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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회장은 몽구를 끔찍이 사랑했다”

“왕회장은 몽구를 끔찍이 사랑했다”

■왕자의 난은 아버지 마음 몰라 일어난 비극 ■정주영, 몽헌 회장에 “현대상선 형에게 줘라” ■왕회장과 매일 ‘용의 눈물’ 녹화 비디오 봐 ■왕회장 “지키는 건 몽헌이가 잘할 것 같아” ■몽준 고문, “왜 아버지 방에 혼자 들어가느냐” 호통 ■왕회장 “몽준 대신 자네가(감옥에) 좀 들어가게” ■나는 대북 송금 퀵서비스 역할만 했을 뿐 ■변중석 여사, “현정은이 나를 가장 많이 닮아”
‘이익치’가 입을 열었다. 그가 누구인가. 1969년 현대그룹 말단사원으로 입사해 현대증권 회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최측근 가신(家臣)으로서의 ‘명예’와 현대그룹 몰락의 중심에 있었다는 ‘불명예’를 함께 짊어지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진짜 현대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며 “지난 31년간 현대가를 지키면서 보고 들은 현대가의 비밀을 이제는 말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왕자의 난이 일어난 숨은 배경과 옆에서 지켜 본 현대가 사람들,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의 내막 등 현대그룹을 떠난 후 7년 만에 입을 연 그의 격정 토로를 이코노미스트가 담았다. 그의 토로는 이틀에 걸쳐 8시간 동안 이뤄졌다. 이 전 회장의 얘기는 실제와 다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자신에 대한 변명이나 방어를 위한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의 얘기를 상세히 싣는 것은 이 또한 우리 기업사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진위는 시간에 의해, 사람들에 의해, 법에 의해 밝혀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인터뷰 약속 장소였던 호텔 로비에 나타난 이익치(63) 전 현대증권 회장을 본 첫 느낌이었다. 그는 노란 서류 봉투를 한쪽 옆구리에 낀 채 기자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거리에 가다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노신사의 모습이었다. 한때 ‘컴도저’(컴퓨터 두뇌에 불도저식 추진력을 갖췄다는 의미)로 불리며 재계 1위를 달리던 현대그룹의 흥망성쇠에 관여하고 현대가 ‘왕자의 난’의 중심에 있었던 그였다. 69년 현대건설 말단 사원으로 입사한 그는 3년간 정주영 회장 비서로 청운동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현대중공업 전무, 현대증권 사장과 회장을 거치며 최고 전문경영인 자리에까지 오르며 샐러리맨의 꿈을 이룬 사람이었다. 특히 정주영 회장이 작고하기 1년 전인 2000년엔 매일 오전 2시간씩 정 회장과 독대를 하는 ‘특권’을 누리기도 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현대가 분쟁을 조종했다는 의혹을 사기도 했던 그다. “할 말이 너무 많습니다. 아예 오후 시간은 비워뒀으니 천천히 합시다.” 호텔 비즈니스 룸으로 자리를 옮겨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인터뷰는 점심식사도 거른 채 4시간 넘게 진행됐다. 다음날 오전에도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그는 목이 타는 듯 간간이 앞에 놓인 물잔의 물을 마시는 것 외에는 기자가 질문할 새도 없이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마치 지난 7년간의 침묵을 보상받으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참…. 현대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왕자의 난이 왜 일어난 겁니까. 그게 다 아들들이 아버지 마음을 제대로 몰라 일어난 비극이었어요.” 그는 2000년 3월 자신의 인사 사건으로 말문을 열었다. 이 인사는 당시 현대증권 회장으로 있던 그를 고려산업개발 회장으로 발령을 낸다는 내용으로 현대그룹 구조조정본부가 아닌 현대자동차가 발표해 분쟁을 일으켰었다. 당시 현대그룹 인사는 모두 구조조정본부에서 발표했다. 그런데 계열사 중의 하나에 불과했던 현대자동차에서 인사 발표를 했으니 억측이 난무할 수밖에 없었다. 정몽구 회장과 함께 그룹 공동회장이던 정몽헌 회장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 유럽 순방 길에 재계 대표로 동행해 공석인 상태였다. 당시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이 인사 발표를 거부하자 현대자동차가 이 인사를 통신사인 연합뉴스 측에 흘려 공개했으며, 이를 안 몽헌 회장 측은 “이 인사는 무효”라고 맞서 현대그룹 내부 갈등이 표면화했다. 이익치 회장에 대한 이 인사가 곧 왕자의 난을 촉발한 계기가 됐다. “그때가 제가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으로 3개월을 살고 나온 후였어요. 제가 출소한 직후 금융감독원에서는 저에게 대표이사 업무정지 명령을 내리더라고요. 현대와 저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라 생각하고 사표를 들고 정주영 명예회장님을 찾아 뵀죠. 근데 회장님이 저보고 갑자기 ‘내일부터 계동으로 출근해’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예 회장실 옆에 방을 마련해 놓고 매일 오전 불려 들어갔죠. 그러니 주변에서 저를 보는 눈이 어떻겠습니까. 명예회장 옆에 있으면서 뭔가 딴 궁리를 하지 않겠느냐는 의심을 받은 거죠. 이익치를 현대자동차 산하에 있는 고려산업개발로 보내면 더 이상 명예회장이나 몽헌 회장의 직접 지시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거 아니겠습니까?”


