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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 본 팝음악 황금기

되돌아 본 팝음악 황금기


엘비스에서 에미넴, 그리고 그 이후까지 베이비부머 음악 평론가가 회상하는 반항과 냉소의 전통 우리 부모님은 내 침대 옆 탁상에 놓아준 애드미럴 전자의 플라스틱 라디오가 내게 어떤 영향을 줄지 전혀 알지 못했다. 1956년 코네티컷주의 작은 마을, 내가 아홉 살 때의 일이다. 나는 부모님이 잠들었을 만한 늦은 밤 어둠 속에서 야구와 아이스하키 경기 중계, 브라이디 머피(콜로라도주의 한 가정 주부가 최면상태에서 기억해낸 전생의 인물)의 환생에 관한 토크쇼 방송을 들었다. 또 빈센트 로페즈 오케스트라의 연주(뉴욕시의 호텔 태프트에서 열리는 공연 중계)와 맥과이어 시스터스·패티 페이지의 노래를 들었고, 프랭크 시내트라의 ‘That’s All’을 틀어주는 깊은 밤 시간대의 DJ들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뿐 아니라 당시 어떤 부모도 들어보지 못했고, 자녀가 듣도록 허락하지도 않았을 위험한 새 음악도 들었다. 척 베리·엘비스 프레슬리·리틀 리처드의 노래와 무시무시한 뉴욕 뒷골목의 10대들이 부르는 두왑(리듬 앤 블루스 코러스의 한 형태)이었다. 1956년은 ‘Heartbreak Hotel’(엘비스 프레슬리), ‘Roll Over Beethoven’(척 베리), ‘Long Tall Sally’(리틀 리처드), ‘I Walk the Line’(자니 캐시), 그리고 섹스를 좋아하는 미스 몰리(리틀 리처드의 ‘Good Golly, Miss Molly’에 나오는 인물)의 해였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도 이 노래들이 지저분한 내용을 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섹스와 로큰롤에 관해서라면 아홉 살 때 이미 3분의 2 정도는 파악했다. 재즈 시대(1920년대)를 포함해 어떤 시대도 우리 세대만큼 대중음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나도 누구 못지 않게 진지했다. 비록 애청곡은 남들과 달랐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우리 세대 대다수에게 로큰롤은 그냥 음악이 아니라 하나의 주의이며 컬트이자 운동이었다. 로큰롤은 부모와 자녀를 갈라놓았고, 추종자들의 스타일과 태도, 이데올로기와 행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 소외되고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들(우리 세대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에게 힘과 위안을 주었다. 로큰롤의 기본 입장은 반항이었다. 로큰롤 뮤지션들은 대중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받은 최초의 대중 예술인들이었다. 이런 냉소적인 전통은 엘비스부터 믹 재거, 에미넴으로 이어졌다. 오리지널 로큰롤은 비트 시(반문화운동인 비트 제너레이션의 시·1956년은 비트 시인 앨런 긴스버그의 시 ‘Howl’의 해이기도 했다)와 마찬가지로, 아이젠하워 시대가 억누르고자 했던 에너지와 고뇌를 표출했다. 중산층이 미국을 대표하는 계층으로 떠오르자 사람들은 품위 있는 가정에서라면 반기지 않았을 흑인과 백인 노동자 계급의 음악을 받아들였다. 또 유대인 대학살과 수소폭탄의 개발을 모른 체하는 사회 분위기에 대한 반발심은 레코드 플레이어의 볼륨을 높였다. 미끈한 컨버터블 자동차를 탄 가족들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건설한 주간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손을 흔드는 자동차 광고의 이미지는 사람들이 욕설을 퍼붓고 싶어하는 대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자동차마다 라디오 다이얼만 돌리면 비극적인 자동차 사고, 여자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10대 남자 아이들, 바람기 있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마치 그들의 욕망이 영원히 지속되기라도 할 듯한 분위기였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면 나는 다른 베이비 부머들과 다를 바 없다. 우리 가족은 새로 나온 1960년식 임팔라 컨버터블을 타고 주간 고속도로를 따라 여행했다. 빨간색 자동차였다. 라디오로 무슨 음악을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로큰롤은 아니었다. 다이나 쇼어가 “미국을 보세요/시보레를 타고”라고 노래한 영화 사운드트랙은 기억난다. 1950년대에 상고머리 학생이었던 나는 TV 서부 드라마를 보고 야구 카드(야구 팬들의 수집용으로 앞면에 선수 사진, 뒷면에 그의 성적이 인쇄된 카드)를 모았다. 1960년대에는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마리화나와 환각제에 빠졌으며, 징병을 기피하고, 주류사회와 거리를 두고 살았다. 1970년대에는 정신을 차리고 사회로 돌아왔다(내 경우에는 박사 과정을 밟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안정된 직업을 갖고 돈도 원하는 만큼 벌었다. 광고주들에게는 꿈 같은 시절이었다. 세 번의 이혼 경력에 60세를 코앞에 둔 지금은, 글쎄 뭐라고 말해야 할까? 물론 대다수 베이비 부머가 이렇게 틀에 박힌 삶을 살지는 않았고, 모든 사람이 가위 세계적이라 할 로큰롤 열풍에 사로잡히지도 않았다. 솔이나 컨트리 음악(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을 선호하는 사람도 많았고, 좀 지적인 부류는 콜트레인(재즈)에서 바르톡(현대 고전음악), 로버트 존슨(블루스)까지 다양한 음악을 즐겼다. 