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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창조의 시녀

불안은 창조의 시녀


볼거리 많은 유럽 여름 전시회… 뒤숭숭한 현실 피해 예술 세계로 세상이 뒤숭숭하다. 전쟁으로 멍들고, 기후 변화와 테러 걱정으로 마음 편할 날 없으며, 이란과 서방의 팽팽한 힘겨루기에 지쳤다. 그러니 유럽인들이 비정치적인 예술에서 도피처를 찾는다고 나무라지는 말자. 이렇게 세상이 뒤숭숭할 때는 가까운 전시장이라도 찾아 (모네의) 수련 그림이나 정물화가 그려진 델프트(네덜란드 델프트산) 도자기를 감상하고 싶어진다. 유럽의 여름은 전통적으로 대중적인 미술 전시회가 많이 열리는 철이다. 게다가 올여름에는 “불안은 창조의 시녀”라는 영국 시인 T S 엘리엇의 말처럼 불안한 세계 정세가 활기 넘치는 전시회를 양산해냈다. 중국의 부상(浮上)부터 현대 대도시의 눈부신 발전까지 지정학적 현실을 반영하고 풍자하는 전시회가 유럽 전역에서 풍성하게 열린다. 뉴스 헤드라인이 문화적 고정관념을 강조한다면 예술은 그것을 깬다. 유서 깊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박물관의 네덜란드 분관인 에르미타주 암스테르담에서 열리는 ‘페르시아, 예술과 문화의 30세기’(9월 15일까지)는 바로 문화적 고정관념 타파를 목적으로 했다. 말을 탄 사냥꾼의 모습을 담은 파이앙스(유약을 아름답게 착색한 도자기) 타일이나 포옹하는 연인의 모습이 담긴 서구풍의 19세기 회화 작품 등은 이란이 ‘엄격하고 단일문화적인 사회’라는 고정관념을 깬다. 이슬람교에서는 원칙적으로 인간이나 동물을 비유하는 그림조차 그리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미술가들은 오랫동안 그 율법을 어겨왔다. “선지자 마호메트는 인간이 신의 영역을 침범해 사람이나 짐승의 이미지에 생명을 불어넣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전시장 벽에 쓰인 19세기 페르시아의 왕 나지르 알-딘 샤 카자르의 말이다. “하지만 페르시아 미술가들은 그 유혹을 참지 못했다. 알라의 창조물을 묘사해 가장 아름다운 형태와 이미지로 그를 더욱더 영광되게 하려는 욕망 때문이었다.” 또 이란의 여성 억압 문제를 생각할 때 페르시아의 위대한 시인 니자미 간자비의 작품 ‘캄사’에 곁들여진 15세기의 삽화는 더욱 놀랍다. 쿠스로 왕(사산 왕조)과 신하들이 시린 공주(카스피해 근처 기독교 왕국의 공주)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는 그림이다. 시린 공주는 강에서 가슴을 드러낸 채 목욕을 하면서 머리를 빗어 내린다. 뉴스에 뻔질나게 오르내려 익숙한 가자 지구와 관련된 전시회를 보려는 사람들도 이와 유사한 놀라움을 맛보게 된다. 팔레스타인 고대유물부에서 빌려온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발굴물 531점과 가자의 기업인 자와트 코우다리의 개인소장품을 전시하는 ‘문명의 교차로, 가자’(Gaza at the Crossroads of Civilization, 스위스 제네바 미술·역사 박물관에서 10월 7일까지)은 수십 세기 동안 이 좁은 지역의 일상에 나타난 다문화적 특징을 보여준다. 고대 이집트의 갑충형(甲蟲形) 인장, 포세이돈과 아프로디테의 조각상, 비잔틴 교회와 이슬람 묘비의 모자이크 등은 지난 5500년 동안 가자 지역의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 신을 숭배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정세가 불안한 지금 가자 당국이 어떻게 이런 전시회를 지원하게 됐느냐는 질문에 팔레스타인 외무부 장관 지아드 아부 아메르는 이렇게 답했다. “가자 사람들에게도 영혼이 있다!” 독일 본에서는 지중해 지역의 문화 융합 현상을 증명하는 또 다른 전시회가 열린다. 본의 미술전시관에서 열리는 ‘이집트의 수장됐던보물’(Egypt’s Sunken Treasures, 2008년 1월까지)은 이미 파리와 베를린 순회전에서 1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끌어 모았다. 프랑스의 수장유물 발굴 전문 고고학자 프랑크 고디오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근해 탐사 중 발견한 해저 고대도시 헤라클레이온과 카노푸스에서 나온 조각상과 동전, 프리즈(고대 건축물 기둥 상부의 수평 부분) 등 유물이 전시된다. 메소포타미아와 그리스, 로마 문명이 고대 이집트에 끼친 영향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유물 중 일부는 2000년 동안 지중해에 잠겨 있었다. 높이 6m의 대리석으로 된 프톨레마이오스의 석비(石碑)에는 상형문자와 그리스 문자가 새겨졌다. 이집트의 신 세라푸스의 조각상은 그리스 신 제우스처럼 곱슬머리에 턱수염이 달렸다. 러시아 예술을 감상할 만한 최고의 박물관인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갤러리에서는 유럽과 러시아의 삐걱거리는 애정 관계를 보여주는 ‘유럽-러시아-유럽’(6월 29일까지)이 열린다. 러시아와 나머지 유럽 국가들이 오랜 세월 동안 교류해온 문화 양상을 조명하는 전시회다. 국가적 정체성을 표방하고 있어 대다수 국가가 자국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작품을 출품했다. 스페인에서는 피카소의 작품을, 이탈리아에서는 티티안(티치아노 베첼리오)의 작품을, 오스트리아에서는 클림트의 작품을 내놓았다. 이 밖에도 문화적 정체성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더 있다.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열리는 ‘파리의 분위기’(Airs de Paris, 8월 15일까지)는 파리 사람들에게 자신, 그리고 현대성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한다. 마르셀 뒤샹(프랑스 초현실주의 화가)·낸 골딘(미국 사진작가) 등 이질적인 예술가들과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작품을 통해 현대 도시의 변화상을 보여준다. 