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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기사로 읽는 한국의 역사

표지기사로 읽는 한국의 역사

뉴스위크는 1933년 창간 이래 모두 16번 한국을 표지기사로 다루었다. 물론 1991년 11월 6일자로 한국판이 창간된 이후는 중복을 피하려 제외했다. 그동안 한국은 6·25 전쟁, 눈부신 경제발전, 민주화 시위로 뉴스위크 표지를 장식했다. 그 이미지들은 전쟁 후 한국의 정치·경제적 발전상을 연대별로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한국이 처음 뉴스위크 표지에 데뷔한 때는 1951년 4월 30일자(MacArthur vs. Joint Chiefs)였다. 53년까지 뉴스위크가 다룬 한국 관련 기사는 한국전에 초점이 맞춰졌다. 하지만 전쟁 당사자인 한국인들의 고통보다는 미군과 군사전략적 측면이 중심이었다. 그리고 53년 5월 4일자(How the Reds Wash Brains)를 마지막으로 한국은 24년간 뉴스위크 표지에서 사라졌다. 전후 제3세계 신생 국가나 다름없던 한국에서는 전쟁 말고는 다른 관심사가 등장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한국이 다시 뉴스위크의 표지에 등장한 때는 77년 6월 6일자다. 지금도 가끔 인용되는 ‘한국인들이 몰려 온다’(The Koreans Are Coming!)는 기사다. 경제가 15년간 10%씩 고도성장을 지속해 마침내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그러나 급성장으로 인한 소득격차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노동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리라고 뉴스위크는 지적했다. 1979년 청와대에서 울린 총성으로 또다시 사태가 급변하는 듯했다. 뉴스위크는 그해 11월 5일자(Death in Korea)와 12일자(Korea After Park) 두 주 연속해서 박정희 대통령 피살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뉴스위크는 군부가 차기 대통령 선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다고 지적하면서 12·12 사태와 전두환의 부상을 예고했다. 80년대 들어서는 전투경찰과 시위대 모습이 잇따라 네 번이나 뉴스위크 표지를 장식했다. 80년 광주 민주화 항쟁(Rebellion in Korea), 86년 6월 서울대생들의 분신자살(Korea on the Boil), 86년 9월 아시안게임과 정치 불안(Seoul, A Showcase City Girds for the Games), 87년 6월 중산층의 반란(Korea in Crisis)까지. 80년대 내내 한국이 민주화의 열병에 시달렸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 기업들의 급성장 소식(Here Comes Korea, Inc. , 85년 5월 13일자)도 그 열병 속에 묻혀 지나갔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87년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후보의 민주화 선언으로 급격한 전기를 맞는다(South Korea Tries Democracy, 87년 7월 13일자). 뒤이어 88올림픽을 앞두고 뉴스위크는 한국인들을 ‘기적을 만든 사람들’이라고 칭송했다(The People Who Made a Miracle, 88년 9월 5일자). 하지만 그 기적은 2년도 채 안 돼 빛을 잃고 말았다. 경제성장률은 절반으로 떨어진 반면 억눌렸던 노동자들의 욕구가 거세게 분출했다(South Korea’s Economic Miracle Has Lost Its Glow, 90년 5월 14일자). 뉴스위크는 91년 11월 11일자에서 한국이 너무 빨리 샴페인을 터뜨렸다고 꼬집었다(Too Rich, Too Soon). 그러나 이때는 뉴스위크 한국판이 탄생한 이후였다. 다음은 뉴스위크에 실린 한국 관련 표지기사의 요약이다.

뉴스위크 한국판 창간 이전

1951년 4월 30일자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떠나고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이 신임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도쿄에 부임했다. 활동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알려진 리지웨이 장군은 곧바로 한국전쟁 승리와 일본 평화 정착이라는 두 가지 임무에 착수했다. 한국의 군사전선에서는 4월 22일 밤 중국의 춘계 대공세에 밀려났다. 일본의 정치전선에서는 모두 전진했다. 호주·뉴질랜드·필리핀에 안보조약을 제시해 일본 평화협약을 향한 반대를 무마했다. 한국전 승리를 위한 맥아더 장군의 제안 중 적어도 하나(대 중국 경제봉쇄 강화)는 미 국무부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국무부는 그런 제재조치를 ‘긴급현안’으로 검토하도록 유엔 ‘추가조치위원회’에 끊임없이 압력을 가했다. 위원회 대표들은 북한의 ‘평화제의’를 검토할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북한 정부가 보낸 제안은 거의 “미 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인들의 눈을 파내고 코를 잘라낸 뒤 산채로 몸을 갈기갈기 찢고… 생매장해 한국인들을 집단 학살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대표단은 그런 내용을 거의 무시하고 “세계평화평의회의 1차 결의안에 따라” 한국 문제의 해결을 요구한 문장이 평화로운 해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생각했다.

