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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치명적 혼란 불 보듯”

“중소기업 치명적 혼란 불 보듯”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내 시중은행은 전당포나 다름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철창이 앞을 턱 가로막고 있었다. 고객과 행원 사이의 ‘바(BAR)’는 될 수 있는 한 출입구 쪽으로 전진배치돼 있었다. 행원들은 최대한 넓은 업무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고 고객 자리는 늘 비좁았다. 행원은 언제나 앉아 있고 고객은 힘이 들어도 서 있어야 했다. 은행은 행원들의 직장이며 행원을 위한 공간일 뿐 고객들을 위한 곳은 아니었다.” 신한은행에서 20년 넘게 근무한 K 임원은 자신의 초년 시절 은행을 이렇게 묘사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 시절만 해도 은행원은 관공서 공무원처럼 고객에게 고자세를 취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개인이 대출을 받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금융 용어를 잘못 알아들으면 면박을 당하기 일쑤였다. K 임원은 “신한은행이 창구 라인을 후방으로 들여 고객에게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면서 비로소 지금의 은행 점포 모습을 갖추었다”고 말했다. 이른바 신한은행 방식으로 불리는 ‘신한웨이(Way)’는 그렇게 시작됐다. 고객 서비스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고 친절을 최고의 경쟁력으로 삼았다. 심지어 지점 행원들이 동전 자루를 어깨에 둘러메고 시장통을 돌며 상인들에게 잔돈을 바꿔주는 정성까지 쏟았다. 물론 당시 이런 행동은 타 은행들로부터 빈축을 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은행 망신 혼자 다 시킨다”는 비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은행권도 경쟁체제에 돌입하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은행들이 신한웨이를 벤치마킹하기 시작했다.

고객 굶어도 행원은 점심 먹어 공간적으로는 고객을 위한 장소가 됐는지 몰라도 시간상으로 은행은 여전히 은행과 행원들 중심으로 돌아간다.오후 4시30분이면 어김없이 은행 문은 닫힌다. 후문으로 들어간다면 30분 정도 시간을 벌지만 촉박하기는 마찬가지다. 마감시간 전에 간다고 해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번호표를 뽑고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 10분이고 20분이고 번호가 나타날 때까지 눈이 빠지게 기다려야 한다. 점심시간이면 창구 근무자 수는 반으로 줄어들어 점심시간을 다 허비해도 업무를 볼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행원은 식사하러 가는데 고객은 밥을 굶고 기다리는 꼴이다. 현금인출기도 시간적 제한은 있다. 10시면 문을 닫아 이후에 돈을 찾으려면 편의점에서 몇 배나 비싼 수수료를 지급해야 한다. 내 돈을 맡겨놓고도 아무 때나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은행의 자기중심적인 시간운용에 불평하는 사람은 있어도 분개하는 사람은 없었다. 얼마 전 은행 영업시간을 1시간 단축하겠다는 얘기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이 들끓는 비난 여론에도 은행 영업 마감시간을 4시30분에서 3시30분으로 1시간 단축하는 방안을 강행할 계획이다. “행원의 노동 강도가 너무 세다”는 것이 이유다. 노조는 “이미 창구 업무 비중이 많이 줄어 사용자 측의 반대도 크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노조의 이런 주장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쪽은 사용자가 아니라 고객이다. 은행연합회와 은행 경영진들이 노조의 요구를 수용하든 하지 않든 은행은 손해 볼 것이 없다. 고객만 피해를 볼 뿐이다. 금융노조는 “시중은행은 영업시간 이후에도 창구 마감업무와 함께 고객관리·마케팅 활동 등 연장 근로가 이뤄지고 있어 창구 영업시간을 단축해 실제 퇴근하는 근무 종료시간을 앞당길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은행 간 과당경쟁으로 인해 은행원의 노동 강도가 살인적일 만큼 극심하다”는 일선 현업의 요구가 높다는 것이다.

