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야 족쇄 풀리는 ‘평생 스토커’
| ▶워싱턴 일원에서 최근 나오는 부동산 매물 중 20~30%가 차압 주택이거나 숏 세일 매물이다. 사진은 싼값에 내놓은 워싱턴 메트로 지역 주택 전경. | |
서브프라임 ‘한파’의 진앙지인 미국에선 요즘 주택시장뿐 아니라 중산층과 저소득층 주민들의 마음까지 꽁꽁 얼어붙고 있다. 할부 금리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어 호주머니 사정이 날로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재할인율 인하로 증시는 다소 진정되기는 했지만 중산층 가정에서 느끼는 실물경제는 크게 나아진 게 없다. ‘할부로 시작해 할부로 끝난다’는 미국인들에게 주택경기 침체로 시작한 서브프라임 사태는 그야말로 할부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보는 기회가 됐다. 미국 수도인 워싱턴DC와 북버지니아, 수도권 메릴랜드를 일컫는 워싱턴 메트로 지역에서 주택 할부금융의 일종인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을 받은 집 주인들도 요즘 한창 울상이다. 연방정부 자금의 젖줄인 워싱턴 메트로 지역은 탄탄한 지역경제를 기반으로 최근 수년간 주택경기가 뜨겁게 달궈졌다. 버지니아주 페어팩스 카운티 레스턴 지역에 있는 방 3칸짜리 콘도의 경우 2001년 8만 달러에서 2005년 31만 달러까지 팔렸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주택시장이 냉각되면서 20만 달러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가장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은 30만 달러 안팎에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통해 이 콘도를 구입한 집 주인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주택시장에서 내 집 마련을 한 이들은 이후 금리는 치솟는 데 반해 집값이 급락하자 된서리를 맞았다. 상승곡선을 보이는 변동금리에 따라 불어나는 대출상환액을 매월 힘겹게 막다가 집이 차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증시에서 상투를 잡은 셈이다. 주택의 덩치가 클수록 집 주인의 부담은 눈덩이처럼 커진다. 대출액이 41만7000달러 이상일 때 적용되는 점보대출을 받은 집 주인이 대표적인 경우. 이들에게 적용되는 금리가 8월 초 6.875%에서 최근 8% 수준으로 뛰었다. 평균 50만~60만 달러를 융자받은 경우 2~3주 사이에 월 상환액 부담이 400~500달러나 높아진 것이다. 메릴랜드주 몽고메리 카운티에 거주하는 한인동포 김모씨도 미국 할부의 비애를 맛보고 있다. 지난해 2월 40만 달러를 주고 구입한, 한국의 연립주택에 해당하는 타운하우스의 월 상환액을 석 달 밀린 후 집을 차압당할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대출은행과 협의해 차압을 미룰 수 있었지만 주택시장에 집을 33만 달러에 내놓았지만 선뜻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요즘 같은 시장 분위기에서는 1만~2만 달러가 더 깎여야 할지도 몰라 김씨는 한숨만 내쉬고 있다. 워싱턴 일원의 부동산 업계에서는 최근 이 지역 주택시장에 나오는 매물 중 20~30%가 차압 주택이거나 김씨의 경우처럼 차압되기 직전 싼값에 내놓는 숏 세일 매물로 보고 있다. 대표적 할부 프로그램인 모기지 제도는 1934년 주택법의 발효로 미국에 처음 도입됐다. 하지만 모기지 제도는 초창기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다. 보수적인 미국인들이 빚지고 사는 걸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집값이 비싸지도 않았기에 대부분 미국인은 셋집에 살며 돈을 모아 일시불로 주택을 구입했다. 그래서 잘 알려지지도 않은 모기지 제도를 굳이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 ▶미국 대학 수업 모습. 그들의 할부인생은 20대 초반부터 시작된다. | |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 같은 주택구입 경향이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참전용사를 위한 GI(Government Issued·미국병사를 가리키는 속칭) 법안이 통과되면서 퇴역군인들에게 장학금과 주택구입 모기지가 지원됐다. 1940년대와 50년대에는 30년 상환 모기지가 대부분이었다. 주택 할부금을 모두 상환하는 시기와 은퇴 시기를 엇비슷하게 맞췄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해 대출금을 전액 상환한 집에서 노후를 보내거나 그 집을 팔고 휴양지나 은퇴촌으로 이주해 여생을 보내자는 개념이 30년 모기지 프로그램의 기조에 있었다. 