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 객원기자의 공개하지 못한 취재수첩] 기름덩이 얻어다 빨랫비누 만들어
[이호 객원기자의 공개하지 못한 취재수첩] 기름덩이 얻어다 빨랫비누 만들어
기억해도 좋을 여성 기업인이 한 사람 있다. 화려하지도 궁상스럽지도 않고, 요란스럽지도 바보스럽지도 않으면서, 늙지도 젊지도 않은 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게 오직 ‘깨끗함을 위하여’ 그렇게 50년 넘도록 하나에만 평생을 걸고 조용히 지내온 여성 기업인이다. 옛 어머니들에게는 네모나고 도토리묵처럼 거무죽죽한 빨랫비누로 기억하고 있을 ‘무궁화유지’ 최남순(75) 회장. 무궁화유지는 고 유한섭 회장이 1944년부터 무궁화 그림이 찍힌 빨랫비누를 만들어 동네방네에 나누어주기도 하고 팔기도 하다가 47년에 ‘무궁화비누’라는 이름으로 창업한 회사다. 최남순 회장이 남편과 함께 비누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53년부터니까 ‘최남순의 이력서’로는 1.5세 창업주이면서 국내 최초의 여성 기업인이 되는 셈이다.
남편이 설립… ‘휴엔코’로 제2 창업 지난 5월, 창립 60주년을 맞아 2세 경영체제(대표 유성수)를 확립하면서 제2의 창업을 한다는 각오로 회사 이름을 ‘인간(Human), 환경(Environment), 기업(Cooperation)’의 합성어인 ‘휴엔코’로 변경하고 무공해 세제와 생활용품 전문기업에서 웰빙 문화를 추구하는 기업으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했지만 독자들에게는 여전히 ‘무궁화비누’가 친숙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대기업들이 엄청난 광고 공세와 지방 계열사들까지 조직적으로 동원하면서 한때 세제 시장이 과열될 정도로 판촉 경쟁에 불붙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방문 판매와 유명 배우들을 모델로 내세운 치열한 광고전을 벌였어도 끝내 품질에서만큼은 무궁화비누 제품을 누르지 못했던 것은 그 선두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최 회장의 고집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고집의 핵심은 ‘속이지 않는다’는 제품의 양심이었다. 실질적인 무궁화유지 창업 60주년이 되는 2004년 12월, 서울 공릉동에 있는 서울사무소와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본사를 오가면서 최 회장과 ‘숨은 저력’ 60년에 대해 들어보았다. “우리가 신체든, 옷이든 깨끗하게 한다는 건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 아니겠어요? 그런데 깨끗하게 해주는 세제를 만들면서 공해를 일으키는 제품을 만들면 건강할 수가 없잖아요. 뭐 유식하게 이런저런 얘기로 꾸며댈 것도 없고, 그저 우리는 공해 없는 좋은 제품을 만드는데 50년 넘게 열심히 연구해 왔다, 그것밖에 내세울 게 없어요. 그래서 저희 무궁화 연구소가 무공해 세제를 만들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1년 반 넘게 매달려서 처음 내놓은 것이 ‘마일드 붐’인데, 그게 90년부터 개발에 들어갔던 거예요. 솔직히 그전까지는 우리가 먹고 살기 바쁘니까 공장의 오폐수, 발암물질, 이런 굴뚝산업이 유발하는 산업공해나 세제 때문에 물과 토양이 오염되는 소위 생활 공해 같은 것은 크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처지였잖아요. 그러다가 91년 3월인가요? 거기도 대기업인데 어떤 전자회사가 낙동강에 페놀을 방류한 사건이 발생했잖아요. 그 때문에 사회적으로 환경 문제가 급부상하고 특히 수질 환경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굉장해졌죠. 그때 무공해 제품이 어디 없나 해서 찾으니까 다들 난리가 났는데 그때 우리가 마일드 붐을 내놨죠. 그랬더니 그때부터 우리를 새롭게 인식하더라고요.”
