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장 원칙을 앞장서 훼손
자유시장 원칙을 앞장서 훼손
식품 가격 인상은 소비자에게 나쁜 소식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미국 정치권의 움직임은 훨씬 더 나쁜 소식이다. 이론상 농작물 가격 급등은 현명한 개혁과 진정한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예컨대 서유럽 국가와 미국 같은 부자 나라들에선 농민에게 지불하는 막대한 보조금을 삭감하기가 더 쉬워진다. 그러면 정부의 예산 부담도 줄고, 전 세계 농민은 더 공정한 무대에서 경쟁할 수 있다. 자유시장을 지향하는 미국의 역대 정부가 다년간 주창해 온 목표와도 합치한다. 농업보조금 축소는 또 과다한 경작을 줄일 수 있다. 보조금으로 보호받는 농민은 지나치게 많은 토지를 개간하고 비료와 농약을 과다하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식량 위기에 대한 미국 의회의 대응 방식은 이해하기 힘들다. 세계 경제를 위한 최선의 방책과는 정반대로 가기 때문이다. 지난 5월 미 의회는 농민에게 훨씬 더 많은 보조금을 안겨주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국내 대부분 설탕 시장 독점권을 설탕 생산 농민에게 계속 보장함으로써 그들을 국제 경쟁에서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필요성과 상관없이 광범한 부문의 농민에게 보조금을 지원하도록 돼 있다. 그리고 이미 높아진 가격을 기준으로 새로운 보조금을 책정했기 때문에 나중에 가격이 떨어질 경우엔 정부의 예산 부담이 훨씬 커지게 된다. 과거 유럽이 그런 조치를 취했을 때 미국은 이를 혹독하게 비판했다. 예일대와 컬럼비아대가 공동 발표한 EPI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유럽 국가들은 농업보조금과 관련된 EPI가 가장 낮다(예일-컬럼비아대 팀은 세계은행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이용해 농작물의 국내 가격과 국제 가격의 차이를 측정해 보조금 지수를 산출했다). 프랑스·독일·영국 등 EU의 부자 회원국은 이런 잘못된 보조금 관행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돈이 많은 데다 농민 로비단체의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폴란드처럼 비교적 가난한 신규 회원국들은 EPI가 훨씬 높다. 정부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보조금과 관련해선 좋은 점수를 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EPI를 보면 미국의 농업 보조금은 유럽처럼 후하진 않지만 이제는 미국도 유럽 못지않게 됐다. 미국의 농업 보조금 법안이 선거철에 통과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법안을 집행하려면 불필요하게 막대한 예산이 소요된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재선을 염두에 둔 의원들은 압도적인 표차로 법안을 통과시켜 부시의 거부권을 무력화했다. 농업 로비가 계속 성공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농업 정책이 집행되면 그 혜택은 특수이익집단(농민)에게 돌아가지만, 그 비용은 정책의 내용을 잘 모르고 알아도 대책이 없는 일반 국민이 분담하기 때문이다. 물론 전체 비용에서 납세자와 소비자 개인이 부담하는 부분은 작지만 최근까지도 그들은 이런 부담을 의식하지 못했다. 더 나쁜 점은 전 세계 다른 나라 농민들이 미국의 이런 정책 때문에 미국 시장 진입이 어려워 피해를 본다는 사실이다. 보조금은 또 국제 가격을 떨어뜨려 옥수수와 설탕 같은 주요 작물에 대한 투자를 어렵게 한다. 개발도상국 정부들은 높은 식품 값을 활용할 수 있는 호기를 놓치고 있다. 식량 폭동이 발생하자 많은 개도국 정부는 내수용 확보 차원에서 곡물 수출을 규제했다. 예컨대 인도는 올 초 쌀 수출을 금지했다. 이 조치로 국내 쌀값 급등을 일시적으로 막는 데는 효과가 있었지만 인도 농민의 소득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국제 쌀값이 계속 오르자 다른 나라 정부들도 인도의 뒤를 따르려는 조짐을 보인다. 전 세계 식량 수급체계가 더 생산적이고 안정되기 위해선 식량 무역이 순조롭게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각국이 자의적으로 시장에 개입하면서 그 흐름이 깨지고 있다. 현재 중국 정부는 국내 수요 충족을 보장하기 위해 세계적인 식량 공급망 창설 계획을 검토 중이다. 식품 값의 고공행진이 계속되자 각국 정부는 자국만을 위한 좁은 시각에서 사태를 보려 한다.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식량 사태를 순리대로 풀려는 노력으로 각국 대표가 모여도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도하 라운드’ 무역회담은 거의 무산됐다. 최대 쟁점인 농업정책에서 참가국들이 합의점을 내지 못한 탓이다. 여타 상품과 용역 분야의 무역장벽을 줄이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지만 도하 라운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회담 자체가 최빈국들을 돕는 데 주된 목적이 있었다. 이를 위해선 그들 나라 농민들의 수익성을 높여줘야 한다. 그러나 선진 부국들의 농업보조금은 그런 목표 달성에 주된 장애물이다. 그리고 미국의 새로운 농업 프로그램은 사태 해결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각국 대표가 식량 문제만을 의제로 삼아 회담해도 진전이 없었다. 지난 5월 180개국 정부 대표가 로마에서 열린 유엔식량회의에 참석했다. 그들은 현재의 식량 위기를 타개할 필요성을 열정적으로 강조했지만 단 한 가지 의제에도 합의하지 못했다. 식품 값을 밀어 올리는 바이오연료 문제에서도 진전이 없었다. 바이오연료 생산을 적극적으로 후원해 온 나라들, 특히 미국이 자신들의 잘못된 정책을 국제적인 감시망 속에 노출시킬 생각이 없기 때문이었다. 세계 식량 시장은 간헐적으로 위기에 빠진다. 곡물 작황이 나빠지면 수요와 공급이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그런 불균형은 시장에서 교정되는 경우가 많다. 시장은 유연한 방식으로 식량의 안정적 수급을 회복한다. 또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농민들조차 공평한 경제적 기회를 갖도록 도울 수 있다. 요즘의 식량 위기에서 불행한 점은 대부분의 주요 나라가 ‘자유로운 세계 시장’이란 원칙을 앞장서 훼손한다는 사실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미국이 시장의 힘을 옹호해 온 역할을 포기하고 있다. 내년에 EPI가 발표될 때엔 미국의 점수가 한두 단계 낮아질 가능성이 크다. [필자는 미국 스탠퍼드대 ‘에너지와 지속가능한 개발 프로그램’ 책임자이자 외교관계협의회(CFR) 선임 연구원으로 미국 정부에 기후변화 문제를 자문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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