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성장 속의 빈곤
싱가포르, 성장 속의 빈곤
세계화 혜택 부유층에만 돌아가 서민들 소득은 오히려 줄어 인구 430만 명의 소국 싱가포르는 세계화를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많은 칭찬을 받아왔다. 지난 10년간 외국인 투자와 인재들에게 문호를 활짝 개방하고, 법인세를 삭감했으며, 전략산업(생명공학·제약·금융 서비스 등)을 육성하는 유인책을 제공하는 한편, 다른 많은 나라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다. 그 성과는 명확해 보였다. 지난 3년간 싱가포르 경제는 연평균 7.6%씩(선진국치고는 경이적인 증가율이다) 성장하면서 여느 유럽 국가도 부러워할 만한 속도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왔다. 단 한 가지만이 문제였다. 평균적 시민들은 성장의 혜택을 입지 못했다는 점이다. 최신 통계에 따르면 중산층 가구는 싱가포르의 눈부신 경제성장의 열매를 전혀 맛보지 못했다. 또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빈곤층은 5년 전에 비해 살림살이가 더 나빠졌다. 싱가포르경제협회의 예오 람 케옹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경제는 강력한 성장세를 보이는 데도, 중산층의 실질임금은 정체되고 빈곤층의 소득은 줄어드는 희한한 현상이 나타난다.” 싱가포르만의 특이한 현상은 아니다. 대다수 선진국이 임금·봉급의 정체 현상을 보인다. 놀라운 점은, 현명하고 투명한 지도력으로 유명한 싱가포르조차 세계화의 혜택이 주로 부자들과 다국적기업들에만 돌아가는 현상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국가경제를 국제적 경쟁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기업비용을 줄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에 따라 노동비용이 삭감되면서 임금 하락으로 이어졌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싱가포르의 최상위 부유층 10%는 연간 2.3%씩 소득이 증가했다(자본이득이나 배당금 같은 비임금소득은 포함시키지 않은 수치다). 같은 기간 극빈층 10%의 소득은 매년 4.3%씩이나 줄어들었다. 정부는 또 고용주들이 중앙연금준비기금(CPF)에 불입하는 금액을 줄여주었다. CPF의 자금은 국민연금, 공공주택, 의료 비용, 교육 등에 투입된다.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싱가포르의 민간 소비 수준은 예상보다 낮아져 지난 2년간 3%밖에 늘지 않았다. 시티그룹 글로벌 마케츠의 싱가포르 사무소에 근무하는 경제전문가 추아 하크 빈은 “팽창 일로에 있는 싱가포르 경제에서도 민간 소비지출은 약한 고리 부분이 됐다”고 지적했다. 결국 싱가포르의 거대한 소매업 부문이 피해를 보았다. “싱가포르 경제의 고도성장에도 불구하고 소매업 부문은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고 미국에 본사를 둔 투자회사 센테니얼 그룹의 간부인 마누 바스카란은 말했다. 국제 경쟁도 상황을 어렵게 한다. 하도급업자인 탄 분 수는 그런 압박감을 느끼는 많은 싱가포르인 중 한 명이다. 창유리 설치 공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그는 인도네시아·방글라데시 같은 나라들에서 싱가포르로 쏟아져 들어오는 계약 노동자들과 “살인적인 경쟁”을 벌여야 한다고 탄식했다. 경비원과 거리 청소부 같은 비숙련 노동자들도 낮은 급여를 마다하지 않는 이민자들 때문에 임금 수준이 낮아지는 현상을 감수한다. 이 때문에 토착 싱가포르인들은 직업을 바꾸거나, 줄어든 수입을 메우느라 더 많이 일해야 한다. “싱가포르의 고도성장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성장을 느끼지 못한다”고 탄은 말했다. “금융업자들은 잘 해나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건설업은 그렇지 않다. 요즘 나의 생활 형편은 1997년보다 못하다.” 이 모든 사태는 심각한 곤경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예오 회장은 “이런 동향을 방치할 경우 극빈층이 양산되고 사회적 불안정이 증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싱가포르의 웅대한 국가발전 계획에는 결코 이런 극빈층이 포함돼 있지 않았다. 이제 정부 지도자들은 그동안 비웃어왔던 복지제도에 의존하지 않고도 그런 극빈층의 양산을 예방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지난해 싱가포르 정부는 실험적인 노동자 재교육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덕분에 저소득층은 최대 780달러의 추가 소득을 얻었다. 요즘 리셴룽(李顯龍) 총리의 싱가포르 정부는 저소득 노동계층의 규모를 줄이려고 그 프로그램을 상설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리 총리는 지난해 11월 국회의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다양한 형태의 프로그램들을 충분히 실험해볼 계획이다. 그러나 ‘스스로 돕는 자에게만 정부도 도움을 준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다. 세계화가 싱가포르의 사회적 응집성을 해칠 우려가 있는 만큼, 저소득층에 유리하게 균형을 맞추는 일이 중요하다.” 리 총리는 2월로 예정된 연례 시정연설에서 싱가포르의 빈부격차 해소를 핵심 과제로 언급하겠다는 뜻을 이미 밝혔다. 문제의 인식 자체가 절반의 해결을 의미한다면, 그 같은 태도는 중요한 첫걸음이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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