비누 푼 물에서 붕어가 15시간 멀쩡 실제로 실험이 있었다. “비판 잘하기로 유명한 국내 시민단체들하고 언론사, 그리고 교수들과 국내외 유명 세제 생산업체 연구소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대연회장에서 무공해 세제에 대한 공개 실험을 했죠. 생태계 실험을 ‘생실험’이라고 해요. 그때는 중소기업들은 물론이고 시장점유율이 높은 최대의 A·B·C 대기업들도 자사 제품들을 내놨어요. 시민단체들과 언론들이 공개적으로 제품을 실험하는 기회니까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광고 효과도 클 거 아니겠어요.” 페놀 방류 사건 직후였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관심이 높았다. 그런데 대기업들과 중소기업들이 출품한 모든 세제가 전부 붕어만 죽였다. 실험은 매우 간단했다. 시판 중인 세제들을 전부 출품하고 그 세제를 물에 풀어 비무장지대에서 가지고 온 가장 오염이 안 된 붕어를 넣은 후 얼마나 사는지를 지켜보는 방법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세제마다 시간 차는 있었지만 모조리 2시간에서 6시간 사이에 붕어들이 둥둥 떠올랐다. 심지어 일본이 세계 최초의 무공해 제품이라고 자랑하던 라이언 유지의 스파크도 3시간 만에 붕어를 죽였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모두가 눈을 의심했다. 놀랍게도 15시간이 넘도록 유일하게 살아서 유연한 몸놀림을 계속하는 유리병 속의 붕어가 확인된 것이다. 그것이 무궁화유지의 ‘마일드 붐’을 풀어넣은 붕어였다. “결국 실험은 계속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나중에 그 붕어를 회사로 옮겼는데 2주일이 넘어도 살아있어요. 그때 생실험의 엄정한 심판관은 언론사나 시민단체나 교수들이 아니라 붕어였다고 동아일보가 보도해 한참 웃었는데 우리가 넣은 세제에만 붕어가 살아있잖아요, 하하하.” 91년 생실험은 무공해 세제가 국내에서 최초로 입증된 것을 기념하는 뜻도 있지만 식물성 비누계 원료를 사용한 무공해 세제와 기존의 석유계 원료를 사용한 화학성 세제하고의 차별화를 분명히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컸다. 더욱이 마일드 붐은 이미 광고도 접은 상태였다. 그만큼 신제품 개발이 속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 제품을 떠나서 전문기업 무궁화유지가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점이 있었다. 한우물을 파면서 60년의 맥을 이어온 전통성에서 남다른 점이 발견된 것이다. “우리가 양잿물로 빨랫감을 삶고, 머리를 감을 때 기어다니는 이와 머리카락에 붙어서 기생하는 하얀 알들도 양잿물이나 DDT가 유일한 처방약이라고 알고 있던 시절에 살았잖아요. 그런데 어디에서 비누를 만들어 봤는지 그이(유한섭)가 비누를 알고 있었고, 몸도 옷도 모두가 청결하지 못한 걸 보고 이래선 안 된다면서 비누 제작을 하겠다고 나섰더라고요. 그때 벌써 그 양반의 마음속에는 기업인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지 않았던가 싶어요. 장사꾼은 자기 먹을 것을 생각하지만 기업인이라는 건 사회를 생각하게 되잖아요. 그러고 제 기억에 남아있는 그이는 고아들이나 신문 돌리는 어린 학생을 보면 아무리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어도 지나치지 못하고 주머니를 열어야 되는 양반이었어요. 부드러운 외모였는데 집념이 강한 성격이었고….”