1951년 7월 9일자 휴전의 진정한 의미 “우리는 귀국 대표단을 만나 군사행동의 중단이나 평화 정착과 관련된 회담을 하기로 동의함을 알린다. 시기는 1951년 7월 10~15일 사이, 회담 장소는 38선에 접한 개성지역을 제안한다.” 7월 1일 11시 중국은 베이징 라디오를 통해 휴전협상에 응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번 협상의 결과는 한국전 종식을 뛰어넘는 상징성이 있다. 소련이 전 세계에서 서방과 휴전을 모색하는 쪽으로 획기적인 정책 전환을 하려는가. 러시아와 중국 관계에 심각한 균열이 생겼는가. 그 뒤에 공산주의의 엄청난 흉계가 숨어 있지 않을까. 어쨌든 이번 휴전회담은 전선을 확대하지 않고는 어느 쪽도 한국에서의 전쟁을 이기지 못한다는 현실 인식을 반영한다. 그것은 중국군의 춘계 공세 실패와, 그 기회를 틈탄 유엔군의 반격과 공산세력 섬멸의 실패로 증명됐다. 하지만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한국의 어린이들이다. 그들의 앞날에는 전쟁의 과거로 점철된 불확실한 평화가 놓여 있을 뿐이다. 그들은 평생 “아시아의 오랜 역사에서 최대 비극”의 피해자로 남으리라.

1951년 12월 31일자 휴전 임박했나 한국전쟁이 잦아든다. 6월 23일 야콥 A 말릭 소련 유엔대사가 평화안을 제시한 이후 꼬박 6개월 동안 휴전협상이 진행됐지만 12월 23일까지 휴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미군과 미군포로들이 본국에 돌아가 가족과 함께 보낼지 모른다는 기대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공산주의자들 때문에 무산됐다. 그러나 한국전은 분명 끝나간다. 지난 11월 27일 전선을 따라 임시 휴전선이 그려진 이후 한 달 사이 사실상 전면 휴전은 아니지만 그래도 총성이 상당히 잦아들었다.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은 지난주 휴전 감독과 전쟁포로 문제가 곧 판문점에서 타결될지 모른다는 희망을 시사하는 전문을 보냈다. 한편 12월 18일 판문점에서 열린 포로교환 협상에서 북측은 10만2000명의 실종 미군 중 불과 1만1559명을 포로라고 밝힌 목록을 제시했다.

1953년 5월 4일자 북한의 포로 세뇌방법 4월 26일 아침 마지막으로 귀환하는 유엔군 포로 그룹이 판문점에 도착했다. 귀환하는 포로들을 통해 북한 수용소에서의 생활상과 세뇌방식이 밝혀졌다. 세뇌는 그룹 단위로 이뤄지며 하루에 몇 시간씩 과거의 경험과 생각을 털어놓는 일로 시작된다. 그룹 지도자와 나머지 사람들이 정치적인 문제점을 진단하고 비판한다. 발언자는 다시 자아비판하고 올바른 태도를 설명해야 한다. 그 후 자신과 동료가 가진 생각의 ‘진도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이 과정은 한 주제에 관해 공산주의 이념에 비춰 완벽한 정답이 기계적으로 나올 때까지 반복된다. 저항하는 자에게는 더 과격한 방법을 쓴다. 거의 잠을 재우지 않거나 음식이나 물을 주지 않고 절망에 빠져들게 한다. 밤마다 암실로 끌고 가 고통스러운 자세로 서 있도록 하고 밝은 조명을 눈에 비춘다. 몇 시간씩 전문가들이 심문하며 그의 답을 부정하고 모든 ‘거짓’의 ‘증거’를 제시한다. 자신들이 지어낸 이야기를 포로에게 시끄러울 정도로 들려준다. 그 기간은 3개월 정도 걸린다.

