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정화 vs. 보복 폭로
사회 정화 vs. 보복 폭로
삼성그룹(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주도적 위치 때문에 종종 삼성공화국으로도 불린다)이 부패 추문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지난 11월, 삼성그룹의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49)씨의 폭로가 발단이었다. 김씨는 1997∼2004년에 삼성이 사업상 특혜를 받으려고 고위 정치인, 언론인, 관료, 법조인(현직 검찰총장도 포함된다) 수십 명에게 뇌물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지난주 노무현 대통령이 삼성을 조사할 특별검사를 선임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이번 추문은 새 국면을 맞았다. 몇 시간 후 이건희(65) 회장을 포함해 삼성의 임원 여러 명에게 출국금지 조치가 내려졌다고 보도됐다. 치열한 대선을 불과 몇 주 앞두고 내부 비리를 폭로한 김씨의 동기는 물론 삼성에 제기된 혐의 사실의 진위 여부를 현 시점에서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다. 다만 삼성 지배 일가가 최대 3000억 달러에 달하는 경영권을 둘러싸고 사활이 걸린 투쟁에 휩싸였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 중심에는 평면 TV, 휴대전화, 반도체 부문에서 아시아의 내로라하는 기업인 삼성전자가 있다. 시가총액이 900억 달러로 그룹의 17개 상장사 중 최대 규모다. 삼성그룹은 미상장 기업인 한국 최대의 보험사 삼성생명뿐 아니라 약 40개의 계열사를 거느린다. 김씨 주장의 골자는 이 회장이 대규모 뇌물 공여망을 주도하며 수백만 달러를 뿌려 그룹의 지배적 지분을 자신의 아들에게 불법 양도하는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손을 썼고, 합법적으로 납부했다면 이 회장 일가가 그룹 경영권을 잃게 될지도 모를 상속세를 내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이번 추문은 “[삼성의] 기업 지배구조뿐 아니라 소유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주주권익운동가인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학원 원장은 내다봤다. “삼성이 별도의 금융그룹과 산업그룹으로 분리되는 형태”도 한 가지 가능성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게 되면 한국 기업계의 판도가 달라진다. 지난해 삼성은 1600억 달러를 웃도는 매출을 올렸다. 한국 국내총생산의 약 15%에 달한다. 삼성그룹은 현재 한국 수출의 20%를 담당하고, 전 세계에서 25만 명을 고용한다. 170억 달러 상당의 ‘브랜드 가치’로 인터브랜드의 일류 브랜드 순위에서 21위에 올랐다. 또 10년 전 아시아 금융위기 후 한국의 일류 재벌 중 유일하게 해체를 모면했다. 개혁파들은 그 후 줄곧 삼성도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삼성은 수십억 달러의 외국자본을 받아들이고 경영 투명성 개선을 통해 내부 개혁을 실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랜 습관을 없애기는 쉽지 않다. “삼성은 로비와 뇌물을 통해 나라 전체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고 한 전직 삼성 임원은 말했다. 그는 자신의 현재 사업에 영향이 미칠까 싶어 익명을 요구했다. 김용철씨의 주장은 그런 시각을 뒷받침한다. 김씨는 지난 한 달 동안 잇따라 기자회견을 열어 그룹의 무역을 담당하는 삼성물산이 공급하는 2억2000만 달러의 비자금이 존재하며, 그 돈은 사업상 특혜를 얻어내는 데 사용됐고, 삼성 중역들의 이름으로 개설된 차명계좌를 통해 관리됐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그런 통장이 자신도 모르게 자기 이름으로 네 개나 개설돼 총 550만 달러가 입금됐다고 주장했다. 11월 23일 국회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김씨의 주장과 1996년의 불투명한 주식 매입을 조사하도록 촉구하는 초당적인 법안을 통과시켰다. 1996년의 주식 매입으로 이 회장의 외아들인 이재용씨에게 그룹 경영권이 넘어갔다. 김씨의 주장이 지속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계기가 될지는 아직 말하기 어렵다. 그의 동기가 불분명하고 “사회 정화를 위한” 행동이라는 주장도 다소 공허하게 들린다. 그가 3년 전 회사를 떠난 이래 얼마 전까지 침묵을 지켜왔다는 점 때문이다. 다른 증인들이 나타나 몇몇 김씨의 주장을 뒷받침하자(그중에는 2004년 초 삼성이 500만원의 현금 뇌물을 보냈다는 노 대통령 전 비서관의 주장도 있다) 삼성은 모든 주장을 강력히 부인하면서 앙심을 품은 퇴직자가 연출하는 ‘보복 폭로’의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삼성이 법적인 문제에 휘말리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5년 삼성 임원 두 명이 서울의 한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재용씨가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에버랜드의 지배적 지분을 시가의 10%도 안 되는 가격에 매입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업무상 배임죄를 저질렀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판결(현재 항소 중)이 나오자 이 회장은 8억8000만 달러를 기부해 어려운 학생들 대상의 자선기금을 조성하고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기로 했다. 삼성은 윤리적인 문제를 인정하면서 법적인 잘못은 인정하지 않아 원활한 부자 상속의 초석을 깔려는 계산이었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그 계획은 바로 지난 대선 때까지도 뇌물을 주었다는 김씨의 주장 때문에 수포로 돌아간 듯하다. 그러나 이 회장 일가의 최대 문제는 법이 아니라 돈이다. 포브스지의 추산에 따르면 그들이 보유한 순자산 43억 달러는 한국 경제의 15%를 차지하는 그룹을 마음대로 좌우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아시아의 여느 가족 대기업과 마찬가지로 삼성은 계열사 간의 상호출자 관계를 통해 유지된다. 그런 관계를 시카고 소재 켈로그 경영대학원의 가족기업 전문가 존 워드는 “피라미드 구조”라고 부른다. 한국 기업계 내부의 투명성이 부족한 탓에 역사적으로 한국 증시의 종목들은 낮은 가격에 거래됐다.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이다. 지금도 평균적인 종목의 주가수익률이 12배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 도쿄는 16배, 뉴욕은 16배 안팎이다. 이 같은 ‘디스카운트’ 현상은 낡은 재벌 구조의 유산이다. 지금은 삼성만 유일하게 그런 구조를 유지한다. “단기적으로는 삼성 추문이 한국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듯하다. 한국 기업 개혁의 지지부진한 진척에 투자자들이 실망했기 때문”이라고 우리투자증권의 김승현 분석가는 말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삼성의 제조와 금융 측면이] 깨끗하고 투명한 기업들로 다시 태어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와 같은 분할이 일어날지는 아직 미지수다. 이는 노 대통령이 12월 말까지 선임해야 하는 특별검사가 김씨의 주장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확인하려 하느냐에 많이 좌우된다. 오히려 대선 결과는 더 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현대그룹 임원 출신의 보수파인 선두주자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중도좌파 경쟁 후보들보다 혁신적인 기업 개혁을 추진할 가능성이 작다고 여겨진다. 삼성은 지난주 발표한 성명을 통해 김씨의 주장은 “날조되고 왜곡되고 과장된 주장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그래도 투자자들의 불안은 여전하다. 삼성 계열 상장사들의 주가는 조사가 발표된 날 3% 이상 떨어졌다. 그룹의 총 시가총액이 50억 달러 이상 줄어든 셈이다. “우리는 겁날 게 없다”고 주우식 삼성전자 경영지원총괄 IR팀장은 다음날 주식분석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말했다. “진실이 승리한다.” 문제는 삼성과 김씨 중 누구의 말이 진실이냐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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