그리고 주위의 이런 분위기와는 상관없이 음악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지적인 부류에 속했지만 터프가이 흉내를 내고 싶었다. 1960년께에는 라디오를 더 이상 듣지 않았다(영영 그런 건 아니다). 리틀 리처드는 신학대학에 갔고, 엘비스는 군대에 갔으며, 제리 리 루이스는 13세의 친척 동생과 결혼해 사회에서 배척당했고, 척 베리는 매춘 관련법을 어겨 체포됐다. 이 구제불능 뮤지션들의 빈 자리를 프랭키 아발론과 코니 프랜시스 같은 가수들이 메우자, 나는 플랫 & 슈럭스(블루 그래스)·뉴 로스트 시티 램블러스(포크)·빌리 할리데이·마일스 데이비스(재즈) 같은 가수들 쪽으로 눈을 돌렸다. 나는 또 비틀스의 미국 TV 데뷔를 반대했고, 1964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밥 딜런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형편없고 우스꽝스러운 가수라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스탠리 브러더스(블루 그래스)가 더 좋았다. 그러다가 롤링 스톤스와 딜런의 전자 음악을 듣고 나서야 다시 로큰롤을 좋아하게 됐다. 거칠고, 우울하고, 섹시하고, 초월적인 로큰롤의 매력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래서 다시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는 1960년대의 음악을 혁신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전통적인 가치로의 회귀로 보였다. 한동안 나는 히피의 노선에 동조했다(그렇지만 홀치기 염색 의상을 입은 요정들이나 폴크스바겐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몰려다니는 히피족들은 피했다). 딜런이 경멸조로 “에즈라 파운드와 T S 엘리엇은 선장실에서 싸우고/ 칼립소 가수들은 그들을 비웃고, 어부들은 손에 꽃을 들었네”라고 노래했을 때, 나는 문학은 실생활과 동떨어져 있으며 로큰롤이 인생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하지만 나중에 나는 영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뻔했다). 지금은 클래식 록이라고 불리는 음악에 대한 나의 사랑은 1965년부터 70년께까지만 지속됐다. 얼마 전 내가 지닌 오래된 레코드들을 살펴봤다. 이사를 거듭한 끝에 현재 남아있는 음반의 목록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크림·킹크스·모비 그레이프가 각각 한 장, 밴드와 버즈가 각각 두 장, 후(Who)가 석 장, 비치 보이스가 넉 장, 비틀스가 다섯 장, 롤링 스톤스가 일곱 장,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여덟 장, 딜런이 열두 장이다. 예술가인 체하는 짐 모리슨과 서투르게 꽥꽥 소리를 지르는 재니스 조플린, 우쭐대는 지미 헨드릭스는 참아주기 힘들었다(그래도 헨드릭스의 1집 음반은 지닐 만하다). 또 비틀스는 귀엽고 아기자기한 면 때문에 마음에 안 들었다. ‘All You need Is Love’ 등 우리 세대의 찬가로 여겨지는 곡들은 싫었다(말 더듬는 바보처럼 노래한 후의 ‘My Generation’이 좋았다). 그리고 행사가 열리기도 전 혼란의 도가니처럼 생각되던 우드스톡 록 페스티벌에는 아예 가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두고두고 즐겨 들었을 법한 1960년대의 일부 음악(멤피스 솔과 모타운, 아레사 프랭클린 등)은 수십 년 동안 올드 팝 방송과 수퍼마켓, 광고에서 귀가 따갑도록 흘러나왔다. 슬픈 얘기지만 죽기 전에 ‘Respect’(아레사 프랭클린)나 ‘Dock of the Bay’(오티스 레딩), ‘My Girl’(템테이션즈) 등의 명곡을 다시 못 듣는다 해도, 그 곡들을 들으려고 3분간 목숨을 더 연장해 달라고 애원하지는 않겠다. 벨베츠의 노래 중 히트곡이 없고, 롤링 스톤스의 모든 명곡이 죽도록 사랑받지 않은 점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1970년대 초 나는 다시 팝 라디오를 꺼버리다시피 했다. 그리고 우리 세대나 다른 사람들이 듣는 음악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좋은 노래 한 곡을 들으려고 몇 시간 동안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거나 한 순간의 멋진 부분(예를 들면 ‘I’m a Believer’의 다섯 음표짜리 오르간 파트)을 들으려고 형편없는 노래를 참고 듣기에는 너무 나이가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놓치는 게 많았다. 지구상에서 가장 훌륭한 음악이라고 해도 좋을 플리트우드 맥[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나쁜 줄 알면서도 자꾸 보거나 듣고 싶은 것)다]과 앨 그린, 그리고 1970년대의 제임스 브라운의 음악을 알게 된 건 199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Steel Wheels’ 다음의 그 무슨 곡인가가 나올 때까지는 롤링 스톤스에 대한 기대도 버리지 않았고, 딜런은 변함없이 좋아했다. 나는 그레일 마커스가 ‘오래되고 이상한 미국’이라고 부르는 시대의 음악(딜런과 롤링 스톤스가 숭배한 음악)에 뛰어들어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엘튼 존의 초기 히트곡들은 좋아했지만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핑크 플로이드, 빌리 조엘과 마돈나는 대체로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에어로스미스나 AC/DC, 포리너의 ‘Hot Blooded’는 조금씩 듣기는 했지만 그걸로 족했다. 그리고 키스는 전혀 듣지 않았던 듯하다. 6개월 전 한 친구가 U2의 노래를 들려줬는데 괜찮았다. 하지만 내 생각보다는 더 많은 노래를 들었던 게 분명하다. 가끔 팝차트의 히트곡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몬텔 조던의 ‘This Is How We Do It’을 기억하는가?