 논란을 살펴보면 체니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음이 어렴풋이 감지된다. 미국으로 유입되는 교신 내용을 도청하려면 법원의 영장이 필요하다고 규정한 1978년 해외정보감시법(FISA)을 행정부가 무시하자 상원 정보위원회 소속 공화당 의원 세 명은 행정부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려고 벼르고 있다. 의회 동의 없이 전쟁(첩보활동 포함)을 수행할 권한이 행정부에 부여돼야 한다고 적극 주장한 체니는 그 공화당 의원들의 반란을 진압하려고 의회로 갔다. 14일 그는 상원 정보위원회의 비공개 청문회실 문을 잠그고 장시간 동안 그 상원의원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틀 후 부시의 강력한 지지자인 팻 로버츠 상원 정보위원장은 조사 개시를 결정하는 투표를 연기시킬 수 있었다. 이 일은 사냥 사건으로 안색도 안 좋고 확실히 기운도 없어 보이지만 여전히 조용히 영향력을 행사하는 능력이 체니에게 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그러나 로버츠 상원의원은 어딘가 불안한 듯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정보 당국의 도청은 결국 FISA에 의거해 실시돼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로버츠가 이런 의견을 피력하기 바로 전에 백악관은 다소 입장을 완화해 보다 많은 도청 정보를 공개할 작정이며 해당 법률을 고치는 문제를 두고 상원과 적극 의견을 나누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갑자기 체니는 더 이상 무소불위의 존재가 아닌 듯 보였다. With MICHAEL ISIKOFF, DANIEL KLAIDMAN, RICHARD WOLLFE, HOLLY BAILEY, MARK HOSENBALL and ELEANOR SLIFT in Washington and CARO RUST in Texas 강태욱·정민숙 t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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