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 & TREND] 은행들 “아, 옛날이여…”
[NEWS & TREND] 은행들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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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거래되는 외국환 평형기금 채권의 가산 금리 급등, 금융회사의 해외 자금 조달 차질, 채권과 주가의 급등락, 단기 외채 급증…. 10년 전 외환위기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 것이 아니다. 최근 국내 금융시장에서 이 같은 일이 빚어지고 있다. 이쯤 되면 “한국 경제가 다시 외환위기와 같은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것인가”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도 많은 경제 전문가는 “그 정도로 금융시장이 어렵지는 않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면서도 불안감을 좀체 떨치지 못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장재철 수석연구원은 “국제 금융시장이 극도로 불안하다 보니 우리 경제도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어렵다”며 난감해 했다. 외환위기 직후 금융감독위원회에서 기업 구조조정을 담당했던 서근우 하나은행 부행장은 “단기 외채가 늘고 있는 게 영 기분이 좋지 않다”며 불안해 했다. 국민은행 최인규 전략본부장은 “시장이 불안해 2008년 경영전략을 수시로 수정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급등하는 채권금리 = 11월 28일 채권시장이 요동쳤다. 하루 변동 폭이 많아야 0.05%포인트에 불과했던 3년짜리 국고채 금리가 이날 하루만 0.24%포인트 급등했다. 3년짜리 회사채 금리, 시장금리의 지표가 되는 5년짜리 국고채 금리도 비슷한 수준의 오름폭을 보였다. 이날 채권시장에 불씨를 댕긴 것은 외국은행 국내 지점들이다. 외은 지점들은 달러를 들여와 국내 은행에 빌려 주고, 대신 받은 원화로 채권에 투자해 수익을 올리는 방법으로 손쉽게 돈을 벌어왔다. 이 과정에서 위험을 헤지하기 위해 외환파생상품(금리 스와프와 외환 스와프)과 국채선물 시장을 연계하는 전략을 활용했다. 하지만 달러 고갈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외환파생상품 시장의 왜곡 현상이 발생했고, 여기서 손실을 본 외은 지점들이 국채선물을 대량으로 내다팔자 채권금리가 급등한 것이다. 방아쇠는 외은 지점들이 당겼지만 연발탄을 쏜 것은 국내 시중은행이었다. 은행채와 양도성예금증서(CD)의 발행 급증으로 조달 비용이 높아지자 시중은행들도 이를 만회하기 위해 외환파생상품시장과 국채선물시장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시장의 왜곡은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처리하는 게 원칙”이라던 한국은행이 급하게 소방수로 등장했다. 한은이 1조5,000억원어치의 채권을 시장에서 사들이기로 하자 금리는 급락했다. 하지만 약발은 오래가지 않고 하루에 0.1~0.2%포인트씩 채권금리가 급등락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채권금리가 급등하자 채권형 펀드의 수익률이 급감하고 있다. 펀드평가회사인 제로인은 설정잔액 100억원 이상의 채권형 펀드 중 3개월, 6개월 수익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는 펀드가 전체의 3분의 2에 이른다고 밝혔다. 아이투신운용의 김형호 채권운용본부장은 “패닉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시장 여건이 좋지 않다”며 “이런 상태에서 채권형 펀드가 수익률을 제대로 낸다는 게 무리”라고 말했다. 일 년 수익률이 가장 좋아 봐야 은행 정기예금 수준에 불과한 5%대에 불과하다.
은행·기업 ‘돈 없다’ 아우성 = 채권시장의 폭락을 불러왔던 외환파생상품 시장에서 달러화 고갈은 은행들의 달러 차입이 어려워지면서다. 외은 지점들은 해외 본점에서 손쉽게 달러를 조달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본점이 기우뚱거리자 손을 벌리기 어려워졌다. 게다가 시중은행들도 국제 금리가 급등하면서 해외 차입에 차질을 빚기 시작했다. 국제금리의 기준이 되는 3개월짜리 리보(런던은행 간 금리)는 12월 초 5.15%까지 치솟으며 9년 최고치를 기록했다. 국제금리가 오르는 것은 물론 시중은행들이 무는 가산금리도 급등했다. 산업은행 김인구 외자조달팀장은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국내 은행이 지불해야 하는 가산금리가 4~5배 급등했다”며 “그런 금리를 주고서라도 돈을 빌릴 수는 있겠지만 수지를 맞추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산업은행·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은 물론 시중은행과 제2 금융권도 해외에서 달러화 조달을 무기한 연장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최근에서야 신한카드와 삼성카드가 채권 발행에 성공했지만 통상적인 채권보다 안정성을 높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은행들은 예금 이탈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 2007년 들어 9월까지 증권사 종합자산관리계좌(CMA)는 24조6,000억원이 늘었다. 게다가 주식형 펀드로 자금이 대거 몰리면서 은행의 수신고는 쪼그라들고 있다. 예금보험공사에 따르면 은행권의 부보예금은 3분기 말 476조1,000억원으로 지난 전 분기에 비해 13조1,000억원(2.7%)이 줄었다. 부보예금이란 금융회사가 예금자 보호를 위해 예금보험공사에 보험료를 내 지급 보증이 되는 예금을 말한다. 은행으로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머니 무브’에 맞닥뜨린 것이다. 이처럼 곳간이 비었다고 놀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게 은행의 고민이다. 여전히 각종 수수료와 예대마진이 은행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은행은 대출 확대를 통해 수익을 늘여야만 한다. 궁지에 몰린 은행은 채권발행을 늘리는 전략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7년 들어 11월까지 은행이 발행한 CD는 27조8,00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2조4,000억원)보다 11.5배나 늘었다. 은행의 채권 발행에 직격탄을 맞은 것은 일반 기업들. 은행이 발행하는 채권이 많다 보니 이것보다 안정성이 떨어지는 일반 회사채는 시장에서 소화될 여력이 없는 것이다. 