'왕자의 난'의 발아 그의 인사 발표가 나기 3개월 전인 99년 12월 31일에도 현대그룹은 인사파동을 겪었다.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이었던 박세용 회장이 연말 정기인사에서 갑자기 현대자동차 회장으로 발령이 난 것. 이 인사로 현대자동차는 벌집을 쑤신 듯했다. 현대자동차는 그룹 공동회장인 몽구 회장 몫의 회사였는데 갑자기 정주영 명예회장 사람이면서 몽헌 회장 쪽 사람으로 분류됐던 박세용 회장을 보낸 것에 대해 몽헌 회장과 명예회장이 현대자동차를 접수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 박세용 회장은 몽구 회장의 지시로 다시 인천제철 INI스틸 회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 전 회장은 박세용 회장 인사 얘기를 꺼내며 목소리 톤을 높였다. “아니 생각해보세요. 바로 이 시점부터 틀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박세용 회장을 현대자동차 회장으로 보낸 건 다 몽구 회장을 위하는 명예회장의 마음이 반영된 거예요. 아니 그걸 왜 몰라줍니까. 명예회장은 자동차에 대한 애정이 깊으셨어요. 그래서 본인이 몽구 회장을 가르치며 자동차 산업을 맡으시려고 했는데 실무진이 필요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몽헌 회장에게 자동차 산업을 잘 이끌 만한 똑똑한 사람을 추천하라 해서 몽헌 회장이 박 회장을 추천한 겁니다. 원래 박 회장은 정주영 회장 사람이었고, 그룹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한 사람이니 누구보다 두 분을 잘 보필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걸 무슨 섭정으로 받아들이고…. 내 참…. 박 회장은 몽구 회장을 잘 보필하고 몽구 회장은 아버지를 잘 보필하며 지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다 자연스럽게 몽구 회장이 자동차를 맡게 되는 것 아닙니까. 몽헌 회장은 자동차에 대한 욕심은 애당초 없었어요.”

-생전 명예회장은 몽구 회장보다는 몽헌 회장을 더 인정해 그룹 후계자도 몽헌 회장으로 지정하신 것 아닙니까?
“에이, 아니에요. 명예회장님은 장자인 몽구 회장에 대한 사랑이 끔찍하셨어요. 명예회장이 자동차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각별합니까. 제가 비서실에 있을 땐데 현대자동차가 처음 미국 포드사와 계약할 때 명예회장님은 회의실에 일부러 에어컨도 안 틀고 문을 닫은 채 몇 시간째 엔진 기술을 내놓으라고 설득했어요. 결국 포드가 엔진 기술을 안 줘 현대가 독자 엔진을 개발해 만든 게 포니 아닙니까. 그리고 엑셀이 나왔고요. 처음에 현대가 자동차를 한다고 했을 때 정부가 나서서 말렸어요. 그 시련을 겪고 일군 사업인데…. 본인이 죽는 날까지 한다고 하신 사업이에요. 자기가 좋아하는 거 장자한테 가르치며 주겠다는 게 뭐가 문제입니까. 몽구 회장이 지레 겁을 먹었던 거죠.” 이 전 회장이 기억하는 장면 중에 정주영 회장이 몽구 회장을 얼마나 생각하는지를 입증하는 장면은 더 있다. 99년 초 정주영 명예회장이 현대자동차를 셋째 동생 정세영 회장에게서 몽구 회장 쪽으로 넘겨주기 직전 이 전 회장은 정씨 일가의 대화 자리에 같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 정주영 명예회장 방에는 정세영 회장, 몽구, 몽헌 회장과 이익치 전 회장이 같이 있었다. “정세영 회장이 명예회장에게 대놓고 몽구 회장은 세심하지 못해 자동차가 안 맞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랬더니 정주영 회장이 버럭 화를 내며 ‘무슨 소리야. 내가 데리고 하면 돼. 20년이고 30년이고 내가 데리고 할거야’라고 하시더군요. 아니 본인이나 아들 욕하지, 남이 아들 욕하면 듣기 좋습니까. 장자를 가장 사랑하니까 장자한테 준 겁니다. 그때도 일부에선 저를 모함했어요. ‘이익치가 정몽구한테 왔다갔다하더니 왕회장에게 가서 몽구한테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다고요. 그런 말 들을 때마다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었죠.”

-자동차를 왜 몽구 회장에게 줘야 한다고 생각하셨을까요.
“몽구 회장은 현대자동차서비스 서울사무소 이사로 시작한 분입니다. 자동차 수리부터 시작한 분이에요. 현대자동차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셨겠죠. 그래서 정주영 회장이 야단친 겁니다. 충분히 능력 있는 아들을 동생이 알아보지 못해 역정이 나셨던 거죠. 현대자동차는 도요타와 계속 경쟁해야 한다, 그래서 몽구 데리고 하겠다. 그런데 실무진으로 똑똑한 사람이 붙어야 하니까 박세용 회장을 붙여준 겁니다.”

-그럼 그냥 몽구 회장에게 주면 되지, 굳이 정주영 회장이 같이 데리고 하겠다는 뜻은 뭡니까.
“이보세요. 정주영 회장님은 말입니다, 거짓말 안 보태고 당신이 20~30년은 너끈히 사실 것으로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명예회장님 앞에서 ‘백수 누리세요’하는 사람은 바로 다음날 사표 써야 합니다. 본인이 150살까지 사실 생각을 가진 분인데 백수 누리라는 말은 일찍 죽으라는 말이잖아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오래 사시라고 수백 년 묵은 산삼을 선물로 주시면 그렇게 좋아하셨어요. 그 덕분에 동행한 저와 김윤규 전 현대아산 회장은 30년 묵은 산삼을 먹어 본 적도 있죠.(웃음) 150살까지 사실 양반이 20~30년 더 일 못하시겠습니까. 그러니 몽구 데리고 당신이 직접 하시겠다고 한 겁니다.”