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폴리스(영국의 록 그룹)를 좋아하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자동차 라디오에서 다음 곡들을 처음 들었을 때 어디를 지나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한다. 마이클 잭슨의 ‘Don’t Stop ’Til You Get Enough’는 버지니아주 컬페퍼의 29번 도로, 벡의 ‘Loser’는 뉴욕주 하트퍼드의 30번 도로, 노터리어스 B I G는 브루클린~퀸스 간 고속도로에서 들었다. 요즘은 라디오 방송에서 곡명과 뮤지션을 소개하지 않는다(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알아내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뉴스위크의 동료에게 그 여자 가수들이 “Biggie Biggie Biggie”라고 부르는 게 누군지, 또 델타 슬라이드 기타와 드럼 머신을 연주하는 뮤지션이 누구인지 묻는다. 올 봄에는 라디오만 틀면 나오는 댄스홀 레게 곡(“oh-oh”라는 가사가 들리는 곡)에 푹 빠져서 수소문 끝에 션 폴의 CD를 손에 넣었다. 다른 곡들은 그 곡만큼 좋지 않아 아쉬웠다. 내가 음악의 흐름에서 시대에 뒤지지 않았던 이유는 고집 때문이었던 듯하다. 우리 세대 중 일부는 디스코가 등장하자 그 흐름에서 도중하차했다. 디스코가 왈츠 이후 춤추기에 가장 적합한 음악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고, 도나 서머와 패티 라벨 같은 클래식 솔 가수들이 부르는 디스코의 묘미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라모네스·섹스 피스톨·엘비스 코스텔로·토킹 헤즈 등의 펑크 록을 이해하지 못해 도중하차했다(하지만 지금 그들은 이 뮤지션들을 줄곧 좋아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힙합이 등장하자 많은 백인 베이비 부머(그리고 일부 40대 흑인)들이 갑자기 까다로운 노인 행세를 했다. 내가 들뜬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F--- Tha Police’를 음악계의 오랜 동료 한 사람에게 들려주었을 때 그의 반응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한 시사잡지에 그 곡에 대한 평을 쓰지 않았더라면 나도 그와 똑같이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동네가 떠나갈 듯 강렬한 비트와 저주가 가득 찬 가사로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음악은 내가 아홉 살 때부터 기다려온 음악이었다. 여러 번 이야기하다 보니 나 자신도 듣기 싫을 때가 있지만, 나는 열세 살 때 척 베리와 제리 리의 지나간 시절을 아쉬워했고, 59세인 지금은 퍼블릭 에너미와 N W A의 지나간 시절을 아쉬워한다. 그러나 내가 음악의 황금기에 자라난 것은 분명하다. 한번 생각해 보라. 엘비스의 ‘Mystery Train’부터 딜런의 ‘Like a Rolling Stone’, 비틀스의 ‘Rubber Soul’, 롤링 스톤스의 ‘Satisfaction’이 나오기까지 불과 10년(1955~65년)밖에 안 걸렸다. 예술성 있는 팝 음악 로커들이 아직도 따르는 음악이다. 1965년부터 70년까지도 그에 못지않게 두드러진 시대였다. 젊은이들은 딜런과 롤링 스톤스, 그리고 누구보다 비틀스를 따랐다. 그들은 이 뮤지션들이 획기적인 변화를 거듭함에 따라 기꺼이 자신들의 취향을 거기에 맞춰 나갔다. 그들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진정한 대중인 듯했다. 그 이후 어떤 음악도 그렇게 많은 사람을 그런 열정 속으로 몰아넣지 못했다. 로큰롤이 미국 대중음악의 기초를 다진 조지 거슈윈과 콜 포터, 어빙 벌린 같은 작곡가들의 음악을 압도한 이후 50년 동안, 미국 대중음악의 판도를 바꿔놓은 유일한 음악은 힙합뿐이었다. 로큰롤 탄생 50년 전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시대였으며, 포드의 모델 T 자동차가 나오기 전이었다. 이제 미국에 새로운 국가적 음악이 나올 시기가 됐을까? 아니면 미국인의 음악 취향이 장르별로 너무나 확연히 구분돼 있기 때문에 어떤 한 형태가 로큰롤처럼 만인의 음악으로 자리 잡기 힘들까? 내 입장에서는 후자라도 좋을 듯하다. 베이비 부머들은 음악에 관한 한 의견이 일치한 적이 없다. 게다가 딜런과 롤링 스톤스를 처음으로 지지했던 반체제 젊은이들도 자신들의 반문화가 제도화하기를 결코 바라지 않았다. 따라서 내게는 지금이 애드미럴 라디오를 듣던 때보다 더 살기 좋은 시대인 듯하다. 새로운 음악 대부분은 (새로운 책이나 영화처럼) 돈을 내고 구입해야 하는 상품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요즘은 꼭 그렇지도 않다. 1960년대에 음악을 탐구하는 일은 여간 힘들고 고된 일이 아니었다. 흑인 가스펠 가수 워싱턴 필립스나 왼손잡이 기타리스트 세븐 풋 딜리가 녹음한 음악을 전부 들으려면 희귀한 78회전 음반을 찾으러 헤매고 다녀야 했다. 지금은 그것들을 모두 갖고 있다. 요즘은 중요한 (혹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모두 마우스 클릭 한 번으로 찾을 수 있다. 아서 갓프레이의 CD 7장(여덟 살 때 그를 좋아했다), 인도네시아 현지 녹음 CD 시리즈 20장, 의회도서관 비치용으로 녹음된 음악 전부, 실버 주스, DJ 어설트, 그리고 단 하나의 히트곡으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수많은 천재 뮤지션들이 여러 가지 버전으로 녹음한 노래들. 도무지 없는 게 없다. 나는 그것들을 모두 다운받을 생각이다. 어쩌면 그중 일부는 합법적으로. 아마 내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절반도 못 듣겠지만(지금 아홉 살인 어린이라도 불가능하다) 한번 시도해 볼 작정이다.


