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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살롱·카지노 와인에 취하다

룸살롱·카지노 와인에 취하다

국내 와인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와인 소비 트렌드도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 과거 레스토랑이나 와인바가 고급 와인시장의 주류였다면 최근엔 룸살롱·골프장·카지노·치과로 옮겨가고 있다.
지난 8월 31일 저녁 10시. 서울 신사동 씨네시티 극장 건너편에 위치한 ‘시카고’. 입구엔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으로는 출입이 안 된다’는 경고문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높은 천장으로 탁 트인 공간엔 와인빛이 감도는 소파와 앤틱 테이블, 그리스 신전 기둥을 연상시키는 벽화가 눈길을 끌었다. 라이브 공연이 한창인 홀 안엔 세련된 드레스를 차려입은 미모의 여인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 사장’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손님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4개의 룸을 포함해 12개 테이블엔 빈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성황이었다. 남성 손님이 대부분으로 화이트칼라 복장의 외국인들도 더러 있었다. 시카고의 정체는 손님들이 주고 받는 술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이곳에선 위스키나 맥주가 아닌 와인이 ‘주 종목’이다. 시카고의 전체 매출에서 와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이 넘는다. 그래서 연예인 못지않은 미모의 ‘여 사장’들은 고급 클럽의 ‘마담’ 역할부터, 와인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소믈리에’ 역할까지 멀티 플레이어를 자청한다. 영어와 일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해외파도 여럿 있다. 시카고의 주 고객층은 금융권 CEO들부터 로펌 변호사들, 재계 오너, 연예인 등. 금융권에선 특히 골드먼삭스나 리먼브러더스 등 글로벌 본사 CEO들이 한국을 찾을 때 반드시 ‘모시고’ 가는 코스로 손꼽힌다. 이곳 와인값은 일반 레스토랑의 두 배가 넘지만 10만원 이상의 고급 와인들만 판매된다. 한 병에 100만원이 넘는 ‘샤토 마고’나 ‘샤토 무통로쉴드’ 같은 프랑스 특급 와인들도 잘 팔린다. 국내 한 와인 수입업체 관계자는 “최근 시카고와 같은 강남의 일부 고급 사교클럽은 와인 수입업체들이 호텔 레스토랑 못지않게 집중 관리하는 곳”이라며 “고급 와인의 매출 비중이 높고 CEO나 연예인을 상대로 해당 브랜드를 알릴 수 있어 매력적”이라고 설명했다. 시카고의 김봉원 사장은 “와인 애호가뿐 아니라 시끌시끌한 룸살롱 문화가 맞지 않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며 “폭탄주를 즐기는 CEO 중 여기에서 와인을 접한 후 와인에 빠진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김 사장은 여세를 몰아 9월 중순엔 여성들도 편하게 찾을 수 있는 ‘시카고2’를 선보일 예정이다. 최근 강남의 고급 카페와 룸살롱들이 와인 업계의 ‘큰손’으로 떠오르고 있다. CEO와 임원 등 접대가 많은 간부들 사이에서 와인이 인기를 끌면서 위스키보다는 와인을 찾는 사례가 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위스키가 절대적으로 많이 팔리던 강남 고급 룸살롱들은 이미 경쟁적으로 와인과 샴페인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청담동과 압구정동 인근에선 시카고를 벤치마킹하는 ‘와인 살롱’들도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다. 두산주류BG 와인사업부에선 올 초 이미 룸살롱에서 일어나는 와인 매출에 대한 보고서까지 작성한 상황이다. 강남지역을 맡고 있는 한 주류도매상은 “룸살롱의 경우 레드 와인보다는 고가의 샴페인이 잘 나가는 편”이라며 “지난해만 하더라도 한 달에 1~2병 정도 주문하던 업소들이 지금은 하루에만 1~2병씩 주문한다”고 귀띔했다. 룸살롱과 더불어 가라오케나 젊은 층이 많이 찾는 ‘클럽’에서도 와인의 인기가 높다. 신사동에 위치한 가라오케 T업소의 경우 한 달에 돔페리뇽만 40병 이상씩 팔려 와인 수입상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이곳에선 히딩크 감독이 즐겨 마셨다는 프랑스 보르도산 ‘샤토 탈보’나, 칠레 고급 와인의 대명사 ‘알마비바’도 잘 나가고 있다. 국내 한 대기업 전무는 “외국인 바이어를 접대하거나 조용한 분위기가 필요할 때는 ‘와인 살롱’을 즐겨 찾는 편”이라며 “3~4명이 가서 적당하게 마시면 50만원 안팎이 나오기 때문에 룸살롱이나 카페보다 오히려 싼 편”이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국내 와인 수입업체들의 최고 ‘격전지’는 국내 대형 할인점과 백화점들이었다. 하지만 국내 와인시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전쟁터’가 바뀌고 있다. 국내 한 와인업계 관계자는 “국내 와인 수입업체 대부분 올 상반기에 지난해 매출 이상을 올린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하지만 경쟁이 과열되면서 마진이 낮아져, 신규 시장이나 고급 와인 수요처를 물색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강원랜드에서 이름을 바꾼 ‘하이원’이 대표적인 신규 와인 소비시장으로 주목 받는다. 지난해 초 강원랜드에 부임한 조기송 사장은 카지노가 아닌 ‘종합리조트’로 변신을 선포하며 식음료 매장의 주류 리스트부터 손을 댔다. 위스키와 코냑 등 독주 일색이던 주류 리스트에 와인을 강화하고, 와인 프로모션을 매월 진행할 것을 지시하며 이미지 쇄신에 나선 것. 매출도 덩달아 뛰었다. 지난해 6월 한 달에 200만원 남짓 하던 와인 매출이 순식간에 6000만원으로 오른 것. 지난 5월엔 세계 최고의 와인컨설턴트로 불리는 미셸 롤랑까지 초대해 와인 메이커스 디너까지 개최하며 국내 와인시장에 확실하게 입지를 굳혔다.


