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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점이 없는 ‘말아톤’

결승점이 없는 ‘말아톤’

어른이 된 자폐인들을 사회에 통합하려는 한국 정부와 민간의 노력은 미미하다. 현재 한국에는 자폐인 전용 특수학교가 일곱 군데에 지나지 않는다. 서울에 세 군데, 지방에 네 곳이다. 유치원에서 고등학교 과정까지 있고 이곳에 등록된 학생은 모두 1893명이다. 여기에 일반 학교에 마련된 특수학급이나, 일반 학생들과 섞여 공부하는 자폐인들이 4000명 가량 더 있다. 그러나 장애인복지법에 따라 등록된 발달장애(자폐)인들은 지난 8월 말 현재 1만832명이고 이들을 스무 살까지 나눠보면 1만198명이다(표 참조). 그렇다면 학교에 가야할 나이의 등록 발달장애인 중에 50% 남짓만 공교육을 받는 셈이다. 장애인 특수학교는 국고나 지방비, 자치 단체 등의 지원을 받아 무상교육을 실시한다. 설사 특수학교에 다닌다고 해도 직업교육을 받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발달장애 특수학교 일곱 군데 중에서 직업훈련을 하는 학교는 서울에 있는 정애학교와 한국육영학교 둘 뿐이다. 각 학교의 고등부 두 학급 중 한 학급에 해당하는 학생들 10명 남짓만 졸업 후 2년간 추가로 직업교육의 혜택을 받는다. 몇몇 사업체나 복지관과 연계한 교육이다. 나무 젓가락 포장에서 악기 조율까지 아이의 지능과 상태에 맞춰 가르친다. 영화 ‘말아톤’의 주인공 배형진(장애 3급)씨는 한국육영학교에서 직업교육을 받고 현재 악기 부품 조립공장에서 일한다. 배씨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직장에 다니는 발달장애인들은 약 50명 가량이라고 한다. 등록된 발달장애인 전체에서 2% 남짓에 속하는 ‘축복받은 소수’다. 특수학교가 자폐 학생들의 직업교육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는 다양하다. 서울의 한 학교 관계자는 “새 교실을 짓기도 어렵고, 학교나 교사들이 일반 기업체와 연계를 맺기도 벅차다”고 말했다. 또 직업교육을 받았다고 취직이 보장되지도 않는다. 아이들의 능력도 문제고, 선뜻 일자리를 제공하려는 기업체도 아직은 드물다. 따라서 특수학교에서 직업교육을 받는다 해도 일자리를 쉽게 구하지 못한다. 그런데 왜 부모들은 직업교육을 받게 해주려 애쓸까. 졸업 이후 따로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낯선 환경을 어려워하는 아이들이 익숙해진 공간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물게 해주려는 마음에서다. 추첨에서 떨어져 직업교육을 받지 못하게 된 학생들은 부모의 손에 이끌려 학교 밖 사회복지시설을 찾아 기약없는 방랑을 시작한다. 그러나 “손길이 많이 가는 발달장애를 환영하는 곳은 별로 없다”고 한민족 복지재단의 이영주 복지사는 말했다. 류향금씨는 둘째 아들이 한국육영학교에 다닌다. 중증의 발달장애(1급)로 말도 못하지만 누구보다 밝고 부지런하다. 그러나 그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내후년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만약 직업교육 과정에 들어가는 추첨에 떨어지면 그 많은 시간을 어디서 어떻게 보내도록 해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류씨는 “아직도 우리 사회가 자폐를 낯설어 하고 그런 사람들을 보듬어 안으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발달장애, 자폐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때는 1980년대라고 단국대학교 특수교육과의 김은경 교수는 말했다. 그나마 2000년에 들어서야 장애인 복지법으로 개정되면서 장애로 분류되고 등록됐다. 1981년 장애인 복지를 포괄적으로 규정한 심신장애인복지법이 처음 제정된 지 거의 20년 만이다. 사실 장애인 복지법에 따라 등록됐다고 발달장애인에게 주어지는 지원이 남다르지 않다. 장애수당, 의료비 지원, 세금 혜택 등은 장애 유형과 관계없이 제공되는 혜택들이다. 장애수당의 경우 보호자 유무, 경제형편, 장애 등급에 따라 매월 2만원에서 10만원까지 지원받는 정도가 고작 일뿐이다. 2009년까지 단계적으로 6만원에서 16만원까지 늘려간다는 계획이나, 실효성이 얼마나 있느냐고 문제를 제기하는 전문가들도 많다. 