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경제부촐릐 영광과 좌절] 한덕수의 성적표

[경제부촐릐 영광과 좌절] 한덕수의 성적표

설 연휴를 앞둔 지난 1월 26일 아침. 스크린 쿼터 축소를 결정하기 위해 경제장관회의가 열렸다. 난상토론을 벌인 끝에 현행보다 절반으로 줄인다는 방침이 결정됐지만 누가 이것을 발표할 것인가를 놓고 논쟁이 거듭됐다. ‘문화부 장관이 해야 한다’ ‘통상교섭본부장이 낫겠다’며 갑론을박이 한참 이어지던 것을 지켜보던 한덕수 경제부총리가 나섰다. 총대를 메기로 한 그는 곧바로 재경부로 돌아가 기자들 앞에서 스크린 쿼터 축소 방침을 전격 발표했다. 7·3 개각으로 참여정부의 세 번째 경제팀 수장에서 물러나게 된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의 업무 스타일은 합리적인 대화와 토론을 즐기며, 도출된 결과의 집행을 중시한다. 그러나 취약한 경제 리더십에 대한 비판이 끊이지 않으면서 재임기간 내내 ‘색깔 없는 부총리’로 불렸다. 카리스마와 보스 기질이 넘쳐났던 역대 거물급 경제 부총리들에 비해 파워가 약하고 중량감이 떨어진다는 ‘선입관’이 깔려 있는 이 표현은 학자풍의 면모에다 조용히 일을 추진하는 그의 성격에서 비롯됐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꺼리지 않는 ‘반골’ 성향이라기보다는 정확한 상황 판단과 조언에 어울리는 전형적인 ‘참모형’ 인재라는 게 그에 대한 중평이다. 이 때문인지 각각의 목소리가 크고 복잡한 경제팀 내에서 강력한 지도력이 부족하지 않으냐는 지적을 곧잘 받았다. 한 전직 장관은 “각료들과 자주 폭탄주를 나누며 허심탄회하게 경제팀을 이끌었던 전임 이헌재 부총리와는 달리 그는 말수가 적고 학구적인 면모가 강해 친해지기가 쉽지 않았다”며 “‘만기친람(萬機親覽)형’ 장수라기보다는 ‘단기필마(單騎匹馬)형’ 인재에 가깝다”고 평했다.