-그래도 후계자는 몽헌 회장 아니었습니까.
“그래도 정 회장 마음은 장자가 우선이었던 것 같아요. 몽구 회장은 항상 50%는 접고 들어갔습니다. 몽헌 회장보다 몽구 회장 생각을 더 했다는 증거가 뭔지 알아요? 하루는 몽헌 회장이 굉장히 화가 나서 저와 몇몇 측근을 사무실로 부르더라고요. 다신 형을 보지 않겠다고 해서 깜짝 놀랐죠. 이야기를 들어 보니 화가 날 만도 했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몽헌 회장을 불러 현대상선을 형한테 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나 봐요. 당시 몽헌 회장은 중공업·현대건설을 다 가지고 있었는데 몽구 회장은 현대모비스·현대자동차서비스·현대강관 등만 가지고 있었으니 아버지 마음으론 더 주고 싶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상선이 어떤 회사입니까? 몽헌 회장이 배 2~3척 가지고 시작해 키운 회사 아닙니까. 다른 건 몰라도 상선만은 100% 주인이 몽헌 회장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그 회사를 형한테 양보하라고 했으니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아버지 앞에선 말도 못하고 나와 형한테 간 거죠. ‘형이 아버지를 좀 설득해 달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몽구 회장이 ‘나는 모르겠다’고 한 모양이에요. 그 이후부터 그렇게 친하던 두 형제 간 사이가 급격하게 벌어지더라고요.”

-현대상선은 지금 현대그룹 소속 아닙니까. 결국 몽구 회장 쪽으로 가지 않았는데요.
“형이 모르겠다고 하니까 몽헌 회장이 결국 직접 아버지에게 말한 겁니다. 제가 어렵게 처음부터 키운 회사니 그것만은 안 된다고요. 그랬더니 정주영 회장이 그랬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엄청 심플하시죠.”

-말씀을 들을수록 의문이 가네요. 결국 정주영 회장은 누가 더 좋고 싫고를 떠나 처음엔 둘을 똑같이 생각하셨다는 겁니까.
“맞아요. 명예회장님은 생각하는 게 복잡하지 않으세요. 그냥 ‘스트레이트’(그의 표현)합니다. 정부에서 현대그룹을 둘로 쪼개라니까 자동차와 현대그룹으로 나눴을 것 아닙니까. 아마 이렇게 둘로 나눈 건 당시 박세용 그룹구조조정본부장 아이디어였을 겁니다. 그러니까 원래 자동차 쪽과 연관된 현대모비스, 현대정공 등을 맡던 몽구 회장에겐 자동차를 주고, 다른 쪽 덩어리인 현대그룹은 몽헌 회장에게 준 겁니다. 다른 생각 없으셨어요. 정주영 회장이 자동차 하신다고 할 때 이미 중공업 주식을 몽헌 회장에게 주고 자동차 주식 샀잖아요. 나중에 몽구 회장 가르치다 정주영 회장이 가지고 있던 자동차 주식 고스란히 몽구 회장에게 가는 것 아닙니까. 제가 오래 모셔봐서 압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신 게 맞아요.”

-근데 정주영 회장이 2000년 4월 17일 갑자기 유언장 작성을 하셨잖아요. 본인 재산과 현대그룹 모든 상속을 다 몽헌 회장에게 승계하시겠다고요.
“화가 나셔서 그런 거예요. 그렇게 서둘러 유언장을 작성할 필요도 없었어요. 박세용 회장 인사로 몽구 회장이 반발을 했잖아요. 아버지 뜻을 모르고 그 난리를 쳤으니 뭐가 예쁘겠습니까. 주고 싶어도 있던 것 뺏고 싶은 마음이었겠죠. 아마 그래서 유언장이니, 그룹회장 발표도 서둘러 하셨을 겁니다. 그 전에는 그런 마음이 아니셨을 거예요.”

-정주영 회장 부인인 변중석 여사는 특히 몽헌 회장과 며느리 현정은 회장을 예뻐하셨다고 들었는데…. 변 여사가 후계자 선정에 영향을 미친 건 없을까요.
“워낙 말씀이 없으시니까…. 근데 후계자에 대해 딱 한마디 하시는 것을 들었어요. 제가 80년대 초 청운동 집을 무슨 일로 거의 매일 드나들다시피 했는데 그때 변 여사가 그러시더라고요. ‘회장님이 기업은 내가 다 키워 놓고 아들들은 지키기만 하면 되는데…. 지키는 건 몽헌이가 잘할 것 같아’라고 하셨다고요. 이미 20여 년 전부터 심정적으로는 몽헌 회장에 대한 믿음은 있으셨던 것 같아요. 몽헌 회장이 조용하고 워낙 침착하잖아요. 그게 뭐 더 좋아하고 아니고가 아니라 성격적인 면에서 후계자 감으로 점 찍어 놓으셨던 거죠. 변 여사도 몽헌 회장을 무척 좋아하셨어요. ‘참 착한 아들이라고…’. 아들이 예쁘면 며느리도 예쁘다고 현정은 회장도 끔찍하게 아끼셨죠. 저보고도 그랬는걸요. ‘현정은 회장은 당신을 가장 많이 닮은 며느리라고’. 원래 말이 없으시고 조용하시잖아요. 하여간 현대 어른들은 나서고 말 많은 걸 제일 싫어했으니까요.” 정주영 명예회장은 아들이든 부하 직원이든 앞에서 말대꾸하는 것을 못 참았다고 한다. 하지만 2000년 5월 31일 정 명예회장이 3부자 퇴진을 발표하던 날 그의 방에 찾아와 ‘감히’ 대든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이진호 경호실장이 봤답니다. 누구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정주영 회장은 그 모습을 보고 ‘어디 앞에 와서 소리를 지르냐’며 역정을 내셨대요. 그리고 나서 몸이 급격히 쇠약해지신 것 같아요.”