전체 등록 장애인의 18% 정도만이 장애수당을 받기 때문이다(2009년에는 약 25%). 의료보험도 특성을 무시한 채 약물치료에만 적용된다. 하지만 발달장애의 경우는 약품에 의존하기보다는 언어치료라든가 보험적용이 되지 않는 분야가 더 많다. 또 주의력 결핍 등의 문제로 몸을 다칠 우려가 많지만 민간 보험회사들은 발달장애인들의 경우 상해보험을 받아주지도 않는다. 장애인들은 누구나 1994년부터 고등학교 과정까지 무상교육을 받게 됐다. 그러나 발달장애인들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더 복잡하다. 사실 발달장애나 자폐의 종류는 천차만별이다. 발달장애는 우선 1, 2 , 3급으로 분류된다. 1급은 지체 부자유 장애인으로 치면 양팔이 모두 없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말도 못하고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24시간 보호가 필요하다. 3급은 IQ 70 이상이고 노력 여부에 따라 의사소통도 가능하다. 이 중 고기능 자폐는 영어, 수학, 그림 등에 특출난 소질을 보이지만 사회성이 조금 떨어지는 경우다. 예컨대 세계 장애인 수영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김진호씨가 고기능 자폐다. 따라서 이런 사람을 모두 한 자리에 몰아넣고 교육한다는 발상 자체가 무리다. 그러나 의무교육 과정에서 자폐인들의 등급이나 유형별 관리는 아직 꿈도 꾸기 어려운 형편이다. 더구나 공교육에서 소외된 등록 발달장애인의 절반은 대부분 사회복지관 등 사설기관이나 집에서 지내며 그럴 경우 개인 부담이 만만치 않다. 사설 복지관에는 한 달 평균 30만원 이상을 내야 한다. 따라서 “갈 곳 없는 저소득층 발달장애인들은 집에 틀어박혀 지내다가 사회성이 더 퇴보된다”고 한민족복지재단의 이영주 사회복지사는 말했다. 자폐인을 끌어안으려는 사회적 노력은 다른 장애인의 경우에 비해 적으면 적었지 많지는 않다. “흔히 휠체어를 탄 사람을 보면 밀어주고 시각장애인을 보면 길 안내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길에서 성인 자폐인을 만나는 경우엔 ‘이상한 사람이다, 미쳤다’면서 피하고 만다.” 류향금씨의 말이다. 사실 겉보기엔 멀쩡한 어른 같아도 기본적인 인지능력조차 부족한 자폐인들이 적지 않다. 따라서 정신지체 3급이면 군대가 면제돼도 자폐 3급은 병무청에서 징집영장을 발부하는 경우가 있다. 판정기준이 복잡한데다 신체검사를 담당하는 군의관들이 외양에 근거해 판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세대 의대의 신의진 교수는 “군대를 갔다가 3개월도 안 돼 돌아오는 사례도 몇 번 봤다”고 말했다. “총기사고라도 날까봐 겁이 난다. 애들이 좀 경증인 경우는 신체검사할 때 겉모습이 멀쩡하므로 무심한 성격이라고 판정받아 군대에 가기도 한다. 그러나 경증이라도 발달장애는 언제든 문제행동을 일으킬지 몰라 위험하다.” 자폐인에 대한 더 세심한 관심이 필요한 대목이다. 사실 자폐인 자신들도 스스로가 발달장애인인줄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도 없지 않다. 배형진씨의 어머니 박미경씨는 “지하철에서도 자폐인들을 흔히 보곤 한다”고 말했다. “본인은 몰라도 반평생을 지켜봐 온 나는 안다”고 박씨는 말했다. 학계는 발달장애가 1000명당 한 명꼴로 발생한다고 본다. 따라서 전국적으로 발달장애인은 모두 4만7000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결국 발달장애인 중에 열의 일곱 여덟은 장애인 등록이 아예 안 됐거나 다른 장애인으로 살아간다는 말이다. 또 등록된 환자들 중에 20세 이상의 성인은 대단히 드물다. 보건복지부 등록 자폐인들 중에 30세 이상은 127명에 불과하다. 보건복지부는 발달장애 등록을 2000년에서야 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미 다른 장애로 등록한 장년층이 누락됐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80년대 이전에는 자폐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신지체 등의 다른 장애로 등록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조금 더 우울한 분석도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발달장애 등 몇몇 장애의 경우 수명이 조금 짧다는 얘기가 있다”고 했다. 