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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AGEMENT] 발목 잡는 금융노조 승산 없다

[MANAGEMENT] 발목 잡는 금융노조 승산 없다

▶2005년 5월 국민은행 노조원들이 은행 측의 구조조정에 반대하며 서울 여의도 본점 행장실 앞에서 행장실 진입을 시도하며 청원경찰들과 몸싸움을 하고 있다.

100일은커녕 3년 임기가 다 지나도록 CEO가 장악하기 어려운 조직이 있다. 강성 노조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한국의 금융회사 노조는 유별나게 강하다. 일부 노조는 인사까지 간섭한다. 달라질 수는 없나.
A씨는 공개 모집 절차를 거쳐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한 금융회사의 사장으로 선임됐다. 출근 첫날 A사장이 총무부장에게 취임식 준비 상황을 물었다. 총무부장은 “내일이나 내일 모레나…” 하고 얼버무리더니 “노조위원장이 독대하자고 한다”고 전했다. A사장은 “무슨 독대냐”며 말을 자르고 “경영진과 노조의 상견례 자리를 갖자”고 지시했다. 회의실에는 노조 조끼를 입은 집행부 간부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노조 간부들은 ‘사장에게 먼저 인사할 이유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총무부장은 사장에게 간부들을 소개하지 않은 채 서있었다. A사장은 할 수 없이 먼저 나서서 일일이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이르자 한 간부가 왼손을 허리에 댄 채 오른손만 내밀었다. A사장이 “손을 내리고 악수합시다” 하고 말했지만 그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A사장은 당황했다. ‘저 손을 잡자니 숙이고 들어가는 것 같고, 잡지 않자니 속좁은 것으로 비칠 테고….’ 그는 오른손으로 노조 간부의 왼손을 툭 쳐 내린 뒤 손을 잡았다. 기지를 발휘해 당혹스러운 순간을 넘긴 것이다. 그러나 이 상견례가 끝이 아니었다. 노조는 사사건건 간섭하려 들었다. 전임자를 예우하는 문제를 이사회 안건으로 올렸더니 노조가 딴죽을 걸었다. 알아보니 이사회 안건이 노조를 거치도록 전임 CEO가 양보했던 것이었다. “나중에 노조위원장과 소주를 한 잔 마시는데, 그러더군요. ‘사장님은 호텔을 거치지 않은 첫 CEO입니다.’ 무슨 소리냐고 물었죠. 전임자들은 나와 달리 대부분 낙하산이었고, 노조가 반발해 출근을 저지했어요. 그러면 사장이 집무실에 못 들어가고 회사 앞 호텔로 출근합니다. 며칠 그렇게 하다가 결국 노조위원장을 불러 독대하면서 양보했답니다. 한마디로 ‘항복각서’에 조인한 것이죠.” 노조의 이사회 안건 개입도 이런 파행의 산물이었다. 다부지기로 이름난 그였지만 노조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가 한계를 절감하게 된 ‘사건’이 있다. 퇴근한 뒤에 휴대전화가 계속 울려서 받아보니 노조위원장이었다. 노조위원장은 “아무개는 내일 인사에서 어떻게 되느냐, 좌천되는 것 아니냐”며 따지듯 물었다. “내일 발표하면 보라”고 하자 노조위원장은 “그런 식으로 인사한다면 내가 폭로할 게 있다”며 을러댔다. ‘A사장이 CEO 공모 때 회사 내부에서 도움을 받았으며 그 근거로 통화 내역을 확보했다’는 게 협박거리였다. 통화 내역이란 지원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 회사 기획실과 주고받은 연락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A사장뿐 아니라 다른 지원자들도 마찬가지였고, 그런 통화 내역은 하등 문제삼을 성질이 아니었다. 그는 “얼마든지 폭로하라”고 맞받아쳤다. 몇 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요즘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금융회사 CEO들은 말한다. 한 금융회사의 CEO는 “직원들을 개별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면 합리적이고 말이 통하는데, 노사의 입장이 엇갈리는 이슈에서는 대부분 노조 편을 든다”며 서운해 했다. 직원들이 CEO보다 더 오래 볼 노조에 더 신경을 쓴다는 얘기다. 노조가 강한 한 증권회사의 차장은 “노조 간부가 ‘우리에게 밉보이면 승진은 다 한 줄 알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닌다”고 말했다. 금융 노조는 외부 인사가 CEO로 선임되면 으레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출근 저지 투쟁을 벌이며 기선을 제압하려 든다. 또 대형화를 통한 경쟁력 강화란 추세를 거부하며 합병에 강력히 반발한다. 신한은행과 조흥은행, 한국투자증권과 동원증권 등 합병 회사의 경영진은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한국투자증권 노조는 동원증권과의 통합에 반발해 지난해에 4개월 동안 장기파업을 벌였다. 홍성일 전 한국투자증권 사장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CEO 자리에 앉은 뒤 맘 편한 날이 하루도 없었고 합병 후에도 노조 파업으로 밤잠을 설쳤다”고 말했다. 노조는 또한 업무 재배치 등 경영상의 의사결정을 가로막는다. 회사 측이 감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사기진작비를 준다고 해도 파업을 결의하며 선명성을 과시한다. 구조조정에 대한 반발은 더 거세다. 지난 2월 하나증권 노조는 소매 영업권을 대한투자증권으로 양도하는 조건이 흡족하지 않다며 경기도 가평 연수원으로 들어가 파업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 명분 없는 파업이란 비판이 많았다. 소매영업 직원 전원의 고용승계 요구를 관철한 데다 사기진작비도 정규직 기준으로 300%를 얻어냈기 때문이었다. 하나증권 노조의 파업은 결국 이틀도 지나지 않아 조합원 만장일치로 풀리고 말았다. 은행장 인사에도 노조가 목소리를 높인다. 기업은행 노조는 지난 2월 강권석 행장의 연임이 결정되기 전 성명서를 냈다. 기업은행 노조는 “밀실에서 추진되는 은행장 공모 절차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직원 대표가 은행장 추천 과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우리·경남·전북은행 노조는 3월 5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 노조는 “우리금융지주 회장과 은행장 선임을 둘러싼 공모제가 청와대와 재정경제부 등의 밀실 야합과 나눠 먹기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낙하산·코드·보은 인사가 철회되지 않을 경우 총파업을 포함한 강력한 투쟁에 돌입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노조의 이런 행태는 회사의 발전을 위한 충정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지나친 측면이 있다고 금융계 인사들은 비판한다.