-그룹 안에서는 이 회장이 현대그룹 인사권에 영향을 미친다는 소문도 있지 않았습니까?
“(발끈 화를 내며) 도대체 누가 그런 얘기를 합니까. 그럼 제가 아침마다 명예회장 방에 들어가 “회장님은 자동차를 가지시고 아들들은 이렇게 저렇게 나눠주세요”라고 말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그건 명예회장님에 대한 모욕입니다. 조금이라도 회장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못하죠. 앞서 말했다시피 명예회장 앞에선 물어보기 전에 일언반구 대꾸를 할 수가 없어요. 아주 얼어버립니다, 얼어. 저도 매일 아침마다 그 방을 들어가고 싶었겠어요? 부르니까 들어간 거예요. 아들들도 아버지 앞에 말 한마디 못하는데 아들도 아닌 제가 어디 감히 조언을 해요.”

'왕회장'과 독대에서 나눈 말들

-매일 2시간씩 방에 들어가 무슨 얘기를 하셨어요.
“제가 정씨 일가를 대신해 현대전자 주가 조작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그 이후부터 명예회장님이 저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셨어요. 제가 옥살이를 마치고 집행유예로 나오자마자 저를 부르신 겁니다. 들어가서 한 일은 별로 없었어요. 당시 인기 사극이었던 ‘용의 눈물’ 녹화 비디오를 2시간씩 보고 그 비디오가 끝나면 ‘밥 먹지’ 딱 그 한마디였어요. ‘용의 눈물’은 당시 현대그룹 이야기와 너무 비슷한 내용 아닙니까. 조선시대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 휘하에서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고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 내용이잖아요. 한동안 그 프로를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뚫어지게 보시더라고요. 연일 뉴스에선 현대가의 싸움이 보도되고 심정이 복잡하셨을 겁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정주영 회장을 아들보다 더 가까이 더 자주 접한 사람’이었던 거다. 그는 자신과 명예회장의 독대를 가장 불안해 했던 건 아들들이었다고 말했다. “제가 그 방에서 나오면 항상 몽구 회장과 현대중공업 몽준 고문이 차례로 저를 불렀습니다.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얘기해 보라는 거였죠. 저는 항상 별 말 없으셨습니다라고 말하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몽준 고문은 정도가 좀 강했어요. 어느 날은 저를 부르더니 호통을 치며 ‘왜 그 방에 혼자 들어가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저보고 ‘이제 혼자 들어가지 말고 박세용 회장과 같이 들어가라’고 하는 겁니다. 박세용 회장은 몽헌 회장 쪽 사람이었습니다. 몽헌 회장의 박세용 회장에 대한 신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죠. 그런데 몽준 고문이 박세용을 지목했던 겁니다. 둘 사이에 정보 교류가 있지 않고는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뭐라고 답하셨어요.
“내가 좋아서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그랬죠. 명예회장이 박세용 회장을 불러야 같이 들어가지, 내가 어떻게 데리고 들어가느냐고 반박했어요. 몽준 고문이 저에게 반말로 ‘혹시 당신이 우리 아버지에게 가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것 아닌가’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기에 저 역시 소리를 버럭 질렀어요. 내가 누구 때문에 감옥에 들어갔다 왔는데 나한테 그런 소릴 하면 안 되지 하고 말입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설사 명예회장님이 아들 얘기를 무의식적으로라도 툭 던지셔도 저는 절대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제가 왜 얘기를 합니까. 그건 아들 간에 이간질시키는 것 아닙니까.” 그는 몽준 고문을 대신해 감옥에 들어갔다는 말을 인터뷰 내내 수 차례 반복했다.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은 98년 이씨가 회장이던 현대증권이 현대중공업과 현대상선 자금 2134억원을 동원해 현대전자 주식을 집중 매입, 현대전자 주가를 끌어올린 사건이었다. 여기에 대해 그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사실 그 사건에 책임 있는 사람은 몽준 고문과 박세용 종합기획실장입니다. (종합기획실은 이후 그룹구조조정본부로 이름이 바뀐다) 몽준 고문은 현대중공업 대주주로 있으면서 보유하고 있던 현대전자 주식을 팔아 헐값에 중공업 주식을 산 거 아닙니까. 우리나라에 내부자 거래만큼 나쁜 죄질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당시 현대증권 사장으로 있으면서 수익증권 판매로 정신이 없었어요. 아시지 않아요. 현대증권이 최초로 국내에 채권형 수익증권이라는 금융 상품을 들고 나와 외환위기로 부도 직전인 기업들의 숨통을 터주지 않았습니까. 97년 말 1조원이던 수탁고는 99년 29조원에 이르는 경이를 기록했어요. 한국 최고의 수익증권 판매고 자리를 한국과 대한투신이 아닌 현대증권이 차지한 겁니다.”