비누를 만들게 된 배경은 어디서부터 이야기가 돼야 하겠습니까. “그이는 평안북도 의주 출신인데 중국에서 신징공업학교를 마치고 얼마 안 있다가 고향을 두고 월남하셨거든요? 그래서 초기에는 마땅한 직업이 없어서 공사판에서도 고생을 하셨어요. 근데 성격이 워낙 깔끔하고 더러운 걸 못 참으세요. 먹는 것조차 빈곤한 시절인데 남들 같으면 청결에 어떻게 신경을 쓰겠어요. 그런데도 몸 하고 의복은 깨끗이 해야 한다는 거죠. 그러니 공사판에서 얼마나 있었겠어요. 곧바로 공사판을 나와서 그때 생각한 게 비누였대요. 그때부터 그이는 푸줏간이든 미군 부대든 찾아다니면서 쓰레기통으로 나오는 기름 덩어리 있잖아요? 그걸 모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이가 체격도 좋고 잘생겨서 그랬던지 주방의 아주머니든 아저씨든 버리는 기름덩어리라도 그땐 남대문 시장에 가면 돈인데 모두 ‘이북사람 유씨’ 몫으로 챙겨주더라는 거죠.” 새벽도 없고 밤도 없었다. 그가 그렇게 수거한 기름덩어리를 자루에 담아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 곳은 청계천8가 검정다리 밑이었다. 그리고 그는 고기 껍질에 약간씩 붙어있는 기름 조각까지도 소나무 속껍질 벗기듯이 알뜰히 긁어냈다. 그러면서 오물은 닦고 분리하고 헹궈내며 양잿물을 섞어서 드럼통에 담아 불을 피웠다. 마침내 검정다리 밑에서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기름덩어리가 끓었다. 바로 청계천8가 검정다리 밑이 무궁화비누의 첫 공장인 셈이었고 오직 드럼통과 비누를 찍어내는 나무틀이 공장 시설물의 전부였다.
그러면 원래 비누를 제조하는 기술을 가지고 월남하셨던 겁니까? “그랬었나 봐요. 물론 처음에는 그 양반한테 완벽한 기술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어느 분이 비누를 만들 때 그이는 옆에서 불을 때셨대요. 한 3개월 되니까 그분이 그 일을 그만두더라는 거지요. 그때는 먹기도 바쁘니까 기름이 있어요? 기름이 없으니까 못하고 그만둔 거예요. 그때는 그만둔다고 해봐야 드럼통 하나 치우고 아궁이 덮어버리면 그만이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그때 한 석 달 동안 불때 주면서 어깨 너머로 배운 게 전부죠 뭐. 그걸 가지고 청계천에서 시작했는데 야심은 커서 시커먼 비누에 무궁화 그림을 새기고, 그때 뭐 회사라는 건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니까 간판은 없는 거고요. 그렇게 시작했는데 겨우 하루 몇 개 정도 만들어서 이웃에 주기도 하고 구멍가게에 팔기도 하면서 실험을 해보는 단계였는데 6·25가 터진 거지요. 그러니 다 버리고 제주도로 피란가셨다가 서울이 수복 된 후에 다시 돌아와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저하고 만나 결혼할 무렵만 해도 자전거 하나 하고 드럼통 하나, 그게 전부였어요.”
제약회사 다니다 성실함 보고 결혼
(최남순) 회장님은 어떻게 인연이 되셨습니까. “제가 제약회사 다니다가 결혼했는데, 시커먼 남자 하나 구제해줬죠 뭐, 하하하. 정말 성실하게 살고 외모도 제법 잘생겨서 내가 슬그머니 끌어당겼어요. 나중에 성공하면 내 덕이라고 큰소리치려고, 하하하. 근데 제약회사를 보다가 비누 만드는 현장을 보니까 기가 막혀요. 그래도 이 양반이 얼마나 열심히 정성껏 만드는지 하루에 비누를 2박스, 3박스 만들어 동대문 시장, 구멍가게, 그렇게 갖다주면 정말 잘 팔렸어요. 가격도 좋고. 더구나 비누 중에서도 모양을 제대로 갖추고 무궁화 상표까지 찍힌 빨랫비누라는 건 그때만 해도 생전 처음 보는 거잖아요. 희한한 거지요 하하. 그때부터 무궁화비누가 된 거예요. 이름이 붙은 거죠. 실제로 무궁화 빨랫비누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장사한 것은 전쟁 후였지만 법적으로는 47년 5월 25일자로 서대문구 서소문동을 주소로 해서 회사 등록을 했어요. 청계천 다리 밑에서부터 했었으니까. 근데 우연이겠지만 우리가 회사로 등록을 한 날 지금의 현대건설이 ‘현대토건사’라는 이름으로 똑같이 등록을 했어요. 그쪽(현대)도 실향민이고.” 사업은 번창일로였다. 