1977년 6월 6일자 한국인들이 몰려온다 지난 15년 동안 한국 경제는 해마다 약 10%씩 성장했고 지난 3년간 수출이 배로 늘었다. 올해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하리라 예상된다. 한국 정부는 향후 수년간 두 자릿수 성장과 1990년까지는 완전고용을 예상한다. 그리고 저임 노동집약적 제조업 중심의 경제구조에서 탈피해 고급기술 경제로의 도약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초고속 급성장은 대단히 불균형한 사회구조를 낳았다. 중산층 관리자와 공장 노동자 간의 소득격차는 크게 벌어졌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관리자와 노동자 모두 미래의 경제성장을 향한 기대로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대중이 경제발전의 더 큰 몫을 원하는 상황은 불가피하며 그때가 되면 정부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한국이 계속 성장하려면 경제적으로는 신시장을 개척하고 새로운 첨단기술 분야에서 일본·서유럽·미국 등과 경쟁해야 한다. 정치적으로는 ‘사회개발’ 정책을 통해 더 많은 한국인에게 참여의식을 심어줘야 한다. 정부의 존속은 성장과 그 과실의 분배에 달려 있다.

1979년 11월 5일자 박정희 대통령 사망 박정희 대통령은 몇몇 고위 참모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려고 궁정동 안가로 향했다. 오후 6시 박정희,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등 넷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7시30분 김 부장과 차 실장이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김 부장이 품에서 권총을 꺼내 발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박 대통령도 사망했다. 정부는 이틀 후 김재규와 중정 소속 부하 5명이 사전에 암살을 모의했다고 발표했다. 김이 대통령과 차 실장을 자신의 38구경 리볼버로 쏘아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몇 가지 의문점이 있으며 혹시 권력투쟁의 일환일지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어쨌든 한국은 지난 18년 동안 황제와 같은 권력으로 나라를 통치해온 강력한 지도자를 하루아침에 잃었다. 후임자 문제는 한국의 앞날과 미국에 중요하다. 최규하 대통령 서리는 과도기적 인물인 듯하다. 현재로서는 권력투쟁이 불가피해 보인다. 아마 군부가 차기 대통령 선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칠 전망이다. 누가 지도자가 되든 북한의 지속적인 위협 때문에 박 대통령의 정책을 따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정치 불안 때문에 앞날은 예측을 불허한다.

1979년 11월 12일자 박정희 사후의 한국 일주일간의 공식 애도기간이 지난 뒤에 벌어진 장례 행렬에는 박 대통령을 존경했던 200만 명의 국민이 뒤따랐다. 국화로 덮인 영구차가 지나가자 국민은 울부짖었고 이를 호위하던 경찰들도 넋을 잃었다. 암살의 주요 용의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청와대 근처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 중에 박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쐈다고 알려졌다. 이제는 한국의 미래를 두고 심각한 논란이 벌어질 전망이다. 많은 분석가는 정부가 박정희 독재정권의 유산을 신속히 해결하지 않으면 나라가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이번 일이 정승화 육참총장에게 기회일 수도 있지만 군인정신이 투철한 그는 정치적 야심이 적은 사람이며 매우 정직한 인물로 꼽힌다. 계엄령이 선포된 지금 한국의 가까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는 총을 가진 이들이 주된 역할을 하리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미국과 대다수 한국인은 정승화와 동료 장군들이 진정 민주화를 이룩하는지 지켜봐야 한다.

1980년 6월 2일자 광주를 피로 물들인 무력항쟁 2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군사 통치 종식을 요구하며 광주시내로 쏟아져 나왔다. 시위대는 차량 수십 대를 탈취해 군병력을 향해 돌진했다. 라디오와 TV 방송국 등 공공건물을 점거하고 병기고를 습격해 소총 수천 정을 탈취했다. 처참한 시가전이 사흘간 계속되면서 61명이 사망하고 400명이 부상했다. 한국전쟁 이래 최악의 유혈 사태였다. 전두환 장군은 반체제주의자들에게 극단적인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남한의 불안한 상황을 이용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전 장군이 반정부 인사들을 계속 억누른다면 광주항쟁 같은 사태가 더 많이 발생할 게 뻔하다. 일부 분석가는 이번 사태가 전면 내전으로 비화하거나 더 잔혹한 우익 독재정권이 수립될지 모른다고 우려한다. 아직도 자유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남은 희망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지 않는 지도자들의 쿠데타가 한 번 더 일어나는 일이다.