야근하는 직장이 은행뿐인가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인력을 충원해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목소리가 높다. 인건비가 문제라면 임금을 조정해서라도 풀 일이다. 금융노조가 주장하는 대로 창구 업무 비중이 많이 줄었다는 것도 핑계라는 지적이 많다. 인터넷 뱅킹이나 폰 뱅킹 등으로 창구를 찾는 고객이 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창구 직원들이 대폭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요즘 은행에 가보면 일반 고객들이 활용할 수 있는 창구보다 대출 전담 창구나 PB(프라이빗 뱅킹) 고객들을 위한 창구의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체감할 수 있다. 특히 PB 창구는 일반 고객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 일반 창구 앞에는 두세 명의 여직원들이 감당해야 할 고객들이 번호표를 들고 잔뜩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켠 PB센터에서는 어쩌다 하나 둘 들어오는 ‘부자’ 고객들을 맞기 위해 별 할 일 없이 앉아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근본적으로 은행원들의 업무가 다른 기업체 사무직 업무와 비교해 정말 근무시간을 단축해야 할 정도로 강도가 높을 것이란 주장에 이해할 사람이 몇이나 될지 의문이다. S그룹 시스템통합 계열사 영업팀에 근무하는 K 과장은 “요즘 야근 안 하는 회사가 어디 있으며, 그래도 은행원들은 업무시간 이후에 거래처 사람들 접대하느라 몸 상하는 일은 없을 것 아니냐”고 말했다. 창구 영업시간을 단축한다고 해도 영업력 저하로 이어지지는 않아 사용자 측의 반대도 크지 않을 것이라는 금융노조 측의 주장도 문제가 많다. 혹시라도 이번 근무시간 단축이 강행된다고 해도 특정 은행만 영업시간을 단축하는 것이 아니라 전 은행에 걸쳐 이뤄질 테니 고객 입장에서는 거래은행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이런 약점을 악이용해 노조가 사용자 측을 설득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는 대목이다. 노조는 또 일본과 캐나다(3시), 영국(3시30분) 등 해외 선진국에서는 이미 영업시간 단축이 확산하는 점도 배경으로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유리한 해외 사례만 가져온 것에 지나지 않다. 독일 등 일부 유럽국가가 3시30분에 끝나는 건 맞다. 하지만, 미국 은행들은 거의 대부분이 5시에 문을 닫는다. 또 중국의 일부 은행은 6시까지 하면서 토요일도 영업한다. 스웨덴은 5시30분까지 영업하며 호주, 홍콩, 프랑스는 우리처럼 4시30분까지 손님을 받고 있다. 그 유명한 스위스은행은 24시간 영업이다. 연휴가 아무리 오래 지속되더라도 은행이 4일 연속 휴무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해놓고 있는 국가도 있다.

미국 은행들도 5시에 마감 미국의 상업은행들은 대부분 토요일에도 오전영업을 하며 개인창구 중심으로 업무를 보기 때문에 미리 약속할 경우 평일 영업시간이 지나도 업무를 볼 수 있다. 바클레이즈, 로이드 등 영국 은행들도 공식 업무시간은 오후 3시30분에 끝나지만 입출금을 비롯한 상당부분의 업무를 업무시간 외에 처리해준다. 금융선진국 은행들의 변화의 요체는 무엇보다 고객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여론의 반발을 의식해서인지 금융노조는 창구 영업시간 단축에 따른 고객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을 사용자 측에 요구하는 한편 고객 설득에 나설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그 대안이라는 것이 궁색하기 짝이 없다는 빈축을 사고 있다. 노조 측은 마감시간을 1시간 당기는 대신 자동화기기(ATM) 이용 수수료 면제나 추가 인하 등을 사용자 측에 요구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자동화기기를 사용해도 되는 고객은 어차피 창구 마감시간과 무관하다. 더구나 자동화기기 수수료가 걱정되는 고객이라면 창구를 찾지 않을 것이다. 자동화기기 수수료가 더 저렴하기 때문이다. 노조의 깊은 ‘배려’에도 고객들이 쉽게 이해해 줄 것 같지는 않다. 회사원 김은정(33)씨는 “심지어 직장인들은 하루 휴가나 반차 내서 은행업무를 직접 가서 처리해야 할 때도 있다”며 “업무시간에 은행 다녀오는 게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닌데 그나마 마감시간까지 단축한다니 해도 해도 너무한다”며 “은행이 서비스업이면 서비스업답게 행동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렇게 잔업이 많으면 아침에는 한가하던데 차라리 그 시간에 문닫고 자기네 업무 처리하고나서 오후부터 문 열었으면 좋겠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금융노조가 은행 고객 영업 마감시간을 3시30분으로 앞당기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진 뒤 네티즌들의 항의가 이어졌던 것도 이런 부정적인 여론을 반영한다. 물론 금융노조는 내부 자료를 올리기 위해 홈페이지 접속을 일시 차단했다고 밝혔지만, 홈페이지는 몇 시간씩이나 다운된 상태였다. 금융노조 홈페이지에는 고소득을 올리는 은행원들이 고객의 편의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복지만 챙기려 한다는 네티즌들의 비난이 잇따랐다. 노조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은행도 적잖은 손실을 볼 수 있다. 창구업무 시간을 단축할 경우 방카슈랑스나 카드 업무 등에서 창구 상담과 판매가 타격을 입을 수 있다면서 은행 마감시간을 앞당기는 데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랬던 그들이… 지난 98년 시중은행들은 영업시간까지 파괴하며 살아남기 위해 애썼다.