무궁화비누가 지금처럼 푸르거나 하얗지는 않아도 가정에서 쌀겨로 만든 검정비누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척력이 뛰어나고 규격까지 일정하게 갖추고 있어서 시장에서는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였다. 어쨌든 대기업이 화장비누나 세제에 손을 댄 것도 한참 후였기 때문에 60년대의 무궁화비누는 경쟁자도 없는 셈이었다. 거기다가 유 회장은 단신으로 월남해 일가친척이 없는 데다 성격적으로도 다른 기업인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꺼려서 시간만 나면 비누 제작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품질도 향상되는 게 당연했다. 물론 식구가 없으니 돈이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사람이라서 수입도 계속 늘어났다. <계속>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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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설립… ‘휴엔코’로 제2 창업 지난 5월, 창립 60주년을 맞아 2세 경영체제(대표 유성수)를 확립하면서 제2의 창업을 한다는 각오로 회사 이름을 ‘인간(Human), 환경(Environment), 기업(Cooperation)’의 합성어인 ‘휴엔코’로 변경하고 무공해 세제와 생활용품 전문기업에서 웰빙 문화를 추구하는 기업으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했지만 독자들에게는 여전히 ‘무궁화비누’가 친숙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대기업들이 엄청난 광고 공세와 지방 계열사들까지 조직적으로 동원하면서 한때 세제 시장이 과열될 정도로 판촉 경쟁에 불붙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방문 판매와 유명 배우들을 모델로 내세운 치열한 광고전을 벌였어도 끝내 품질에서만큼은 무궁화비누 제품을 누르지 못했던 것은 그 선두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최 회장의 고집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고집의 핵심은 ‘속이지 않는다’는 제품의 양심이었다. 실질적인 무궁화유지 창업 60주년이 되는 2004년 12월, 서울 공릉동에 있는 서울사무소와 경기도 동두천에 있는 본사를 오가면서 최 회장과 ‘숨은 저력’ 60년에 대해 들어보았다. “우리가 신체든, 옷이든 깨끗하게 한다는 건 건강하고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 아니겠어요? 그런데 깨끗하게 해주는 세제를 만들면서 공해를 일으키는 제품을 만들면 건강할 수가 없잖아요. 뭐 유식하게 이런저런 얘기로 꾸며댈 것도 없고, 그저 우리는 공해 없는 좋은 제품을 만드는데 50년 넘게 열심히 연구해 왔다, 그것밖에 내세울 게 없어요. 그래서 저희 무궁화 연구소가 무공해 세제를 만들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1년 반 넘게 매달려서 처음 내놓은 것이 ‘마일드 붐’인데, 그게 90년부터 개발에 들어갔던 거예요. 솔직히 그전까지는 우리가 먹고 살기 바쁘니까 공장의 오폐수, 발암물질, 이런 굴뚝산업이 유발하는 산업공해나 세제 때문에 물과 토양이 오염되는 소위 생활 공해 같은 것은 크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 처지였잖아요. 그러다가 91년 3월인가요? 거기도 대기업인데 어떤 전자회사가 낙동강에 페놀을 방류한 사건이 발생했잖아요. 그 때문에 사회적으로 환경 문제가 급부상하고 특히 수질 환경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굉장해졌죠. 그때 무공해 제품이 어디 없나 해서 찾으니까 다들 난리가 났는데 그때 우리가 마일드 붐을 내놨죠. 그랬더니 그때부터 우리를 새롭게 인식하더라고요.”
