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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주 칼럼] 경쟁의 쓰나미가 온다

[김병주 칼럼] 경쟁의 쓰나미가 온다

월드컵 축구경기는 제한된 운동장이란 공간에서 일정 기간 열기를 발산하고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각국 경제 전쟁은 세계 도처의 시장에서 지속적으로 냉엄한 경쟁을 통해 승패가 갈린다. 현 정부 핵심부는 거꾸로 가는 국내의 ‘개혁’과 북한 돕기에 몰입하고 있지만, 주요국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세계 경제 현실의 소용돌이에서 우리만 자유로울 수 없다. 지난 6월 15일 도쿄(東京)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 비공개 회의에서 미국 재무부 국제관계 차관보 팀 애덤스가 아시아 통화단위 창설에 더 이상 미국이 반대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이것은 1997년 환란 직후 일본의 아세아 통화 통합안을 거부했던 미국의 입장을 철회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돌이켜 보면 환란 이후 미국의 조야는 달러화의 기축통화 지위를 잠식하는 어떤 변화도 수용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입장이었다. 정부와 금융계는 물론 학계도 같은 목소리였다. 달러리제이션과 그 변신인 커런시 보드(홍콩 등의 통화위원회)보다 정부와 중앙은행이 신뢰성과 합리성이 인정되는 거시경제 금융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더 우월하다는 뉴욕대 루비니 교수의 주장이 설득력 있다. 하지만 몇 해 전까지 서울을 자주 방문하던 하버드대의 로버트 배로 교수는 한국이 미국 달러화를 통화로 쓰라는 제안을 되풀이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아시아 환란 이후 미국 경제의 고질병 쌍둥이 적자는 심화일로였다. 경상수지 적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7%에 이르렀고, 해외자본 유입도 주춤해졌다. 미 연방준비제도(FRB) 이사회의 버냉키 의장이 지속적인 금리 인상을 예고해 인플레이션 파이터로서의 변모를 부각하려 하지만, 시장에서 그린백의 시세를 지탱하기에 역부족이다. 한편 동아시아 국가들은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해 2조 달러 이상의 외환을 보유해 자신감에 느긋해졌다. 그러기에 중국은 환율 인하를 요구하는 미국에 남의 탓하기 전에 “집안 정리부터 하라”고 반박할 수 있게끔 됐다. 이것이 애덤스 차관보 발언의 배경이다. 환란을 겪었던 한국으로서는 반가운 변화 조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시아 통화 통합이 성사되기까지 앞길은 요원하다. 유럽의 경우 경제통합 이전에 먼저 2차대전 당사국들 간의 화해, 우리 식으로 말해서 과거사 정리가 독일의 진솔한 사죄로 마무리됐다. 동아시아의 경우 주요국들이 경쟁적으로 역사왜곡을 탐닉하고 있어 국민적 화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유럽의 경우 독립성이 강한 중앙은행으로서의 그 평판을 갖춘 독일 연방은행이 있어 유럽 중앙은행의 모태가 될 수 있었다. 동아시아의 경우 가장 앞섰다는 일본은행도 모태 감으로 부적절하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사이에 팽팽한 주도권 다툼이 예상돼 한국이 조정자로서 주도권을 잡을 틈새가 엿보이지만, 현재는 비전도 준비도 없다. 결국 미국 등 역외국가의 입김에 노출되는 형태의 통화 통합이 될 가능성이 크다. 통화 통합은 환란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장점과 도덕적 해이 초래의 단점이 있다. 통합 이후 인구 감소 등 노쇠화가 역력한 일본의 선진 경제, 인구 증가의 고삐를 틀어쥐기에 바쁜 중국의 신흥경제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통합 중앙은행이 유동성 공급창구를 팽창(서강대 명예교수)긴축 어느 한 방향으로 균일하게 운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늘날 중국 내 지방정부 간 경제상황 차이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아직은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인 일본은 투명성을 높이고 규제의 틀을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만 하면 단연코 도쿄가 지역통합은행의 본거지로 자리 굳힐 수 있다. 다양한 국제 금융기관들이 활발하게 영업하고 있는 홍콩이 있고, 정부가 정책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상하이(上海)가 있다. 시야를 조금 넓히면 싱가포르가 버티고 있고, 이슬람 금융과 라부안을 앞세운 콸라룸푸르가 도사리고 있다. 한국은 현정부 출범 시 동북아 금융허브 제안이 반짝했다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축구는 둥근 공에 승패의 운을 맡기고 즐길 수 있는 게임이지만, 경제는 사활을 건 경쟁을 요구하는 엄숙한 생존 과제다. 기업·근로자·가계가 분발하고 정부는 전략을 짜고 지원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은 먼 얘기로 들리지만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물러가고 미국 경제 질환이 깊어지면 국제금융 변화의 쓰나미가 나타날 수 있다. 머지않아 싫든 좋든 일본인·중국인이 우리의 돈줄을 거머쥐는 시대가 온다. ‘경쟁’을 저주의 말로 여기다가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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