1985년 5월 13일자 ‘주식회사 한국’이 쳐들어온다 1960년대의 일본처럼 한국의 수출군단이 세계시장으로 맹진격 중이다. 날로 확대되는 810억 달러 규모의 한국 경제는 신발·장난감·전화기에서 비디오 녹화기·마이크로프로세서에 이르기까지 갈수록 첨단기술 제품을 대량 생산한다. 한국의 막강한 재벌은 중동지역 건설공사뿐 아니라 세계 조선·섬유·철강 산업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한국은 20년간 연간 8%에 이르는 경제성장을 지속했다. 수출은 64년 1억1900만 달러에서 지난해 290억 달러로 급증했다. 현재 2000달러인 1인당 국민소득도 금세기 말이면 5000달러를 넘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이 해외시장을 지키고 계속 성장하려면 경제의 기어를 첨단산업 쪽으로 전환해야 한다. 70년대 일본이 임금 경쟁력을 상실하면서 겪은 상황과 매우 유사한 처지다. 한국은 제품의 질과 디자인 향상으로 미국·서유럽·일본과 정면으로 경쟁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국 등 신흥 저임금 국가들에 밀릴 위험이 있다.

1986년 6월 2일자 한국 ‘시련의 계절’ 지난 한 달 사이 서울대생 3명이 분신자살했다. 이 끔찍한 사건들은 오늘날 한국이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10년간의 고도성장 이후 고조되는 정치발전 열망으로 한국 사회가 크게 흔들린다. 과격파 학생들은 한국 사회의 대폭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군부는 반대파들의 강력한 탄압을 주장한다. 그 중간에 있는 중산층은 수세기에 걸친 권위주의적인 전통을 타파하고 38년간 한국 역사를 좌우해온 반란과 탄압의 악순환을 없애려 한다. 그 저변에는 정치권력을 나눠가져도 좋을 만큼 한국이 부유해졌다는 믿음이 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8년 임기가 만료되면 물러나겠다고 약속하며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이양을 이루고 싶어한다. 하지만 근본적이고 신속한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갈수록 커진다. 야당의 대통령 직접선거 요구가 이제 급진적인 학생들 때문에 거리로 번져갔다. 한국은 갈림길에 섰다. 걷잡을 수 없는 폭동과 유혈 탄압으로 빠져들까. 아니면 또 다른 기적을 낳을까. 한국의 미래는 향후 몇 년이 좌우한다.

1986년 9월 29일자 서울아시안게임 지난주 86 서울 아시안게임이 시작됐다. 하지만 그 화려함과 자부심 속에서 서울의 관계자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며칠 전 김포공항에서 폭발물이 터져 5명이 사망하고 30명 이상이 부상했기 때문이다. 이번 아시안게임은 88 서울 올림픽의 최종 리허설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두 대회는 다사다난했던 한국 역사의 분수령을 이루게 된다. 당국자들도 분명 애국심이 분출하면 국내정치 불안도 진정되리라 기대한다. 서울은 한국이 두 대회를 통해 경제력을 세계 만방에 과시하고 세계 선진공업국 대열로 진입하는 중요한 도약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지난주 김포공항 테러공격이 보여주듯 서울은 휴전선으로부터 불과 43km 거리이며 학생시위가 빈번한 곳이다. 동시에 한국의 발전상을 과시하기에는 세계 여섯 번째 규모인 서울에 비견할 만한 도시도 없다. 물론 그동안 앞만 보고 외적 상장을 향해 달려온 탓에 이제 온갖 부작용이 곳곳에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울이 한국의 경제발전과 미래를 상징하는 도시임에는 틀림없다.

