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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넘어 투명성 확보

위기 넘어 투명성 확보

38세에 그룹 총수에 오른 최태원 회장은 외환위기, 소버린 사태 등 굵직한 사건을 두루 경험했다. 경영권 위기를 잘 넘긴 최 회장은 지배구조를 개선해 그룹 경영의 투명성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은 제가 지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룹을 지키는 일은 저보다 손 회장께서 적임이십니다. 회사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2003년 초 최태원(48) SK 회장이 부당내부거래로 구속됐을 때 손길승 전 SK그룹 회장에게 이같이 읍소했다. 손 전 회장은 이 이야기를 자신의 지인에게 전하며 “최 회장이 그룹을 위해 자신을 던졌다”고 평가했다. 손 전 회장의 든든한 후원으로 순항 중이던 최 회장은 2003년 2월 ‘SK사태’로 일련의 암초에 부딪혔다. 최 회장은 이후 부당내부거래로 구속됐고 소버린의 경영권 공격에 시달렸다. 내부적으로도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최태원 회장이 1998년 SK㈜ 회장 직함으로 그룹 총수에 취임했을 당시 나이는 38세. 그룹을 맡기엔 철저한 준비가 부족한 때였다. 그룹 내부에서도 경험 미숙과 조직 장악력에 대한 의구심이 컸다. 초기 손 전 회장과 함께 SK의 사령탑을 맡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손 전 회장은 애초 최 회장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1, 2년 정도만 회장직을 수행하겠다고 밝혔다가 예상과 달리 5년 이상 회장직을 수행했다. SK그룹에서 고위직을 지낸 한 임원은 “2000년대 초반까지도 나이나 경험으로 봐서 그룹 회장직을 최 회장보다 손 전 회장이 맡는 게 더 바람직해 보였다”며 “최태원 회장은 비상한 면이 있지만 나이나 경험으로 봐서 손 회장이 더 적합해 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영호 아주대 경영대학원장은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창업주에서 2대로 넘어가는 경영승계에 대해선 대부분의 여론이 긍정적이다. SK는 경영승계 과정에서 법적 하자가 없었고, 가족끼리 합의를 봤기 때문에 외부적으로 정당성을 얻었다. 하지만 급작스럽게 경영승계가 이뤄지면서 내부적으론 갈등의 소지가 있었다.” 최 회장의 취임 초기엔 긍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SK 계열사의 한 고위 관계자는 최 회장을 ‘빌 게이츠 타입’이었다고 말했다. “회장에 막 올랐을 때는 직원들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똑똑하고 사고의 폭이 넓었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스스로 답하는 빌 게이츠 회장 타입이었다. 직원이 무엇을 가져오면 질문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이런 창의적인 면 때문에 일부 임원들은 최 회장을 어려워 했다. 젊은 나이에 들어와 조직과 융화가 절실했는데 원숙미가 떨어지는데다 조직을 잘 이끌지 못하는 것처럼 비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최 회장은 난제들을 정공법으로 하나씩 헤쳐나갔다. 지주회사 설립을 통한 지배구조 개선은 경영 투명성과 윤리 경영으로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최 회장이 지난해 10월 SK㈜ 창립 42돌에서 저간의 심경을 밝혔다. “나는 재벌이라는 말이 싫습니다. 그룹이란 말도 재벌이란 지배구조에서 나온 것인데 그런 지배구조가 과거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기업을 이끄는 시스템입니다. 누가 주식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독립된 각 기업이 얼마나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일을 추진하는 시스템을 가졌느냐는 겁니다.” 최 회장의 투명 경영 노력은 세계 무대에서도 인정받았다. 지난 4월 최 회장은 기업과 단체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유엔의 ‘글로벌 콤팩트’ 이사로 선임됐다. 유엔 글로벌 콤팩트는 2000년 유엔 주도로 발족한 전문기구로 인권, 노동, 환경, 반부패 등 분야에서 10대 원칙을 제시하는 등 기업과 단체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현재 120여 개 국가에서 5000여 개 기업과 단체를 포괄하고 있지만, 한국을 선정하기는 처음이다. SK 관계자는 “주요 계열사 사외이사 비중을 60% 이상으로 높이고 이사회에 사회공헌위원회를 설치하는 등의 책임 경영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한다고 평가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 회장은 내부적으로도 한층 성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SK그룹의 한 고위 관계자는 한 일화를 들려줬다. “지난해 SK와이번즈가 우승할 때 최 회장은 당시 VIP석에 앉지 않고 직원들과 일반석에 앉아 같이 응원했다. 최 회장의 형 같은 편안한 이미지가 돋보였다.” SK의 전 고위 임원은 “요즘 최태원 회장에 대한 평이 좋다”며 “나이와 경험은 결국 세월이 해결해 준다”고 풀이했다. 경영적인 측면에서도 활발한 대외 활동 속에서 전문경영인들과 철저한 역할 분담으로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특히 ‘회사 내 회사’ 제도를 도입해 부문장을 사장으로 대접하고 있다. 물론 자율권을 주는 대신 책임 한계를 명확히 해 실적과 성과가 뒷받침되지 못할 경우 가차 없이 그 책임을 묻는다. 최 회장이 그동안 목말라해 온 글로벌 경영에 대한 성과는 어떨까. 그가 기회의 땅으로 여기는 곳은 중국과 중동. 특히 중국에는 그동안 대규모로 투자했다. 재계에선 이를 두고 선친의 ‘제2의 창업’을 발전적으로 승계한 ‘제3의 창업’에 해당한다고 평가한다. 최 회장의 야심은 장차 중국에서 2010년까지 매출 5조원을 달성하고 20여 개 현지법인을 설립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세계적인 에너지 메이저로 도약한다는 것이다. SK그룹을 이끄는 4두마차는 사촌형인 최신원(56) SKC 회장과 최태원 회장, 최재원(45) SK엔론 부회장, 최창원(44) SK케미칼 부사장이다. 최 씨가의 장남인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은 2000년 지병으로 별세했다. 최 회장의 친동생인 최재원 SK엔론 부회장은 ‘파이낸싱’의 귀재로 통한다. 월스트리트의 일본계 증권사에서 18개월가량 근무한 데 이어 2000년 SK텔레콤의 신세기통신 인수에서 남다른 역량을 발휘했다. 최 신원 회장은 SKC의 구조조정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 사촌 동생인 최창원 SK케미칼 부사장은 94년 선경(현 SK)그룹 경영기획실에서 첫 발을 내디뎠다. 그는 구조조정과 사업 재편에 뛰어나 그룹 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2세 기업인이다. 최창원 부사장은 과거 선경인더스트리(현 SK케미칼), 쉐라톤워커힐호텔, SK상사 등 계열사의 구조조정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 이밖에 최종건 회장의 둘째 사위인 박장석 SKC 사장 등이 SK그룹을 이끌고 있다. 사촌 간의 경영승계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재계는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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