비누 푼 물에서 붕어가 15시간 멀쩡 실제로 실험이 있었다. “비판 잘하기로 유명한 국내 시민단체들하고 언론사, 그리고 교수들과 국내외 유명 세제 생산업체 연구소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대연회장에서 무공해 세제에 대한 공개 실험을 했죠. 생태계 실험을 ‘생실험’이라고 해요. 그때는 중소기업들은 물론이고 시장점유율이 높은 최대의 A·B·C 대기업들도 자사 제품들을 내놨어요. 시민단체들과 언론들이 공개적으로 제품을 실험하는 기회니까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광고 효과도 클 거 아니겠어요.” 페놀 방류 사건 직후였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관심이 높았다. 그런데 대기업들과 중소기업들이 출품한 모든 세제가 전부 붕어만 죽였다. 실험은 매우 간단했다. 시판 중인 세제들을 전부 출품하고 그 세제를 물에 풀어 비무장지대에서 가지고 온 가장 오염이 안 된 붕어를 넣은 후 얼마나 사는지를 지켜보는 방법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세제마다 시간 차는 있었지만 모조리 2시간에서 6시간 사이에 붕어들이 둥둥 떠올랐다. 심지어 일본이 세계 최초의 무공해 제품이라고 자랑하던 라이언 유지의 스파크도 3시간 만에 붕어를 죽였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모두가 눈을 의심했다. 놀랍게도 15시간이 넘도록 유일하게 살아서 유연한 몸놀림을 계속하는 유리병 속의 붕어가 확인된 것이다. 그것이 무궁화유지의 ‘마일드 붐’을 풀어넣은 붕어였다. “결국 실험은 계속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나중에 그 붕어를 회사로 옮겼는데 2주일이 넘어도 살아있어요. 그때 생실험의 엄정한 심판관은 언론사나 시민단체나 교수들이 아니라 붕어였다고 동아일보가 보도해 한참 웃었는데 우리가 넣은 세제에만 붕어가 살아있잖아요, 하하하.” 91년 생실험은 무공해 세제가 국내에서 최초로 입증된 것을 기념하는 뜻도 있지만 식물성 비누계 원료를 사용한 무공해 세제와 기존의 석유계 원료를 사용한 화학성 세제하고의 차별화를 분명히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컸다. 더욱이 마일드 붐은 이미 광고도 접은 상태였다. 그만큼 신제품 개발이 속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 제품을 떠나서 전문기업 무궁화유지가 관심을 끄는 또 다른 점이 있었다. 한우물을 파면서 60년의 맥을 이어온 전통성에서 남다른 점이 발견된 것이다. “우리가 양잿물로 빨랫감을 삶고, 머리를 감을 때 기어다니는 이와 머리카락에 붙어서 기생하는 하얀 알들도 양잿물이나 DDT가 유일한 처방약이라고 알고 있던 시절에 살았잖아요. 그런데 어디에서 비누를 만들어 봤는지 그이(유한섭)가 비누를 알고 있었고, 몸도 옷도 모두가 청결하지 못한 걸 보고 이래선 안 된다면서 비누 제작을 하겠다고 나섰더라고요. 그때 벌써 그 양반의 마음속에는 기업인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지 않았던가 싶어요. 장사꾼은 자기 먹을 것을 생각하지만 기업인이라는 건 사회를 생각하게 되잖아요. 그러고 제 기억에 남아있는 그이는 고아들이나 신문 돌리는 어린 학생을 보면 아무리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어도 지나치지 못하고 주머니를 열어야 되는 양반이었어요. 부드러운 외모였는데 집념이 강한 성격이었고….”
비누를 만들게 된 배경은 어디서부터 이야기가 돼야 하겠습니까. “그이는 평안북도 의주 출신인데 중국에서 신징공업학교를 마치고 얼마 안 있다가 고향을 두고 월남하셨거든요? 그래서 초기에는 마땅한 직업이 없어서 공사판에서도 고생을 하셨어요. 근데 성격이 워낙 깔끔하고 더러운 걸 못 참으세요. 먹는 것조차 빈곤한 시절인데 남들 같으면 청결에 어떻게 신경을 쓰겠어요. 그런데도 몸 하고 의복은 깨끗이 해야 한다는 거죠. 그러니 공사판에서 얼마나 있었겠어요. 곧바로 공사판을 나와서 그때 생각한 게 비누였대요. 그때부터 그이는 푸줏간이든 미군 부대든 찾아다니면서 쓰레기통으로 나오는 기름 덩어리 있잖아요? 그걸 모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이가 체격도 좋고 잘생겨서 그랬던지 주방의 아주머니든 아저씨든 버리는 기름덩어리라도 그땐 남대문 시장에 가면 돈인데 모두 ‘이북사람 유씨’ 몫으로 챙겨주더라는 거죠.” 새벽도 없고 밤도 없었다. 그가 그렇게 수거한 기름덩어리를 자루에 담아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 곳은 청계천8가 검정다리 밑이었다. 그리고 그는 고기 껍질에 약간씩 붙어있는 기름 조각까지도 소나무 속껍질 벗기듯이 알뜰히 긁어냈다. 그러면서 오물은 닦고 분리하고 헹궈내며 양잿물을 섞어서 드럼통에 담아 불을 피웠다. 마침내 검정다리 밑에서 회색 연기가 피어오르고 기름덩어리가 끓었다. 바로 청계천8가 검정다리 밑이 무궁화비누의 첫 공장인 셈이었고 오직 드럼통과 비누를 찍어내는 나무틀이 공장 시설물의 전부였다.