70년대 풍미한 싱어송 라이터의 명음반 10선 누구나 지녀야 할 음반 10장을 고르라니? 뉴스위크 편집진은 불가능한 일을 요구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런 일을 하려 할까? 그들은 그저 내가 합당하고 공정한 기준으로 골라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정말이지 이것으로 내 인생은 끝이다. 이 리스트에서 이름이 빠진 내 오랜 친구들이 도끼와 비소를 들고 욕설을 퍼부으며 내 집으로 향하는 작은 언덕을 오르면서 “왜 난 빠졌지?” 라고 소리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갑자기 사방이 캄캄해지고 광명이 비친다. 모든 게 분명해지고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인다. 사실 내게 이런 영감이 없었다면 음악계의 어떤 행사에서 이 훌륭한 뮤지션들을 마주치게 될 때 그들을 피해 화장실로 달려가거나 춥고 어두운 거리로 도망쳤을 것이다. 클라이브 데이비스나 보노와 마지막으로 포옹하고 사진을 찍을 기회도 갖지 못한 채 말이다. 어쨌든 리스트는 완성됐다. 정말로 누구도 놓쳐서는 안될 앨범들이다. 이 아티스트들은 대체로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사운드를 들려줬다. 아니면 적어도 라디오에 붙어살면서 매일 레코드 가게를 들락거리던 시절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여성 뮤지션은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성차별주의자라는 오해를 살 법한 일이다. 하지만 이유는 단지 내가 모든 여성을 질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구색을 맞추기 위해 억지로 여성을 포함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지켜보기 바란다.

