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terview] “환갑 때까진 회사와 결혼했다 생각”
[人terview] “환갑 때까진 회사와 결혼했다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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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출생 1988년 조지워싱턴대학원 석사 1989년 한국급유 사장 2007년 한유그룹 회장 |
‘하나, 둘, 셋!’ 외침 소리가 끝나는 동시에 ‘행복 에너지를 전하는 참 기업’이라는 한유그룹(한유엘앤에스, 한유에너지, 한유케미칼)의 새 비전이 시작됐다. 지난 9월 14일 대전 KT인재개발원에서 열린 한유그룹 창립 40주년 행사의 모습이다. 환호하는 400여 명의 임직원을 바라보며 누구보다 가슴 벅찬 이가 있었다. 바로 박기흥 한유그룹 회장이다. 사명을 바꾸고 새 CI와 비전을 선포하기 전날, 박 회장은 돌아가신 아버지와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 “새 모습에 노여워하지 마시라고 말씀 드렸어요. 더 발전하기 위한 시도이니까요.” 박 회장은 한유그룹을 설립한 박갑수 사장의 둘째아들이다. 박 회장은 “회사에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현장에 데리고 가셨다”며 아버지와의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박 회장이 미국에서 대학원을 마치고 일본 이토만 상사에서 연수를 받던 시절엔 더 깊이 회사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1989년 박 회장은 뜻하지 않은 시점에 한유그룹에 뛰어들게 된다. “둘 다 너무 이른 나이였어요. 아버지께서 예순셋에 뇌출혈로 그만…. 요즘 같으면 청년 아닙니까. 저도 사장 자리에 앉기엔 너무 젊었고요.” 새 사장은 겨우 서른다섯이었다. 196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중공업 육성 정책으로 울산에 대한석유공사((주)SK의 전신)를 설립했다. 당시 미국의 걸프석유회사와 각각 50%의 지분을 소유한 정부는 한유그룹에 해상 판매 전권을 위임했다. “정부를 대행해 항구를 드나드는 모든 배에 기름을 공급했습니다. GS칼텍스·에쓰오일·현대오일뱅크 등 민간 정유사들이 회사를 설립할 때 우리 직원들을 스카우트해 갔어요. 초창기 해상 급유에 관련된 직원은 모두 한유그룹 출신입니다.” 한유그룹은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박 회장은 “라면, 휴지를 만들지는 않지만 알고 보면 일상과 관련된 사업이 많다”고 말했다.
한유케미칼에서 제조하는 탄산가스는 제과·음료회사에서 흔히 사용된다. 또 박 회장은 “앞으로 생선이나 채소를 보관할 때도 물 대신 탄산가스를 농축한 드라이아이스를 사용하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 일반인에겐 낯설지만 해외에서는 다르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유럽에 가면 기름 공급원인 SK보다 한유그룹이 더 유명했습니다. 공급을 얼마나 잘 해주느냐가 중요했으니까요. 요즘에야 SK가 잘 알려져 있지만 당시엔 회의에 참석했다가 상대쪽 반응에 당황하기도 했지요.” 박 회장은 한유그룹이 담당하는 급유·저유·벙커링·수송 등이 ‘산업에 필요한 1차적 사업’이라 했다. 기름은 국가 기간산업의 토대가 되는 원료기 때문이다. 경제가 침체하던 1970년대 1, 2차 오일쇼크 때도 한유그룹은 일반 기업들과 다른 입장이었다. 기름 공급량이 부족해지자 외상거래, 불량채권 발생, 이자부담률이 확 줄어든 것이다. 한유그룹은 이 시기에 연평균 38%라는 성장을 이뤘다. 박 회장은 ‘성장’이라는 말에 손사래를 쳤다. 고객에게 ‘미안하다’는 것이다. “기름을 받아가려고 선사 영업직원들이 아침부터 회사 앞에 줄을 서 기다렸습니다. 기름을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 선박 사업을 하느냐 못하느냐가 달려 있으니 극한 상황이었지요. 현금을 미리 맡기고 기름을 배정해 달라는 곳도 있었고요. 아마 그때 근무한 영업직원들이 역대 한유그룹 영업직들 중 가장 편하게 일했을 겁니다. ” 1997년 외환위기가 닥쳤을 때 마흔셋의 사장은 단 한 명의 인원 감축 없이 회사를 꾸렸다. 