바이코리아 펀드의 탄생 99년 현대증권이 발매한 주식형 수익증권인 바이코리아펀드도 6개월 만에 11조원이 넘는 돈이 몰려 화제를 뿌렸다. 수수료 수익만 3000억~4000억원. 업계 하위였던 현대증권은 1, 2위를 다투는 증권사로 성장했던 것. 업계에선 ‘이익치를 배우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였다. 업계에서는 건설 출신인 그가 여의도에서도 건설처럼 금융을 한다는 말이 파다했다. “그때 참 잘나갔었죠.(잠시 회상에 잠긴 듯 그는 먼 산을 쳐다봤다) 그때가 우리가 가장 힘든 외환위기 때 아니었습니까. 고금리에 길들여진 한국 사람들이 5%의 저금리에 절대 만족하지 못할 것으로 믿었죠. 따라서 저금리를 뛰어넘을 주식 투자에 돈이 몰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고객들은 당장 확인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심리를 이용했죠. 1억 들고 온 고객한테 바로 다음날 전화를 걸어 찾아가라고 합니다. ‘고객님, 어제 넣어두신 1억이 오늘 1억1000만원이 됐습니다. 해약하러 오세요’. 그 다음은 해약을 하든, 다시 펀드에 가입하든 고객 마음입니다. 그런데 백이면 백 다음날 5억 싸들고 와요. 생각해 보세요. 1억 넣어두고 다음날 1억1000만원 생기면 누가 신이 안 납니까? 그런데 바로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태가 터진 겁니다.” 그는 스스로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에 연루되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98년 벌어진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은 현대증권 주도로 현대중공업과 현대상선이 현대전자 주식을 집중 매수하도록 해 현대전자 주가가 급등하도록 조작했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그 결과 현대전자 주가는 최저 1만4800원에서 최고 3만2000원까지 116% 상승했다. 그러자 정주영 회장과 아들들, 그리고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현대전자 주식 3000만 주 정도를 팔아 수천 억원의 시세 차익을 남겨 빈축을 샀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구속된 건 정씨 일가가 아닌 바로 그였다는 것. “오랫동안 현대에 몸담으면서 배운 경험인데 말입니다. 기업이든 사람이든 가장 잘나갈 때를 경계해야 한다는 겁니다. 현대건설도 중동 특수가 절정에 달했던 78년 더 큰 수주를 따내기 위해 애쓰다 돈 거래 음모에 휘말려 몇 명의 임원이 현지 감옥에서 옥살이를 했거든요.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 때도 제가 현대에서 가장 승승장구할 때였습니다. 당시 구조조정 때라 현대전자 주식을 팔아야 하는데 외환위기 때 누가 삽니까. 그래서 종합기획실이 주도를 해 돈 많은 현대중공업 등 계열사들에 주식을 좀 사 달라고 얘기한 거겠죠. 그런데 중공업은 사기만 하고 팔지를 않았어요. 무려 2000억원을 들여 사들였죠. 그 와중에 정씨 일가가 개인적으로 주식을 팔아 시세 차익을 남겼던 겁니다. 저는 진짜 그런 사실은 몰랐어요. 단 중공업이 주식을 사들인다는 말은 들었죠.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아무도 안 사는데 사주면 좋은 거 아니냐’고요.”

-현대증권 회장으로 계시면서 자동차나 상선 등 다른 계열사 주식 거래는 관여 안 하셨다는 거죠.
“(손사래를 치며) 아이고 말도 안 돼요. 말도 안 돼. 그룹 내에서 주식 거래는 종합기획실에서만 합니다. 그래서 현대전자 주가 조작도 종합기획실 아이디어였잖아요. 검찰은 몽준 고문을 압박해 들어간 것 같았어요. 어느날 새벽 명예회장님이 저를 불러 들어갔더니 ‘몽준이는 좀 어떻게 살려야 하지 않겠나. 몽준이를 대신해 자네가 좀 들어가 달라’고 부탁하시는 겁니다. 명예회장이 그렇게 부탁을 하시는데 거절을 할 수 없었어요. 그때 이미 마음속으론 저와 현대의 인연은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검찰에 간 거고 제가 한 거라고 말해 버린 겁니다. 정몽준 고문 보고 들어간 게 아니라 명예회장 보고 들어갔던 겁니다. 나중에 몽헌 회장한테 전해 들은 얘기로는 누가 정주영 회장한테 찾아가 ‘이익치가 들어가면 사태를 빨리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더군요.” 정주영 회장의 부탁으로 감옥까지 갔다 왔다고 주장하는 이익치 전 회장. 그의 말이 전적으로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현대전자 주가 조작 사건과 관련해 정몽준 고문에 대한 적개심의 발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몽준을 대신해 들어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현대에 발을 들여놓은 건 69년 10월이었다. 그는 경기고에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인재였다. 현대건설 외국공사부에 발령을 받고 한 달이 지나 정주영 회장의 긴급 소집에 불려 나갔다. “대리급과 신입사원을 소집해 2시간 동안 정 회장과 자유 면담 시간을 가졌어요. 훗날 안 일이지만 이때가 개인 비서를 고르기 위한 인터뷰였더라고요. 그 모임이 있고, 바로 회장 비서실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당장 내일 새벽 4시까지 청운동 정 회장 집으로 출근하라는 거예요. 통금시간이 있던 터라 새벽 4시에 정주영 회장 집을 가긴 무리였죠. 수소문한 결과 정주영 회장의 운전기사 차가 통행 허가증이 붙어 있다기에 근처 여관에서 자다가 운전기사 차를 빌려 타고 새벽 4시 전에 청운동에 도착했죠.”