1987년 6월 29일자 중산층의 반란 오랫동안 침묵하던 다수 중산층이 거리로 몰려나와 반정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민주화 투쟁의 전환점이다. 이들이 가세하면서 전두환 독재정권은 눈에 띄게 힘을 잃어간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한국의 경제 엔진이 힘을 잃을 뿐 아니라 온 나라가 고대해온 올림픽의 개최권마저 상실할지도 모른다. 이란 사태에 정신이 팔린 미국은 ‘조용한 외교’로 일관했다. 전두환 정부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 후 빠른 시간에 경제적으로 많은 업적을 이뤘다. 그러나 급속한 성공과 함께 정치적 기대도 높아졌지만 보수 정부는 그에 부응하지 못했다. 지난 4월 전두환 정부는 야당과의 개헌 협상을 중단하고 장성 출신인 노태우를 자신의 후계자로 내정했다. 전 대통령의 고압적인 방식에 불만을 품은 국민은 1960년 이래 가장 광범위한 과격시위를 벌였다. 노태우 후보가 개헌 협상을 외면한다면 대통령이 돼도 전 대통령의 문제를 물려받는다. 현 정부가 직면한 과제는 또 다른 군사적 탄압과 학생 혁명 간의 온건 노선을 모색하고 강권통치에서 더 민주적인 방식으로 혼란 없이 전환하는 일이다.

1987년 7월 13일자 한국의 정치 기적 반정부 시위가 걷잡을 수 없는 폭동으로 확대되자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리라는 소문이 퍼졌다. 바로 그때 노태우 집권 민정당 대표가 모든 반대를 잠재우는 깜짝 선언을 했다. 대통령 직선제 요구를 포함해 야당의 요구를 거의 모두 수용했다.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노씨의 지지자들까지 놀랐다. 이틀 후 전두환 대통령도 노 대표의 민주개혁 요구를 승인했다. 앞으로 대선은 노 대표와 YS의 대결로 압축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DJ가 지지자들의 압력에 못 이겨 불출마 선언을 번복한다면 반정부 세력은 그와 YS로 양분된다. 한국은 마침내 놀라운 경제성장에 걸맞은 정치적 성숙함을 보여줄 준비가 된 듯하다. 커다란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군부가 수립한 독재정치 체제로부터 불과 몇 달 만에 민선 정부로 전환하는 아주 드문 업적도 달성하리라.

1988년 9월 5일자 꿈이 만든 나라 코리아 88올림픽 주최국 한국은 9월 17일 그동안의 발전상을 전 세계에 과시한다. 한국인은 환경·정치·경제·사회의 온갖 역경을 딛고 놀라운 발전을 이뤘다. 그들은 독재정치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를 향한 불확실한 여정에 착수했다. 반가운 변화지만 그에 따른 새로운 과제들이 한국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았다. 아직 협상과 타협의 기술이 부족하다. 게다가 경제성장의 그늘에서 빈부격차가 확대돼 간다. 한국인은 한마디로 역동적이고 감정적이며 논쟁적이고 친절하며 배타적이면서도 외래사상에 수용적이고 사교적인 동시에 의심까지 많은 국민이다. 이런 속성, 그리고 그로 인해 야기된 긴장이 앞으로 한국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지 예측을 불허한다. 하지만 한국인은 보기보다 무모하지 않다. 몇 년 후에는 정치 현안 다수가 해결되고 소비와 레저에 다시 관심을 집중하며 번영을 향유할지도 모른다.

1990년 5월 14일자 한국 ‘기적은 없다’ 한국이 88올림픽을 통해 화려하게 세계무대에 등장한 지 2년도 안 됐지만 사정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경제성장률은 거의 절반으로 떨어졌고 한없이 불어난다 싶었던 무역흑자는 올해 적자로 돌아설 듯하다. 외채는 다시 불어나고 물가는 올랐지만 주가는 폭락했다. 막강해진 노조는 한국의 미래 경쟁력을 위협한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경기는 어떻게 그리 빨리 식었을까. 정부는 기업 경영자들의 근시안적 경영을 탓하고 재계 지도자들은 정부의 무능과 노동자의 탐욕을 비난한다. 월급쟁이들은 정부와 경영자를 탓한다. 사실은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 한국의 경제위기는 더 크게 보면 민주주의와 개인적 자유 확대에 따르는 성장통일지도 모른다.