강원랜드서 샤토 페트뤼스 60% 팔려 그러자 강원랜드에선 지난해 6월에서 올 6월 사이 올린 전체 와인 매출이 2005년 6월에서 지난해 6월까지 올린 매출에 비해 60% 이상 수직 상승했다. 메인 카지노가 들어선 강원랜드 호텔은 국내에서 100만원 이상의 프랑스 특급 와인들이 가장 많이 팔리는 곳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잭팟’을 터뜨리거나 강원랜드에서 지급받은 ‘포인트’로 최고급 와인을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으로 손꼽히며 한 병에 300만원이 넘는 프랑스 보르도의 명품 ‘샤토 페트뤼스’가 한 달에 많게는 30병까지 팔린다. 이는 국내에 수입되는 샤토 페트뤼스 전체 수량의 60%를 차지할 정도다. 조기송 사장은 “앞으로 와인 사업을 지속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라며 “폐광에 와인 셀러를 구축해 와인 애호가들을 위한 관광 명소로 활용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고급 룸살롱이나 카지노 못지않게 와인 영업사원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은 골프장 내 클럽하우스다. 골프장 클럽하우스는 위스키를 마시던 고객들이 고급 와인으로 돌아서면서 수요가 폭증하고 있는 것이다. 골프장은 특히 CEO들이나 정치가들이 즐겨 찾는 장소로 자연스럽게 ‘명사’들을 통한 입소문을 유도할 수 있다. 그래서 와인업계에선 ‘고급 와인을 띄우려면 골프장 클럽하우스를 공략하라’는 말이 돌고 있다. 일례로 얼마 전 시내 유명 클럽하우스에서 와인 입찰을 실시하자 수십 곳의 와인 수입업체 영업담당 임원들이 몰려 들었다. 안양베네스트의 서홍진 식음료 팀장은 “몇 년 전과 비교하면 와인 수요가 엄청나게 늘었다”며 “운동을 한 후 뒤풀이에서도 과거처럼 폭탄주를 돌리고 취하기보다는 와인을 놓고 ‘와인 펀드’나 ‘와인 컬렉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과거엔 와인에 대한 취향이 천편일률적이었다면 최근엔 뉴질랜드 소비뇽 블랑과 같은 화이트 와인도 잘 나간다”며 “고급 와인보다는 가격 대비 품질이 좋은 와인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고 덧붙였다. 와인이 인기를 끌면서 전혀 ‘엉뚱한’ 곳에서도 와인 수요가 생겨나고 있다. 서울 삼성동에 위치한 예치과 건물 13층. 수려한 스카이 라인을 자랑하는 이곳은 낮엔 고객들이 치료를 받기 전에 커피나 차를 마시며 대기하는 장소다. 하지만 밤이 되면 한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급 와인 레스토랑으로 탈바꿈한다. 지난 8월 문을 연 이곳은 현재 예치과 의사들과 VIP 고객들이 참여하는 클럽제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프랑스 소펙사가 주최한 소믈리에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전현모 지배인부터 호텔 출신의 주방장을 차례로 영입하며 이미 와인 애호가 사이에선 고급 와인바로 입소문이 퍼진 상태. 박인출 예치과 대표원장은 ‘치과 전용 와인바’를 전국으로 확대할 방안으로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로 출장까지 떠났다. 예치과 관계자는 “예치과가 들어선 곳들이 대부분 입지가 좋아 와인바들도 인기를 끌 것”이라며 “와인을 통해 예치과 이미지까지 끌어올릴 수 있어 일거양득인 셈”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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