'왕회장'과의 긴 인연 이때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당시 서울 상대 출신은 대부분 한국은행을 택했는데 그는 건설회사에 들어왔던 것. 일본 책으로 공부를 하다 보니 일본의 경제사가 건설업부터 시작했다는 걸 남보다 먼저 깨달은 것이다. “정주영 회장 부인인 변중석 여사 기상 시간이 새벽 2시30분입니다. 3시면 이미 식탁에 밥이 다 차려져 있어요. 몸빼 입으시고 계시기에 전 처음엔 안주인인 줄도 몰랐어요. 그렇게 첫날 가자마자 정 회장님과 겸상을 해 아침상을 받는데 밥을 두 그릇이나 비웠습니다. 알배기 조기랑 게장, 개성식 동치미 등이 찬으로 나왔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염치 불구하고 사모님께 밥 한 그릇 더 달라고 했죠. 중 3때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도 나고 울컥 했습니다. 사모님은 밥 잘 먹어 보기 좋다며 등을 두드려 주셨어요.” 그렇게 시작한 비서 생활은 고달팠지만 영광스러운 시간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매일 새벽 정주영 회장의 자가용인 링컨컨티넨탈 또는 캐딜락을 타고 정 회장 옆자리에 앉아 고속도로 현장을 다녔기 때문이다. “명예회장님이 가장 기분이 좋을 때는 저녁에 손님을 만나러 가기 전 양치질을 하시고 난 직후였어요. 이때 옆에 가서 말을 하면 대부분 기분 좋게 들어주셨죠. 그래서 하루는 제가 ‘이제 비서 생활만 3년을 했으니 나가서 일 좀 배우고 싶습니다’했더니 ‘너 경기 나오고 서울 상대 나왔으니 미국 가고 싶지?’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뜨끔했는데 ‘그러지 말고 현장으로 가. 내가 보니까 넌 현대 사장감이야. 내가 시키는 대로 해. 현장에 직접 가서 먼저 알아야 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는 바로 남해고속도로 현장 관리과장으로 발령 나 건설 현장을 누볐다. 하지만 70년대 초 석유파동을 겪으며 조선소와 자동차를 하던 현대도 자금난에 부닥쳤다. 포드에서 수입한 코티나 자동차가 하도 안 팔려 외상으로 팔았는데 사람들이 돈을 갚지 않아 경부고속도로를 지나가던 코티나를 발견하면 직원들이 잠복해 있다가 달려가 돈을 받아 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단다. 당시 신진자동차의 코로나와 비교해 판매율은 턱도 없이 저조했다. “건설도 중공업도, 자동차도 안 되는 시절이었죠. 명예회장님 모시고 매일 부도를 막으러 한일은행 찾아 다닌 기억이 나네요. 어느날 회장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오죽 답답했으면 그러시더라고요. ‘자네 머리가 똑똑하니 우리가 어떡하면 살아남을 수 있겠나 한번 생각해 보라’고요. 생각해 보세요. 남들보다 잠도 덜 자고 아끼고 별 방법을 다 써봐도 살아날 기미가 안 보이니 오죽 답답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외람된 말씀이지만 돈은 돈이 있는 곳에 가서 벌어야 합니다. 지금 기름값이 10배, 20배로 뛰며 중동에 돈이 몰려 있다 하니 그곳에 진출을 해보시라’고 조언했죠. 당시 정주영 회장 나이가 57세였어요.” 이 전 회장의 주장대로라면 현대의 중동 진출은 그의 아이디어로 탄생했다는 소리다. 현대는 76년 외환보유고가 5000만 달러이던 시절, 사우디에서 산업항 공사 수주로 무려 9억3000만 달러에 해당하는 외화를 벌어들였다. 이후에도 그는 현대엔진의 초기 맴버로 활약하다 중공업을 거쳐 현대해상화재보험·현대증권 등 건설에서 금융 부문까지 두루 거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명예회장님 옆에서 새벽 밥을 함께 먹으며 일군 현대에 대해 제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대북 송금 사건의 진실 그는 현대를 떠난 후인 2003년 현대그룹 대북 송금 사건으로 여러 차례 몽헌 회장과 함께 특검 조사를 받았다.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150억원을 무기명 CD(양도성 예금증서)로 전달한 사건과 권노갑 민주당 의원 비자금 사건에 전달책으로 연루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5월 박 전 장관은 서울고등법원 파기환송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그해 9월 대법원 판결로 확정됐다. 권노갑 비자금 사태는 검찰 수사 결과 정몽헌 회장이 2000년 2월과 3월 당시 민주당 고문이던 권노갑씨에게 각각 3000만 달러와 200억원을 건넨 사건으로 200억원 수수혐의에 대해서는 대법원 확정 판결로 권씨의 유죄가 확정됐다. 3000만 달러 수수 혐의는 검찰이 수사는 해놓고 기소하지 않아 의혹이 풀리지 않은 상태다.

-몽헌 회장은 대북 송금 사건으로 심리적 압박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아는데…. 몽헌 회장 자살로 받은 충격은 없었나요.
“거기에 대해선 저도 마음 아프고 할 말이 없습니다. 검찰이 워낙 주도면밀하게 증거 자료를 들이대는 바람에 저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결국 나중에 모두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당시 현대가 북한에 5억 달러를 건넨 것으로요. 청와대 심부름을 몽헌 회장이 한 것이고, 그때 저와 같이 다닌 겁니다. 하지만 저는 퀵서비스 역할만 했을 뿐입니다. 그 돈이 어떻게 어디로 흘러 들어갔는지는 저도 몰라요. 저도 그 건으로 해외에 돈을 빼돌렸다느니, 별 의혹을 다 받지 않았습니까. 결국 그 의혹을 제시한 언론이 지난 8월 정정보도를 내며 사태는 마무리됐지만 마음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몽헌 회장이 자살하기 이틀 전인 2003년 8월 2일 연락을 취했다는데… .
“특검이 한창 진행 중일 때인데 몽헌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강명구 회장(현대택배)을 보낼 테니 좀 만나 달라고요. 그래서 코엑스 아셈타워 커피숍에서 잠깐 봤어요. 그런데 대뜸 저보고 그러더라고요. ‘몽헌 회장 부탁인데 특검 관련 일에 대해 짐을 다 져주면 안 되겠느냐고’요. 제가 펄쩍 뛰었습니다. 아니 저는 전달 역할만 한 사람인데…. 주가 조작 사건으로 대신 감옥에 다녀온 것은 명예회장님 보고 그렇다 쳐도 이번 건은 아니었어요. 아무리 연결을 시켜도 법적으로 제가 했다는 증거가 나오겠습니까. 제가 강 회장한테 ‘회장님 그렇게 모시면 안 된다’고 호통을 쳤어요. 결국 나중에 진실은 다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이 부분에 대해 강명구 회장은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강력하게 부인했다. 이씨를 만난 적은 있지만 그런 내용으로 대화를 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호한 답변을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몽헌 회장은 결국 본인이 그 짐을 다 짊어지고 돌아가신 것 아닙니까. 돌아가신 분에 대해 산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겠죠.”

