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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방심·방치 ‘정답은 뭔가’

오만·방심·방치 ‘정답은 뭔가’

▶3월 20일 이명박 대통령과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환율 폭등에 따른 경제상황 점검회의에 앞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2008년 3월 17일 서울 외환시장. 전날 997.3원이었던 원-달러 환율이 개장 5분 만에 1000원을 넘어섰다. 40분 만에 1010원대, 1시간 만에 다시 1020원대로 치솟았다. 2시간 10분 뒤 1030원 선도 넘어섰다. 각 은행 딜링룸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날 환율은 결국 전날보다 31.9원 오른 1029.20원으로 마감했다. 외환위기 이후 최대 상승폭이다. 10년 3개월 만에 ‘제2의 환란(換亂)’이 닥친 격이다. 원-달러 환율은 2월 29일부터 3월 17일까지 12일 연속 92.7원이나 올랐다. 그것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미국 달러화가 세계 대다수 통화에 비해 약세를 면치 못하는 가운데 유독 원화만 맥을 못 춘 것이다. 환율이 아니라 마치 주가지수처럼 급등한 이날도 외환 당국은 직접 개입하지 않았다. 한국은행에서 “환율 상승 속도에 우려하고 있다”는 수준의 구두 개입을 하는 데 그쳤다. 이튿날 상황이 달라졌다. 청와대가 나섰다. 이명박 대통령이 환율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부처 업무 보고를 받기 위해 이동하는 중에도 실시간 보고를 받을 정도였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 전광우 금융위원장, 김중수 대통령 경제수석이 청와대에서 만나 긴급 거시경제정책협의회를 가졌다. 그리고 전날 ‘입’으로만 개입했던 것을 ‘손’(10억 달러)으로 개입해 13 거래일 만에 환율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3월 18일 거시경제정책협의회 분위기는 환율 상승 추세 자체에 대한 불만은 별로 없었다. 다만 상승이 너무 가파르므로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는 정도였다. 그 뒤에는 환율이 올라야 수출에 도움이 되고 성장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경제팀의 기본 인식이 깔려 있다. 성장에 무게를 두는 새 정부로선 우리 상품의 달러화 표시 수출단가를 낮춤으로써 수출에 도움이 되는 환율 상승을 내심 용인해 왔다. 환율 상승으로 (수입)물가가 다소 오르더라도 성장(수출)을 우선하겠다는 의지가 작용한 것이다. 여기에는 ‘747’(연 7%대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경제강국) 선거 공약에서 올해 6% 내외로 성장률을 낮춘 마당에 6% 성장마저 이뤄내지 못하면 정권 차원의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정치적 판단도 깔려 있다.

성장·경상수지 개선 위해 환율 상승 용인
기획재정부 강만수 장관과 최중경 1차관은 ‘환율 매파’다. 수출과 경상수지를 위해, 또 성장을 위해서라면 환율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또 그것이 환율 정책을 책임지는 정부의 역할이라고 확신한다. 외환위기 당시 재정경제부 차관을 지낸 강만수 장관은 2005년에 외환위기 당시를 회고하며 쓴 책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서 ‘환율주권론’을 역설한다. “경상수지는 그 나라 경제의 종합건강지수이고, 환율은 나라경제를 지키는 주권이며, 환율 관리는 경제적 대외균형을 지키기 위한 주권행사다. 환율을 관장하는 재정경제부(현재는 기획재정부) 장관이 환율을 시장에 맡긴다는 것은 주권을 포기한다는 말과 같다. 또한 환율은 수출·수입·임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가장 강력한 변수다.” 그는 이러한 소신을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취임한 2월 29일 당일 기자간담회에서 털어놓는다. 그날부터 환율은 오르기 시작했다. 최중경 차관이 당국의 시장 개입 이튿날인 19일 경제·금융상황 점검회의를 마친 뒤 가진 브리핑은 겉으론 환율 급변동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외환시장은 일방적인 기대가 아니라 양 방향으로 모두 열려 있어야 건강한 시장이다. 정부는 환율이 급변동할 때 변동성을 줄여 주는 조치를 취할 것이다.” 다분히 교과서적인 구두 개입 수준이다. 그러나 시장은 그 다음 발언에 주목했다. “지난 2년여 간 유지돼 온 900원대 환율은 비정상적이었고, 최근 환율 상승은 수년간 고평가된 원화가치가 정상화되는 측면이 일부 있다.” 이에 대해 시장은 최근의 환율 움직임이 정상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따라서 앞으로도 환율 상승을 용인할 것이란 의미로 받아들였다. 강만수-최중경 라인은 서비스 수지 적자를 줄이기 위해 환율 상승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갖고 있다. 환율 상승을 유도해 내국인의 해외여행과 유학·연수 등을 줄임으로써 서비스 수지 적자를 개선한다는 복안이다. 문제는 그 시기와 폭이다. 원화가치가 고평가된 부분이 있더라도 세계적인 달러화 약세 기조 속에서 원화가치만 인위적으로 떨어뜨리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또 최근 환율 사태처럼 급격하게 환율이 변동하면 기업이든 가계든 경제주체가 적응하기 어렵다. 더구나 환율 상승에 따른 수출증대 효과도 그전 같지 않다. 수출품 가운데 가격으로 승부하는 제품의 비중은 낮아지는 추세다. 더구나 우리 수출품의 달러화 표시 가격이 다소 싸지더라도 지금처럼 세계 경기가 둔화되고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 수출이 크게 늘어나기도 어렵다. 이보다는 오히려 물가가 급등하는 바람에 내수가 위축될 수 있다. 또 외채를 쓰는 기업의 빚 부담은 더 커진다. 환율 상승(원화가치 절하)에 따른 무역수지 개선 효과는 작고, 오히려 부작용이 커질 위험성을 안고 있다. 당국의 개입으로 급등세는 꺾였지만 시장의 우려는 여전하다. 정부가 환율의 방향성에 대해 언급한 것은 투기세력더러 빨리 시장에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속도 조절을 위한 미세 조정을 넘어선 당국의 개입은 투기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그 결과 금융시장에 혼란을 주는 것은 물론 정부가 투기세력에 굴복할 경우 국부 유출까지 초래할 수 있다. 최 차관은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으로 있던 2005년 환율 방어를 위해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을 대규모로 발행하고 역외선물환(NDF) 시장에 개입했다가 1조원이 넘는 손실을 본 전력이 있다.
투기세력에 환율 방향성 노출
한편 이명박 대통령은 3월 20일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상황과 서민생활 안정을 위한 점검회의에서 “국제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고 미국 경제가 어려워 달러가치가 하락하는데도 우리는 달러(가치)가 상승하는 역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며 “이 같은 현상은 기업경영에 다소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위협을 주는 요소가 되고, 특히 물가가 대폭 상승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가원수가 환율에 대해 직접 언급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이례적인 일이다. 외환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는데다 자칫 미국으로부터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돼 무역 보복을 당할 수도 있어서다. 외환시장에 대한 공식 구두 개입은 통상 국장급 정도에서 이뤄진다. 구두 개입을 하더라도 “투기세력에 대해서는 대응하겠다” “지나친 급변동은 막겠다”는 정도일 뿐 대체로 방향성에 대해서는 언급을 삼간다. 그런데 우리는 대통령부터 장관·차관에 이르기까지 환율의 방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물론 이명박 대통령은 환율 상승이 기업 경영에 위협을 주고 물가상승을 초래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통해 강만수-최중경 라인에게 환율 상승을 원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사실상 환율 상승에 대한 방어의사를 시사한 셈이다. 총선이 다가오는 상황에서 물가 관리에 역점을 둔 발언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강만수-최중경 라인이 환율주권주의를 포기할까? 총선이 지나가고 환율 변동이 심하지 않다면 다시 환율 끌어올리기 시도를 할 가능성이 있다. 수출과 기업 채산성에 환율이 미치는 효과가 갈수록 약해지는 상황에서 정답은 환율을 시장에 그냥 맡겨두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 변하는 환율이란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실물경제를 나아지게 하는 정공법을 쓰는 것이다.