뉴스위크 한국판 창간 이후 한국판 창간 이후 뉴스위크에 비친 한국의 모습은 부쩍 다양해졌다. 1980~90년대의 정치, 민주화 시위 일변도에서 탈피해 남북관계, 한류 문화, 월드컵, 영화까지 다방면으로 조명을 받았다. 총 12건의 한국 관련 표지기사 중 남북관계가 3건, 국내정치 3건, 경제 3건, 문화 부문이 3건이었다. 특히 이전까지 한 번도 다뤄진 적이 없었던 문화가 3건이나 되는 반면 그동안 한국과 관련해 최대 이슈였던 시위와 노사분규 문제가 사라졌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가 그만큼 발전하고 성숙해졌다는 방증이다.

1991년 11월 13일자 너무 빨리 앓는 한국병 한국판 창간 이후 첫 번째 한국 관련 표지기사(Too Rich Too Soon)는 30년 동안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해 아시아의 신흥부국으로 떠오른 한국이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렸다는 경고다. 부동산 가격은 성큼성큼 뛰어오르고 해외여행자들은 외국 관광객이 한국에서 쓰는 돈의 거의 두 배를 지출한다. 젊은이들은 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이른바 3D 업종을 기피한다. 부동산 투기 열풍, 빈부격차 확대, 중하층이 느끼는 위화감,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가 도미노처럼 이어진다. 그래도 이제는 한국도 민주주의 시대라서 사람들이 일을 하든 놀든 정부가 간섭하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1995년 7월 31일자 전환기의 한·미 관계 95년 7월 31일 호에서는 한·미관계의 긴장이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Stress and Strains). 북·미 간 경수로 협상과 미국이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꿔 남북에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 하지 않나 하는 남한의 우려를 묘사했다.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전작권을 환수하려는 지금의 상황과 비교해보면 금석지감이 든다.

1995년 11월 6일자 한국 정치의 추악한 얼굴 95년 11월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부정축재 추문과 구속으로 두 번이나 뉴스위크 표지에 얼굴을 올렸다(1995년 11월 6일자·Korea’s Shame, 11월 27일자·Roh’s Disgrace). 재임 시 5000억원이라는 거액의 비자금을 불법 조성했다고 시인하면서 불거진 추문이다. 이 추문으로 노 대통령이 구속되고 정계와 재계로까지 여파가 확산돼 대기업 총수들이 줄줄이 소환됐다. 이것은 한국 5·6공 시절의 청산과 본격적인 문민정치의 시작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1997년 12월 1일자 한국 경제 거품 꺼진다 97년 11월에는 한국 경제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외환위기가 표지기사로 다뤄졌다(South Korea’s Bubble Bursts).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2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신청했다고 뉴스위크는 소개했다. 또 한국 기업의 약 절반은 금융위기로 허덕이며 97년 1월 이후 7개 재벌 기업이 파산했고 앞으로도 더 늘어나리라고 전망했다. 또 IMF가 구제금융의 조건들을 압력 수단으로 활용해 규제 완화, 경제적 투명성, 금융제도 개선 등을 강요한다면 한국 경제의 개혁은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이번 위기가 장기적으로 경제의 체질개선을 위해 언젠가는 겪어야 할 성장통이라는 인식이 한국 내에 빠르게 확산돼 간다고 뉴스위크는 덧붙였다.

2000년 6월 26일자 남북 화해의 큰 걸음 2000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두 번이나 빛을 발했다. 뉴스위크는 6월 26일자에서 역사적인 남북한 정상회담을 다루면서 DJ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을 맞잡은 사진을 표지에 올렸다(‘A New Day’). 양 정상은 자주적 통일, 이산가족 상봉, 교류 확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만간 서울 답방 등에 합의했다고 전했다. 또 넉 달 뒤 ‘The Prize Winner’(2000년 10월 23일자·‘북한·미국 정상회담’)라는 기사에서는 DJ의 노벨 평화상 수상 소식, 북한 조명록 특사의 방미와 클린턴 미 대통령 면담 소식을 전했다. 회담 자체는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크지만 양국관계에 변화의 물꼬를 튼 계기라고 뉴스위크는 평가했다. 역사가 돌고 돈다면 아직 북한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지 않아도 될 듯하다.