-현대가 5억 달러 마련하느라 계열사 이곳저곳에서 돈 끌어다 쓰고 어려워졌는데…. 대북 사업이 현대를 힘들게 한 건 아니라고 보십니까.
“아니에요. 아냐.(그는 강하게 손사래를 쳤다) 저는 100% 아니라고 봅니다. 명예회장님은 대한민국에서 몇 백억 신용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대현대그룹이 그깟 5억 달러 가지고 흔들렸겠습니까. 형제들 간에 싸우고 하니까 기업 신용이 떨어지고 주가가 떨어지고 기반이 흔들린 겁니다. 처음에 현대투신이 흔들려 자금 압박이 시작됐잖아요. 왜 힘들어졌겠어요. 형제 간 싸움이 났는데 누가 거기다 돈을 맡깁니까. 바이코리아펀드로 이름 날렸던 이익치는 주가조작으로 구속되고, 정씨 형제들은 싸우고 누가 현대를 믿었겠어요.” 그는 현재 민·형사소송이 진행 중인 현대중공업 지급보증각서 사건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건은 97년 현대전자가 캐나다 은행과 주식환매 계약을 맺을 당시 지급보증을 섰던 현대중공업이 그로 인해 2460억원의 손실을 보게 됐다. 그래서 현대중공업은 보증계약 당시 현대증권 회장이던 이 전 회장이 중공업 측에 써 준 각서가 ‘손실 보전’ 지급보증서라며 손해배상청구를 한 것이다. 현대증권 역시 이사회의 결의를 거치지 않은 채 현대중공업에 지급 보증각서를 써 줬다는 이유로 이 전 회장을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발했다.

몽준 고문과의 질긴 악연 지난 1월 1심 재판부가 그의 유죄를 인정했으며,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당시 현대중공업 실무자가 현대전자에 공문을 요청해 제가 중개인 자격으로 연대 서명한 겁니다. 그건 지급보증서가 아니라 업무협조문서였어요. 그런데 법원은 그 각서가 중공업이 주장하는 대로 ‘지급보증서라면 이사회 결의를 거쳤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 지급보증서’라는 겁니다. 저는 불법 행위를 한 거고요. 증권회사는 증권거래법상 지급보증서를 발급 못하게 돼 있어요. 만약 이사회 결의를 거쳤다면 저는 진짜 죄를 저지른 게 되는 거예요. 이사회 결의가 없기 때문에 각서가 무효라면 그걸로 끝나는 건데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불법이라니…. 당시 명예회장과 몽헌 회장, 몽준 고문도 다 알고 있었던 상황이에요. 두 분은 지금 안 계시고 유일한 증인은 몽준 고문인데 몇 차례 증인 요청을 해도 나오지 않고 있어요. ” 그는 주가 조작 사건과 현대중공업 지급보증 각서 건까지 몽준 고문에 대한 섭섭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재벌 1세대의 품 안에서 커 온 그가 이제는 2세대와 싸우고 있는 것이다.

-2002년 정몽준 고문이 대선 후보자로 나왔을 때 ‘나와 이익치의 악연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던데… 도대체 무슨 악연입니까.
“저도 그 말 들었어요.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바로 ‘엑셀’ 때문이었어요. 딱 20년 전인 82년 현대자동차가 엑셀 공장을 시작할 때 현대가 3000억원을 투자해 소형차 엑셀 30만 대를 생산하는 공장을 짓겠다고 하는 회의를 마치고 차를 타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앞에 타고 뒤에 정주영 회장과 몽준 고문(당시 현대중공업 상무)이 탔어요. 근데 갑자기 몽준 고문이 ‘아버지, 지금 GM이 이미 30만 대 소형차 공장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는 승산이 없어요’라고 말한 거예요. 갑자기 정주영 회장이 발끈 하시더니 저보고 ‘이 비서는 어떻게 생각해’ 물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항상 회장님이 생각하시는 게 옳다고 봅니다. 중공업도 건설도 남들이 안 되는 걸 다 성공하시지 않았습니까’라고 답했죠. 그러고 나서 바로 몽준 고문을 보시더니 ‘너, 미국 가서 공부하고 온 거 맞아!’라면서 호통을 치시더라고요. 그때부터가 아마 맞을 겁니다.”

-악연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나요.
“제가 중공업 전무로 있을 때 당시 중공업 회장으로 있던 몽준 고문의 말보다 정주영 회장 말을 듣고 직접 지시를 받으니까 얼마나 미웠겠어요.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왕회장이 시키는 걸 어쩝니까. 그랬더니 결국은 저를 현대해상화재보험 전무로 발령을 내시더라고요. 현대그룹 내에서 현대중공업이 1~2위면 해상화재보험은 꼴찌 기업이었어요. 당시 금융이 힘이 없을 때니까요. 그야말로 엄청난 좌천 인사였죠. 몽준 고문이 보낸 겁니다. 눈엣가시 같으니까. 그때 깨달았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자식이 저 사람 싫다는데 어쩌겠어요. 그 악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겁니다. 길고 길죠….” 그는 본인이 이번에 토로한 말들은 그동안의 ‘이익치’에 대한 오해와 편견에 대한 도전이라고 했다. 그의 말들이 어디까지 진실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말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정주영 회장과 몽헌 회장의 이야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그는 소용돌이쳤던 현대가의 흥망성쇠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다.