이영주 복지사는 “자폐는 아파도 의사소통을 못한다. 그래서 보호자가 없을 때는 매우 위험하다. 그렇게 방치되면 일찍 사망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따라서 현재 뚜렷한 대책이 없는 만큼 국내 성인 발달장애인들의 경우 부모와 가족이 외면하거나, 그들과 사별하면 합당한 치료와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버린다는 말이다. 현재 중앙 정부가 딱히 발달장애인을 위해 마련 중인 정책은 없다. 교육인적자원부의 김은주 교육 연구관은 발달장애인의 직업교육을 늘려달라는 요구에 뚜렷한 대책을 말하지 못했다. 각 시·도 교육위원회에 권장만 할 뿐 강제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란다. 다만 지방정부와 일선교사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노동부와 협의해 지역 내 발달장애인 일자리 창출을 논의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 역시 발달장애인을 특별히 고려한 일자리 창출 노력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발달장애인을 위해 국회에 제출됐거나 심의 중인 법안도 없다고 보건복지위원회의 이규담 전문위원은 말했다. 자폐인을 위한 민간의 노력도 현재로서는 걸음마 단계다. 현재 한국에서 자폐 관련 권익옹호단체는 올 1월 정식으로 발족한 사단법인 한국자폐인사랑협회(Autism Society of Korea·대표 김용직 변호사)가 유일하다. 기업계, 학계, 법조계 등 다양한 분야의 인사들과 부모들이 모여 자폐가 무엇인지 대중적으로 알리고 자폐인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인식을 개선하는 운동을 벌이겠다는 취지로 발족했다. 영문 약자를 ASK로 사용하는 한국자폐인사랑협회는 자폐인 백서 발간 등을 비롯, 자폐인 가족이 서로 돕는 상부상조의 네트워크 구축과 자폐인들의 체험학습 기회 부여 등 야심 찬 계획을 마련했다. 그러나 아직 초기 단계에 불과해 많은 자폐인 가족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미흡하다. 이 밖에 국제구호단체 한민족복지재단은 경기도 성남에 발달장애인을 위한 말아톤복지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 18세 이상의 발달장애인을 대상으로 재활·사회통합·직업전환시설을 세울 예정이다. 아울러 한민족복지재단은 중증 발달장애인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공동생활가정을 시범사업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말아톤’의 주인공 배형진씨의 어머니 박미경씨는 재단 설립을 도우려고 배형진씨의 광고 출연료 일부를 내놓기도 했다. 이처럼 발달장애인을 배려하는 정부나 사회적 노력이 미흡하자 자폐 가족들은 다양한 자구책을 강구한다. 어느 언론사 중견간부는 아내와 자폐 아들을 미국에 보내고 몇 년째 기러기 아빠로 지낸다. 미국의 자폐아 교육 여건이 이곳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ASK에서 교육자문을 담당한 김상용 박사의 자폐 아들(22)도 미국에서 독립해 산다. 남편이 교환교수로 미국에 갔던 99년부터 미국에서 계속 산다. 다른 한편 류향금씨는 아들의 한국육영학교 동급생 7명의 어머니들하고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시절부터 꾸준히 돈을 적립해왔다.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2008년이 되면 이들이 모은 돈은 1억원이 된다. 이 돈으로 집을 한 채 사서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도록 해줄 생각이다. 부모가 없더라도 이들 스스로 자립해 살아나갈 기반을 마련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직업훈련이나 사회 통합 교육을 담당해줄 특수교사도 고용하는 등 부모가 힘이 닿는 데까지 도와줄 계획이다. 그러나 그것도 힘 닿는 데까지다. 모두 한국의 정부나 사회가 담당하지 못하는 부분을 채워주려는 부모들의 노력이다. 그러나 이런 부모조차 없는 자폐인들은 누구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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