하지만 산업화, 도시화가 가속화하며 한 집에 사는 기간이 점점 짧아지면서 모기지 상환기간도 30년에서 20년과 15년, 10년 등으로 단축되고 있다. 부동산 업계에서는 주택 소유주가 한 집에 평균 7년을 거주하는 것으로 본다. 최근에는 3년간 낮은 고정금리의 이자만 상환하다가 그 이후 변동금리에 맞춰 원금과 이자를 내는 등의 변형된 모기지가 각광을 받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도 이러한 모기지의 파생상품으로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할부제도가 인생 전반에 걸친 동반자나 마찬가지다. 인생에 있어 가장 규모가 큰 구매가 이뤄지는 주택매매 시 모기지를 이용하는 것을 비롯, 자동차 구입도 할부가 기본이다. 미국에서 자동차 판매점에서 일시불로 1만에서 3만 달러짜리 자동차를 구입하는 사람은 마피아거나 복권 당첨된 사람이란 농담이 있다. 물론 요즘엔 정보통신업계 전문가 등의 고액 연봉자와 돈 많은 이민자들도 일시불로 가는 경향이 있지만 평범한 미국인이라면 고가이든 저가이든 자동차도 3년 상환의 할부로 구입한다. 이러한 할부제도는 병원비 납부에도 해당된다. 싸구려 보험 가입자나 무보험자가 큰 수술을 받은 경우 병원비가 수만 달러에서 수십만 달러에 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환자는 병원 측과 협상을 통해 일부 보험료를 탕감 받은 뒤 나머지 금액을 몇 년에 걸쳐 할부로 납부하기도 한다. 대학 학비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는 부모가 자녀의 대학 학비를 대주는 게 상식처럼 됐다.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대학 학비는 자녀가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일부 자상한 부모가 첫 학기 학비만 대주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대학생이면 부모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고 보기 때문에 학비도 스스로 충당해야 한다. 이때 학생들이 할부금융의 일종인 학자금 융자를 받는다. 교육부 산하 교육통계센터(NCES)의 2006년 발표에 따르면 대졸자의 66.4%가 학비 대출을 받았으며 평균 대출액은 1만9202달러, 상위 25%의 대출액은 2만5000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993년 조사에서 학자금 융자를 받은 학생이 전체의 절반에 못 미쳤던 것에 비해 17% 이상 증가한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1인당 평균 학자금 대출 규모도 13년 전의 9250달러에 비해 두 배 이상 커졌다. 졸업생들의 부담이 크게 늘었음을 보여준다. NCES는 또 ‘학자금 대부를 후회하는 졸업생’의 비율이 1991년 31%에서 1997년 45%, 2002년에는 54%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학비 융자에 따른 졸업생들의 부담은 앞으로도 계속 커질 것으로 보인다. 2007~ 2008년 대학 평균 학비는 4% 이상 인상돼 소비자 물가 상승률 2.4%를 훨씬 상회했다. 미국 대학들은 지난 10년간 매년 5~7% 이상 학비를 올렸으며 앞으로도 학비 상승률이 낮아질 조짐은 없다. 결국 대학 졸업생들은 더욱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2006년 버지니아의 한 주립대를 졸업하고 유명 투자회사에 취직해 연봉 5만 달러를 받으면서 뉴욕 맨해튼에서 근무하고 있는 강모씨. 주변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그는 남에게 말하지 못하는 고민이 있다. “모두 내가 돈을 많이 번다고 생각하지만 세금 떼고 매달 학자금 융자 상환, 렌트비, 교통비 등을 제하면 실제 손에 쥐는 돈은 겨우 500달러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남들은 배부른 소리라고 핀잔을 줄 테니 어디 하소연할 수도 없습니다.” 주립대에 다녔지만 다른 주 학생으로 학비 혜택을 받지 못한 강씨는 학교를 졸업하면서 3만 달러가 넘는 학자금 빚을 안았다. 그는 현재 맨해튼 근처의 누추한 아파트를 빌려 월세 2200달러를 내고 있다. 여기에 교통비와 식비 등의 생활비를 더하면 아무리 돈을 아껴도 2500달러가 훌쩍 넘는다. 이런 그가 한 달 500달러에 달하는 학자금 고지서를 꼬박꼬박 갚아나가는 것은 상당한 무리다. 사립대를 졸업한 학생들은 강씨에 비해 학자금 융자 상환에 따른 부담이 더욱 크다. 아이비리그의 어느 대학을 나와 컨설팅 회사에 들어간 N씨는 매달 갚아야 할 학비가 1300달러가 넘는다. 비정부기구에서 경력을 쌓고 싶었던 그는 학자금 상환 부담 때문에 높은 연봉을 주는 컨설팅 회사를 선택했다. 전공을 바꾸느라 학교를 1년 더 다닌 그는 “이렇게 융자금 상환 부담이 클 줄 알았으면 최대한 학교를 일찍 졸업했을 것”이라며 미국 대학의 높은 학비에 혀를 내두른다.