①‘Highway 61 Revisited’: 밥 딜런. 대표곡은 ‘Princess on the steeple and all the pretty people’.

②‘Natty Dread’: 밥 말리 & 더 웨일러스. ‘Lively Up Yourself’와 ‘No Woman No Cry’ 가 수록돼 있다.

③‘In the Wee Small Hours of the Morning’: 프랭크 시내트라. 그가 한 일은 모두 흉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었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으며, 앞으로 그렇게 할 생각도 없다.

④‘Behind the Gardens, Behind the Wall, Under the Tree’: 안드레아스 폴렌바이더. 몇 년 동안 꾸준히 들었다. 안드레아스의 1집 앨범.

⑤‘Mo’ Roots’: 타지마할. 우리 할머니를 생각나게 한다.

⑥‘Abbey Road’: 비틀스.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⑦‘Tea for the Tillerman’: 캣 스티븐스. 이런 사운드에 참여하고 싶은 욕망은 사그라지지 않을 듯하다.

⑧‘Sticky Fingers’: 롤링 스톤스. ‘Moonlight Mile’과 폴 벅매스터의 스트링이 백미다.

⑨‘Sexual Healing’: 마빈 게이. 아버지가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게이는 아버지가 쏜 권총에 살해됐다). 그가 아직도 우리 곁에 있다면 어떤 음악을 내놓았을지 상상해 보라.

⑩‘Sweet Baby James’: 제임스 테일러. (필자는 싱어송 라이터로 새 앨범 ‘Into White’가 10월에 나온다. ) Carly Simon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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