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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Serenade] 빛 바랜 태권도 검은띠

[Seoul Serenade] 빛 바랜 태권도 검은띠

내가 태권도와 처음 만난 것은 1984년이다. 그 순간부터 그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무도에 대한 나의 열정은 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마치 숨을 쉬는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이치와 비슷하다. 그런 내가 약 10년 전 한국땅을 밟자마자 최고의 무술학교부터 찾아나선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곳을 찾아다니면서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결코 ‘조용’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국의 풍성한 문화가 주는 흥분 때문이다. 그 후 한국에 남겠다고 결심했고, 그 결정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내 삶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한국을 배우겠다는 목표는 지난 10년간 충분히 달성됐다. 그런데도 나의 인격 형성에 끝없이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합기도인 이유는 뭘까? 한국에 살기 전에 이미 미국에서 10년 넘게 태권도를 배웠다. 그러나 정작 한국에 온 뒤로는 지나치게 현대적인 분위기의 태권도장에 실망이 컸다. 미국에서 태권도를 처음 접했을 때, 나이가 70세를 훌쩍 넘긴 사범들은 전통을 중시하면서 내게 혹독한 규율과 기술을 가르쳤다. 그 두 가지는 한국 무술의 힘을 충분히 활용하는 데 필수적 요소다. 그분들이 나를 얼마나 세게 훈련시켰던지 초단 승단시험을 보기까지 무려 7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한국에선 열 살도 채 안 된 아이들이 검은띠를 두른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기본 품세조차 제대로 못한다. 더군다나 한국 사범 중엔 아이들이 진정한 무술 훈련보다는 얼핏 현대무용을 더 닮은 몸풀기 동작을 하는 동안 책상 뒤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경우도 있다. 한국의 태권도 수련에서 가장 충격을 받았던 요소는 무도의 스포츠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그 결과 태권도에서 ‘도’가 실종됐다. 오랫동안 서구에서 살면서 검은띠는 무술의 기본을 마스터했음을 뜻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한국에서 검은띠는 단지 기본동작을 배웠다는 의미다. 이곳에선 3단은 따야 태권도를 ‘배웠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런 차이가 태권도에서 ‘도’를 앗아갔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합기도장을 찾아 나선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엄격하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나를 지도한 미국 태권도 사범의 충고에 따른 것이었다. 결국 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서 한 곳을 찾아냈다. ‘무도 정심’이란 도장이다. 수련을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외국인이 아닌 동료 무도인으로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됐다. 1999년 3월 도장에서 처음 합기도 수련을 시작한 후 고생을 이만저만 한 게 아니지만 합기도에 대한 열정만큼은 결코 식지 않았다. 도장에서 상대를 공격하고, 비틀고, 내던지면서 문화·정치·언어적 장벽도 사라졌다. 대한합기도협회에 여러 차례 국제연락관을 자원해 합기도 발전을 돕는 영광도 누렸다. 용산 미군기지와 DMZ에서 합기도 시범을 이끌고, 미국의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방영된 ‘파이트 퀘스트(Fight Quest)’ 한 회 분의 제작을 돕기도 했다. 조영섭 관장님을 비롯한 사범들은 단지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차원 이상의 그 무엇을 내게 가르쳤다. 덕분에 무도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는 법과 깊은 정신세계를 배웠다. 미국의 사범들은 대부분 문화·종교적 차이 때문에 그런 것을 가르치지 못한다. 오직 한국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태권도 수련은 4단만 따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합기도 스승들은 내게 무도에서 배움의 길은 끝이 없다고 가르쳤다. 내 합기도 인생을 되돌아보니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은 내 방 벽에 붙은 단증과 사진이 아니라 뭐니뭐니해도 내가 직접 도장에서 후학들을 지도할 때임을 깨닫는다. 한국인들은 대개 처음엔 왜 미국인이 자신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느냐고 의아해 한다. 그런 냉소주의자들도 이젠 모두 내가 조 관장님과 똑같은 이유로 그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른 사람들의 수련을 도우려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나는 합기도를 하는 다른 외국인들은 엄두도 못 낼 관장님의 신뢰를 얻었다(도장과 관장실의 열쇠를 내가 보관한다). 얼핏 사소한 일로 여길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곧 관장님이 자신의 사업과 자신의 생계 문제에서까지 나를 신뢰한다는 뜻이리라. 한국 사회를 배우겠다는 나의 목표는 ‘도장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생각으로 실현됐다. 나는 이 교훈을 미국으로 가져갈 작정이다. 인종·종교적 적개심으로 자주 분열하는 미국인들이 합기도를 통해 단합과 이해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싸우는 무술을 평화를 가르치는 데 이용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피할 순 없지만 균형과 조화를 강조하는 한국 문화는 충분히 배울 가치가 있다. 미국인 제자들에게 합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조용한’ 자신감으로 자신의 공격성을 억제하도록 가르치기만 한다면 그들 스스로에게 잠재된 평화를 되찾는 데도 도움을 줄지 모르니까. 합기! [필자 존 존슨은 미국 캔자스주 출신으로 1999년 한국에 왔으며 현재 건국대 언어교육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 영어 원문을 뉴스위크 한국판이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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