강만수 장관의 고민


경제상황 나빠 소신 펼치기 힘들어
지난 2월 말 취임해 사실상 경제부처들을 휘어잡으며 막강 권력을 행사해 ‘킹(King )만수’라는 닉네임이 붙었던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그는 경제부총리 자리는 없어졌지만 부총리 이상의 힘을 가진 경제 사령탑이다. 그러나 최근 강 장관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우선 미국 경기 침체, 환율 급등 등 대내외 변수 악화로 물가가 폭등하고 금융시장 불안이 더해져 생각보다 우리 경제 여건이 나빠지고 있다. 총선용이란 비판이 일었지만 정부 내에서 위기론까지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런 문제들이 대외 변수 때문이라 뽀족한 해법을 내놓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의 환율 불안은 강만수 장관의 이른바 ‘환율주권론’이 부추겼다는 지적이 많다. 강 장관은 환율 상승(원화가치 하락)으로 11년 만에 찾아온 경상수지 적자를 해소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새 정부의 6% 경제성장 목표치를 달성하려 했으나, 결국 급등하는 환율에 일단 소신을 접어야 했다. 환율 급등세가 정상 궤도를 이탈해 ‘미니 외환 위기’로 불릴 정도가 됐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지난 3월 17일 한국은행이 달러 매도를 통한 외환시장 개입에 나선 것은 환율주권론을 외치던 강 장관이 결국 시장의 힘에 굴복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밝혔다. 새 정부가 내세웠던 올해 6% 성장에 대해서도 민간연구소나 전문가들은 달성이 어렵다는 분석이다. 정부 부처 안에서는 강 장관에 대한 견제 분위기도 감지된다. 강 장관은 최근 국세청 조사과장을 데리고 건설 현장을 방문해 “철근 매점매석을 막고, 부당 이익에 대해 과세하라”고 지시했다. 21세기 경제위기에 1970년대식 대응책을 내놓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경제부처 국장급 간부는 “10년 만의 복귀라 성적을 올리려고 마음이 급하신 모양인데 너무 서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 장관은 취임 일성(一聲)으로 규제 완화를 외치고 있으나 재계의 반응은 그리 뜨겁지 않다. 송재형 전국경제인연합회 규제개혁팀 조사역은 “강 장관이 내놓은 대책은 단순 방향 제시 수준이어서, 기업들의 실제적인 투자가 이뤄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법 개정 등 후속작업을 서두르고, 경제 상황이 좋아져야 기업들이 쌓아 둔 돈을 풀겠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강 장관이 IMF 이후 10여 년 동안 야인(野人) 생활을 하다 보니 감각이 둔해진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결국 이런 여러 상황으로 강 장관의 입지가 좁아지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한운식 아시아투데이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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