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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투사의 비장함으로 개척

혁명 투사의 비장함으로 개척

▶우남균 LG전자 중국 총괄 법인장

“차별화된 제품으로 중국 시장에서 돈 벌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차별화된 사업 방법(Business model)으로 승부해야 한다.” 중국 베이징(北京) 시내 중심 거리인 창안(長安)가에 우뚝 솟은 LG 쌍둥이 빌딩 21층. LG전자 중국 총괄 법인장을 겸하고 있는 우남균(59) 사장을 만났다. 유창한 영어 솜씨와 친근한 미소가 인상적인 우 사장의 첫인상은 듣던 대로 역시 부드러웠다. 그러나 한 시간 이상 대화하면서 출중한 기업 경영자로만 한정 지으려던 생각을 고쳐먹어야 했다. 치밀한 논리와 적확한 예시로 경영론을 풀어내는 솜씨가 흡사 학자 같은 면모를 풍겼다. “바꿔 보자” “새롭게 해보자”는 말을 쏟아낼 때는 급기야 무슨 거사를 모의하는 혁명 투사 같은 비장감도 감돌았다. 사실 중국 시장에서 LG전자를 중심으로 LG가 그동안 쌓아온 명성과 위상을 감안하면 지금 중국 속의 LG가 우 사장이 말하는 것만큼 혁명적인 변화가 절실한지는 의문의 여지가 남는다. 그러나 우 사장의 논리를 따라가면 지금 변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도태될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 인식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그는 왜 “다르게 해보자”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닐까.
LG 브랜드조차 없을 때 베이징 진출
LG전자는 1993년 한국 대기업으론 처음으로 광둥(廣東)성 후이저우(惠州)에 합작 공장을 설립하면서 13억 중국 시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구본무 회장이 취임한 95년 2월에야 그룹 CI를 LG로 바꿨으니 당시만 하더라도 LG란 브랜드조차 없을 때였다. 합작투자 주체도 금성사(LG전자의 전신)였다. 그룹 관계자는 “당시 그룹 총수였던 구자경 회장의 명을 받아 이헌조 금성사 부회장이 중국 투자를 처음 주도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중국을 LG의 제2 내수시장으로 만들자는 목표를 세웠다”고 회고했다. 이 부회장에 이어 구자홍 회장이 LG전자의 중국 시장 공략을 이어갔다고 한다. LG의 중국 진출은 당시로서는 한국 기업이 밟아보지 않은 전인미답의 길이었다. LG가 물꼬를 트자 이에 자극 받아 삼성이 중국 투자를 결단했다.


LG전자 중국사업장 현황

법인 15개(생산법인 13개, 지주회사, 연구법인)

주요 생산거점 톈진, 난징, 선양, 칭다오, 상하이, 항저우, 후이저우, 쿤산, 예타이, 타이저우, 친황다오 등

직원 수 약 5만 명

주요 제품 CDMA단말기, LCD모니터, PDP, DVD,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 등
이어 한국 기업의 중국 투자 러시가 이어졌다. 2007년 말 기준으로 4만 개를 넘어선 한국 기업의 중국 진출사를 LG가 선두에서 썼던 셈이다. 92년 초 덩샤오핑(鄧小平)의 남순강화(南巡講話)에 이은 한·중 수교(92년 8월 24일)라는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한국 경제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해 줄 승부처로 중국을 낙점한 심모원려(深謀遠慮)가 빛을 발했던 것이다. LG는 현재 지주회사와 연구개발(R&D)센터를 제외한 13개 현지법인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13개 생산법인은 중국의 동남부 연안에서부터 보하이(渤海)만, 동북 3성, 중부 내륙에 두루 거점을 확보하고 있다. 이들 법인이 지난해 중국 시장에서 매출 100억 달러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5만여 명의 임직원이 땀 흘려 일군 결과다. 불과 15년 남짓 짧은 기간에 LG는 ‘4대 현지화 전략’을 강력하게 추진해 중국 시장에 빠르게 뿌리내렸다. 생산·마케팅·인력공급·R&D 등 중국 현지의 경영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략을 썼던 것이다.
남 위하는 게 나를 위한 최선의 방법
생산 측면에서는 선택과 집중 전략에 따라 핵심부품에서부터 첨단 디지털 가전과 이동전화 단말기에 이르기까지 생산체계를 갖췄다. 생산법인 설립 이전부터 프리 마케팅을 진행하고 마케팅과 영업을 연계시켰다. LG전자 중국법인의 내수 비중(현재 20%)을 높이기 위해 최근에는 프리미엄 마케팅도 강화하고 있다. 우수한 인력 조달을 위해 96년부터 ‘러닝 센터 차이나’를 설립해 인재 육성에 공을 들였다. 우 사장 스스로가 “나는 최고경영자가 아니라 최고교육자(Chief Education Officer)”라고 단언할 정도로 인재 육성을 강조하고 있다. R&D 분야에서는 생산법인별 연구소와 디자인 연구소를 운영하는 독특한 전략을 구사했다. 초기 백색가전제품에서 시작해 정보기술(IT), 정보통신 단말기 제품군을 거쳐 첨단 프리미엄 제품으로 투자전략을 변경한 것도 먹혔다.