할부 뒤에 숨은 고금리 리스업 |
저소득층 유혹하는 신종 마케팅 캘리포니아주에 사는 멕시코 출신 이민자 알베르토 곤잘레스는 일용직 건설 노동자다. 동료의 차를 빌려 함께 출근하는 그도 최근 들어 자가용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편의점에 콜라 한 병을 사러 가려 해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미국에서 차가 없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월 수입 1000달러 남짓에 신용도 없는 곤잘레스에게 자동차 구입은 언감생심 그림의 떡이었다. 그러던 중 자주 보는 스페인어 채널의 한 광고가 곤잘레스의 눈에 들어왔다. 광고에서 말쑥하게 차려입은 잘생긴 젊은이는 “신용 없이도 차를 살 수 있습니다”면서 번쩍거리는 차들을 보여준다. ‘신용 없이도’라는 말에 그는 ‘이번에 나도 차나 사볼까’하면서 광고에 나온 전화번호를 누른다. 1990년 후반 들어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빈곤층 마케팅’(Poverty Marketing)의 한 장면이다. 마케팅에 있어서 더 이상 미국 기업들에 빈곤층은 외면의 대상이 아니다. 낮은 이자율과 유동성 증가로 빈곤층의 신용 접근이 쉬워졌을 뿐 아니라 포화상태에 이른 중산층·부유층 대상 마케팅의 경쟁이 무한대로 치열해지면서 역발상을 받아들이는 기업들이 많아졌다. 빈곤층 마케팅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일부 기업은 1980년대에 이미 빈곤계층에서 틈새시장을 발견했다. 이들은 일개 빈곤 가정의 수입은 무시할 만큼 적지만 4000만이 넘는 전체 빈곤층의 수입을 합하면 수천억 달러 규모의 시장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빈곤층 마케팅이 일반 마케팅과 다른 점은 우선 신용 없이 물건을 판매하는 만큼 높은 이자율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교육 수준이 낮은 소비자를 겨냥한 현란한 과장·과대 광고와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판매기법이다. 이자율은 철저히 소비자의 신용 등급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신용이 없는 것에 가까운 빈곤층 마케팅 대상자들은 일반적인 이자율의 최소 2배가 넘는 고리를 각오해야 한다. 그 결과 많은 소비자는 비싼 이자의 할부금을 감당하지 못해 기한을 채우지 못하고 물건을 차압 당하기 일쑤다. ‘고리 리스업’이라 불려도 될 정도다. 빈곤층 마케팅의 광고는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기보다는 영어를 잘 못하는 이민자나 지식 수준이 낮은 노동자를 끌어들이기에 적합하게 과장된 문구나 시각 효과로 도배돼 있다. 판매기법으로는 가격을 미리 정해놓지 않고 소비자의 신용에 따라 결정하는 ‘기회 가격(opportunity pricing)’, 약관 설명 누락, 환불 요청이 있을 경우 최대한 시간을 끌어서 더 많은 할부금 받아내기 등이 사용된다. 이 외에도 기상천외한 판매 기법이 많다. 문제는 이 중 대부분이 불법이지만 적발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이다. 경제학자들은 빈곤층 마케팅이 빈부격차를 키우고 있다고 비판한다. 지난 수십 년간 빈곤층의 수입은 중산층이나 부유층에 비해 크게 늘어나지 않았으나 지출은 상대적으로 증가했다는 것. 빈곤층 마케팅이 이들에게 무리한 소비를 강요해 자산 축적을 요원하게 한다는 것이 비판의 골자다. 광고에 나온 멋진 중고차를 장만한 곤잘레스는 아메리칸 드림에 한 발짝 더 다가간 느낌이었다. 월 할부금은 250달러에 이자율은 25%. 할부를 붓기 전까지만 해도 곤잘레스는 조금씩만 아껴 쓰면 충분히 갚을 수 있는 금액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월급 1000달러에 불과한 곤잘레스에게 월 250달러는 큰 부담이었다. 그는 결국 석 달 만에 더 이상 할부금을 갚아 나가길 포기하고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며 마이카의 꿈을 다음으로 미뤘다. 750달러를 챙긴 판매상은 곤잘레스에게서 차압한 차를 다시 시장에 내놨다. 곤잘레스의 차는 새 빈곤층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박진걸 중앙일보 워싱턴지사 기자·iptbak@koreadaily.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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