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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기업 DNA엔 철학이 있다

100년 기업 DNA엔 철학이 있다

월가 5대 투자은행의 하나인 베어스턴스가 좌초했다. 1930년대 대공황과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도 살아남았던 찬란한 85년의 역사. 100년 기업으로 가기 위한 여정은 그리도 험난한 것인가.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경제 위기 상황을 맞아 100년이 넘은 기업들의 경영 철학과 가풍을 취재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영속하는 데는 면면히 흐르는 위대한 정신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야 기업의 역사가 일천하지만 서구 유럽이나 일본만 봐도 몇 백 년 된 기업이 수두룩하다. 이들 기업에서 우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만난 교포에게서 들은 얘기다.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들 하나를 데리고 이민 왔는데, 현지 학교에 입학시킨 며칠 후 담임교사의 호출을 받았다고 한다. 아이가 낯선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나 하고 달려갔는데, 교사의 말은 뜻밖이었다. “어떻게 아이가 구구단을 줄줄 외우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이 아버지가 “한국에서는 그 정도는 다 떼고 입학한다”고 설명하자 교사는 “수리력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구구단을 외우게 하는 것은 아이의 창의성을 망치는 것”이라며 호되게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 등장하는 분수정원은 물을 뿜어내는 데 단 1볼트의 전력도 필요하지 않다. 오로지 기하학과 수리학을 통해 얻어낸 위치에너지로 곳곳에서 수십m나 치솟는 불가사의한 분수를 만들어냈다. 수천 년 전부터 아이에게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게 해서 얻어낸 창의성이 뿜어낸 걸작이다. 이탈리아가 세계적인 명품의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런 교육철학과 무관하지 않다. 이탈리아에는 수백 년, 심지어 1000년을 이어온 명품가(家)가 셀 수 없이 많다. 이미 우리 귀에도 익숙한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도 알고 보면 50년 전쯤에는 이들 중 하나였다. 이들 집안에선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 부모가 신중한 결정을 내린다. 계속 공부를 시킬 것인지, 아니면 가업을 물려줄 것인지. 나중에 명문대에 갈 정도로 학업 성적이 좋지 않다면 일찌감치 가업을 전수시켜 최고의 명장으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수백 년 전통을 자랑하는 명가의 장인정신은 이렇게 전수돼 온 것이다. 200년이 넘은 장수 기업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윌리엄 오하라 교수는 “세계적인 장수 기업은 장인정신으로 철저하게 무장돼 있다”고 분석했다. 서기 578년에 창업해 장장 1430년을 이어 온 세계 최장수 기업인 일본의 건설 명가 곤고구미를 비롯해 1000년이 넘는 프랑스 와인 명가 샤토 굴랭, 700년 장수한 독일 호텔 기업 필그림하우스, 467년 된 영국 모직 회사 존 브룩, 454년 된 네덜란드 비누 회사 데베르굴데한트, 359년 된 핀란드 가위 명가 휘스카스 모두 장인정신으로 정평이 나 있는 기업들이다. 장인정신이 부족해서일까. 100년을 넘기는 기업은 극히 일부다. 세계 기업의 평균 수명이 고작 12년 6개월이다. 초우량 기업도 마찬가지다. 미국 경제지 포춘이 1970년대에 선정한 500대 기업 중 3분의 1이 13년 뒤에 사라졌다. 우리 기업들 사이에도 이른바 ‘지속 가능한 경영’이 화두다. 살아남기도 힘든 치열한 경쟁시대에 ‘오래 사는’ 기업을 만든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바꿔 말하면 오래 사는 비법을 안다는 것은 이미 살아남는 법 정도는 꿰고 있음을 뜻한다. 장수 비법이 결국 건강 비법인 셈이다. 100년이 넘은 전통을 자랑하는 기업을 두고, 그 장수의 비결을 찾으면서 경영전략으로 접근하는 것은 그다지 실익이 없을 것 같다. 전략이란 것은 그때그때 달라질 수 있는데다 문화가 다른 곳에 무턱대고 적용했다간 낭패 보기 십상이다. 보다 근본적인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기업의 근간을 이루는 전통과 문화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풍(社風)은 역시 창업 당시의 가풍(家風)에서 나온 것이다.