그는 사장을 맡을 때부터 선배 사원들의 고생을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고 했다. 박 회장은 어려운 때일수록 선배 사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한유그룹은… 선박용 유류 공급 기업으로 1967년 고(故) 박갑수 창업주가 부산에 설립한 한국해상급유주식회사로 출발했다. 선박급유업의 선구자로 1981년 자회사인 한국특수유를 설립하고 한유그룹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1989년 박기흥 사장 취임 후 정보통신·항공급유 등 꾸준히 사업을 확대해 왔다. 2007년 9월 창립 40주년을 맞아 새로운 사명과 기업통합디자인(CI)을 발표하고, 한유그룹 아래 한유엘앤에스(공급운반), 한유에너지(판매), 한유케미칼(생산) 자회사를 두었다. 포항·광양제철에 산업유를 공급하고, 청주 공항을 오가는 항공기에 항공유를 독점 공급하는 등 급유사업과 저유·주유·LPG 충전·아스팔트·정보통신 등 연관사업으로 2015년 매출 1조원을 달성할 계획이다. |
“나이 서른다섯이면 과장급 아닙니까. 제 잘못을 지적해줄 수 있는 분들이 필요했습니다.” 박 회장은 회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생사고락을 함께한 이들에게 정년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말처럼 실천이 쉬울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속한 곳에 대한 믿음 없이 어떻게 열심히 일하겠습니까. 나로 시작해 가족, 기업, 더 확대되면 국가, 세계가 됩니다. 가족 운운하면서 안정을 주지 못한다면 모순이지요.” 박 회장은 신입사원들에게 당부한다. “내가 아버지면 임원들은 어머니고, 선배 사원들은 누이, 형제다.” 40주년 행사에서 새 비전을 발표할 때 직원들의 외침 소리가 유난히 컸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전 판은 18개의 널빤지를 이어 만들었다. 완성 글귀가 뭔지 모른 채 18개 팀이 사진, 사탕, 그림 등으로 꾸민 조각 글자가 모여 새 비전이 된 것이다. 박 회장은 “많은 2세 경영인이 의욕만 가지고 무리한 확장을 하다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며 “‘뿌리가 없는 나무는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 회장의 가족경영은 회사 밖에서도 이어진다. 한유그룹은 40년 고객인 SK그룹과 큰집, 작은집처럼 지낸다. SK의 전체 윤활유 중 40% 이상을 한유그룹이 유통판매하고 있다. 두 기업은 서로 어려울 때 경영기법 전달, 인력 교육 등으로 도움을 주고받기도 했다. 박 회장은 한유그룹 사장이 되기 전부터 현재까지의 ‘유류단상(油類斷想)’을 펼쳐 보였다. “1960년대는 등잔불과 호롱불 시대입니다. 이때까지도 기름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서민이 많았지요. 경공업이 발전한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에는 자동차산업이 발달하고 대중목욕탕이 인기를 끌었어요. 자연히 기름 소비도 늘었고요. 1990년대에 보일러를 사용하게 되자 대중목욕탕이 쇠퇴했지요. ” 박 회장은 2000년대 웰빙 트렌드가 기름사업을 변화시킨다고 했다. 청정가스 등의 환경 원료가 주목 받는 것이다. 한유그룹도 몽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법인 등 국내외 유통 채널을 이용해 신사업을 개발할 계획이다. “기업은 살아있는 생물입니다.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영양소를 공급해야 하지요. 저 역시 오로지 기업을 살려야 한다는 집념으로 살았습니다. 사장 취임 5년이 지나고 아내가 일기장을 보여주더군요. 취임 첫해 집에서 밥을 먹은 끼니 수가 열다섯 끼라고요. 늘 미안한 마음이지만 환갑 때까지는 한유그룹과 결혼했다 생각하라고 말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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