산은자산운용의 백수동 채권운용본부장은 “회사채 시장은 우량 기업이 아니고선 좀체 발행이 어려워졌다”며 “회사채 시장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나 마찬가지”라고 진단했다. 3개월 사이에 회사채 금리가 1%포인트나 급등한 것은 이런 시장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돈줄이 막힌 기업은 은행을 찾고, 은행은 대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채권 발행을 늘리다 보니 채권금리가 계속 오르는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은행 ‘잔치는 끝났다’ =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은행이다. 은행들은 부동산시장의 호황에 따른 주택담보대출 증가, 펀드와 보험 판매 수수료 증가, LG카드 매각이익 등 특별이익의 증대 등으로 몇 년간 파티를 벌였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끝났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은행의 수익성을 나타내는 순이자 마진(NIM)은 어느 은행이랄 것 없이 올 들어 내리막을 걷고 있다. 자산 100억 달러 이상인 미국 상업은행의 상반기 NIM은 3%대를 보이고 있는 반면 국내 시중은행의 NIM은 2%대 초반에 불과하다. 한 시중은행 여신담당 부행장은 “NIM이 2% 밑으로 내려가면 거의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위험 수위”라고 지적했다. 시중은행 스스로 은행에서 돈이 빠져 나가는 머니 무브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한은에서 열린 금융협의회에서 시중 은행장들은 “우리나라 가계의 주식보유 비중이 선진국에 비해 낮은 점 등을 감안할 때 앞으로도 은행에서 주식시장 등으로 돈이 이동하는 현상은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상황이 이쯤 되자 각 은행은 올해 허리띠를 졸라맬 각오를 다지고 나섰다. 우리은행은 전년 대비 예산안 증가율을 15%에서 올해에는 7∼8%로 낮추기로 했다. 신한은행도 올해 예산안 증가율을 7.7%에서 3∼4%로 줄이기로 했다. 자산을 늘리는 외형 경쟁도 자제한다는 방침이다. 강정원 국민은행장이 “내년엔 외형 경쟁을 자제하고 내실을 다지는 데 주력할 계획”이라고 밝힌 것도 자금조달 비용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대출을 통한 자산 확대 전략은 제살 깎기나 마찬가지란 인식에서다.
국제 금융시장 동향에 촉각 = 상반기 국내를 포함해 전 세계 금융시장의 걱정은 ‘돈이 너무 많이 풀렸다’는 것이었다. 이를 감안해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와 한국은행은 금리를 계속 인상했다. 금리를 올려 유동성을 죄겠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가 이런 상황을 일순간에 역전시켰다. FRB와 유럽중앙은행(ECB), 일본은행 등이 수천억 달러를 시장에 쏟아 붓고, FRB는 금리를 세 차례에 걸쳐 0.75%포인트 인하했다. 상대적으로 한국은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노출이 적었지만,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을 감안해 한은은 9월 이후 네 차례 연속 콜금리를 동결했다. 그러나 국제금융시장의 불안감은 가시지 않고 있다. 씨티은행이 90억 달러에 달하는 부실을 발표하는 등 유수의 투자은행들이 서브프라임 부실을 속속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알려진 미국의 시중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AOB)와 와코비아은행까지 부실 규모를 털어놨다. 이에 미국 등 5개 중앙은행은 12일(현지시간) 400억 달러의 긴급자금을 시장에 공급하기로 하는 깜짝 발표까지 단행했다. 영국 재무장관은 “시장이 불안해질 땐 언제든지 중앙은행이 개입할 것”이라며 엄포를 놨다. 호주·일본 중앙은행도 5개 은행의 동맹체제에 언제든지 협력하겠다고 지원사격을 했다. 또 시티뱅크 등이 중심이 된 국제 투자은행들이 500억~600억 달러에 달하는 ‘슈퍼 펀드’를 조성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타격을 입은 구조화회사(SIV)를 돕는 방안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 이쯤되면 시장이 가라앉아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시장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5개 중앙은행의 동맹 체제 발표 이후에도 미국 증시는 소폭 상승하는 데 그쳤고, 아시아·유럽 증시는 비웃듯이 급락세를 연출했다. 그 정도 대책으로는 시장 불안을 잠재우기 어렵다는 분석이 확산된 탓이다. 증권연구원 김필규 연구위원은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각종 파생상품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도대체 부실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기조차 어렵다”며 “이런 태생적인 문제로 인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 따른 금융위기의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잔액은 1조4,000억 달러. 문제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기초로 파생된 상품의 규모가 1조1,000억 달러에 이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복잡한 구조로 파생상품이 얽혀 있어 투자자들조차 자신이 투자한 상품에서 얼마 정도의 부실이 발생할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런 사정 때문에 현재 각 은행이 발표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관련 부실 규모는 1,000억 달러 수준이지만 도이체방크는 최종 부실규모가 4,000억 달러를 넘을 것이란 분석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부실 규모가 새롭게 드러날 때마다 국제 금융시장이 출렁거리고, 그 여파로 인해 국내 주식·채권시장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은행과 기업의 해외 자금조달 어려움도 가중될 수밖에 없다. 한국금융연구원 하준경 연구위원은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대출 구조상 2008년에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고 2009년까지 간헐적인 위기가 지속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우리가 아무리 잘해도 해외발 악재 때문에 금융시장이 기우뚱하게 된다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권순우 수석연구원은 “금융권은 부실이 발생할 소지를 최대한 억제하고, 기업은 사내 유보금을 늘리는 방법으로 위기에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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