▶2003년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은행 경영진과 전국금융산업노조 소속 은행 노조 대표들이 금융산별교섭을 벌이고 있다.

한국 노조는 다른 나라보다 강성으로 꼽힌다. 시티은행과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 등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은행들에는 아예 노조가 없다. 한국 금융 노조가 투쟁하는 모습을 본 외국 금융회사 간부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한국의 은행 노조원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데모하는 모습을 TV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 ” 지난해 터키 이스탄불에서 포브스코리아 취재기자가 만난 터키시티은행의 스티브 비덴쉬(Steve Bidenshi) 행장의 말이다. 한국 노조의 ‘투쟁성’이 멀리 터키에까지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이다. 비덴쉬 행장은 “은행 노조원들이 한국처럼 데모하는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현 정부는 출범 이후 줄곧 ‘동북아 금융허브’를 외쳐왔다. 그러나 강경한 노조를 이대로 두는 한 금융허브는 공염불이란 지적이 많다. 금융회사 CEO들은 “미래의 비전을 그리고 실행에 옮기는 데 주력해야 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노조에 뺏긴다”고 어려움을 토로한다. 한 증권회사 사장은 “금융사 CEO들이 노조 문제로 고민하느라 경영전략을 짜고 비전을 세울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평소에도 업무 시간의 20~30%를 노조 문제에 할애하는데, 노사 문제가 불거지면 거의 90% 이상을 노조 문제에 씁니다. 금융사 사장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죠.” 한국의 모든 금융회사 노조가 강성은 아니다. 증권과 보험업 노조는 강성이 적다. 우선 증권사는 개인별 실적을 산출하기 쉬운 구조이고 각 개인의 임금에서 성과급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또 증권사 인력 시장은 이동이 활발한 편이다. 그래서 증권사 직원은 노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보험은 생명보험과 손해보험 모두 노조가 없는 삼성이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손보사 가운데 동부화재에도 노조가 없다. 동부화재 노조는 과거 노조 문제로 사장까지 구속되는 홍역을 치르면서 없어졌다. 생명보험 업계에서는 외국계 보험사 비중이 커지면서 노조가 약해졌다. 노조가 강한 곳은 은행, 은행계 증권사, 주인이 자주 바뀐 증권사, 증권사 유관기관 등이다. 은행은 산별노조를 통해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의 주축을 이루는데, 이런 정치적인 구조가 은행 노조를 강성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인 성향의 일부 은행 노조위원장들이 한노총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타협보다는 투쟁을 앞세워 왔다는 얘기다. 외환위기 이후 구성원들이 자기보호를 위해 노조를 중심으로 뭉친 측면도 있다. 선한승 한국노동교육원장은 “금융 노조가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조금씩 강성으로 변모했다”고 설명했다. 강성 노조가 시대적으로는 과거 관치금융의 유산이라는 분석도 있다. 정부가 금융회사 CEO 자리에 ‘낙하산’을 내려보내면 노조가 이에 반발하고 신임 CEO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양보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노조의 힘을 키워 줬다는 설명이다. 회사를 좌지우지하려는 금융 노조의 행태를 바로잡을 방법은 없을까. 박종원 코리안리 사장은 “CEO의 성과가 좋은 경우 연임하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렇지 않으면 직원들이 ‘잠시 있다 갈 CEO’보다 노조에 더 기운다는 설명이다. 박 사장은 이와 관련해 자신이 겪은 일을 들려줬다. “처음 임기 3년 동안 구조조정과 혁신으로 뛰어난 실적을 올렸어요. 그런데 임기가 끝나가자 직원들은 ‘저 사람은 곧 바뀔 것’이라며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됐죠.” 금융회사 CEO들은 “사장 개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노조와 관련된 기본틀을 고쳐나가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진영욱 한화손보 부회장은 “노조 전임자에 대한 임금 지급 금지 등 노사관계를 둘러싼 제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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