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옛 혈맹의 동상이몽

옛 혈맹의 동상이몽

▶2006년 모스크바에서 만난 차베스와 푸틴.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는 8월 초 소련의 옛 동맹국인 쿠바와 관계를 “재정립”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그러자 많은 외국 언론이 흥분하고 몇몇 나라의 외무부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고르 세친 부총리가 이끄는 고위급 러시아 대표단이 3일간 일정으로 쿠바를 방문한 직후이자 러시아 군대가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베어 폭격기의 급유소로 이 카리브해 섬을 이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나온 발표였다. 이 갑작스러운 소식으로 1962년 [케네디 집권시절의] 미사일 위기의 기억과 플로리다 해협 건너편에서의 새로운 ‘위협’이 새삼스레 부각됐다. 사실 이 문제는 겉모습과는 달리 별게 아닐지도 모른다. 푸틴과 러시아는 체코(그리고 어쩌면 폴란드)에 ‘미사일 방패’를 설치키로 한 미국 정부의 결정에 불쾌감을 표명했다. 이론상 특정 국가가 아닌 모두로부터의 방어지만 러시아 정부 입장에서는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여긴다. 쿠바에 파견단을 보내고 핵 폭격기가 쿠바에 착륙하거나 주둔할 가능성을 거론하는 조치는 꽤나 고전적인 대항수단으로 보인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는 사실을 미국 정부에 상기시키는 것이다. 적어도 러시아의 관점에서 볼 때 쿠바 미사일 위기의 한 가지 결과는 터키로부터, 다시 말해 소련 영토 가까이에서 미국 미사일이 제거됐다는 사실도 떠오르게 한다. 사실 쿠바는 그런 위협의 구성원도 아니고 거기에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2001년 러시아 정부가 미국의 압력에 굴해 사전통보 없이 쿠바의 루르드 도청기지(소련과 그 후 러시아가 많은 돈을 들여 유지해 왔다)를 폐쇄한 것이 큰 불만이다. 그 ‘새로운 관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한 설명이 없다면, 또 루르드 사태가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면, 쿠바가 러시아와 보조를 맞출 가능성은 작다. 피델 카스트로가 공산당 기관지 그란마에 게재하는 주간 사설(그것도 아주 어려운 말로)을 제외하면 쿠바의 공직자들은 아무도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라울 카스트로가 이 새 제안에 진정 관심이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라울은 아마 썩 내키지 않을 것이다. 1962년 피델 카스트로와 니키타 흐루쇼프가 즐겼던 위험천만한 과시 행위는 외교정책에서 그가 원하는 바와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라울은 오히려 남들의 이목이나 불필요한 갈등을 피하고 실패가 분명한 경제(본인이 시인했다)와 사회 문제의 해결에 주력하려 한다. 그가 이런 엉뚱한 제안에 동의하는 일은 미국 정부가 그것을 자존심을 세우는 계기로 변질시키거나 러시아가 상당한 경제적 대가를 제공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쿠바가 같은 길을 걷기는 하지만 갈수록 변덕스럽고 위험스러운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에게 더는 죽기 살기로 매달리지 않을 만큼 말이다. 사실 기본적으로 그것이 이번 소동의 실체일지 모른다. 라울 카스트로는 1962년 현직에 있었다. 당시 쿠바 군대를 지휘했고 지금도 그렇다. 그와 그의 형(적어도 지금은)은 이런 게임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알고 있다. 불행히도 차베스와 라울 카스트로에겐 피델이 과거나 현재 베네수엘라인들에게 미쳤던 지적인, 정서적인 영향력이 없다. 하지만 차베스는 러시아가 의도한 계획을 묵인하기 쉽다. 실제로 그는 이미 일정부분 그 계획에 참여하고 있다. 7월 22일 차베스는 모스크바에서 지난해 서명한 방대한 물량을 뛰어넘는 무기구입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는 이미 20억~30억 달러어치의 러시아제 무기를 사들인 것으로 추산된다. 그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베네수엘라가 향후 6년에 걸쳐 비행기, 잠수함, 전차, AK 소총 등 300억 달러어치의 러시아제 무기를 구입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참으로 엄청난 액수다. 다만 차베스라는 인물의 성격상 실현될지는 더 두고 봐야한다. 유가가 계속 떨어질 가능성도 있고, 유럽의 미사일방어체제 문제에서 미국과 합의할 경우 러시아가 발을 뺄지도 모른다. 게다가 차베스가 영구 집권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베네수엘라 정부는 러시아의 중남미 진출을 실현시킬 발판이다. 그 결과가 카리브해와 남미(베네수엘라는 콜롬비아, 가이아나, 브라질과 국경이 맞닿는다)의 군사적 힘의 균형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날지 모른다. 누구도 원치 않고 여력도 없는 군비경쟁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현 정부나 혹은 가능성이 더 큰 다음 정부가 푸틴이나 메드베데프와 베네수엘라 문제를 협의하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다. 미국이 쿠바를 겨냥한 강경 발언이나 모욕적 언사를 삼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발언은 쿠바인들의 적개심만 키우고 때로는 어리석지만 예상한 대로 그들이 피하고 싶었던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지 않았던가? [필자는 멕시코 외무장관을 지냈고 현재 뉴욕 대학 교수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1139회 로또 1등 13명…당첨금 각 21억원

240년 수명 다한 고리원전 3호기…재가동 심사한다는 데

3산업은행 부산 이전 이뤄지나

410대 여고생 살해 남성 구속…”피해자와 모르는 사이

5이스라엘군 공습으로 확전 우려 레바논…각국 철수 명령 이어져

6매년 0.33일씩 늦어지는 단풍 절정기… 2040년이면 11월에 단풍 구경해야

7밥 잘 주는 아파트 인기…’프레스티어자이’ 10월 분양

88살짜리 소아당뇨 환자도 ‘응급실 뺑뺑이’…충주에서 인천으로 2시간 후에나 이송

9 美 CNN “이스라엘, 헤즈볼라 지도자 27일 폭격 때 사망한 듯” 보도

실시간 뉴스

11139회 로또 1등 13명…당첨금 각 21억원

240년 수명 다한 고리원전 3호기…재가동 심사한다는 데

3산업은행 부산 이전 이뤄지나

410대 여고생 살해 남성 구속…”피해자와 모르는 사이

5이스라엘군 공습으로 확전 우려 레바논…각국 철수 명령 이어져