2001년 4월 9일자 일본에 부는 한국 열풍 2001년 4월 9일자(Korea Envy)에서는 일본의 한류 열풍을 소개하며 한국을 동경하고 부러워하는 일본인이 급증한다고 전했다. 한국 영화와 팝 음악은 수백만 명의 일본인 팬을 끌어 모으며 한국 여성은 이상적인 미인으로, 한국 남성은 멋진 애인상으로 간주되고 서울은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올해 최고의 여행지로 꼽힌다고 썼다. 또 10년에 걸친 정치·경제의 침체로 일본의 전통적인 우월감이 줄어든데다 한국 신경제의 성공이 한국을 향한 편견을 바로잡고 호감을 갖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과거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검정교과서 발행 등 일본의 오랜 편견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2002년 6월 3일자 아시아 축구의 도약이 시작됐다 1997년의 외환위기가 한국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냈다면 2002년 한·일 월드컵은 한국인들의 꿈과 자신감을 한껏 키워줬다. 뉴스위크는 이번 대회가 새 밀레니엄 최초, 아시아 최초의 대회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와 상징성을 지닌다고 분석하며 한·일 양국이 세계의 벽을 뛰어넘어 축구 강국 대열에 서려고, 또 외국 손님의 마음을 얻으려고 뜨거운 각축전을 벌인다고 전했다(Asia Takes the Shot). 하지만 전망기사였기 때문에 정작 2002년 월드컵의 백미였던 한국팀의 선전과 응원 열기가 소개되지 않은 점은 아쉬웠다.

2003년 3월 3일자 노무현 시대-희망과 불안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한국 사회의 디지털화, 탈보수·탈권위화 등 여러 가지 급격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뉴스위크는 2003년 3월 3일자(In the Hot Seat)에서 젊은 네티즌들의 열렬한 지지를 등에 업고 당선된 노 대통령이 취임 초반부터 북핵 사태라는 암초를 만났지만 노 대통령과 미국 양측이 서로를 잘 모른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편 노 대통령은 부시와 원만한 관계를 수립하고, 미국과 협력해 북한의 핵 개발을 막아야 하며, 아울러 2004년 총선에 앞서 정치적 현안들을 해결해 집권당의 역량을 강화해야 하는 힘든 과제에 직면했다고 뉴스위크는 분석했다.

2003년 11월 24일자 은둔의 제왕 성숙기 한국 경제를 논할 때 삼성과 이건희 회장을 빼고 말하기는 어렵다. 뉴스위크는 2003년 11월 24일자에서 ‘한국경제 이끄는 은둔의 제왕’(The Hermit Kingdom)이라는 제목으로 이건희 회장을 표지에 실었다. 삼성이 1997년의 외환위기로부터 6년 만에 세계적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소니나 모토롤라 같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주요 국제시장을 점유했다고 소개했다. 이 회장은 “국가 차원에서 인재를 발굴하고 양성하는 데 삼성이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사람의 천재가 1000명, 1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는 이른바 '천재 경영론’이다. 이제 문제는 이 회장이 이 나라를 투명성과 효율성이 지배하는 새 시대로 이끌어 가느냐, 단독으로 옛 재벌 총수들의 구태를 계속 유지해 가느냐의 여부다.

2004년 5월 3일자 동양의 할리우드, 한국 영화 아시아권을 벗어나 미국과 유럽 등 전 세계로 뻗어가는 한류의 대표주자는 영화다. 뉴스위크는 2004년 5월 3일자에서 ‘한국영화 전성시대’(Hollywood East)라는 제목 아래 전 세계적인 흥행작 ‘반지의 제왕’ 3편이 한국에서는 토착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실미도’에 제왕 자리를 내줬다고 놀라움을 표하며 1999년 이래 한국의 영화 제작자들은 아시아 최초로 비평가들에게 호평받을 뿐 아니라 시장성에서도 인정받는 블록버스터들을 내놓는다고 소개했다. 또 한국의 영화 스타들은 이제 아시아를 대상으로 하는 광고 모델과 영화 스타로 발돋움했으며 할리우드도 10여 개의 한국 영화 리메이크 판권을 사들이는 협상을 진행 중이라고 전하고 이제 한국 영화는 할리우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중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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