한편 영국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은 최초의 대규모 사진 전시회를 통해 필름에 담긴 영국의 특징을 조명한다. ‘우리의 모습: 영국을 사진에 담다’(How We Are: Photographing Britain, 9월 2일까지)는 국가적 사진첩이라고 할 만한 전시회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빅토리아 여왕의 사진과 런던의 멋쟁이들, 호전적인 여성 참정권론자들, 테스코 수퍼마켓, 영화배우 줄리 크리스티 등의 사진이 포함됐다. 서구의 자아(自我)상은 역설적이게도 중국 현대 미술을 전시하는 ‘메이드 인 차이나’(코펜하겐 외곽의 루이지애나 현대 미술관에서 8월 5일까지)의 작은 주제 중 하나다. 세계 최대의 현대 중국 미술 컬렉션인 에스텔라 컬렉션에서 가져온 100점의 작품이 전시 중이다. 지난 20년 동안 중국의 미술가들은 사진·비디오·개념 드로잉 등 서구의 매체를 흡수했다. 그러나 단순히 서구의 전통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그것을 발판 삼아 자기 혁신을 이룩했다고 이 전시회의 큐레이터인 안데르스 콜트는 말했다. 그는“현대 중국 미술을 들여다보면 서양 미술이 보인다”고 덧붙였다. “세계화된 새로운 세상에서 서양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서양 미술이 어떤 관점에서 보나 소멸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다. 다른 관점이 얼마든지 있다. 그것이 세계화의 특징이다.” 중국 화가 웨이동의 한 작품(2001)에 나오는 여인은 미국 화가 존 커린이 그린 기괴한 이미지의 인물들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중국 혁명 포스터의 환각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공공연하게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데 앞장서왔다. 1974년 전시회는 그보다 1년 앞서 일어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에 반대한다는 표시로 칠레에 헌정됐다. 올 전시회(11월 21일까지)는 아제르바이잔·타지키스탄 등 신생 독립국들의 데뷔전 성격을 띤다. 또 아메리카 인디언 출신의 개념 미술가 에드가 힙 오프버스의 거대한 패널화 ‘가장 평화로운 사회’(Most Serene Republics)는 십자군 원정부터 1880년대 와일드 웨스트 쇼(백인 기병대의 아메리카 원주민 토벌 작전을 묘사한 쇼) 공연을 위해 유럽으로 간 아메리카 인디언까지 유럽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교류를 조명한다. 올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또 아프리카 특별 전시회도 열린다. 올 전시회의 큐레이터인 미국인 로버트 스토어는 이 지역이 “국제 전시회에서 너무 오랫동안 간과돼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올해 황금사자상 평생공로상은 말리의 사진작가인 말릭 시디베(72)가 받는다.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최초의 수상자다. 시디베는 말리의 수도인 바마코의 복잡한 거리에 있는 작은 스튜디오에서 그 도시의 활기 넘치는 젊은이들과 음악 문화를 기록해왔다. 그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말리의 젊은이들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방금 할례 의식을 치른 일단의 소년들이 시디베의 카메라를 진지하게 응시한다. 또 최신 음악을 즐기는 나팔바지 차림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아끼는 레코드나 오토바이와 함께 과장된 포즈를 보여준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시디베는 ’아프리카인들은 에이즈에 맞서 노래한다’(Africans Sing Against AIDS)는 제목의 프로젝트로 제작된 작품들을 전시한다. 전국 경연대회 출품을 위해 에이즈에 관한 노래를 작곡하고 공연하는 음악가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복잡하고 어수선한 현실을 피해 느긋하게 쉴 그늘을 제공하는 대규모 전시회도 있다. 런던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서 열리는 ‘호크니가 본 터너의 수채화’(Hockney on Turner Watercolours, 2008년 2월 3일까지)는 19세기 영국의 풍경화가인 조셉 터너가 템스 강부터 로마까지 다양한 지역의 풍경을 묘사한 뛰어난 작품 150점이 전시된다. 영국의 현대 미술가 데이비드 호크니가 전시회의 게스트 큐레이터로 참가해 ‘할렉 성(城)’ 등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들을 골랐다. 또 테이트 브리튼의 자매 미술관인 테이트 모던에서는 ‘달리와 영화’(9월 9일까지)가 열린다.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가 스페인 영화제작자인 루이스 부뉴엘과 함께 작업한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더구나 그가 월트 디즈니, 히치콕과도 공동작업을 했다니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싶을 때는 런던의 카운티 홀에서 열리는 ‘스타워즈: 전시회’에 가보면 좋을 듯하다. 영사기에서 비치는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의 풍경을 보며 스타워즈의 세계 속으로 푹 빠져들게 된다. 진정한 예술은 아닐지 몰라도 좀 더 단순하고 확실한 시간으로의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전시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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