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론] 국가지도자의 명백사달<明白四達>
한 신문의 워싱턴 특파원으로 나가 있던 시절 나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을 수사자에 비유한 적이 있다. 굳이 옛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우리나라의 어지러운 현 정국에 클린턴보다 더 좋은 반면교사가 없기 때문이다. 르윈스키와 놀아난 바람둥이에다 위증(僞證)을 일삼은 거짓말쟁이일 뿐 아니라 탄핵소추로 대통령직을 잃을 뻔한 클린턴이었지만 재임 중 그가 이룩한 ‘10년 호황’은 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클린턴은 자신의 전공이 아니었던 경제를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 (FRB) 의장과 기업인들에게 맡겼다. ‘나에겐 묻지 마시오’ 식 경제철학이 ‘10년 장기 호황’을 만들어 낸 클린턴의 업적이란 평가가 많다. 다시 말해 시장경제란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자율(自律)과 그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실천한 대통령이었다는 뜻이다. 탁월한 경제 성적은 바람기 때문에 그 가치가 반감됐지만, 그의 수사자 같은 면모가 또 다른 재조명을 받으며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 <노자를 웃긴 남자> 를 쓴 이경숙 씨의 글을 읽으면 공감은 더 진해진다. “수사자는 암사자들과 새끼들로 이뤄진 가족을 거느리는 우두머리다. 그런데 이 수사자는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냥 빈둥거린다. 나무 밑에서 잠이나 자고 암사자들이 꼬리를 흔들면 사랑해주고 그게 다야. 사냥도 안 하고 일도 안 해. 어쩌다가 마지못해 영토를 한 번씩 둘러보면 그걸로 끝이야. 그러나 수사자가 크게 한 번 울면 사바나 전체의 동물들이 숨을 죽여. 그래서 백수의 왕이라 그래. 그게 바로 (노자가 말하는) 명백사달(明白四達)이야.” ‘아파트 반값, 참 나쁜 대통령’ 등 단순명료한 말 몇 마디가 변호사의 변론처럼 길고 지루한 설명보다 더 힘 있고 효과적이란 뜻이 바로 <노자 도덕경> 이 말하는 명백사달(明白四達)이다. 단순명료함 이외에 지도자에게 필요한 또 다른 덕목을 꼽으라면 진실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연저지인(疽之仁)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병법(兵法)가인 오기(吳起)가 부하의 상처 난 부위의 고름을 입으로 빨았다는 데서 비롯된 고사성어로, 어진 덕장(德將)을 표현하는 뜻이기도 하지만 목적 달성을 위한 ‘독한 마음과 위선의 극치’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고치자는 노무현 대통령의 제안은 나라 정치를 바로 잡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제안한 ‘입으로 고름 빠는’ 행위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더 이상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고름을 빠는 행위가 스스로 귀를 막고 종(鐘)을 훔치는 ‘엄이도령(掩耳盜鈴)’으로 읽히고 있는 것이다. 국민은 지도자의 거울이다. 자기의 행위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기본적 의문을 무시해서는 국가나 회사의 조직을 제대로 경영할 수가 없다. 늑대 소년은 정말 늑대가 나타난 시점에 주민들이 왜 나타나지 않는가를 스스로 자문해 봐야 한다는 뜻이다. 조직을 운영함에 있어서 자기 위치를 잘 파악하는 균형감각 또한 지도자의 중요한 덕목이다. 국가에는 대통령이 할 일이 있고 국장이 할 일이 따로 있다. 회사에는 사장이 할 일이 있고 대리가 할 일이 따로 있다. 대통령이 국장할 일을 챙기고 사장은 대리가 할 일까지 챙기면 국가와 회사는 결딴난다. ‘사단장이 보초를 서면 그 군대는 망한다’는 말과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다. 제갈공명은 능력이 뛰어난 재상이었지만 결국은 중원을 평정치 못하고 사마중달에게 패한 사람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소식(小食)하고 10대 이상 때리는 형벌은 직접 손을 대느라 ‘성공하지 못한’ 제갈공명의 ‘식소사번(食少事煩)’은 결국 사단장이 보초를 서는 행위를 표현한 것일 뿐이다. 돌이켜 보면 클린턴이야말로 틈만 나면 골프나 치던 ‘수사자 같은 정치인’이었다. 수사자처럼 놀고먹는 클린턴의 역설적 균형감각과 정치적 수완이야말로 미국 경제를 오늘의 반석 위에 올려놓은 핵심이자 요체였다는 게 미국을 아는 사람들의 설명이다. 클린턴은 이제 발톱 빠진 수사자다. 그러나 현란하기까지 한 정치적 수사(修辭)로 바람 잘날 없는 우리 사회에 수사자의 명백사달보다 더 의미 있는 정치 훈수는 없을 것이다. 노자>노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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