▶베이징 창안대로에 있는 LG트윈타워.

특히 ‘인화(人和)의 LG’라는 말에 걸맞게 노사 안정이 큰 힘이 됐다. 중국에서는 드물게 사업주가 먼저 노동자들에게 노조 설립을 적극 권장하는 독특한 시도가 노사 평화를 가져다줬다는 평가다. 지금 추세대로만 끌고 가도 2010년 160억 달러 매출목표 달성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남균 사장은 성에 차지 않는 듯해 보인다. 그는 “중국의 비즈니스 환경이 크게 바뀌고 있다”고 진단한다. 우 사장은 “중국에 투자한 한국 기업이 이런 전환기를 능동적으로 맞아야 한다”고 말한다. 임금인상과 세금인상, 환경보호정책 강화 등이 한국 기업만을 겨냥해 추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강조했다. 따라서 비정상적 청산(이른바 ‘야반도주’)을 하는 한국 기업들이 한국과 중국 정부에 뭔가를 해달라고 하소연하듯 조르는 방식은 정확한 문제 해결법이 아니라고 우 사장은 지적한다. LG를 포함해 한국 기업의 대안으로 우 사장이 내세우는 것이 차별화된 사업 방식이다. 거창한 얘기가 아니라 “색다르게 해보자”는 한마디로 압축된다. 우 사장은 이를 위해 마케팅을 거듭 강조했다. 그가 진두지휘해 진행 중인 새로운 마케팅 실험의 요체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사례가 있다. LG전자가 1월 말 최신 휴대전화 모델 KF600을 중국 시장에 출시하면서 선보인 체험 마케팅 기법이다. 낡은 LG 휴대전화를 사용하던 기존 고객 2008명을 LG전자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홈페이지를 통해 신청한 이들에게 낡은 휴대전화 대신 KF600을 무료로 교환해 줬다. 새 휴대전화 사용 체험기를 블로그에 올리도록 했다. 네티즌의 평가로 선정되는 최우수 체험기를 올린 소비자에게 6만 달러(약 5700만원) 상당의 BMW 쿠페 자동차의 평생 사용권을 주기로 약속했다. 이처럼 파격적인 소식이 입 소문을 타고 급속하게 번지면서 LG전자 중국법인 홈페이지는 3주일간 80만 클릭을 넘기도 했다. 차별화된 마케팅을 위해 우 사장은 지난해 코카콜라 중국 상하이(上海) 지사장으로 일하던 고경곤씨를 상무로 전격 영입했다. 고 상무는 코카콜라에서 16년간 일하며 브랜드 마케팅 분야의 고수로 알려진 인물이다. 또 LG전자가 유럽과 남미 시장을 휩쓰는 데 핵심 역할을 해 ‘마케팅의 귀재’로 통하는 조중봉 상무를 중국으로 불러들였다.
이런 노력 덕분에 인민일보 산하 징화스바오(京華時報) 등 중국 언론들은 “LG가 중국 시장에서 처음 시도한 체험 마케팅이 신선한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며 주목했다. 우 사장은 “세상은 변하고 중국 소비자의 눈높이도 빠르게 변하고 있는데 (그동안 중국 시장에서 써먹었던) 고리타분한 마케팅 방식으로는 중국 소비자의 마음을 더 이상 얻을 수 없다”고 역설한다. 이런 절박한 판단을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과거엔 제품(하드웨어)으로도 중국 소비자의 마음을 충족시켰는데 이제는 중국 기업들도 웬만한 수준의 제품은 다 만들기 때문에 제품만으로 차별화하던 시대는 지났다고 보는 것이다. 우 사장은 “LG 같은 다국적기업이 중국 소비자뿐 아니라 경제정책 입안자들에게 보여줄 것은 이처럼 중국 기업들이 엄두도 못 내는 참신한 시도들”이라고 역설했다. “중국을 위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 내야 중국 소비자에게 먹힌다”는 것이 우 사장의 지론이다. 이런 생각은 ‘이타(利他)가 최고의 이기(利己)’, 즉 남을 위하는 것이 자신을 위하는 최고의 방법이란 뜻의 좌우명과도 맥이 닿는다. 우 사장은 가전업계에서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아온 브라운관(CRT) TV를 중국에서 완제품이 아닌 부품으로 생산해 제3국 시장에 수출하는 독특한 사업 방식을 채택해 이익을 내고 있다. 우 사장이 말하는 사업 방식의 차별화를 통해 남들이 레드오션(Red Ocean)으로 보는 시장을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탈바꿈시킨 생생한 사례다. 중국을 글로벌 생산기지로 적절하게 활용한 것이다. 중국 시장 진출 15주년을 맞은 LG전자가 차별화된 사업 방식으로 올해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벌써부터 주목된다.


