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중견기업] “기술 좋으면 위기 두렵지 않다”
[파워중견기업] “기술 좋으면 위기 두렵지 않다”
경부고속도로 김해 대동 톨게이트를 지나면 낙동강 하류가 보이기 시작한다. 낙동강 하류 양 옆에는 부산 산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기점이 있다. 오른쪽은 부산·경남지역의 인력과 화물 수송을 맡고 있는 김해공항, 왼쪽은 신평·장림공단이다. 80년에 설립된 엔케이는 신평·장림공단의 터줏대감이자 대표 기업이다. 이 회사는 선박용 소화장치와 고압가스용기 제조가 주업이다. 지난 2004년부터 매출이 가파르게 올라 지난해 설립 이후 처음으로 매출액 1000억원을 넘겼다. 박윤소(65) 엔케이 대표는 “창업 초기부터 강조했던 부품의 국산화와 기술력 중심 경영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80년부터 국산화 사업 시작 박 대표는 현대중공업에서 선박용 기계장비를 설치하는 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현대중공업은 우리나라 조선업계 최초로 대형 선박인 ‘아틀랜틱 베런호’와 ‘베르니스’라는 배를 만들 때였다. 박 대표는 “임직원 모두 우리나라 조선산업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히 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켠에는 불만이 하나 있었다. 배를 만드는 기술력도 좋았고, 기술자들도 성실했지만 배에 들어가는 대부분의 부품이 수입품이라는 것이었다. “배를 움직이는 주요 부품은 물론이고 심지어 배에 들어가는 문짝도 수입했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우리나라 조선업계의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지요.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는 내내 부품의 국산화를 고민했습니다. 내부에서 여러 방법을 알아봤지만 쉽지 않더군요. 그래서 제가 직접 국산부품을 만들기로 결심했습니다. 결국 79년에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나왔지요.”
엔케이는? |
설립 : 1980년 1월 남양금속공업사로 출발
사업 분야 : 선박용 소화장치, 고압가스용기
직원 수 : 220명(2007년 3월 현재)
관계 회사 : ENK, NKTECH, GESKO, NKSH
본사 : 부산시 사하구 신평동 | |
여러 궁리 끝에 그는 선박용 소화장치 사업에 뛰어들기로 했다. 80년 박 대표는 엔케이의 전신인 ‘남양금속공업사’를 설립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선박용 소화장치를 독일, 영국 등지에서 전량 수입해 설치하고 있었다. 기술개발에만 성공한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사업이었다. 일단 기본 설비 구축에 중점을 뒀다. 부산에 고압용기 공장을 짓다가 부도난 공장을 2억원에 사들였다. 기본 설비를 갖춘 것이다. 의욕은 넘쳤지만 기술이 부족했다. 때문에 창업 초기에는 선박용 맨홀, 휴지통, 비눗갑 등 기본적인 제품만을 만들었다. 당시 우리나라 조선업계는 선박용 소화설비 설치 관련 법규가 없었다. 전부 일본법을 따르고 있었다. 공장 설립부터 일본의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한국의 조그마한 공장이 선박용 소화장치를 만든다는 점을 탐탁지 않아 했다. 박 대표는 1년 넘게 쫓아다니며 기어이 공장승인과 제품승인 허가를 받아냈다. 박 대표의 열정적인 모습에 감동한 세계 최대의 소화설비업체 영국 ‘키데’는 81년 엔케이와 기술 제휴 협정을 맺었다. 엔케이는 이를 계기로 소화장치 국산화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때부터 그는 “부품의 국산화도 중요하지만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만의 기술력이 있어야 한다”는 경영철학을 갖게 됐다. 박 대표는 “엔케이의 오늘이 있기까지 27년 동안 세 번의 위기와 기회가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위기가 없었다면 성장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첫 번째 위기는 84년이었다. 그 해에 엔케이는 독자 기술로 선박용 소화장치를 개발했다. 그러나 국내 조선기업들은 엔케이의 제품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렵사리 만든 제품이 무용지물이었던 셈이다. 박 대표는 오기를 품고 더 앞선 제품 개발에 나섰다.
1년 여에 걸쳐 기존 제품보다 설치가 편하고 값도 싼 소화장치를 개발했다. 일본이나 독일의 검증을 받기 위한 준비도 철저히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85년 처음으로 현대중공업에 엔케이 소화장치를 납품하기 시작했다. 엔케이의 이륙은 95년까지 쭉 이어졌다. 그 사이 매출은 85년 26억원에서 95년 263억원으로 10배 이상 올랐다. 사업이 탄력을 받자 박 대표는 91년에 평소 염원이던 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처음에는 5명으로 시작했지만 현재 박사급 인원 4명 등 총 18명이 엔케이만의 기술을 연구하고 있다. 여기서 개발된 기술은 선박용 폐수처리 장치 기술 등 50여 개가 넘는다. 박 대표는 “아직 특허로 등록하지 않은 몇몇 기술이 있지만 이 기술이 앞으로 엔케이의 성장을 주도할 것”이라 말했다. 두 번째 위기는 97년 외환위기였다. 여느 기업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엔케이도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사업 확장을 위해 국내외에 투자를 많이 한 상태라 부채가 급격히 늘어났다. 부채만 해도 180억원이었다. 97년 엔케이의 자본 총액은 80억원 가량이었다. 박 대표는 좌절할 수 없었다. 평소 신용이 좋았던 엔케이는 은행에 부채 상환기간을 연장해 달라고 요청했고 은행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회사를 겨우 살려냈지만, 한번 꺾인 상승세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박 대표는 위기 탈출법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쌓여가는 빚으로 인해 더 이상의 사업 확장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이때 그가 마음속으로 되뇌고 되뇐 것이 ‘위기가 곧 기회’라는 진리였다.
앞으론 초고압용기로 승부 박 대표는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새로운 제품 개발에 나섰다. 압축천연가스(CNG) 충전용기를 개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환경을 생각하는 사업에 비전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 박 대표의 예상이었다. 박 대표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98년에 개발된 압축천연가스 충전용기는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기 시작하면서 개발 3년 만에 세계시장 점유율 2위를 차지하게 됐다. 현재 서울 시내를 달리고 있는 압축천연가스 버스 1만1000여 대에 쓰이는 충전용기 전량이 엔케이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압축천연가스 버스는 일반버스보다 대당 연평균 400만원의 연료비를 절감한다. 두 번째 기회 역시 위기 덕분에 찾아온 엔케이의 성장 기반이었다. 세 번째 위기는 지금이다. 지난해 매출 1158억원을 기록했지만 박 대표는 “또 한번의 위기”라고 말한다. 주력 사업을 고압용기에서 초고압용기로 바꿀 계획이기 때문이다. 초고압용기의 압력은 고압용기의 압력보다 2~3배가량 높지만, 들어가는 비용은 20~30배나 된다. 더구나 고압용기로는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할 수 없다. 고압용기 제작 업체가 점점 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국내에서 아무도 손대지 않은 초고압용기로 승부를 걸 생각이다. 아직은 성공할지 실패할지 미지수다. 현재 관련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초고압용기도 성공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동안 쌓아둔 기술이 있기 때문이죠. 물론 몇 번의 시련이 다가올 테지만 문제없습니다. 우리에게 시련은 성장의 발판이니까요.” 엔케이는 해외진출도 활발히 하고 있다. 2003년에는 독자적으로 중국 상하이에 공장을 설립했다. 또 2004년에는 이란 가스빈사와 합작공장을 만들었다. 앞으로 브라질, 태국 등지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올해 매출 목표는 1650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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