“한덕수는 단기필마형 인재” 하지만 그가 부총리 재임기간 중 이룬 실적에 대해 할 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8년 동안 해묵은 난제였던 스크린 쿼터를 축소하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개시 합의를 이끌어낸 것을 비롯, 이렇다 할 경기부양책을 동원하지 않은 채 일관된 정책을 펼치면서 국내총생산(GDP) 등 실물지표를 개선하고 경기회복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은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실제 정책 개발에서도 ‘개방과 경쟁’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워 외환규제 완화, 시장개방 등 우리 경제의 규제 개혁과 글로벌화에 주력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한 부총리의 적극적인 개방 정책은 해외에서 ‘한덕수 프리미엄’이라 불릴 정도로 국내에서보다는 외국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다. 합리적인 설득을 통해 정책의 안정성을 높이는 업무 방식도 돋보인다는 게 과천 관가의 평이다. 그는 항상 ‘합리적’이란 말을 즐겨 사용한다. 예컨대 ‘경기 부양’이라는 말 대신 ‘합리적인 경기 진작’이란 표현을 쓸 정도다.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출신답게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의 소통을 좋아했다. 실제로 한 부총리는 재임기간 중 일주일에 네 번씩 관계 각료들과 공식·비공식 정례 모임을 하고 경제현안에 대해 토론했다. 화요일·목요일 아침에 관계장관과 청와대 정책실장, 한국은행 총재와 함께 거시경제 현안을 논의하고 목요일 저녁 관계장관 정례 만찬 등을 통해 이견을 좁힌 뒤 금요일 아침의 경제정책조정회의를 통해 정책을 이끌어내는 식이다. 지금까지의 수직적인 의사결정 구조에 익숙한 ‘통솔식’ 정책 입안 과정과는 분명히 다른 대목이다. 산자부 출신인 그가 머리 좋다는 수재들이 모여있는 재경부에 들어가 1년4개월여 동안 조직을 장악하고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33년 경제 테크노크라트 생활에서 배어난 노하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그는 기획원 과장 시절 산자부로 옮겨갔으며, 산자부 차관을 지낸 뒤엔 직업 외교관들이 판치는 외교부 내에 초대 통상교섭본부장으로 가는 등 항상 외부 인사를 적대시하는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본 경험이 많았다. 그런 만큼 적응력이 뛰어나고 처세술도 원만했기 때문에 재경부 입성 후에도 별로 호의적이지 않을 수 있는 부내 분위기를 무리 없이 잘 추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카리스마와 리더십은 다르다”주장 “리더십이란 카리스마가 있고 없고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열심히 노력하고 지식을 길러야만 나오는 것입니다.” 지난 6일 재경부에서 열린 마지막 정례 브리핑 자리. 한 부총리는 퇴임 소회를 밝히면서도 자신을 향한 세간의 지적을 의식한 듯, “그동안 수직적 리더십보다는 수평적 리더십을 보이려고 노력해 왔다”며 “이를 위해선 지시와 명령보다는 꾸준한 대화와 토론이 필요하다”고 해명했다. 한 부총리는 재임기간 내내 ‘경제부총리는 어디에 있느냐’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유약한 리더십에 대한 비판에 시달렸다. 있는 듯 없는 듯한 그의 존재감은 바로 리더십 부재(不在)라는 지적으로 이어졌고, 심지어 개각 때마다 “경제부총리를 (개각 대상에) 넣으나 빼나 색깔은 마찬가지”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성향을 ‘시장주의자이자 개방주의자이고 재정에 관해서는 (건전성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라고 규정했다. 시장 개방과 자율성을 추구하면서도 부동산 시장과 같은 시장의 실패에 대해서는 공적 수단과 시장주의적 대책을 함께 추진했다고 자평해 왔다. 그러나 대화와 토론을 통한 수평적 리더십이라는 외형적인 변화를 내세웠지만 결과물로 나온 각종 경제정책들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노무현 정부의 통치철학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수주(受注)형 정책’을 내놓는데 그쳤다는 것이 비판론의 골자다. 특히 보유세 강화를 골자로 하는 8·31 대책으로 대표되는 부동산·조세정책은 집값 양극화와 조세저항을 불러와 결국 그의 퇴진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게 중론이다. 의욕을 보였던 중장기 조세개혁 방안도 정치 논리에 밀려 사실상 논의를 접었다. 그의 교체는 5·31 지방선거 참패 이후 분위기 쇄신과 국면 전환을 위한 정치적 차원에서의 ‘경질’ 성격이 짙다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선거 직후 경제부총리 교체설이 나돌기 시작한 것은 여당 의원들과 청와대의 젊은 참모들을 중심으로 선거 패배 원인이 부동산 세금정책 등 경제정책의 실정 때문이었다는 지적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한 부총리가 유연하지만 약하다. 뭔가 2% 부족하다”는 인물평도 한몫했다는 후문이다. 게다가 좋지않은 상황까지 크게 작용했다. 외환은행 헐값 매각 문제와 관련해 감사원과 재경부가 맞서고 재경부 출신 인사들이 수뢰 문제로 구속되는 사건 등이 잇따라 벌어지면서 한 부총리가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더욱 증폭됐다. 금리·환율 등의 거시 경제변수 운영에 대한 확고한 정책 비전 없이 ‘관리형’ 정책에만 주력하는 바람에 하반기 이후 뚜렷해지고 있는 경기둔화 조짐·양극화 등에 대한 선제적 정책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지나치게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통상교섭본부장 시절 “스크린 쿼터제가 오히려 한국 영화 산업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며 스크린 쿼터 폐지의 직격탄을 날릴 정도로 시장 개방 문제에 관한 한 그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뚝심 있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거시 경제 정책의 문제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행보로 일관해 자신의 컬러가 담긴 정책 개발이 아쉬웠다는 지적이다. 그는 자신과 닮은 ‘참모형’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는 후임 권오규 경제부총리에 대해 “거시와 미시 경제에 정통하며 국제적 안목과 개방적 사고도 하고 있는 유능한 관료”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권 후임 부총리가 과연 전임자의 전철을 비슷하게 밟게 될지, 아니면 전임자의 ‘실패학(失敗學)’을 교훈 삼아 새로운 행보를 보일지에 주목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오픈런 필수” 크플, 연 12% 수익률 ‘단기투자’ 후속 상품 출시

2김성태 기업은행장, 중소기업 대표 20명 만나 “중기 위기극복 지원” 약속

3아직도 줄 서서 기다려?…자녀 셋 낳으면 공항 '하이패스'

4"국내 제약·바이오 인수합병 상당수 1000억원 미만"

5“회장님 픽” 농협은행 ’밥심예금’…최고 3.1% 금리 눈길

6부모가 자녀 ‘틱톡’ 사용 시간관리…팔로우 목록도 확인

7취준생 10명 중 6명 공채보다 수시 선호, 그 이유는?

8네이버 AI 쇼핑앱 ‘네이버플러스 스토어’ 오픈…쿠팡 와우멤버십과 본격 경쟁

9김수현 ‘미성년자 교제’ 논란에 유통업계 ‘초비상’…광고 삭제·일정 보류 나서

실시간 뉴스

1“오픈런 필수” 크플, 연 12% 수익률 ‘단기투자’ 후속 상품 출시

2김성태 기업은행장, 중소기업 대표 20명 만나 “중기 위기극복 지원” 약속

3아직도 줄 서서 기다려?…자녀 셋 낳으면 공항 '하이패스'

4"국내 제약·바이오 인수합병 상당수 1000억원 미만"

5“회장님 픽” 농협은행 ’밥심예금’…최고 3.1% 금리 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