이익치가 본 현대가의 아들들


“몽헌 회장 화내면 명예회장보다 무서워”
2002년 대선 당시 몽헌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 방에 들어와 “몽준이가 대선 후보감으로 어떠냐?”고 물었다. 나중에 몽헌 회장에게 들은 얘기론 누군가 명예회장에게 몽준 고문에 대한 평을 들어 달라고 했던 것이다. 이 자리에는 명예회장과 몽헌 회장, 그리고 이익치 전 회장과 나머지 한 명이 더 있었다. 이때 명예회장은 “걔는 그냥 국회의원 하라고 해”라고 한 후 “걔는 참 욕심이 많아”라고 했다는 것. 몽구 회장에 대해서는 호탕하고 섬세한 면이 약한 것이 단점이지만 현대가의 장자로서 왕회장 마음속에 애틋한 마음이 항상 깔려 있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익치 전 회장은 1992년 현대상선 비자금 사건 때 몽헌 회장이 구속되기 직전 명예회장과 아들의 면담을 지켜보기도 했다. “대통령한테 준 돈이나 네 돈으로 팔자 고친 사람 있으면 말하고, 그 외에는 일절 말하지 마라.” 명예회장은 딱 이 한마디를 남기고 자리를 떴다. 아버지의 충고를 받아들여서였을까. 몽헌 회장은 끝까지 침묵했고 현대상선 비자금 사건은 몽헌 회장이 구속 기소된 것으로 종결됐다. 굳이 아버지의 충고가 없었어도 몽헌 회장은 삼형제 중 가장 말수가 적었단다. 몽헌 회장이 명예회장 앞에서 말대꾸를 하는 것도,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 이 때문에 이 전 회장 눈에는 세 아들 중 몽헌 회장이 명예회장의 말에 가장 복종하는 아들로 비쳐졌다. 하지만 화를 낼 때는 정주영 회장보다 더 불 같았던 게 몽헌 회장이라고.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고 혼자 감당하는 내성적인 면이 많았던 것. 명예회장이 외강내강이라면 몽헌 회장은 외유내강이었다는 것이다. 대북송금 특검 중 모든 것을 떠안고 자살한 몽헌 회장의 행동이 설명되는 부분이다.


이익치의 현대가 관련 법적 분쟁

▶현대전자 주가조작 사건(1999년): 1998년 이씨가 회장이던 현대증권이 현대중공업과 현대상선 자금 2134억원을 끌어들여 인위적 시세조종으로 현대전자 주가를 끌어올렸다는 것. 형사소송은 대법원에서 이씨의 유죄가 확정돼(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마무리. 현재 그 사건으로 피해를 봤다는 투자자들이 낸 민사소송(손해배상청구소송) 진행 중.

▶현대중공업 지급보증 사건(2000년): 1997년 현대전자가 캐나다 금융기관에 현대투자신탁증권 주식을 팔면서 3년 후 적정 주가 이하로 떨어지면 되산다는 주식 환매계약을 맺었다. 이때 현대증권의 주선으로 현대중공업이 지급보증을 섰다. 3년 후 2460억원의 손실을 입은 현대중공업은 현대증권·현대전자·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을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지급보증을 설 당시 이 전 회장이 써준 현대중공업에 손해가 날 경우 현대증권 등이 책임진다는 내용의 각서가 문제가 됐다. 1, 2심에선 원고 일부 승소했다. 2004년엔 현대증권이 이씨를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발했다. 이사회 결의를 거치지 않은 채 현대중공업에 지급 보증각서를 써줬다는 이유다. 지난 1월 1심 재판부는 이씨의 유죄를 인정, 징역 2년 6월을 선고했지만 법정구속은 하지 않았다. 현재 항소심 진행 중.


왕자의 난 주요 일지

1999년 12월 31일: 정몽헌 회장 측, 박세용 회장(그룹구조조정본부장)을 정몽구 회장 측인 현대자동차로 전보. 노정익 부사장이 구조조정본부장 대행

2000년 1월 4일: 정몽구 회장 측, 박세용 회장을 인천제철 회장으로 다시 전보

3월 14일: 정몽구 회장 측, 일방적으로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을 고려산업개발 회장에 내정 발표

3월 24일: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 긴급 기자회견에서 정몽헌 단일 그룹회장 체제 및 정몽구 공동회장은 그룹회장직 그만두고 현대자동차에만 전념한다고 발표. 이익치 회장과 노정익 사장에 대한 인사는 없었던 것으로 원 위치  

2000년 3월 27일: 현대경영자협의회 개최, 정주영 명예회장 참석해 육성녹음 공개. 정몽헌 단일회장 체제, 정몽구 회장 수용 선언

4월 25일: 현대그룹 계열사, 현대투신 영향으로 주가 폭락

5월 28일: 현대그룹, 3조4000억원 규모 유동성 확보 방안 발표

5월 31일: 정주영 명예회장 및 정몽헌·정몽구 회장 퇴진 및 현대자동차 계열분리 약속

6월 1일: 정몽헌 회장, 회장직 사퇴서 제출 뒤 일본으로 출국. 정주영 명예회장도 사퇴서 제출

6월 2일: 정몽구 회장, 사퇴 거부 뒤 미국으로 출국

6월 8일: 정몽헌 회장과 정몽구 회장 동시 귀국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남북정상회담
6월 28일: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 방북(김정일 국방위원장 면담)

6월 30일: 정몽헌 회장 측, 당초 약속과 달리 현대자동차 제외하고 나머지 계열분리 편법 신청(역계열분리), 공정거래위원회는 즉각 계열분리 신청 반려

7월 25일: 현대중공업,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과 현대전자 측 제소(1997년 현대전자 외자유치 관련 보증각서가 빌미)

8월 23일: 현대자동차 부문 10개사 계열분리(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현대정공, 현대강관, 현대우주항공, 현대캐피탈, 오토에버닷컴, 이에치디닷컴, 인천제철, 삼표제작소)

8월 30일: 이익치 회장 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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