LG의 역대 ‘중원 사령관’ 3인

▶천진환 “서비스 투자는 더 확대해 볼 만”

중국 시장에서 ‘LG 신화’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LG 사람들은 중원(中原)을 호령했던 3명의 역대 야전사령관이 있었기에 오늘의 LG가 가능했다고 입을 모은다. 천진환(69)·노용악(68)·손진방(62) 등 3인(사진)이다. 중국 시장에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인 LG의 이미지를 심고 기틀을 다진 인물들이란 얘기다. 이들이 중국 본부장 또는 중국 지주회사 사장 같은 타이틀을 달고 크고 작은 비즈니스 전투에서 거둔 승리가 쌓여 LG란 이름이 우뚝 서게 됐다는 얘기다. 중국 진출 1세대로 분류되는 천진환 전 LG상사 고문은 구자경 회장 시절이던 85년 50만 달러를 투자해 베이징에 징러(京樂) 완구유한공사를 설립하면서 처음 인연을 맺었다. 천 전 고문은 “당시 중국 투자에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을 때 구태회 고문께서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일단 시작해 보자며 힘을 실어줬다”고 회고했다.

▶노용악 “이해하고 몸으로 중국 느껴라”

이어 93년 그룹 회장실 해외사업추진위원회 사장으로 중국 제조업 투자에 본격적으로 손을 댔다. 그룹 CI가 95년부터 LG로 변경되기 전의 일이다. 중국 진출 초기 경험이 일천한 그룹 계열사의 현지 정착을 돕기 위해 그룹 차원에서 통합 중국 본부를 한시적으로 운영할 때 그가 본부장을 맡았다. 99년 럭키금성(LG상사의 전신) 중국지역 본부장(사장)을 끝으로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교수와 컨설턴트(Kim&Chun 파트너스)로 변신했다. 2001년부터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으로 4년간 활약했다. 근황을 묻자 천 전 고문은 “2006년부터 한림국제대학원으로 옮겨 최근까지 연세대, 중앙대, 부산대에 출강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장쑤(江蘇)성 롄윈강(連雲港)시 경제고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전자와 화학을 위주로 하되 앞으로는 서비스 분야로도 투자를 확대할 만하다”고 후배들에게 권유했다. 노용악 LG전자 고문은 중국 시장에 LG란 이름을 중국 대륙에 각인시킨 인물로 평가 받는다. 94년 금성사(LG전자의 전신) 중국 지역담당을 시작으로 2003년 말 LG전자 중국 지주회사 부회장을 끝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약 10년간 LG의 중국 시장 대약진을 이끌었다.

▶손진방 “끊임없는 변신으로 명성 지켜야”

노 고문은 철저한 현장주의를 입버릇처럼 강조했던 경영인이었다. 그는 “중국을 이해하고 몸으로 느끼라”는 말을 ‘중국 사업 10계명’의 제1조로 꼽을 정도로 현장을 강조했다. 지금은 LS전선의 사외이사로서 이 기업의 중국 시장 공략을 조언하고 있다. 2004년부터 2년간 LG전자 중국 지주회사 사장을 지낸 손진방(62) LG전자 고문은 은퇴 이후 아예 베이징에 제2의 인생 설계를 위한 둥지를 튼 경우다. 손 고문은 “LG가 GE와 손잡고 94년 톈진(天津)에 8억 달러 규모의 백색가전 공장을 세우려 하자 놀란 중국 정부가 중국 가전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투자를 허가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중국의 변화를 짐작하게 하는 일화다. 손 고문은 “끊임없는 변신을 통해 LG의 명성을 이어가야 한다”고 LG 후배들에게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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