입사 7년차 연봉이 6000만원 금융노조는 창구 업무가 마감돼도 은행원들은 아침 8시에 출근해 잔업으로 평균 오후 10~11시에 퇴근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하소연한다. 심지어 은행 간 경쟁으로 직원들의 노동 강도가 갈수록 세져 과로사도 잇따르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노동강도는 겪어보지 않으면 함부로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밖에서는 은행원들이 “그 이상의 충분한 보상을 받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시중은행 가운데 급여수준이 최하위라는 Y은행의 경우, 대졸 입사 7년차 연봉이 6000만원에 달할 정도다. 그뿐만 아니라 주택자금 마련 융자 때 심한 곳은 1%대 금리를 적용받는 등 각종 금융혜택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번 근무시간 단축 주장이 나왔을 때 금융노조를 향해 또 하나의 ‘귀족노조’라는 비난이 쏟아진 것도 그래서다. 금융대란 당시 은행 구조조정 때 은행원들이 보여준 ‘눈물의 집회’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다.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고 근무시간부터 줄이려는 은행원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어느 중소기업 사장은 “천문학적인 공적자금 투입으로 기사회생한 은행들 중에는 실적이 좋아졌다고 ‘인센티브 파티’를 벌이기도 한다”며 혀를 차기도 했다. 은행노조가 줄이려는 오후 3시30분부터 4시30분까지는 고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시간이다. 은행 업무 마감이 1시간 당겨지면 고객이 단순히 불편해지는 것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 있다. 창구영업 시간 단축으로 기업체 자금 회전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점도 검토해야 한다. 통상 기업체의 경리·회계·자금운용 등 상당수 업무가 은행 마감시간에 맞춰 운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 마감까지 수출환어음을 제출해야 하는 수출업체들로서는 더욱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유동성이 늘 걱정스러운 중소기업들에는 마감시간 단축이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구로 디지털산업단지에서 벤처기업을 경영하는 최모 사장은 “그동안 은행 마감시간을 못 맞춰 어처구니없이 부도를 내는 사업자들을 여럿 봤다”며 “10분 사이에도 회사의 사활이 결정되는 긴박한 상황에서 1시간이나 단축한다는 것은 엄청난 사태를 몰고 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금융은 ‘돈의 흐름’인데 시간적 제약으로 그 맥을 건드리게 되면 비즈니스의 연속성(BC)을 약화시켜 자칫 금융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일각을 다투는 기업 생각해야 금융노조가 올해 공동 임금단체협상에서 ‘창구영업 시간 단축’을 주요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실현 가능성은 작을 것으로 전망된다. 한 은행 관계자는 “근로조건 문제라도 고객의 큰 불편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으냐”며 “특히 수출기업 등 기업금융 고객이 많은 은행은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이기가 더욱 곤란하다”고 말했다. 고객 불만뿐만 아니라 금융시스템 전반에 미치는 영향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 만만찮다. 유가증권 시장이 종료되는 오후 3시 이후 은행을 통해 오후 4시30분까지 지급준비금 이체가 이뤄지더라도 시간이 빠듯한 상황이다. 여기에 창구영업 시간이 앞당겨지면 자금 흐름에 혼선이 생길 수 있다. 금융노조가 명분으로 내세운 일본 은행 마감시간도 바뀌고 있는 상황이다. 은행법 개정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로 의무화돼 있던 영업시간 규제가 해제되면서 시중은행들은 경쟁적으로 영업시간을 확대하고 있다. 심지어 미쓰비시도쿄UFJ은행은 지난해 6월부터 도쿄(東京) 시내와 주택가 점포에서 평일은 물론 공휴일에도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로 영업시간을 늘렸다. 마쓰이스미모토은행도 도심 67개 점포에서 토요일과 공휴일 자산운용 서비스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거래소가 발행하는 경제매거진 『KRX』가 조인스닷컴·팟찌닷컴에 최근 의뢰해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은행 영업시간 단축에 대한 여론의 반발이 얼마나 거센지 알 수 있다. 응답한 총 1467명 가운데 무려 92%가 넘는 1351명이 은행의 3시30분 영업 마감에 반대했다. 인터넷 뱅킹을 자유롭게 이용할 것으로 생각되는 네티즌들조차 창구 업무의 불편을 강하게 호소했다는 점에서 은행 영업시간 단축은 여론을 거스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대 의견을 낸 응답자들이 올린 댓글도 눈여겨볼 만하다. 아이디 ‘woomi1275’인 한 네티즌은 “그렇게 일찍 닫고 싶으면 아예 문을 닫으라”고 일침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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