그러면 원래 비누를 제조하는 기술을 가지고 월남하셨던 겁니까? “그랬었나 봐요. 물론 처음에는 그 양반한테 완벽한 기술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요. 어느 분이 비누를 만들 때 그이는 옆에서 불을 때셨대요. 한 3개월 되니까 그분이 그 일을 그만두더라는 거지요. 그때는 먹기도 바쁘니까 기름이 있어요? 기름이 없으니까 못하고 그만둔 거예요. 그때는 그만둔다고 해봐야 드럼통 하나 치우고 아궁이 덮어버리면 그만이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그때 한 석 달 동안 불때 주면서 어깨 너머로 배운 게 전부죠 뭐. 그걸 가지고 청계천에서 시작했는데 야심은 커서 시커먼 비누에 무궁화 그림을 새기고, 그때 뭐 회사라는 건 생각도 못하던 시절이니까 간판은 없는 거고요. 그렇게 시작했는데 겨우 하루 몇 개 정도 만들어서 이웃에 주기도 하고 구멍가게에 팔기도 하면서 실험을 해보는 단계였는데 6·25가 터진 거지요. 그러니 다 버리고 제주도로 피란가셨다가 서울이 수복 된 후에 다시 돌아와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저하고 만나 결혼할 무렵만 해도 자전거 하나 하고 드럼통 하나, 그게 전부였어요.”
제약회사 다니다 성실함 보고 결혼
(최남순) 회장님은 어떻게 인연이 되셨습니까. “제가 제약회사 다니다가 결혼했는데, 시커먼 남자 하나 구제해줬죠 뭐, 하하하. 정말 성실하게 살고 외모도 제법 잘생겨서 내가 슬그머니 끌어당겼어요. 나중에 성공하면 내 덕이라고 큰소리치려고, 하하하. 근데 제약회사를 보다가 비누 만드는 현장을 보니까 기가 막혀요. 그래도 이 양반이 얼마나 열심히 정성껏 만드는지 하루에 비누를 2박스, 3박스 만들어 동대문 시장, 구멍가게, 그렇게 갖다주면 정말 잘 팔렸어요. 가격도 좋고. 더구나 비누 중에서도 모양을 제대로 갖추고 무궁화 상표까지 찍힌 빨랫비누라는 건 그때만 해도 생전 처음 보는 거잖아요. 희한한 거지요 하하. 그때부터 무궁화비누가 된 거예요. 이름이 붙은 거죠. 실제로 무궁화 빨랫비누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장사한 것은 전쟁 후였지만 법적으로는 47년 5월 25일자로 서대문구 서소문동을 주소로 해서 회사 등록을 했어요. 청계천 다리 밑에서부터 했었으니까. 근데 우연이겠지만 우리가 회사로 등록을 한 날 지금의 현대건설이 ‘현대토건사’라는 이름으로 똑같이 등록을 했어요. 그쪽(현대)도 실향민이고.” 사업은 번창일로였다. 무궁화비누가 지금처럼 푸르거나 하얗지는 않아도 가정에서 쌀겨로 만든 검정비누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척력이 뛰어나고 규격까지 일정하게 갖추고 있어서 시장에서는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였다. 어쨌든 대기업이 화장비누나 세제에 손을 댄 것도 한참 후였기 때문에 60년대의 무궁화비누는 경쟁자도 없는 셈이었다. 거기다가 유 회장은 단신으로 월남해 일가친척이 없는 데다 성격적으로도 다른 기업인들과 어울려 다니기를 꺼려서 시간만 나면 비누 제작에만 몰두했기 때문에 품질도 향상되는 게 당연했다. 물론 식구가 없으니 돈이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사람이라서 수입도 계속 늘어났다. <계속>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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