▶도요타 공장 생산라인에서 직원들이 자동차를 조립하고 있다.

창업 당시의 가풍 속에는 오늘날 성장과 성공의 열쇠가 되는 유전자(DNA) 같은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개척정신이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정신도 그런 것이다. 연구 개발에 대한 과감한 투자, 품질 확보와 시장 개척을 위한 사업가 마인드와 난관을 극복하는 지혜도 가풍의 한 요소가 될 것이다. 자동차의 역사를 써 온 미국 ‘빅3’가 후발주자인 도요타와 현대차에 속수무책 시장을 내주고 존립마저 위태로워지는 것도 그 원인을 거슬러 캐 보면 이렇다 할 경쟁자도 없이 무법자로 군림하면서 찌든 방만심에서 찾을 수도 있다. 『기업 생로병사의 비밀』을 쓴 손동원 인하대 교수는 “가족기업, 사회적 의미를 살린 기업, 스스로 진화하는 능력을 갖춘 기업이 대체로 장수한다”고 분석했다. 100년이 넘은 전통을 이어오는 세계적인 기업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바로 주주와 고객은 물론 국민, 심지어 외국인에게도 존경 받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환경변화에 대처하며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을 거듭하면서도 변함없이 지켜온 절대가치다. 절대가치임에도 이것이 가장 지키기 어렵다는 게 문제다. 미국 월트디즈니는 “아이들과 가족들에게 꿈을 주기 위해”, 스위스의 네슬레는 “좋은 음식과 좋은 삶을 위해” 기업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기에 롱런하고 있다고 한다. 이 얼마나 단순 명료하면서도 1000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말인가. 100년 기업이 우리에게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규모나 성장속도가 눈에 띌 정도는 아니다. 취급 품목이 대기업이 뛰어들지 않는 것이거나 오너가 지나칠 정도로 알뜰해 사업을 확장하기 꺼려온 보수적 기업이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가늘고 길게’ 살아온 기업들이다. 그룹사들은 저마다 100년 기업에 도전하며 전통을 세우려 안간힘을 쏟고 있다. 창업주의 초심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면 거기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벤처 붐이 인 지 10년이다. 지금 몇이나 살아남았나. 실리콘밸리 벤처 1호로 불리는 HP는 초우량 글로벌 기업으로 여전히 건재하다. 서브프라임 사태로 거대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가 쓰러졌다. 그 뒤를 이어 또 얼마나 많은 기업이 국민과 주주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 채 사라질지 모른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결국 책임은 기업과 CEO에 있다. 지금의 경영 환경은 창업의 초심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봐야 할 위태로운 상황이다.


100년 기업의 메시지 ■ 발렌베리 존재하지만 드러내지 않는다 능력 검증돼야 경영권 승계 ■ 타타그룹 자연처럼 사회의 일부가 돼라 사회적 의무 회사정관에 명시 ■ 골드먼삭스 헌신이 준비된 직원만 뽑는다 나보다는 회사, 회사보다 고객 먼저 생각하라 ■ HSBC 관시는 어디서나 통한다 진출국의 문화를 수용하라 ■ 코닥 다양성과 포용력을 견지하라 항상 고객의 곁에 있으라 ■ 도시바 중역은 직원보다 10배로 일하라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봐라 ■ 밀레 직원은 비용이 아니라 가족이다 동업의 의리를 깨지 마라 ■ JP모건 약속은 생명과도 같다 윤리는 법보다 엄하다 ■ 브리지스톤 전선도 뛰어넘는 기업가 정신 무조건 고객을 믿으라 ■ 미셸린 오너ㆍ경영진은 무한책임 전 사원의 69%가 회사 주식 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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